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나아만
열왕기하 5:10-11절을 보겠습니다. (구 568쪽)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인생은 병자입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병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설령 병이 안 든다 해도 그가 기력이 쇠해가는 것 그 자체도 병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은 모두 그렇게 병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지금도 수많은 의사나 과학자들이 밤을 새워 가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왜 죽습니까?
결국에는 병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 병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를 인류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일부 인류학자들 가운데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1000년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뉴스를 통해서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병과의 싸움입니다.
영생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병과 싸우고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 인류학자가 이야기를 한 것과 같이 의학이 발달을 해서 1000년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 인생이 죽는 것은 성경에서 정해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을 한다 해도 인생이 영생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반드시 죽습니다.
미물인 짐승들도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인생들은 더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짐승들은 자기 죽을 자리를 알고 가서 거기서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을 짐승들도 그렇게 순응을 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오히려 인생들이 더 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일부 교회는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다닌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육체의 병을 고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은사 집회를 하고 있고 또 기도를 하고 있고 안수를 받으면서 자기의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고통 중에 있는 환자가 무슨 일이라도 해 보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교회에서 그런 집회에 참석을 한다고 해서 다 병이 고쳐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아니 설령 그 병을 고쳤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영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 병이 호전이 되었다가 다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육체의 병자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아니 그렇게 병을 고친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영생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고쳐 주셨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었습니다.
잠시 그 순간입니다 그런 병을 고치느냐 안 고치느냐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육적인 병을 고치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 병을 고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셨을 때는 다 그 안에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육적인 병을 고쳐 주시면서 영적인 병을 함께 고쳐 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 그저 자기 육적인 병을 고치고자 애를 쓰다가 병을 고치든 못 고치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병은 더럽습니다.
그 더러운 것을 주님께서 친히 담당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병자를 고쳐 주셨고 또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 하면 우리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은 육적인 병이 아니라 영적인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병자가 나옵니다.
물론 육적인 병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그림자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 병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뜻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우리 병을 짊어 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적인 병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고 있는 병은 물론 육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영적인 병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병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육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병을 짊어 지셨다면 우리는 죽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병을 짊어 지셨다고 말씀을 하는데 육적인 병을 짊어 지셨다면 우리는 절대로 죽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짊어지신 병은 육적인 병이 아니라 영적인 병이라는 것을 이해를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입니다.
아람의 군대 장관인데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가 어떻게 고침을 받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 시간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5:1절을 보겠습니다. (구 567쪽)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아람의 군대 장관입니다
그는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아람을 구원해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시 아람에서는 왕 바로 아래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권력만 왕으로서 누렸지 실제 아람을 구원했기 때문에 왕과 같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지만 실제 나아만은 그렇게 믿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구원을 했습니까?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능력으로 아니 자기들의 신이 도와서 아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나아만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그를 통해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이 걸려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나아만에게 구원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과 아람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늘 전쟁을 했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람에 군대 장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어떻게 보여 주시고 있는 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우리 이방인을 지금 어떻게 보여 주시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가 지금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람의 군대 장관이냐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이방인이고 문둥병자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문둥병입니다
지금은 이 문둥병도 치유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 문둥병을 격리 시켰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둥병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문둥병자를 낫게 하신 것을 신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13:45-46절을 보겠습니다. (구 165쪽)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문둥병 환자의 율법입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규례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발생이 되면 이렇게 했습니다. 이것은 문둥병에 대해서 율법으로 정해 놓은 것입니다
육적인 문둥병자입니다
예전에만 해도 이 문둥병은 불치의 병으로 알고 있었고 또 유전으로 내려오는 병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의학에서는 이 병이 치유가 되는 병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문둥병에 걸렸어도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문둥병은 균에 의해서 전염이 되는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죽는 병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 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까 내가 어찌 하나님이 관데 사람의 죽이고 살릴 수 있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문둥병은 불치의 병이고 유전이 되는 병으로 알고 있어서 이 병에 걸리면 격리를 해서 살아갔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병입니다
그래서 이 병에 걸리면 격리를 해서 살았습니다. 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진 밖에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중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문둥병은 회중에 들어 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은 것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 회중 안에 있다는 것과 밖에 있다는 것은 구원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아만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지만 나병은 전염이 되는 병이기 때문에 회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고 또 전염이 되는 병이라 누구도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한 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깨끗하지 못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정합니다.
