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복음의 일
고린도후서 4:7-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영
인생은 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영에 대해서 무지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마치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는 것같이 육을 가지고 있는 인생이 영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의 일을 모르다 보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가지고 영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영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모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달을 아는 것보다 심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바다 속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연구를 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아주 초보적인 것에 불과 합니다.
누가 갔다 왔습니까?
영상으로 보는 것과 직접 아는 것은 다릅니다. 마치 이와 같이 영의 일은 암흑과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있지만 그 영의 일에 대해서 바로 알고 가는 사람은 너무 적습니다. 영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전하는 일은 모두가 영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의 육으로 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영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영과 육에 대해서 바른 이해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의 일이 무엇인지 육의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이미 목사라는 것은 직업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목사를 하면서 이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사람들이 그 출세를 한 목사를 따라 모이다 보니까 더욱 더 그런 형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점점 대형화 되면서 마치 블랙홀과 같이 신앙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쉽습니다.
마치 대기업의 자녀들이 기업을 하면 뒤에서 밀어주는 힘이 있어서 금세 안정을 취하고 흑자 기업으로 발전을 하는 것과 같이 교회도 그런 현상을 똑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하는 일도 이미 상술이 적용이 되어서 이 세상의 기업을 운영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부목사로 있다가 그 교회에서 한 100여명쯤 딱 떼어 주면 그 교회가 성장을 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학을 공부를 하고 대형교회에서 마치 종과 같이 있다가 그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잘 보여서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면 그 목사는 이제 스스로 자립을 해서 탄탄한 생활을 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개척교회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들이 힘이 드는 것이 영적으로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육적으로 힘이 들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육적인 일로 해서 교인 하나를 더 얻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의 일입니다
교인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또 이 시대는 너무 목회를 편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어 놓기만 하면 교인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쉽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그런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이 복음을 전하기 쉬운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기업화 되다 보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마케팅이 되었고 그 마케팅을 잘 하면 금세 성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해서라도 복음을 전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이 안 좋으면 역시 다른 복음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4: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고린도후서 3장에서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4장은 이제 그 영의 일을 하는데 있어 현실 적인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이 무엇인가를 3장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이제 4장에서 그 영의 일을 하는데 있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직분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의 직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금 주고 있는 그런 직분이 아니라 영의 일을 하는데 있어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하는 말씀입니다 이 직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복음을 가진 우리도 역시 그렇게 직분을 맡았습니다.
이 직분이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저는 이 직분이 너무 제게 있어 버겁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조용히 성경이나 보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직분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직분을 주셨을 때는 반드시 일을 하게 하시고 있고 그 일을 얼마나 힘이 드는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깁니다.
얼마나 그 일이 힘이 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고 있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이 직분으로 일하고 있으니까 낙심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쉽다면 절대로 낙심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을 하고 또 그 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어떤 복을 누릴 수 있다면 절대로 낙심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낙심합니다.
반드시 낙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으로 새 힘을 얻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이 이 복음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사람인지라 이 일을 하면서 때로는 낙심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데도 그렇게 잘 되고 있는데 진리를 전하고 있는 저는 너무도 힘에 겹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진리를 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육적으로 채워 주셔야 하는데 오히려 더 힘들어 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고 누구라도 낙심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로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성도들이 앞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니 지금 이 강의를 듣고 전하고 있는 성도님들은 분명히 느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데는 오히려 사람들이 가고 있고 바른 복음을 아무리 전하려고 해도 그들이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때로는 내가 이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도와주시고 능력을 주시겠지 생각을 합니다. 사실 사단은 이렇게 우리 성도들을 미혹을 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저들도 세상에서 크게 쓰임을 받고 있는데 바른 복음을 전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크게 쓰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 생각 자체가 사단의 미혹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닙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왜 낙심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이 복음을 전하는 성도님들도 역시 이 세상을 교회를 보면 반드시 낙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낙심을 할 정도로 힘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사도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인간적으로 기대를 하게 되면 될수록 낙심이 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 성도는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그 한 영혼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를 통해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 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 십만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음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십만 명에 대단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비록 내가 한 영혼을 위해서 그를 가르쳐서 그가 구원을 받는다면 누가 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일을 잘 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보는 눈이 있어서 우선은 십만 명을 보게 되고 자기에게 있는 한 명을 보면서 낙심을 하게 됩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부끄러운 일을 버려야 합니다.
