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2: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89쪽)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의 모든 것입니다
교회도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사람인 나 역시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십일조를 하는 것도 세상에서 하는 것이고 내가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는 것도 세상에서 하는 것이고 내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는 온갖 행위도 다 세상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사상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수천 년 내려왔습니다. 물론 유교의 사상도 있습니다. 이런 사상이 있다 보니까 교회를 세상으로 안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안에 있는 자기는 세상에서 떠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있는 모든 일들이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 주일을 지키고 하는 모든 일들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지금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세상을 모릅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좇아 온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는 말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믿음이라고 한다 해도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일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며 하나님께 로서 좇아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좇아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들을 깨닫지를 못하면 세상으로 좇아 온 그것으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으로 좇아 온 그것을 행하면서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나쁜 의미의 모든 말씀을 이 시대 기독교가 행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서로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정욕입니다
누가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하면 도리어 저를 더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 너무 빤합니다.
그러나 압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을 얻은 성도는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늘 말씀을 드리지만 영생을 얻는 성도는 지극히 적고 사망을 당하는 가라지가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왜 망 합니까?
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면서도 깨닫지를 못 합니까? 사람의 이성에는 이 사망을 위하여 맺는 그 열매가 너무 옳기 때문입니다. 죄의 정욕이 사람의 이성에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과 같이 판단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기초가 안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무엇이라는 기초도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죄의 정욕을 따라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해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지만 죄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사망입니다
육신의 열매는 사망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 삯이 사망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모르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서 자기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다 이단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수가 옳습니까?
제가 소수가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언제 다수가 옳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 주시면 그 선지자들을 죽이거나 핍박을 했습니다. 언제나 다수는 진리에 대해서 대적을 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다수가 그런데 이 시대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정욕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정욕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루신 구속의 일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고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 정욕에 빠져 있는 사람은 절대로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을 냈는데 그가 한 모든 일이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열매를 위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이 어느 한 사람이었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다수가 사망이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세상에 있는 것으로 정욕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입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방해하고 있고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언제 그런가 하면 육신에 있을 때에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정욕을 일으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로마서7:6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옭아맸던 것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죄의 정욕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에 빠져 그 지체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교회사를 보더라도 이 죄의 정욕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던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자기들의 지체로 율법을 지켜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습니다.
율법입니다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율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경까지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쓴 사도 바울의 사상이 잘못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을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 세상 사람이 보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경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일부의 사람이 죄의 정욕으로 자기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해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절대 다수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입니다.
이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 시대 자기들의 지체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체로 율법을 지키면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지만 사람들은 아무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진심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정욕에 얽매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하는 것이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체는 죄의 정욕에 얽매여서 꼼짝을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죄의 정욕에서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점점 더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죄의 정욕에서 얽매였던 것에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의 정욕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더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12:1절을 보겠습니다. (신 367쪽)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오직 믿음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극히 적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히브리서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믿음의 선진들의 예표를 들어서 말씀을 하면서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는가를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왜 보고 있는가 하면 이 믿음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이 믿음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죄를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죄가 무슨 죄인가 하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무겁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사람의 이성을 매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율법을 보면 어느 누구도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이 되어서 사람들로 죄를 짓게 하고 있습니다.
죄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죄라면 누가 쉽게 얽매이겠습니까? 죄라고 생각이 안 되기 때문에 그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사람들이 쉽게 얽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왜 죽었는가 하면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얽매이기 쉬운 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방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나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보고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서 죽지를 않고 도리어 점점 더 살아나고 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율법을 더 많이 지키고 있으면서도 종교에 의해서 매여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율법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얽매였던 것에서 죽었습니다.
죄에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죄에서 죽은 우리를 사도 바울은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 어느 누구도 율법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도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시편124:7절을 보겠습니다. (구 898쪽)
“우리 혼이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남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예레미야5:26절을 보겠습니다. (구 1059쪽)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의 매복함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육의 일을 통해서 우리의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편입니다. 다윗은 시편을 통해서 우리 영의 일을 정말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을 보는 사람들이 그저 시로만 보고 있고 구약의 육적인 것을 보고 이 시대 그대로 육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냥꾼입니다
물론 악인이 사냥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에서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의 매복함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의 교회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도 똑같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벗어났습니다.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으니 올무가 끊어짐으로 우리가 벗어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악인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악인입니다. 그 악인이 새를 사냥하는 것과 같이 사람을 잡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이 율법의 올무를 놓아서 사로잡고 있습니다.
올무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부하려 하는 사람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올무입니까?
율법이 올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 올무에 모두가 걸려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의 이성으로는 어느 누구도 그 올무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올무가 끊어짐으로 해서 우리가 빠져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 그 올무를 끊어 주셨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끊어주셔서 우리가 빠져 나오고 있습니다.
악인이 있습니다.
그 악인은 교회 안에서 사냥꾼과 같이 율법으로 올무를 놓고 있습니다. 그 악인들로 인하여 모두가 올무에 걸려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 악인들이 교회 안에서 새를 사냥하는 것과 같이 올무를 놓고 있습니다. 이 악인이 누군가 하면 광명의 천사와 같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올무에 걸려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입니다
올무에 걸려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부하려 하는 자들은 다 올무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는 올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새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을 새 대가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미련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 걸려듭니까? 새는 사냥꾼보다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사냥꾼보다 더 지혜가 있다면 새는 절대로 올무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는 올무를 보고도 그것이 올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올무에 걸리고 있습니다.