문둥병이 있는 날 동안 부정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니라 당시에는 문둥병을 못 고쳤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병들은 그래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부정하다고 하는 병중에서 이 문둥병은 고침을 받지 못하고 평생을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병입니다
이제 영적으로 이 문둥병이 무엇인가를 보겠습니다.
육적으로는 문둥병이 감각이 없는 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기 살이 떨어져 나가도 아프지 않는 그런 병입니다. 몸이 다 썩어서 냄새가 나고 그래서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도 감각이 없어서 아프지 않은 병을 문둥병이라고 합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이 문둥병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가 아주 큽니다. 영적으로 감각이 없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나아만이 누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감각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입니다. 육적인 문둥병은 자기 육체가 떨어져 나가도 냄새가 나도 감각이 없이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에베소서4: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14쪽)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감각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감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문둥병이 걸려 있는 사람은 자신을 방탕에 내 맡기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문둥병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나아만 장군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을 방탕에 내 맡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문둥병이 걸려 있으면서도 자기가 문둥병에 걸려 있는 줄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 감각이 없는 병에 걸려서 성령이 감동을 주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방탕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누가복음21:34절을 보겠습니다. (신 133쪽)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져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이 이대 역시 누구나 이렇게 문둥병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에게 문둥병이 언제 전염이 된지도 모르게 임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전혀 조심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있지만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15쪽)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 술에 취해서 교회 안에 방탕해 있는 사람들이 다 문둥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술을 마치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술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이고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라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문둥병이 걸리면 술 취함에 내 맡기고 있습니다.
이 술이 무엇인가는 제가 계속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과 반대가 되는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이렇게 술 취함에 자기를 내 맡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문둥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술 취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술에 취해서 감각이 없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가르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술에 취해 있으면 영적으로 감동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거의 모든 말씀이 이 율법을 비유로 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감각이 없어서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다 보니까 점점 더 취해 가고 있습니다.
방탕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술에 취해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방탕한 것인 줄을 모르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의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감각이 없는 자이며 문둥병이 걸려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술 취함에 자기를 내 맡기고 있습니다. 아니 술에 취하지 않고는 한 시도 못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늘 술에 취해서 감각이 없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를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려 감각이 없어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술에 흠뻑 취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23:35절을 보겠습니다. (구 937쪽)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때려도 아프지 않습니다.
문둥병은 살이 떨어져 나가도 아프지 않습니다.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자기 스스로를 상하게 하여도 전혀 감각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문둥병에 걸려 있는 사람은 절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은 술이 깰 수 없습니다. 늘 술에 취해서 늘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때려도 아프지 않고 상하게 하여도 감각이 없습니다. 한쪽 발이 떨어져 나가도 감각이 없고 이제 생명까지 죽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바로 영적으로 문둥병이 걸려 있는 사람이 이렇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술에 취해 있습니다.
흠뻑 취해서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이 말씀은 술에 취해 있으면 절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술이 무슨 술인지를 모르고 있고 심지어는 사람이 마시는 술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9절을 보겠습니다. (신 17쪽)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먹고 또 포도주를 마시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술을 좋아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마셨으니까 방탕한 것입니까? 만약에 에베소서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하는 그 말씀이 진짜 사람이 먹는 포도주를 말씀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결론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술이 아닙니다.