복음의 일을 하려면 반드시 부끄러운 일을 버려야 합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닌 모든 행위가 사실은 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복음의 일을 하려면 반드시 부끄러운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일이 아닌 육적인 행위는 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을 맡은 성도는 이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부끄러운 일이 더욱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기와 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어떻게 일을 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 합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왜곡이 되고 있습니까? 설교를 들어보면 성경과 오히려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왜곡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는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한 말씀을 왜곡을 하면 모든 말씀이 다 왜곡이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곡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왜곡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곡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우리를 진리를 환희 들어냄으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나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진리를 전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낙심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는 떳떳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환경과 처지를 보면서 낙심을 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심에 떳떳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불행하기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그들이 더욱 자기 양심에 떳떳하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분명히 양심에서 갈등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겉으로 호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면 양심에서 벌써 요동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내 양심이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이 볼 때는 너무 빈약하기 때문에 혹시 사도바울이 잘못 전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베드로가 처음 설교를 할 때처럼 삼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으니까 사람들은 낙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가 진리를 전하는데 있어 떳떳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3절을 보겠습니다. (신289쪽)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진리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볼 때는 낙심을 할 정도입니다. 정말 열심을 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마 이 시대 역시 똑같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어떤 때는 벽에 대고 복음을 전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양심에 비추어서 떳떳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듣지를 않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나 안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4장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 이 일을 하면서 설령 세상의 기준에 못 미치는 것 같더라도 낙심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안 듣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잘못 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안 들으면 그들은 본래 멸망을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이 있는 사람들이 착각하기 쉽습니다.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전하면 사람들이 쉽게 진리를 들을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선택이 안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진리를 전해도 그들의 귀에 들려지지가 않는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낙심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 때로는 너무 고독합니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듣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나 안 하면 다행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직분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다만 왜곡만 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낙심이 될 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전하고 있는 성도고 주님께서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안 듣는 것은 그들이 멸망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눈이 가려져 듣지를 않고 있을 뿐입니다 정말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쉽게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4:4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공동번역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들이 안 듣습니까?
그 이유를 사도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전해도 듣지를 않고 망하는 자들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너무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하고 있는데도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안 듣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다른 신들에게 미혹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역시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있으면 아무리 복음을 전하려 해도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안 보입니다
그들은 눈이 가려져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광체가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잘못 전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미혹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체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낙심을 할지라도 진리를 전하는데 있어 생명까지 아까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4:5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 되신 것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가 되신 것과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을 전파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성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를 위해서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된 것을 전파한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가진 자는 정말로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누가 종이 되는 줄을 전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다른 복음을 전하면서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그들을 종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스스로 종이 되면서 그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다른 것 전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전한다고 해서 오직 예수를 전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문자적으로 오직 예수를 반대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들어오는 자들을 종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예수를 안 전합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예수를 알고 있지만 성경의 이면에 담겨져 있는 예수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한 행위를 전하고 있고 자기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 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다른 복음인데도 이 시대는 그런 말을 듣고도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겸손의 모양을 내려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6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오직 예수만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을 맡은 일군은 복음만 전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를 안 전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도 우리는 늘 예수를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는 한 달에 한두 번만 전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성도의 행위를 전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예수만을 전했습니다. 솔직히 사도바울이 쓴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부 예수에 대해서 기록을 했지 다른 것을 기록했습니까?
자기들이 잘못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만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다른 것을 전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평생을 예수에 대해서만 전해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왜 다른 것을 전하느라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까? 더구나 예화를 전하면서 그것으로 사람의 마음의 감성을 자극을 하고 있는 것은 그가 예수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비춰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 주셨습니다. 그런 성도는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 안에 있는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으면 율법이 나타날 것이고 예수가 자리하고 있으면 예수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십자가를 거절하는 율법의 행위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면서 마치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이 미혹을 시키고 있습니다.
마음에 비춰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오직 진리만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라 해서 또 십자가가 걸린 교회라 해서 다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미 종교화 되어 있는 교회에서는 예수는 그저 자기들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4:7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입니다
이 보배를 우리가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보배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 안에 있는 보배를 나타내고 있지를 않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주 잘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이 이 보배는 전혀 나타내고 있지를 않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보배가 있으면 그것을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 교회를 자랑하고 자기 목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보배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들의 안에서는 보배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고 목사가 그리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어떤 일들이 보배가 되고 있습니다.
보배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왜 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이 보배를 자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보배를 주신 단 한 가지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보배를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보배가 없기 때문에 보배를 자랑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셨습니까?