악인이 그렇게 교회 안에서 새 사냥꾼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악인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사람의 이성으로 이 악인을 분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의 매복함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보다 지혜가 없어서 잡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만이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지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은 예레미야의 말씀과 같이 새 사냥꾼에 의해서 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에서 벗어나지를 못 합니다.
누가 벗어났습니까?
율법에 대해서 죽을 수도 없고 율법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새가 사냥꾼에게 걸린다기보다는 사냥꾼이 올무를 쳐 놓기만 하면 새는 그냥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올무에서 벗어나야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도 이 시대는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악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은 다 악인입니다. 성경에서 악인을 말씀할 때는 악인이 그만큼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악인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악인을 보려고 하니까 도무지 볼 수 없습니다. 아니 새처럼 악인의 올무에 모두가 걸려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올무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것에서 벗어났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하면 새가 사냥꾼에게 잡힌 것과 같이 올무에 걸려 있기 때문에 율법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올무가 끊어져야 합니다.
아니 얽매였던 것에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이성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너무도 옳기 때문에 사람들 스스로가 올무에 걸려 있습니다. 사냥꾼이 그물을 치기도 전에 사람의 지혜를 가지고 올무에 걸려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5: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91쪽)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교회는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이 하는 예배의 모든 형식이 다 율법에 의해서 하다보니까 그 행위만 보아도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라는 건물을 지어 놓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그들은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효과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율법의 보이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굳이 자랑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 안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모두가 인정을 하게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사실 이 시대 교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 아마도 속된 말로 맨붕에 빠질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자기들이 이제부터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줄을 모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의 효과라는 것이 바로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율법에 자기들이 어떻게 얽매여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고 하니까 도리어 율법을 더 잘 지키려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교회 안입니다
분명히 그 안에는 육체의 사람이 있고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의 사람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영의 사람이라고 하면 영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있다고 하면 영의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알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고 이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성도들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영의 새로운 것을 전혀 모르고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그 율법의 행위를 보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말씀을 하는데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영의 새로운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하나도 모르고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면서 억지로 해석을 해서 모두가 다른 길로 가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이 시대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교회는 없고 다 육체의 것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의식화 되어 있는 모든 예배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하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막연하게 섬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에게 이전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확하게 말씀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데도 이것을 육체와 연결을 하다 보니까 도리어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의 나입니다
그것은 이전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내가 섬기는 모든 행위는 다 이전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 이전 것으로 섬기면서도 자기들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다 이전 것이지 영의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나입니까?
그것이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또 여러 가지 행위를 한다 해도 그것은 영의 새로운 것이 아님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은 육체의 이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이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과 육체를 섞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것은 어느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교회는 율법의 행위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섬깁니다.
그런 단어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거의 자기 육체로 무엇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는 말씀은 영의 새로운 것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이 되는 그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새 것이 되지 않으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이 되어서 이제 새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새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난 영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영의 새로운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영의 일을 모르니까 자의적으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입니다
영이 우리에게 보입니까? 영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까? 영이라는 단어를 바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영이 우리 육체에게 어떤 영향을 주어서 그것이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는 이런 샤머니즘적인 사상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마치 영의 새로운 것이 내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것을 체험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그것은 말씀그대로 영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영을 자기들의 육체로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샤머니즘의 행위를 하면서 자기들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은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어떤 행태로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은 영이 아니라 샤머니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신 모든 일이 이제 영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 영의 일이 우리 안에서 믿어지는 역사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서 주님이 오시는 날에 그 영이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합니다. 이것을 이루는 것이 영의 새로운 일입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계속해서 전제 조건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싶어도 안 됩니다.
영입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영을 우리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영의 일을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어지는 것을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6절을 보겠습니다. (신 288쪽)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의문과 영입니다
이 시대는 의문이 무엇인지 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솔직히 이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영입니다
내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영으로 한다는 말씀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그냥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에서 진리 가운데로 역사를 하심으로 영의 새로운 것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영으로 한다고 하지 마시고 영이 무엇이고 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막연하게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영으로 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으로 한다고 하는 그들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의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에게 명확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지를 않아서 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의문으로 하면서도 영으로 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의문이 자기들을 죽이고 있지만 의문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 모든 교회가 의문의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게 말씀을 드리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구속의 일을 알고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의문으로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성경을 보고 그 문자 그대로 자기들이 육체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둘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비교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렇게 비교가 되어 있을 때는 영으로 하는 사람과 의문으로 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영으로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또 영으로 하는 사람은 의문으로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영으로 하는 성도는 의문을 하지 않습니다. 또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영으로 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자기들이 영으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생활하고 있고 영으로 하는 성도는 절대로 의문의 모양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영으로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영으로 하는 성도는 의문으로 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의문으로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고 영으로 하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절대로 자기에게서 의문이 나타나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5:7절을 보겠습니다. (신 268쪽)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새 것이 되었습니다.
새 것이 되려면 반드시 의문의 묵은 것은 내어 버려야 합니다. 말로만 새 것이 되었다고 해서 새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묵은 누룩을 내어 버려야 내 안에 새 것이 거할 수 있습니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면서 새 것이 탄생이 되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서 국어만 알아도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의문의 묵은 것은 내어 버려야 합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의문으로 하지 않습니까?
의문은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이는 것을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죽이는 이 의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보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 성령을 보내 주실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의문의 죽이는 것에 얽매여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의문을 모릅니다.
성경의 문자 그대로가 의문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이 의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의문에 모두가 매여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의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은 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자체가 종교에 의해서 속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룩이 없는 자입니다
누룩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이 누룩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그는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기초가 되는 말씀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까? 자기에게도 불행이고 남에게도 불행을 가져다주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영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영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버리고 성령이 오셔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성도만이 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next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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