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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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윤주만목사 2015. 7. 8. 15:36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9:9-13절을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복음

이 시대 이 복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이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시대가 점점 혼미해 지고 있고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사라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시대 목사들 중에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름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부름을 받은 것은 부름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부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입니다

신학교를 들어갑니다. 그것은 부름이라고 하기 보다는 자기가 신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학에 가서 이 세상에서 대학을 공부하는 것 같이 공부를 하고 나서 학위를 받고 또 안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름이라기보다는 순전히 자기의 의지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런 것을 보고 부름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가고 있는 것이지 부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꿈을 꾸고 남의 말을 듣고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부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말로 잘 가져다 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름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자기가 자유의지로 했으면서도 그것을 부름이라고 미화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가 이 세상의 지성의 터로 점점 바뀌고 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 신학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자기가 교회를 보아왔고 또 신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학을 해야겠다고 하는 마음의 감동을 받은 것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학이라고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이 세상의 학문을 가르치고 있다면 그것은 부름을 받은 자들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지성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신학을 나와서 라이선스를 따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런 시스템에 자기가 들어가고 있다고 해야 맞습니다.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불행이 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내가 부름을 받았는가를 늘 성경을 보면서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불렀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부른 이가 가르쳐 줍니다. 왜 불렀는가를 가르쳐 주고 일을 시킵니다. 그러나 부름을 받지 못한 자가 그냥 자기가 와서 남들이 하는 일을 보고 따라서 하는 것은 부른 이가 자기에게 무엇을 시키고 있는 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23:21-22절을 보면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이스라엘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활동을 했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해서 자기들이 성경을 연구를 한 사람들이 선지자들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선지자들을 보내지 않았는데 달음질을 하고 있고 그들이게 이르지 않았는데도 예언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낸 자가 많겠습니까? 자기들 스스로 선지자라고 한 사람들이 더 많겠습니까?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는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보내지를 않은 사람들로 인하여 예레미야가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보낸 예레미야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보다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공부를 해서 선지자가 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름을 받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들을 이스라엘에서는 더 신뢰를 했고 그들을 따라갔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안 본다고 하기 보다는 성경에서 그런 말씀이 있어도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그 말씀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보면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그들만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예표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이 죄를 범해서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 일들이 이 시대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육은 우리의 영입니다 그들이 왜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는가를 알아야 우리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데 성경을 보면서도 남의 일을 보듯이 하고 있습니다.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열심을 다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는 줄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달음질을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보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보내지도 않았는데 신학을 공부를 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불행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때 보내지도 않은 자들이 선지자 노릇을 함으로 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참혹하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주시려고 했지만 이 보내지 않은 선지자들로 인하여 완전히 망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표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보내지 않은 자들이 목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다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이 시대 역시 다수의 목사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의 다수가 정통이 되어서 역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같이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수가 정통이라고 하면 그것을 믿게 되어 있고 또 그 다수에는 이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정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같은 사람들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것에 미혹이 되는 순간에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수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수를 따라가다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제가 무조건 소수가 옳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다수라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사람들은 정통이라고 하는 다수를 따라가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리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대에 다수에 의해서 진리가 전파 된 적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초대 교회에 다수가 조금 보이기 시작을 했지 사실은 정통이라고 하는 다수는 늘 타락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지도 않았는데 자기들 스스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에서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늘 그렇게 거짓 선지자에 의해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이성과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서 그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르고 소가 푸주로 끌려가듯이 무지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 회의에 참여를 했었으면...