우리에게 보배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 이 보배를 우리 안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배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보배를 간직하고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이런 영의 비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육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영의 비밀은 모르고 있습니다.
보배를 왜 주셨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행하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보배가 있고 그것을 우리가 이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일을 하려면 반드시 이 보배가 있어야 합니다. 이 보배가 자기 안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재앙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보배가 없이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단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 복음을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까지 얼마나 큰 불행을 주고 있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직분을 맡았습니까?
반드시 이 보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이 보배가 없이 한다면 그는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 이렇게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이 보배가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실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직분이 얼마나 힘이 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복음의 직분이 별로 힘이 들어보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너무도 편하게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이 복음의 직분이 얼마나 힘이 드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복음의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이 얼마나 힘이 드는 가를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4:8-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는데 있어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너무 편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니 복음의 직분을 맡아 일을 하는 것이 너무도 편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대해서 더 당당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진리를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지만 제가 진리를 바로 전하면 모든 사람이 쉽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차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시편3:6절을 보겠습니다. (구 806쪽)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를 하면서 그것을 시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둘러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얼마나 주님을 둘러쌓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책을 잡으려 했습니다.
주님을 둘러진 치며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모두 반박을 하면서 심지어는 비웃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이스라엘에 의해서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 복음이 있는 성도 역시 우겨쌈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실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우겨쌈을 당했는가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대적을 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대적을 하고 있고 서로 거스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이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우겨쌈을 하면서 복음의 직분을 맡은 사도들을 짓누르려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쌓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율법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해도 우리 안에 보배가 있고 그 보배를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이 우겨쌈을 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우리가 이긴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려 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그들과 별로 부딪치지를 않으니까 그런 것을 잘 모르겠지만 여러분의 세력이 커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게 되면 지금 정통이든 이단이든 할 것 없이 모든 교회가 여러분들을 공격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짓눌러 버리려 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령의 소욕으로 행하려고 하는 성도들을 어떻게 하든지 짓누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복음의 직분을 맡은 일군으로 일을 하다 보니까 이런 것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카데미를 하고 있습니다.
적은 무리가 모여서 진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리가 커지고 있고 또 자기들에게 조금이라고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둘러 짓누르려 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이성으로 토론을 하게 되면 우리가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영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수가 짓누르기 시작을 하면 정말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겨쌈을 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육적으로는 우겨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보배가 있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이기 때문에 절대로 우겨쌈을 당하게 두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육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은 우겨쌈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 복음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일과 같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우겨쌈을 당하게 되는 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24:5절을 보겠습니다. (신 230쪽)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이단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볼 때는 분명히 우리는 이단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두가 율법에 빠져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단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율법주의자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진리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그들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면서 이단이라는 공격을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율법주의의 사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폐해졌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단이 됩니다.
복음의 직분 분명히 주님이 주십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아무도 이 직분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직분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겨쌈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고 또 교회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예수를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으면 이렇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적습니다.
율법주의자는 많습니다. 그럼 누가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까? 사실 그리스도편지가 아직까지 그렇게 우리나라 교회에 영향을 안 주니까 문제가 되지 않고 있지 만약에 사이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을 하면 아마도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게 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단이라고 공격을 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율법 이 한 가지를 가지고 이단으로 정죄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는 그런 우겨쌈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 해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굴복을 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우겨쌈을 당하게 되고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전하는 진리를 짓누르려고 할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아마도 복음을 전해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전하고 있는 진리가 바른데도 듣지를 않고 있고 오히려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전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반박을 하고 있고 오히려 진리가 잘못 되었다고 할 때는 너무도 답답하기만 합니다.
예레미야20:9절을 보겠습니다. (구 1082쪽)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답답합니다.
어느 정도로 답답한가 하면 안타까울 정도로 답답합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도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 합니까? 그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맞아 하면서 그러나 이제 성도가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있지 않아 그리고 당연히 교회를 세워야 하지 않겠어! 하면서 다른 이유를 달고 있습니다.
본질은 맞는다고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항상 뒤에 다른 사설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 하고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 합니다.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십일조를 해야 하고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이미 뼈 속까지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예수만 전하면 절대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 사람이 성화주의자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고 대답을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람이 이미 수십 년 동안 성화주의에 대해서 배웠기 때문에 그것을 바꾼다는 것이 글 한 두 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로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쉽게 바뀌겠습니까?