에베소서의 술과 잠언의 술은 바로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진노의 포도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술에 취하면 사람이 감각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도무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성령의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습니까?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그 마음에서는 진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해도 그는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문둥병이 걸려 있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이 그 안에 절대로 임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 감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는 이렇게 감각이 없는 자가 되어서 방탕에 자기를 내 맡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그렇게 자기를 방탕에 내 맡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술에 취해서 자기 자신을 방탕에 내 맡기고 있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방탕에 내 맡긴다는 말씀은 율법에 자기를 내 맡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를 보면 거의 모두가 율법에 자기를 내 맡기고 있으면서도 감각이 없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4:6절을 보겠습니다. (구 1045쪽)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더러운 것에 욕심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의를 위해서 욕심을 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둥병에 걸려 감각이 없는 자가 되면 이렇게 더러운 자기의 의를 더 많이 행하고 싶어서 욕심을 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문둥병이 걸려 감각이 없으니까 그것이 더러운 것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정말 자기의 의를 얼마나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더럽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자기들의 의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감각이 없으니까 그것이 더럽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의 싸움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율법과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의 의와 싸우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면 그는 마치 육적인 문둥병자와 같이 자기 살이 떨어져 나가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되어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이렇게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솔직히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이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이 문둥병은 감각이 없는 병입니다 영적으로 전혀 감각이 없어서 자기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율법주의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우리의 의가 드러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타나면 우리의 의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감각이 없어서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려 있으면 성령이 감동을 아무리 주어도 감각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병을 가지고 살다가 결국에는 부정한 자로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7:1절을 보겠습니다. (신 292쪽)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교회 안에 온갖 더러운 것이 다 있습니다.
성경이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깨끗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눈에 너무도 깨끗하니까 그것을 하는데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더러운 것을 하나라도 더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행위는 다 더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이성적 지식으로는 깨끗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성경이 더럽다고 하면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그것을 깨끗하다고 하면서 더러운 일이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욕심을 냅니다.
얼마나 감각이 없으면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겠습니까? 더러운 것이 있으면 피할 텐데도 문둥병에 걸려 있으면 이 더러운 것도 깨끗하게 보이기 때문에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려 있으면 어떻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문둥병에 걸려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도 안 그럽니다.
누가 더러운 것을 갖겠다고 욕심을 내겠습니까? 옆에 다 썩어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겠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것을 버리려고 하지 그것에 욕심을 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에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려 있어 감각이 없다 보니까 그것이 더러운 것인 줄 깨끗한 것인 줄을 모르고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배설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배설물에 욕심을 낼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성경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러운 것에 더욱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려서 감각이 없어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둥병에 걸려 있어서 잔뜩 취해 있는데 성령이 아무리 책망을 해도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술에 취해서 성령의 책망을 듣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문둥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사실 문둥병에 걸려 있다고 해야 맞습니다. 그것을 오늘 나아만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정합니다.
율법으로는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로는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나아만은 이렇게 문둥병에 걸려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방인이 그렇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나아만은 우리 이방인을 예표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다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또 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종교가 다 그렇고 이 세상이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가 지위가 높던 낮던 그와 상관이 없이 모두가 그렇게 문둥병에 걸려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해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이스라엘로 갑니다.
문둥병은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다 했을 때 그 나라와 주변 국가에 다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그 당시의 의술로는 알아보고 말 것도 없습니다. 당시에 문둥병은 치료를 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염이 되는 병으로 알고 있었고 한번 걸리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치료를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벌로 생각을 했습니다.
천형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나병에 대해서 고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저 나병이 걸린 사람은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며 격리 되어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 병을 작은 계집 아이가 이스라엘의 선지자 앞에 가면 고칠 수 있다고 하니까 나아만은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그 말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선지자에게 가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섭리입니다
그 작은 계집아이가 전쟁 중에 잡혀 왔습니다. 그런데 그 계집아이가 이스라엘에 엘리사가 있는 줄을 알고 있었고 또 엘리사에게 가면 문둥병도 고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우연히 있는 일이 아니라 아람의 군대 장관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모든 사건을 섭리를 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5:8절을 보겠습니다. (구 568쪽)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아람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계집아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왕이 편지를 써 주면서 이스라엘 왕에게 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둥병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은 자기에게 편지를 보낸 아람 왕의 글을 보고 자기와 시비를 해서 이것을 트집으로 잡아서 전쟁을 하려고 하는 줄 알고 내가 어떻게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느냐고 말하며 옷을 찢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엘리사가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내게로 보내라고 하면서 저가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게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미리 아는 자를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지금 문둥병에 걸려 있는데 그에게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게 하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는 예언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나 예언자가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까? 선지자는 남들보다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지금 육적으로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병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나아만은 방탕함과 온갖 더러운 것에 빠져 있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나아만이 이렇게 영적으로 방탕함과 온갖 더러운 것에 빠져 있는 것을 고쳐 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문둥병을 고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표입니다 나아만을 통해서 이방이 어떤 상태에 있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지자가 없어서 듣고 싶어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또 보고 싶어도 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방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에 복음이 전하게 하기 위해서 나아만을 문둥병에 걸리게 하고 있고 또 작은 계집 아이가 포로로 가서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1쪽)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천국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듣지를 못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고 싶어도 보지를 못했고 듣고 싶어도 듣지를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의인들도 그랬는데 하물며 이방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나아만이 문둥병이 걸리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만나로 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이스라엘과 아람은 지금 적대국으로 있는데 병이 걸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러 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문둥병에 걸리게 만들고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게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이 아니면 안 옵니다.
