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1: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54쪽)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믿음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은 믿음이 아니고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영의 일은 사람의 지혜로는 설명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 영을 설명해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해를 시킬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있는 영의 일은 그렇게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을 예표로 해서 우리에게 이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모든 예표가 우리가 영의 생명을 믿을 수 있게 경계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믿음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그런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육의 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저희의 넘어짐 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넘어졌습니까? 성경에서 이런 단어가 나오면 사람들은 거의 다 육의 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표본을 만들어 놓고서 그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넘어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기준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가 넘어 졌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육적인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거든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사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오래 참으면서 믿어서 약속을 받은 것과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약속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면 저가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습니다. 왜 그럴 수 있었는가 하면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믿음이 없었다면 아브라함도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자손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했지만 믿음에 서지를 못 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이 넘어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넘어짐으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넘어졌는가를 그리고 어떻게 넘어졌는가를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방인 역시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과 같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주의에 빠진 것과 같이 이방인 역시도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을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경계로 삼았으면 이방인은 넘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바리새인 못지않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다.
단 한 가지라도 그 모양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다 넘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넘어졌다는 것조차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혈통을 따지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이 이 시대는 정통이라는 것을 따지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율법을 지켰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똑같은 율법을 지키면서 이스라엘은 율법주의라고 하고 있고 자기들은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 있는 기초가 바로 그에게서 율법의 행위가 있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나타나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할지라도 그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다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가 역시 다 넘어졌습니다. 둘 다 바알을 숭배했고 둘 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두 짐승이라고 하면서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 짐승이 자기들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믿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그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11장에서는 넘어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듣는다 해도 사람이 얼마나 쉽게 율법주의에 빠지는 가를 이미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아예 복음조차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천국을 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영생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던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원하던 영생을 얻지 못하고 실패를 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는데도 그들의 눈이 흐려져 성경이 안 보이고 있습니다.
인생이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생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켰던 이스라엘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왜 실패를 해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성경을 보는 눈이 감겨져 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넘어짐과 실패로 말미암아 세상이 부요하게 되었고 우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이방의 사도로서 이 복음을 전파해서 듣고 믿게 했습니다.
그러나 늘 이스라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복음을 듣고 믿으면 그 축복이 얼마나 크겠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유대교에 빠져 복음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봤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은 그들과 같이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고 난 후에 불과 수세기 만에 아니 사도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던 그때에 벌써 율법주의가 들어왔고 니골라당이 들어와서 종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실패가 경계가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을 따라 율법주의로 가고 말았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가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문자를 알던 이스라엘이 율법주의로 갔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 시대 역시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에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우면서 더욱 문자에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미입니다
성경의 텍스트는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텍스트에서 히브리어의 뜻을 알고 또 헬라어의 뜻을 안다고 해도 역시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세상 초등학문을 마치 고상한 지혜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목사들은 그런 자기들의 지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제 나는 이방 사람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니만큼, 나는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늘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도 자기 민족을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이방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방의 사도라는 것을 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다가 하늘에 올라가시기까지 그는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으로 살았습니다. 더구나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할 때 그는 그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참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잡으려고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누구였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기록한 성경에서는 늘 자기가 이방의 사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삼년 반 동안 동고동락을 하면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다릅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사도라는 것을 증거를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께서 부르셔서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로 가서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계시가 되기까지 말씀을 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성경을 보아서도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자기가 히브리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의 사도가 된 것을 자랑스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2:7절을 보겠습니다. (신 338쪽)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실제 우리가 보고 있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사도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이방인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를 성경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거의 2000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물론 성경은 40여명이 되는 선지자들이 기록했습니다. 어느 성경이 중요하고 어느 성경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성경을 보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성경을 기록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특히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고 있는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율법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게 성경을 기록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경을 보는 사람입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시대 신학자라고 하면서 자기 이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볼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그 신학자라는 사람이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폄하를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유대인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그런 이야기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을 폄하를 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왜 이방인의 사도인가 하면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고 이방인들의 스승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과 진리 안에서 분명히 우리 이방인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그가 기록한 성경을 기초로 해서 다른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런 후에 다른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라서 누구보다 이방인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이방인들을 어떻게 해서라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사도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사도 바울만이 이방인의 사도로 세운을 입었습니다. 물론 다른 사도들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성경이 우리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을 세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에 이방인의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선지자가 어느 사도가 율법을 폐하라고 강하게 성경을 기록했습니까? 물론 모든 선지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했지만 그것은 다 의미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만은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십자가에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합니까?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모든 성경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사도 바울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왜 이방인의 사도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저 문자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 이방인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이고 이스라엘에게도 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직접적으로 우리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로마서입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고린도전후서 역시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가 기록한 성경의 대부분은 이렇게 이방인들을 위해서 기록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이 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이스라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입니까?
저는 그렇게 권면을 하고 싶습니다. 먼저 이방인의 사도가 기록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다른 성경을 폄하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고 또 우리 이방인의 사도가 누군가를 알면 우선은 그가 기록한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사람들이 교리서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조차 로마서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입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이 없다면 우리는 사실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구약에 있는 말씀들을 인용을 하면서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최소한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쓴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구약의 대부분은 율법을 지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의미를 알면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은 율법을 폐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방인이라면 우리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기초로 해서 다른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말로만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다른 성경을 보면 더 쉽게 성경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자기들의 사도가 기록한 성경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그들은 성경말씀을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3:7-9절을 보겠습니다. (신 288쪽)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직분입니다
우리는 이 직분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두 가지 직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죄의 직분과 의의 직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두 가지를 가지고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만 됩니다.