저는 복음에 대해서 최소한 100강의 이상을 들어야 복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합니까? 솔직히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니 얼굴을 마주 하고 있다면 제가 몇날 며칠을 통해서라도 그 사람에게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글로 그것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복음으로 들어온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 받아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얼마나 답답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친다고 말씀을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안 받아들입니다. 사실 제가 복음을 전해 보지만 오히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전할 때 사람들은 답답할 정도로 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낙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해 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도 답답하지만 낙심을 하지 않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직분을 맡은 자입니다 그 이상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정말 답답할 정도로 우리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 해도 그것을 안 받아들인다 해도 너무 답답해하지 마시고 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9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진리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때로는 한계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낙심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직분을 주셨고 때가 되면 거두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직분 낙심이 됩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낙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쉽지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그것을 전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분을 주셔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답답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때가 되면 복음의 직분을 왜 주셨고 또 우리가 결코 헛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낙심을 할 때가 많이 있지만 그래도 내 안에 소망이 있어서 결코 낙심을 하지 않게 감동을 해 주고 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복음의 직분을 행하는 일 사도들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방인에게서 핍박을 받는 것도 있지만 이스라엘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 육적으로는 성도들이 얼마나 버린 것 같이 보였습니까?
베드로전서2:4절을 보겠습니다. (신 378쪽)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의 삶이 어떻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주 답답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또 사람들이 볼 때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버린 바 된 것 같이 보인다는 말씀이며 꺼꾸러뜨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버린바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바로 우리 직분을 맡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적으로는 우겨쌈을 당하나 영적으로는 싸이지 않고 육적으로는 답답하나 영적으로는 낙심을 하지 않고 육적으로는 핍박을 받아 버린 자 같이 보이나 영적으로는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되고 육적으로는 꺼꾸러뜨림을 당해 망하지만 영적으로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육적인 것을 말씀을 하고 영적인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말씀을 한 것은 육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뒤에 말씀은 영적으로는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린바 되었습니다.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고 하는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조롱을 했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육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냥 두셨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절대로 버리지 않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핍박을 당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바른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핍박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금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핍박을 받았습니까?
또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초대 교회의 성도들 역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핍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오히려 자기들이 세상 사람들을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미 거대한 사단의 세력으로 변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핍박을 받아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핍박을 하고 있다는 것은 진리가 사라졌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3: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46쪽)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핍박을 받습니다.
핍박이라고 하니까 교회 다니는 것을 못 다니게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그런 핍박을 이야기 하는데 그런 핍박이 아닙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예수를 믿어서 술을 안 먹고 사람들과 못 어울리면서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자초를 하는 것이지 핍박이 아닙니다. 이 핍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으로 인하여 받는 핍박입니다
신앙생활 때문에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핍박을 받습니다. 그것을 누구로부터 핍박을 받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그래왔지만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을 핍박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큰 핍박을 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그리고 버린바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육적으로는 핍박을 받아 버림을 받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육적으로는 그들의 핍박이 때로는 너무 심해 맞아 넘어져도 영으로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이라는 것이 이렇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복음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 사람들과는 너무 거리가 먼 말씀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른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떻습니까?
이미 거대한 세력이 되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우겨쌈을 하고 있습니다. 또 전혀 답답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말을 무조건 순종을 하는 교인들이 있어서 답답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핍박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을 핍박을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맞아서 망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와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육적으로는 그런 일들을 당합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마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는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것과 같은 우리 역시 우리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통해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런 일을 당해도 직분을 맡은 자로 일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도들은 그렇게 육체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당하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해서 전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그냥 그렇게 두셨습니다.
그것을 낙심하지 말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고 있고 또 우리 영을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이 얼마나 힘이 드는 가를 여러분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로 복음을 주셨을 때는 이 세상에서 그런 육체적인 고난이 따른 다는 것을 미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의 삶입니다.
