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5:5절을 보겠습니다. (신 245쪽)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우리의 예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자부를 하면서 살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기보다는 율법주의에 빠져 성령을 거스리면서도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믿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무엇에 대해서 믿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았는데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사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기 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믿습니까?
지금까지의 교회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믿었습니까?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그때가 지나자마자 교회는 다시 율법의 행위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것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믿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화평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부활의 날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리스도의 영이 어떻게 탄생이 되는 줄도 모르고 있고 아니 그 영 자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이 주님의 날에 영광스러운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왜 살아가고 있습니까? 솔직히 성도는 외롭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구원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율법주의와 같이 내 의를 자랑도 하지 않았고 또 세상에서 영광도 나타내지를 않고 죽은 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소망이 없다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 소망을 바라고 즐거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내 안에서 역사를 하심으로 이 소망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죽은 자와 같이 거지와 같이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의 날에 영광이 있기 때문에 소망을 바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자가 아닙니다.
정말 세상 사람이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는 이 복음을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영의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망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시대는 성도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소망을 가지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는 영의 일에 있어서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볼 때 우리는 분명히 이단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하나도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습니까?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악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고 하면 우리는 그것이 악해서 지키지 않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입니다
그리고 의로운 일입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것이 악해서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들로부터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다수는 율법주의자입니다. 솔직히 아주 극소수의 성도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율법주의자고 그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그런 성도들을 율법주의자는 핍박을 하게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환난을 당하는 것을 받아들이려면 인내를 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믿음이 있으면 시련이 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시련이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율법을 지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다수는 소수를 핍박을 하게 되어 있고 그것이 시련으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련이 왔을 때 인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에 있어서 시련이 오면 인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내를 합니다.
당연히 그 인내는 연단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은을 도가니에 그리고 금을 풀무에 연단을 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연단을 하셔서 든든히 설 수 있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시련을 받으면서도 인내를 할 수 있는가 하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없다면 절대로 연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연단을 받기 전에 모두가 포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의 사람은 아주 적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이 시대는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사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우리가 가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주의에 의해서 반드시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에게 있는 소망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이 어디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소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이렇게 성경에서 많은 소망을 갖게 함으로 해서 자기가 즐거워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소망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간곡히 바라고 원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소망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은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져야 할 소망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들이 간곡하게 바라고 원하는 것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소망을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육체를 위해서 간곡하게 바라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아무 것이나 그렇게 구하고 있고 그것이 사단의 교묘한 계략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도의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 해도 우리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성도는 땅에 있는 것과 하늘의 있는 것을 같이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구해야 하는 소망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끊임이 없이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여러 가지 소망을 갖게 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이것도 바라고 저것도 바라는 것이 좋을지 몰라도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바라는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있는 그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가지만을 바라고 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단은 교회에만 나오면 영생을 얻는 것은 기본이고 또 사람이 살아가면서 간곡하게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주고 그것으로 멸망을 당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디도서3:7절을 보겠습니다. (신 350쪽)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의 소망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만 나오면 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얻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은 재물을 위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열심히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하니까 열심을 내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모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까? 교회가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시지도 않는데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갚아 주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병은 늘 있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을 했다 해도 아직까지도 불치병이 많이 있습니다. 그 불치병이 걸린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병을 치유해 달라고 하면서 능력이 있다는 기도원이나 교회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 설교에서 이렇게 병을 고치려고 하는 자체가 잘못되었고 그것은 영적인 병에 대한 예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느 목사가 그것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여호와 라파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병자를 치유해 주신다고 한 결 같이 그 말씀에 반대를 하면서 심지어는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는 말까지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물론 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직 구원을 받지 못 했습니다. 그가 불치의 병이 걸렸다면 우리는 한두 번쯤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영혼을 위해서 간곡하게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아니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권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병을 고치면 뭐 합니까?
제가 말하는 것이 냉정하게 들립니까? 솔직히 그 사람의 병을 고친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습니까? 복음을 듣지 않는다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설령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삶입니다.
누구는 솔로몬과 같이 모든 부와 명예를 다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지 나사로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 죽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차피 한번 죽는 것이 정해져 있는데 왜 그것에 소망을 두고 간곡하게 바라고 있습니까?