당시 어떤 병이 걸렸어도 굳이 이스라엘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둥병에 걸렸기 때문에 안 올 수가 없었습니다. 육적으로 문둥병에 걸렸으니까 왔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려 있는 나아만을 이스라엘에 오게 해서 그가 선지자를 만나 복음을 듣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문둥병에 걸려야 선지자를 만나러 오지 그렇지 않고는 오지 않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걸려 있는 병이 어떤 병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아만과 같이 육적으로 그 병이 나타나면 선지자를 찾아 올 수 있는데 지금 영적인 문둥병은 도무지 자기가 걸려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선지자를 찾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 문둥병을 고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실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와서 그 병을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문둥병에 걸려 있는 사람은 그렇게 주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다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앞에 나오는 문둥병자들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문둥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다 문둥병에 걸려 있는데 지각이 없어 깨닫지를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문둥병 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 방탕하고 있고 또 온갖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육적인 문둥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둥병자들을 고쳐서 그들이 부정함에서 깨끗케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문둥병 환자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고 오히려 더 방탕해지고 있고 더러운 것에 더욱 욕심을 부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못 보고 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를 못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렇다 해도 이제 주님이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 계시지만 사람들은 역시 주님을 못 보고 있고 또 듣지를 못하고 있어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려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이 책망을 하고 있지만 그 영혼에 감각이 없어서 전혀 듣지를 않고 있고 자기 살이 떨어져 나가는 부정함 가운데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열왕기하 5:9-10절을 보겠습니다. (구 568쪽)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사자를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고 네 살이 깨끗하여 질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을 마중 나가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서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겠습니다.
요단은 죽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이제까지 나아만은 술 취함의 방탕과 온갖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면서 살았습니다. 그가 왕 다음의 장군이 되기까지 얼마나 자기의 의를 들어내면서 살았겠습니까?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육적으로 문둥병에 들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산 삶이 문둥병이라는 것을 나아만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네가 이제까지 방탕과 온갖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고 산 것을 죽음의 강에 들어가서 완전히 그것을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씻어야 합니다.
아니 죽여야 합니다. 죽음의 강에 들어가 완전히 이제까지 살아왔던 술 취함의 방탕과 온갖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고 살았던 것을 죽이지 않고는 그 문둥병이 나을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고 또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씻어야 합니다.
어떤 물에 씻어야 합니까? 이 요단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강입니다. 이방의 군대 장관 나아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는 보이는 문둥병에 걸려 있지만 지금 이 시대는 보이지 않는 문둥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자기 몸을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술 취함의 방탕과 온갖 더러운 것에 대한 욕심을 죽음의 강에 들어가 죽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표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이런 예표를 우리가 바로 알고 이 시대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은 나아만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정한 것에서 깨끗해 질 수 있는 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5:26절을 보겠습니다. (신 316쪽)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물로 씻어 부정한 문둥병을 깨끗하게 해서 거룩해 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강 요단강에서 자기가 이제까지 했던 그 모든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이제 그 문둥병을 씻어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씻지를 않습니다.
