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5:5절을 보겠습니다. (신 245쪽)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이 영의 일을 알아야 믿을 수 있는데 이 영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의 일을 하게 하시고 그 일을 깨달을 수 있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성도는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와서 하는 일입니다
다른 일 하지 않습니다. 정말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오셔서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서 영의 일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입니다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누가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까? 사도들은 성령을 지칭할 때 존칭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딱 한번 성령께서 라고 말씀을 하고 모든 성경은 성령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누가 존칭을 했습니까?
어느 누가 성령님이라고 기록을 했습니까? 이 시대는 성령을 너무 모르고 있고 그것이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세뇌가 되어서 성령을 부를 때 이제는 당연히 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언제 부터입니까?
제가 어려서는 성령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을 교회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제 일 계명을 범하는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령을 말씀하면서 존칭을 쓰시고 의인화를 하셨는가를 모르고 예수님이 존칭을 썼다는 그 이유만으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저를 이단이라고 까지 공격할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인들로부터 이단이라고 공격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이단이 된다 해도 저는 구원을 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말씀 그대로 진리의 영입니다
그를 왜 우리에게 보내 주셨는가를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또 로마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와서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라 보내 주신 진리의 영입니다. 영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아닌 진리의 영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성령만 하나님이 보내셨습니까? 천사도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천사만 하나님이 보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잠언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를 의인화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도 하나님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도리어 이단이라고 공격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믿고 있습니다. 이 영생이 좋은 것이 좋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무 감성적입니다
그런 감성이 망하게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미 2000년 가까이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성령을 그렇게 배워왔고 또 신학교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한 위라고 배운 목사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는 제가 드리고 있는 이 말씀이 얼마나 공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에게 성령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그 한 가지만 보아도 그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는 것을 갈라디아에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의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감성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냉정하게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만 다 찾아보아도 성령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성령을 의인화 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도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그리고 그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기 때문에 그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의인화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 주신 영입니다. 그 영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들이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시 부탁을 드리지만 신사가 되어서 성령에 대해서 성경에서 깊이 묵상하면서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5:6절을 보겠습니다. (신 345쪽)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복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우리는 다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이제 그 죄인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예표로 해서 의롭다 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어떻게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는가를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의가 생명에 대한 의라는 것을 말씀하고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동일하게 의로 여기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5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을 이제부터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신앙은 나를 아는데서 부터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영생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면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은혜를 구하고 긍휼을 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얼마나 연약한 가를 몰랐습니다. 왜 몰랐는가 하면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인하여 몰랐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죄를 지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실상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연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찾아 다니셨습니까? 누가복음4장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부자를 찾아다니시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에게는 절대로 이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에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는 강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는 연약한 자입니다. 교회 안에는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물질의 부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셨는가를 알면 됩니다. 이 시대 역시 성령이 누구에게 오시는 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를 찾으셨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8:17절을 보겠습니다. (신 12쪽)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연약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병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남들보다 더 약한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육체의 병이 드는데 그것을 짊어 지셨다는 뜻입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거의 다 육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일을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의 다 문자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고 하니까 자기 육체의 연약한 것이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서 그것이 강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병이 있으면 또 기도를 해서 병을 고치려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정말 성경을 육의 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다가 예수님을 대적하고 말았는데도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과 똑같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이스라엘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정도입니다. 육체의 연약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다 문자로 보다보니까 성경에서 영의 일에 대해서는 소경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샤머니즘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워낙 오래 동안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병이 든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육체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의 생명을 주셔서 그 생명이 주님의 날에 부활을 해서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기를 원하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입니다
모든 영광은 다 마귀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주는가 하면 마귀가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바란다는 말씀은 세상을 살아갈 때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를 바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연약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연약한가 하면 영생에 대해서 연약해서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담당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율법의 행위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연약한 자가 아니라 바리새인과 같이 강한 자입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할 수 없다고 하면 우리가 십일조를 내고 있고,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지키면서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실상은 하나도 지키지 못하면서 율법을 모르다보니까 자기들이 하고 있는 몇 가지 행위를 보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율법주의에 이미 기독교는 처음부터 빠져 있었고 이제 2000년이 흐른 이 세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것을 주님이 오셔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고 말씀을 하면 우리는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의 어떤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시편31:10절을 보겠습니다. (구 823쪽)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의인은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아예 세상에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은 의롭다 함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순간 의롭다 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성도의 삶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모르니까 그저 자기들의 이성으로 지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거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성경은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우리 인생은 연약합니다. 왜 연약합니까? 죄를 지어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의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연약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왜 연약한가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연약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율법을 몇 가지 지키는 것으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하나를 지키면 모두를 지킬 의무가 주어지고 그 모든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인생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연약합니다.