그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으면 이스라엘을 악에서 돌이킬 수 있었겠지만 성령의 강동을 받지 못해서 악을 행하는 것에 더욱 빠르게 가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를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행했던 것을 지금도 그대로 행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문제는 목사입니다

그 한 사람이 잘못이 되면 그에게서 배우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목사라 거짓을 전하는데 내가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지금 이 시대도 역시 목사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에는 참 하나님의 사람과 같이 보이게 해서 모두가 그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만 명이든지 십만 명이든지 한꺼번에 죽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그를 하나님이 보내셨는가 아니면 자기 스스로 하고 있는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지혜가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왜 사단이 강한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들의 눈에는 아니 이성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이는 그를 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 그렇게 죽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이성을 너무도 믿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그 안에서 진리를 사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이성으로 생각을 하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사단이 거짓 선지자를 세워 놓아도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학을 공부를 하고 라이선스를 취득을 하고 있고 목사 안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말을 듣게 되면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들었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를 매국노로 취급을 하면서 핍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소리만 듣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시대도 제가 교회에 대해서 안 좋은 말씀을 전하면 그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이 예레미야와 같은 성경은 보지도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들의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바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망한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악을 행하고 있다고 선포를 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를 그 당시 거의 모든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대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악을 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 말을 듣기가 싫고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보면서 무슨 악을 행하고 있는가 하면서 오히려 예레미야를 미친놈 취급을 했던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있습니다.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마태가 예수님을 좇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마태가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태의 자유의지는 없습니다.

이 당시 마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까 어떤 이유도 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좇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성으로 생각을 하고 나서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까 자기도 모르게 좇아가고 있습니다.

 

마태가 생각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에 대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마태는 세관에서 세리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마태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까 마태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이 개입이 안 되었습니다.

아니 자기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거역할 수없이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 이성적인 생각이 개입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신학을 어떻게 공부를 해서 어떤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 부르심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세관입니다

당시에 하던 일이 있던 사람이 좇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쉽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이 시대 누군가 세관으로 일하고 있는데 주님이 부르신다면 과연 그것을 쉽게 놓고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주님이 부르십니다. 그가 누구인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태는 세관입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일제강점기에 친일을 했던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세관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받아서 로마에게 바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관은 백성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권력은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들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로마에게 세금을 바치려고 하다 보니까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고 그것이 늘 가중하다 보니까 백성들이 세관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일단 세관이라는 직업은 당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아주 좋은 직업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마태를 주님께서 부르시니까 좇아가고 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분파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솔직히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아니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이 시대 가장 알아주는 목사가 부르면 아마도 모두가 갈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목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습니다. 설령 안 불러도 자기가 찾아가려고 하고 있지만 만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 줄에 서서 자기도 그를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종교인으로 성공을 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부르시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태를 부르신 것과 같이 부르시고 있습니다. 마태가 생각하기도 전에 아니 마태가 자기는 복음의 일을 한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그렇게 주님께서는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를 제자로 만드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주님께서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태가 자기 집으로 주님을 모시고 가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이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아카데미를 하고 있습니다.