물론 이 시대는 세상이 변했습니다. 로마 시대나 또 종교 재판이 있는 그런 시대도 아닙니다. 사도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 일을 했는가를 사도바울이 아주 결연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살아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늘 죽음에 내 몰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초대 교회 뿐 아니라 중세 시대까지도 성도들은 종교재판이라는 미명 아래 죽음에 내 몰렸던 것을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정말 자기 육체의 죽음을 늘 생각하면서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순교를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말로는 순교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면 순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의지가 있다 해도 앞에서 사자 밥이 되는 순간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살아갔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실제 순교를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순교로 인하여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초대 교회에 수많은 순교자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척 의아해 했습니다. 도대체 저들이 믿는 예수가 무엇이기에 저렇게 믿을 수 있는가 하면서 그 순교의 현장을 보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었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의 생명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순교의 자리에서도 찬송을 하면서 담대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순교를 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그것을 고린도교회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체의 생명을 걸고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늘 우리 안에서 사망이 역사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순교를 각오를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지 않고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 같이 그 안에서 역사를 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하는 것 같이 복음을 전했을 때 생명이 너희에게서 약동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망이 우리 안에 있는 것 같이 우리가 복음을 너희에게 전했다 그러니까 너희에게서 생명이 약동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을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험한 일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를 하시면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육적으로도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때 정말 어떠한 심정으로 그 생명을 대하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더구나 육의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영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사망이 역사를 하고 있어야지만 내가 복음을 전하는 그에게 생명이 약동을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믿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믿었다 고로 말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믿으며 우리도 말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직분을 행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못 합니다.
우겨쌈을 당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이 모든 일을 육체적으로 당하면서도 또 육체의 사망이 안에서 역사를 하면서도 이 복음의 직분을 행할 수 있는 것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복음의 직분을 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종교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교를 보면 얼마나 편안합니까? 그러나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는 정말 이 시대도 어렵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천국에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직분을 행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을 할 때는 이런 고통들이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기고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무슨 믿음입니까?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이렇게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이 세상에서 우겨쌈에서 벗어나고 답답한 일을 당하지 않고 핍박을 받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목회를 성공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도 한 때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역시 사람인지라 그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사도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힘이 들어도 복음의 직분을 행하고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이 있기 때문이고 그 믿음은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다시 사는 것입니다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망하는 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함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살아가면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망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 눈으로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상업적으로 변해서 교인의 숫자를 늘리는데 급급하기만 합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성공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이 볼 때는 하나님의 역사와 같이 보이기 때문에 마케팅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 일을 한 것은 다 너희를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순교를 당하면서 까지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했고 지금 이 시대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일을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초대 교회의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의 믿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구원입니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영광을 모르고 자기들의 행위를 드러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는 오직 영혼 구원을 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6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낙심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조롱을 하고 비웃을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정을 해 주지 않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러분들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낙심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으로는 이미 낙심을 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 낙심을 합니까?
우리의 겉모습은 후패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낡아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의 직분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낡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겉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낙심을 할 정도로 후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우겨쌈을 당하고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후패해서 낙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것은 영의 일이기 때문에 겉을 볼 때 후패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과 같이 아마도 근사한 교회를 지었다면 사도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으로 볼 때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믿음이 있는 성도는 비록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을 할 때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으로 부활을 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낙심을 하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볼 때는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영을 보면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입니다.
복음의 직분을 행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를 하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시대 복음의 직분을 행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후패해 보일지라도 속은 날로 새롭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을 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고린도후서4: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복음의 직분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는 꿩 먹고 알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다 그렇다고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인생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하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다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의 직분 환난입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교인의 숫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지극히 적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 당시 모든 제사장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를 했습니다.
환난을 당합니다.
진리를 가진 자는 아주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아주 적다는 것을 성경이 많은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적기 때문에 다수에 의해서 환난을 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환난이 지극히 경한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하는 환난은 아주 경합니다. 인생 팔십년을 살면서 당하는 환난은 아주 경합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축복에 비하면 비교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우리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는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직분이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환난으로 다가올지라도 그것을 가볍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4: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복음이 직분입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대 복음의 직분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그것이 교회의 타락으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는 보이는 것을 보고 따라가는 자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무리 크면 뭐합니까?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볼 수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성경에서 조금은 알 수 있지만 그 천국을 인생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는 이 직분을 기꺼이 감당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거의 모든 것이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보이는 것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고도 사람들은 왜 깨닫지를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지만 그 성전을 얼마나 호화스럽게 지었지만 그것은 다 잠깐 보이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성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천국 안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그것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면서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가지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망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소망하고 있는 성도는 절대로 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너무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있고 자기들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는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합니다. 그것은 비단 복음을 전하는 자만이 아니라 복음을 믿고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분명히 우겨쌈을 당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 합니다 아주 심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또 율법을 가진 자들에 의해 짓누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피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너무 크기에 이 세상에서 잠깐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낙심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입니다
우리 영혼은 쌓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답답하지도 않습니다. 절대로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또한 망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그 생명이 보여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질그릇에 보배가 들어 있습니다. 이 보배가 있는 성도를 주님께서 영접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