교회 안에는 정죄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의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교회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복음을 전하면 그가 정죄의 직분인가 의의 직분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어떤 직분을 가지고 살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가 율법주의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반포하셨습니다. 그가 율법을 반포한 것을 사도 바울은 정죄의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반포를 했습니다. 물론 모세는 그 율법의 의미를 알고 반포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는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반포한 율법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듣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육체로 행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정죄의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교회 안에서 지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의의 직분을 맡은 자가 아니라 정죄의 직분을 맡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직분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직분을 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는 삼권 분립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왕정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자기들이 마음대로 직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미디어가 발달을 해서 그들 역시 민주주의 국가의 모양은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가지 직분입니다
한 가지 직분을 하면 한 가지 직분은 하지 못 합니다. 정죄의 직분은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의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운 영이 거하시는 성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죄의 직분을 하고 있으면 의로운 생명이 거할 수 없고 의의 직분을 하고 있으면 정죄의 직분을 자기 육체로 지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의의 직분으로 사도로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문자적으로라도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철저할 정도로 의의 직분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의 직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의를 전했기 때문에 더욱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를 알면 그렇습니다. 이 시대 역시 우리가 의를 알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의를 전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자랑스러운 일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에베소서3:8절을 보겠습니다. (신 312쪽)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가 무엇을 전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영광스럽게 여기는가 하면 그는 의를 얻어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의의 직분을 맡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방인들에게 무엇을 전했습니까?
율법을 지키라고 했습니까? 이 시대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이스라엘이나 된 것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직분입니다
그는 의의 직분을 맡은 자로 살았습니다. 그 의의 직분이 무엇인가 하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할 정도로 율법과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보았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측량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방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할례가 들어와서 사람들이 할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할례는 모든 율법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할례가 들어왔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들은 할례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른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교회가 할례를 하지 않을 줄을 모르시고 사도 바울에게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례는 율법의 상징입니다
꼭 할례가 아니라도 다른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 교회는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가 아니라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모든 교회는 복음이 전해지지가 않고 있고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기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방인들에게 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이고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듣고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까?
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한 사람이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입니다. 우리는 숫자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정말 한 시대에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 가를 이미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배설물과 같이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자기가 육체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았던 모든 것을 다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방에 무엇을 전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들어오자 그는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이 들어오자 자기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이제까지 수고한 것이 헛되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저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면서 사도 바울이 치열하게 싸운 그 율법을 이방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율법이 들어오니까 사도 바울은 탄식을 하면서 자기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야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이방인들이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이 그렇게 수고한 것을 모두 헛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지금 갈라디아서에 있는 말씀과 같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면서 그가 전한 복음을 헛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이방인들이 헛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면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헛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직분이 너무도 영광스럽다고 여겼는데 이방인들은 사도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 만들어서 이 시대는 복음이 사라지고 다른 복음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언제 우리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했습니까? 그가 기록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문자적으로라도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그래도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니 이방인이 많이 믿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정말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복음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위해서 자기들을 위해서 기록한 성경도 폄하를 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8-9절을 보겠습니다. (신 377쪽)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사도 바울의 직분입니다.
그가 왜 자기 직분을 영광스럽다고 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사도 베드로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이 시대는 교회 안에 바다 모래 같은 숫자가 있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 영혼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삼년 동안 눈물로 너희를 훈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지만 내가 가면 이리가 와서 너희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반드시 복음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또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성도들에게 삼년을 밤낮으로 훈계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듣고 믿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까? 그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시대 목사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에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이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영광스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을 받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그 직분 자체는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게 하시면 그를 통해서 듣고 믿는 자가 있게 역사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넘어졌습니다.
그것은 정죄의 직분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어서 영혼 구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결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뭐 합니까? 그 결국에 영혼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 버림을 받는 가장 불쌍한 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교회 안에 있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보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초대 교회는 사도들이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 시대는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직까지 완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보지를 못 했습니다.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의의 직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서 이방인들이 듣고 믿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모두가 믿음에서 넘어졌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믿음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듣지도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믿음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제사만 안 드리고 있지 사실 유대인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자기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종교가 되어 있어서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정죄의 직분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직분입니다
이 시대 우리 성도들의 직분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목사가 그렇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과는 반대로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있는 이 시대에 사도 바울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모두가 다른 복음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그런 정죄의 직분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사망에 이르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저 성경을 보고 성경에 있는 문자를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넘어져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입니까?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직분은 하나도 영광스러운 직분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가 넘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영광스럽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영혼 구원을 받을 수 있어야 영광스러운 직분이 될 수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은 단 한 가지라도 모양을 나타내서는 안 됩니다. next 111-2.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2-1,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 | 2025.04.09 |
---|---|
111-2,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0) | 2025.04.05 |
110-1,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0) | 2025.04.02 |
109-2,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0) | 2025.03.29 |
109-1,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0) | 2025.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