남의 사무실을 빌려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교회도 아니고 또 강의실도 아니고 남의 사무실에서 겨우 십여 명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실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카데미 강의를 한다고 해서 찾아 왔는데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들 마음에서 생각하고 있는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설교를 하려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에 사로 잡혀서 벽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이 시대 교인들도 역시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있어야 합니까?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시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마태의 집에 진리이신 주님이 계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 다른 것이 부족한 것이 없는데 주님은 안 보고 세리와 죄인을 보고 있습니다. 진짜 자기들이 보아야 하는 주님은 안 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선생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 보이고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전혀 안 보이고 그저 죄인들과 세리만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까지 하찮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있다면 그 사람도 역시 별 볼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를 보아야 합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주님이 계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세리와 죄인을 보고 있다면 그 안에는 주님이 안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율법을 가지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십일조를 안 하면 구원을 못 받을 것 같이 주장을 하고 있고 주일을 잘 못 지키면 구원을 못 받을 것 같이 은근히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눈에는 죄인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인들의 마음에서도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죄인으로 보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계신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정통이라고 하는 곳에는 주님이 전혀 계시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을 잘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 당시 성전에는 주님이 안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바리새인이 정통이었고 또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정통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계시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진리가 있는 곳에는 세리와 죄인이 보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혀 진리가 없을 그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아니 진리라고는 도저히 인정을 하고 싶지 않은 그곳에 주님께서 계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통을 너무 좋아하고 있고 또 정통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단에 가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저는 이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가치고 없다고 믿고 있어서 그곳에 대해서는 말씀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늘 정통이라고 하는 그곳이 타락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통이라고 하는 그곳에 예수가 없었다는 것을 지금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정통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통인데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눈으로 보기에는 너희 선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정통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너무도 하려하게 짓고 있고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꼭 외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외모로 보이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안에는 예수가 없다는 증거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교회가 아세라가 되어서 그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오기만 하여도 자기도 거룩해 지는 착각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있으면 죄인이 있고 세리가 있으면 어떻습니까? 예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들로 자기들이 정통리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창고면 어떻고 후미진 곳이면 어떻고 가정이면 어떻습니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만 있다면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할 지라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다 망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저녁노을이 질 때는 예루살렘 전체가 그 성전에서 반사되는 빛으로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그 성전이 어떻게 무너질 것이라는 예연을 하시고 그 예언대로 로마에 의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아무리 그곳이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해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져 버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예수가 안 보이고 있습니다. 그저 입에 바른 말로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있지만 실제 그 안에는 바리새인들만 가득하지 예수 그리스도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바리새인은 몰랐습니다.

자기들이 어떤 병에 걸려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병에 대해서 기록을 하셨는데도 자기들이 그런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모르고 죄인들과 예수님께서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면서 죄인들을 보고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 병자입니다.

이 세상 사람은 다 병자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육적인 병자는 나을 수 있지만 아니 설령 못났는다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영적인 병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가 본다고 하니 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에 나오고 있는 거의 모든 병은 영적인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는데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병들은 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육적인 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보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죄인입니다

육적인 죄인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떤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소경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자기가 중풍병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또 자기가 문둥병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면 다 죽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병자에게는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하겠지만 아니 그런 병자들은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지만 자기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를 모르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건강했습니다.

죄를 안 지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문자적으로는 죄를 안 지었다고 자부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다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병에 걸려 있는 줄을 모르니까 주님께 은혜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적으로 소경은 주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문둥병자는 주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소경과 문둥병자인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주님을 보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잡수시고 있다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병에 걸려 있는 줄을 알아야 주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에게 걸려 있는 영적인 병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8: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내가 연약합니까? 그리고 내가 병이 들어 있습니까? 실제 문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대해서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소경이고 문둥병자고 중풍병자라는 것을 깨닫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마태의 집에서 그런 사람들과 잡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주님을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모르고 있고 또 자기들이 어떤 병에 걸려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병을 아는 사람은 의원에게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면 죽을 때가 돼서야 가보아야 그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게 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왜 오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사람들은 제사에 빠져 그 제사를 보고 자기들이 믿음이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예배, 찬양, 기도, 헌신, 그리고 율법의 행위 등 이 모든 것이 다 제사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제사를 드리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다 그런 제사는 자기들의 마음의 만족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제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제사를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제사를 더욱 거룩하게 드리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과는 자기들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아주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제사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 세상 사람과 자기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니라 해도 그 마음이 진심에서 했다 해도 우리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배를 안 드리고 또 주일을 안 지키고 또 십일조를 안내고 하는 사람과 나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의인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근체의 십일조까지 내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여러 가지 율법들이 교회 안에서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지키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보다 의인이 되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께서 부르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세리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잡수실 때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정해 놓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주님이 그 자리에 계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 역시 의인이 되고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말로는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서 지킨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람의 눈에는 의롭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있습니다.

내가 의인인가 아닌가를 먼저 확인을 하시기 바랍니다. 일부러 이 세상의 도적적인 죄를 지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의롭게 살지 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사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너무 제사에 빠져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제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도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런 제사에 빠져 있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을 구하고 있는 성도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님들을 부르셔서 그 은혜로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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