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욥기
욥기 1:1절을 보겠습니다. (구 761쪽)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성경에서 한 사람 개인을 이렇게 기록한 말씀이 거의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창세기의 일부분을 기록했을 뿐인데 욥이라는 한 인물을 하나님께서는 세우셔서 그의 고난과 축복을 기록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욥기는 사실 좀 어렵습니다.
욥과 그 친구들이 변론을 하는데 어느 말이 맞는지 조차 분별이 안 될 정도로 난해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42장까지 있는 욥기를 이 한 시간에 다 설명을 한다는 것은 사실 힘든 일이지만 오늘은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가 하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욥기는 또 간단하기도 합니다.
가장 핵심이 되는 메타포만 알게 되면 욥기를 보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보면서 정작 중요한 메타포를 발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욥기에서 말씀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욥기 전체는 하나님께서 욥을 어떻게 사랑하는 가를 깨닫게 해 주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욥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다가 그 사랑을 알고 난 후에 고난에서 회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말로는 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있는 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면 결국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는 길임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없는데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게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미련한 자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이 바로 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욥보다 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류는 사랑 받고 있습니다.
사실 아담이 범죄를 한 후에 인류는 멸망을 당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통해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사랑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인생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이성의 생각에 따라 사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을 통해서 알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점점 종교화 되고 자기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 안에서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말라기1:2절을 보겠습니다. (구 1327쪽)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야곱을 사랑했지만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했느냐고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시대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가 돌아온 후입니다 또 그 후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이 완전히 훼파가 되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너무 비참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던 다윗의 영광은 사라지고 겨우 나라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도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있어서 언제라도 침략을 받으면 또 나라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예언을 한 다윗 왕이 다시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바람을 들어 주시지 않고 오히려 더욱 외세에 의해서 약해져만 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아마 이 시대도 개인의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릴 때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몰랐습니다.
아니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 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라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자기 육체의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느냐고 묻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다 영과 육의 괴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참 신이라면 왜 자기들을 돕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의 문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영혼을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고 있지만 그 고난을 힘들어 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했습니까? 지금 내 처지가 안 보입니까? 하면서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에서와 야곱이 낳기도 전에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선택을 했다고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육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잘 될 때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자기들이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면적 유대인을 통해서 이 세상에 구원을 비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영혼의 구원은 아직 자기들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고 현실의 벽에 부딪쳐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생명을 구원해 주셨는데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 시대도 역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 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육적이 것을 보면서 잘 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이고 고난을 당하고 있으면 징계를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았습니까?
더 이상 어떻게 사랑을 해 주어야 합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육을 생각하기 때문에 아니 육의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육적인 풍성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이상의 더 큰 사랑을 바라고 있다면 그는 탐심이 가득한 자이며 그런 자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사랑 받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해 주셨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어떠한 사랑을 받았는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 사랑에 감사를 하면서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욥기는 바로 이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순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실 누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아마도 보통의 사람이 아니고는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우리가 욥을 알기 전에 욥이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욥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에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욥보다 더 완전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욥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영적으로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깨우쳐 주실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왜 고난을 당했겠습니까?
욥기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욥은 고난당한 중에 참고 승리해서 축복 받은 사람, 인내가 많아서 복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욥이 참고 인내하여 복 받은 것도 그것도 한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어떤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서 욥과 같이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이생의 축복을 주기 위한 고난이 아닙니다.