일곱 번 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완전히 알아서 깨끗해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대충 씻고 자기가 깨끗해 진 줄을 알고 있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씻어야 합니다. 술 취함의 방탕과 온갖 더러운 것에 대한 욕심이 완전히 죽어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해 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올 때 어떻게 했습니까?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물에 발을 잠그니까 그때 요단강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요단에서 율법이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요단에서 율법이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반드시 율법을 죽여야 합니다. 요단강에 들어가 율법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의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깨끗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요단강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술에 취해서 방탕해서 감각이 없고 또 온갖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면서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이 사건은 반드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합니다. 나아만이 진짜 문둥병에 걸려 요단강에 들어갔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려 있는 우리를 요단강에 들어가 씻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깨끗해 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부정한 자로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부정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천국
반드시 깨끗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정한 자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정한 자입니다. 그런 부정함을 씻으려면 반드시 요단강에 들어가야 합니다. 죽음의 강 율법을 죽인 그 강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아만의 육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보고도 영적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이방의 장군 나아만을 문둥병에서 낫게 하신 기적을 보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깨끗하게 된 역사는 나 역시도 그렇게 해야만 깨끗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5:11-13절을 보겠습니다. (구 568쪽)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선지자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을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깨끗하여 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제 나아만이 화를 내고 있습니다. 사실 화를 낼 만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도 자기를 극진히 영접을 했는데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것도 종을 보내서 요단강에 들어가 씻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나아만은 자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와서 자기 생각을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제까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은 얼굴도 안 보이고 있고 요단강에 일곱 번을 씻으라고 하니까 화가 날 만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나와서 자기 환부에 손을 흔들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낫게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게 얼굴도 안 보이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한 것의 의미를 모르니까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 안 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나아만과 같이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다. 그 환부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받으면서 자기 병을 고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런 행위들이 나아만의 생각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샤머니즘적인 그런 행위들을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을 고치고 있습니다.
이 병은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 병을 고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구원에 대해서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를 해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혀서 성경을 바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드시 요단강에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요단강은 깨끗한 강이 아닙니다. 나아만이 생각할 때는 자기 나라에 있는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요단 강 보다 더 깨끗하기 않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분명히 요단 강 보다 아마나와 바르발 강이 더 깨끗합니다. 이것은 나아만이 육적으로 강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 영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깨끗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깨끗해지는 줄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볼 때는 율법의 행위를 잘 하고 또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깨끗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으로는 절대로 깨끗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나아만의 문둥병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강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아마나와 바르발은 요단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아름답고 깨끗한 강입니다 그런 강이 자기 나라에 있는데 왜 더러운 요단강에 몸을 담그라고 하느냐고 하면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그렇게 자기들의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깨끗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와 자기들의 의로 깨끗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그 강에서는 절대로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죽음의 강 요단에서 몸을 씻어야 깨끗해 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방탕의 술 취함과 온갖 더러운 것의 욕심을 요단강에 들어가 죽이지 않으면 깨끗해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역시 이 나아만과 같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술 취함의 방탕과 온갖 더러운 것을 눈으로 보고 그것으로 깨끗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다른 강에서 씻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이 문둥병을 고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들어왔으면 성경이 말씀을 하는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생각을 그대로 교회 안에 가지고 와서 깨끗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깨끗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편94:11절을 보겠습니다. (구 872쪽)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사람의 생각입니다
나아만의 내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서 교회에 나와서 자기가 생각한 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 교회 안에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말씀도 안 봅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떠나려고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까 분이 나서 가려고 하니까 그 종들이 나아만에게 말하되 만약에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면서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하는데 한번 해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들어 보라고 합니다.
나아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일을 하라고 했으면 하지 않았겠느냐 그런데 물에 씻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인데 왜 하지 않고 돌아가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선지자의 말 대로 요단강에 들어가 씻어 깨끗하게 해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안 듣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안 듣고 있습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지만 안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미 내가 전한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어떻게 깨끗하게 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고 있지만 그 말씀을 알고 있지만 요단강에 들어가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끗해 져야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깨끗함을 입은 성도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자기를 씻고 있습니다. 그렇게 씻어야 자기가 깨끗함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나와 있지만 씻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서 씻고 있습니까?