그 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율법의 의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율법의 의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인 영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에 대해서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위해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시편입니다
육체의 생명을 말씀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약하여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해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어서 이 생명에 대해서 연약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로마서4장에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죄인인가를 알아야 내 연약한 것을 주님이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죄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연약합니다. 이 연약함을 고백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달은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 놓고도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살인한 자요, 간음한 자요, 우상 숭배를 한자요,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한 자라는 것을 율법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있어서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 연약함을 주님이 오셔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자기들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3절을 보겠습니다. (신 281쪽)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어느 성경을 보더라도 이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거꾸로 보고 있어서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았고 그것을 이방에 전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 마태복음8장17절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는가 하면 이사야53장4절의 말씀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에 기록이 된 대로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살인한 자요, 간음한 자요. 우상을 숭배한 자요 도적질을 한 자요, 거짓말을 한 자요,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한 자인데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성경대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도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모두가 영적으로 살인한 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성경에 문자를 보고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떤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믿을 수 없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어 있는데 율법을 보고도 죄가 더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거기에는 나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나 역시도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죄라고 하니까 육적인 죄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육적인 죄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죄까지도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 육체가 연약해서 이 육적인 죄는 죽을 때까지 짓고 살아가고 있지만 영적인 죄는 성령이 오시면 짓지 않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거꾸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영적인 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육적인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영적인 죄와 싸워야 합니다. 이 영적인 죄를 요한일서에서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영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교회 안에서 육으로 살면서 율법을 지키고 그것이 영적인 죄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영의 일을 모르니까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대로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 사도 바울이 어느 말씀을 인용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편찬한 사람들도 이 성경대로가 이사야 53장 말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많은 말씀들로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왜 성경을 알아야 하는가 하면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어느 말씀에서 비유로 말씀하는 가를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우리가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5:7절을 보겠습니다. (신 245쪽)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믑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성경에 문자로 적혀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으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언어로 감성적으로 자극하는 미사여구를 써서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면서 그것을 알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에 모두가 미혹이 되어서 점점 더 감성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의 감성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믿음으로 내 안에서 역사를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그들이 사람의 말로 미혹을 하고 있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을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사람의 말에 속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경건해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을 내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고 찬송가를 부르고 있고 기도를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건치 아니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진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경건해지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죄라는 것을 모르고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모르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들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의인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의 생각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있습니다.
누가 그 의인을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습니까? 몰론 간혹 가다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보면 의인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인이 있습니다. 또한 선인을 위해서 죽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 그것도 정말 드물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죄인입니다
살인한 자를 위해서 대신 죽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간음을 한 자를 위해서 대신 죽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가를 사도 바울이 세상에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로는 없습니다. 간혹 가다가 의인을 위해서 그리고 선인을 위해서 대신 죽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모든 사람을 보아도 살인한 자를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대신해서 죽지 않았습니다. 살인한 자를 비난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를 대신해서 죽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간음한 자를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습니까?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같이 돌로 치지 않은 것만 해도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런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알면 뭐합니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면 뭐 합니까?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의 문자는 그저 이 세상의 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문자를 아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니까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이 시대 교인들에게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5: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91쪽)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인도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이 세상 사람에 비하면 분명히 더 의롭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 뭐 합니까?
주님이 누구를 위해서 죽으신 줄을 모르고 점점 더 의로워지려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아무리 좋은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는 스스로가 세상 사람에 비해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할 수 없습니다.
나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더기가 지렁이가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로 살아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렁이가 구더기가 성도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죄인인가 하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죄인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이치입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선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정말 어쩌다 간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고도 자기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니까 이 말씀이 은혜가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왜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까?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사람이 같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실 죄를 짓자마자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탄생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썩을 내 육체가 내가 아니라 그 영이 진짜 나입니다. 하늘의 씨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죄인인 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대신 죽으신 것은 우리 역시 죄를 진 육체는 죽었다는 말씀이며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 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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