성도는 영생입니다
그 외에 다른 소망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에 대해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육체에 빠져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 죽은 자가 조금 더 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시대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어 육체를 구하고 있습니다.
냉정하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는 성도는 그런 육체의 슬픔까지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을 슬퍼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그렇게 여러 가지로 사람들에게 소망을 갖게 함으로 해서 영생의 소망을 갖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성경이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영생은 반드시 내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성도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디도서에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다른 것을 간곡하게 바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이것 밖에는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바랄 수 있습니까?
디모데전서6: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42쪽)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내 소망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영생을 받은 자기들이 다른 소망을 가져도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을 누가 보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한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 부자가 많습니까? 가난한 자가 많습니까? 정말 다시 부탁드리지만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절대 다수가 부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부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부한 자들에게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전부입니다
이 시대는 모두가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재물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돈으로 보면 자기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령 이것이 돈이라고 해도 여러분은 세상에 제일 가난한 자에 비해서 부자라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입니다
그 재물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는 것에 다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고 하니까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고 하면서 정함이 없는 재물로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곡하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소망을 두어야 하는 줄을 모르니까 영생을 위해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그것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 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고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어느 한 가지라도 재물에 소망을 두면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영생을 바라고 있다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지만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둡니까?
물론 세상 사람도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재물에 대해서는 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의 의고 나타나는 현상의 의라는 것을 성도는 알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돈이 아닙니다. 내 의가 정함이 없는 재물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내 의고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정함이 없는 재물입니다.
정함이 있는 재물이 무엇입니까?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입니다. 그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는 모든 행위는 다 정함이 없는 재물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은 정함이 있는 재물입니다. 그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행위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소망을 가져야 하는 재물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자기 소망을 이미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 성도로서 살아간다고 하면서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두 가지 소망에 대해서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소망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영생을 얻기도 하고 또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교회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비교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이런 비교의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영생의 소망만 바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영생의 소망을 자기들이 이미 다 받았다고 하면서 정함이 없는 재물도 역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가지게 되면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를 함께 가지려고 하는 그 자체가 욕심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소망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에 있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도서3:5-6절을 보겠습니다. (신 349쪽)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역사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소망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영생을 얻는 그것이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가면 너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성령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5장에서 처음으로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입니다
그것을 디도서에서 우리의 구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아담이 범죄를 했을 때 세상은 그때 종말을 맞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는 정말 부탁드리지만 이 구원만을 생각하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구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왜 보내 주셨습니까?
이 시대는 성령을 왜 보내 주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단 한 가지 이유는 구원입니다. 우리 인생으로는 성경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리의 영인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 성령이 감동을 해 주심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우리 마음에서 믿어지는 역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성령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에 대해서 너무 무지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령이 오셔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샤머니즘적인 은사를 행하게 하고 있고 또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게 감동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령을 왜 보내 주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보내 주셨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영생을 어떻게 받는 줄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받는지를 도무지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면 첫 번째 나타나는 것이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도리어 성령이 오시면 율법의 행위를 잘 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은 것과 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입니다
그 외에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만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셔서 우리가 그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미암다
원인이나 근거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는 말씀은 성령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서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일서4:9-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92쪽)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인도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성령입니다
그가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누구입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구속의 일들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가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오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우리 마음을 감동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셔서 믿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해서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이유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지식으로는 이 성경을 수백 번을 보고 아니 다 외운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입니다
그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바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6:13절을 보겠습니다. (신 176쪽)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구속의 일이 모든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성령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기초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이 성령의 기초입니다. 특히 이 말씀은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 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가 오셔서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입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어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의 종교에서 하고 있는 샤머니즘 적인 행위와 그리고 율법을 잘 지키게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모르다 보니까 이 시대는 이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성령은 말씀 그대로 성령입니다. 그라니까 진리의 영입니다. 그를 왜 보내 주셨는가 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다른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에 대해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그가 아무리 성경을 본다 해도 모든 진리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성령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을 의인화 하시고 또 존칭을 쓰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영생을 얻는 그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존칭을 쓰고 의인화를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비유라도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할 만한 말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의인화를 하시고 또 존칭을 썼다는 그 이유만으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영의 일을 우리가 다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 인생의 언어로 다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인생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서 믿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계속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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