다메섹에 있는 아마나와 바르발 강에서 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강은 자기들의 눈으로 볼 때 너무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강이기 때문에 거기서 씻으려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요단에서 씻지를 않고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강에서 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5:14절을 보겠습니다. (구 568쪽)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씻었습니다.
죽음의 강 요단에서 나아만이 일곱 번을 씻고 올라오니까 그 살이 어린 아이 살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문둥병에 걸려 있는 우리 이방인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들어가 깨끗하게 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을 몸을 담그니 깨끗해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단강에 일곱 번을 몸을 담그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문둥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이 문둥병에 걸려 있는 사람은 부정해서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방탕해서 술에 취해 있는 것과 그리고 온갖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고 있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단강에서 완전히 죽이지 않고는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정한 자가 깨끗해지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방의 나아만 장군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문둥병에 걸리니까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찾아 왔고 또 선지자에게서 문전 박대를 당하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그래도 요단강에서 자기 몸을 일곱 번 담그니까 그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완전히 죽여야 합니다.
정말 이 시대 사람들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의 의 신앙생활의 내 의를 모두 죽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아만이 자기가 행한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죽이지 않고는 절대로 깨끗해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만이 아무리 자기 나라를 구하고 왕과 같이 세상을 살아간다 해도 그가 문둥병이 걸리면 부정한 자가 되어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교회에 나왔으면 나아만과 같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깨끗해 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방법으로 깨끗해지려고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고 또 온갖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면서 더욱 문둥병이 심해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5:15-16절을 보겠습니다. (구 568쪽)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
이제 나아만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와서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안다고 하면서 청컨대 자기의 예물을 받아 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이스라엘에 올 때 자기 병이 나으면 예물을 드리려고 가지고 온 것이 있습니다.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왔습니다.
당연히 자기 병이 고쳐졌으니까 사례를 하고자 가지고 와서 지금 엘리사에게 그것을 주려고 강권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문둥병이 고쳐졌다면 이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고 예물로 드리려고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그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강권을 하니까 엘리사가 고사를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입니다
이것은 육적인 문둥병입니다 그러나 이 문둥병은 영적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구약의 육은 우리의 영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이 문둥병은 부정한 병이라서 하나님의 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문둥병에 걸리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병이 고쳐 진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친 것은 부정한 가운데서 깨끗해 진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부정한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이제 나아만은 깨끗해 졌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고 성경을 본다면 그는 구원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나아만이 누구고 어떻게 했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통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입니다
그 부정한 나아만과 같은 자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아만의 생각이 아니라 선지자를 만나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을 씻는 그것입니다 그 방법이 아니고는 절대로 나아만의 문둥병은 고칠 수 없다는 말씀이고 또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을 몸을 씻어야 깨끗해 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입니다
단순히 병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아만은 자기가 가지고 온 예물을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끝까지 그것을 고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4절을 보겠습니다. (신 243쪽)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자기가 깨끗해 진 것에 대해서 값을 지불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엘리사가 끝까지 고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구원을 받은 것은 어떤 값을 지불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값 지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둥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그 병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병이 깨끗해 졌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값을 지불하려고 하고 있고 엘리사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주는 것이라고 끝까지 고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받았습니다.
누구라고 값을 지불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값을 지불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값을 지불하려고 하다가는 은혜를 거절하는 행위가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은혜를 모르고 있습니다. 거저 주시는 것이 은혜인데 이 시대는 거저 주시는 은혜를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은혜를 외치고 있지만 실제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값을 지불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 줄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5:17절을 보겠습니다. (구 569쪽)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나아만이 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 드리지 않고 다만 여호와께만 드리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아만이 물로 씻어 깨끗함을 입었으니까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청컨대 자기 노새에 두 바리 실을 흙을 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노새 두 마리입니다
어느 정도의 흙을 실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두 바리 흙을 주면 이제부터는 자기가 번제든지 다른 제사를 드릴 때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흙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저도 정확하게는 설명을 드릴 수 없으나 아마도 천국의 땅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나아만이 천국의 땅을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흙을 달라고 합니다. 그 땅을 가지고 갈 수 없으니까 대신 흙을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이스라엘에 와서 살 수 없으니까 대신 해서 흙을 자기 나귀에 실을 두 바리를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땅을 자기에게도 달라고 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입니다
두 바리라고 해 보아야 사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흙을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도 천국에 기업을 얻을 수 있게 땅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받은 나아만이 천국에 대해서 알고 그 기업의 땅을 얻고 나서 자기 나라로 돌라가려고 할 때 이스라엘의 흙을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5:18-19절을 보겠습니다. (구 569쪽)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진행하니라”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꼭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제 다른 신에게 절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적으로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을 제가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로 망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렇게 했다가는 아마도 이스라엘과 아람은 전쟁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가서 왕의 신하로 살아가야 합니다. 왕의 신하로서 살아가려고 하다 보면 자기가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왕이 림몬 당에 들어가서 거기서 숭배를 하며 자기를 의지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자기도 역시 림몬에게 몸을 숙여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유 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자기 왕이 림몬의 당에 들어가서 몸을 숙이고 경배를 할 때 자기도 같이 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때 자기를 용서해 주시고 여호와께서 벌을 내려 주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입니다
그 제일 계명이 바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너희에게 있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을 어길 테니까 그것을 사유해 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을 했는데 자기 집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그래도 되느냐고 그것을 좀 이해해 달라고 하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육적으로 한다고 해서 마치 다른 신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를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육적으로 제사를 할 때 피치 못해서 제사에 참여를 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아니면 지금 영적으로 바알을 섬기고 있는 것이 잘못입니까?
기복주의 바알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피치 못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마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만 제사에 참여를 하는 것이 잘못 입니까? 교회 안에서 마음으로 기복을 바라고 빌고 기도를 하는 것은 바알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죄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음입니다.
내 몸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하고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아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뜻이 있습니다. 나아만은 이제 하나님께만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만을 마음으로 믿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는 더구나 왕과 같이 림몬의 당에 들어가서 숭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할지라도 자기는 하나님만 믿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은 마음에 있습니다. 나아만은 마음으로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자기 나라로 돌라가면 림몬의 당에 들어가 숭배를 할 때 자기도 허리를 숙여야 하는데 그것을 사유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신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림몬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신입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니지만 자기가 허리를 숙이는데 이 일에 대해서 자기를 벌하지 말고 용서해 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 역시도 말년에 다른 우상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에서 떨어진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구원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시는 역사입니다 그 생명을 내 육체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다시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은 우리 육체의 어떤 행위와 상관이 없이 이미 그 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설령 나아만이 림몬의 당에 들어가 허리를 숙인다 해서 그 구원이 취소가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평안히 가라고 합니다.
이미 나아만은 부정한 것을 씻어서 깨끗해져 있습니다. 그가 마음으로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가 육체적으로 그런 일을 할지라도 절대로 그가 다시 더러워져서 부정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알고 또 성경에서 영의 일에 대해서 바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평안하지를 못 합니다.
이 시대는 교회에 이제 막 나온 사람에게도 제사를 드리면 마치 큰 일이 나는 것 같이 해서 그가 도무지 평안할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제사를 드리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육적인 것이 우리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4:27절을 보겠습니다. (신 95쪽)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함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다 문둥병에 걸려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다 문둥병에 걸려 있었지만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깨끗함을 얻지 못 했습니다. 내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말씀을 비유로 하고 있습니다.
깨끗함은 얻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지만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수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지만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문둥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를 찾아오지도 않았고 어떻게 해야 문둥병을 고칠 수 있는 줄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자기들이 문둥병에 걸려서 방탕에 술에 취해 있고 또 온갖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문둥병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나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문둥병자인 나아만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입니다 그런 나에게 주님께서 아주 작은 계집 아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아시고 또 그 선지자를 통해서 죽음의 강 요단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담그게 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 몸을 담그면서 방탕의 술 취함을 죽이고 또 온갖 더러운 욕심을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과 자기의 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는 사람은 깨끗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줄 믿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깨끗해 져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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