또 욥과 같이 고난 중에서 참고 인내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욥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욥이 진짜 복 받은 것은 인내가 많아서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욥이 왜 고난을 당하였는가를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고난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의인인데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고난을 당하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만약 욥이 의인인데도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고난을 당하였다면 욥은 참으로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욥기1-2장을 보면
사단과 하나님의 대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보호해 주시니까 욥이 이렇게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러면 욥의 재물과 가정과 그리고 건강까지 치라고 하면서 욥을 고난에 빠지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제 사단과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왜 욥이 고난을 당하는 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있고 또 욥을 어떻게 사랑하는 가를 나타내시고자 마치 사단과 하나님이 대화를 하는 것같이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공연히 그 사이에 끼어 가지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 아닙니까? 그러면 참으로 불공평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사단이 한마디로 싸우고 있는 것 입니다 그 사이에서 욥이 고난을 당하였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억울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욥이 의인인데도 그런 시험을 당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욥은 죄인입니다
욥이 죄인이기 때문에 시험을 당한 것이지 의인이라면 그런 시험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욥이 의인인데도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시험을 당하였다면 이 일은 욥이 하나님께 항의를 해야 될 일입니다 왜 공연히 나를 이렇게 합니까? 왜 나를 그 사이에 끼어들게 해서 나를 못 견디게 합니까? 그런 호소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 것 입니다
욥은 의인으로서 고난 중에 인내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깨닫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고 바로 서서 승리 한 것입니다 욥은 육적으로는 거의 완전한 사람이었지만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사람이지만 그는 영적으로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욥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겠습니다.
욥기6:29-30절을 보겠습니다. (구 767쪽)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욥이 대답하기를 불의한 것이 없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롭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지 죄인이 아니면 왜 당하느냐고 하니까 욥은 아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고 의롭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죄를 지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신다고 말을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만약에 죄를 짓는 대로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그대로 징계하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사상입니다
내가 의로우면 잘 살게 되고 내가 죄를 지면 그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고 계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따라 처치를 하시면 이 세상은 벌써 종말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볼 때 정말 그런 기본 적인 사상을 바로 알고 있어야 진리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이 세상의 그런 사상들이 그대로 침투를 해서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103:10절을 보겠습니다. (구 877쪽)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욥이 범죄를 해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지금 욥의 친구들도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고 또 욥도 나는 의롭다고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 아니하신다고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 아니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죄를 따라 처치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면 이 세상에 법에 따라 처치를 하고 있습니다. 도적질을 하면 반드시 법이 그를 구속을 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따라 처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법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초입니다
이런 기초적인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면 안 됩니다. 설령 성경에 죄를 따라 처치를 받는 말씀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예표를 보여 주시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죄를 따라 처치를 안 하십니다. 그러나 욥과 그의 친구들의 생각은 다 죄를 따라 처치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고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부모는 죄를 따라 처치를 안 합니다. 때로는 혼을 낼 수는 있어도 그 자녀를 죄를 따라 절대로 처치를 안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면 마치 벌을 받을 것 같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율법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죄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영적인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닌데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 영혼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그런 사상이 진리를 얼마나 방해를 하고 있는 가를 모르고 교회 안에서 아무 거리낌이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네가 죄를 지었다고 하니까 욥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고난을 받아야 할 만큼의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 욥의 말은 너무도 타당성 있습니다. 욥이 자신을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욥기27:1-6절을 보겠습니다. (구786쪽)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욥은 자기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는 자기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는 다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욥은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 할 정도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책망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기를 시작할 때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4-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죽기 전에는 내가 잘못한 것을 찾지 못하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욥은 정말로 그렇게 산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상이 얼마나 세상 적인 것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욥기를 통해서 우리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욥기 전체는 세상의 이성으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한 변론 같지만 사실은 친구들과의 변론이 진리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를 욥기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을 모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욥과 같이 이렇게 순전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사랑했는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과 같이 순전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사실 은혜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죄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어 있고 또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욥은 자기의 순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주시고 있는 가를 모르는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욥은 일평생 자신이 책망 받을 일이 없을 정도로 산 사람입니다
욥과 사도 바울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율법적으로 책망을 받을 것이 없을 정도로 잘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내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보겠습니다.
욥기29:14절을 보겠습니다. (구 788쪽)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욥의 주장입니다
실제 욥은 자기의 의로 옷을 삼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의롭게 살았으면 나는 공의로 도포와 면류관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욥과 같이 산 사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 이렇게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의 그런 삶이 오히려 욥의 눈을 가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너는 죄가 있으니까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니까 욥은 내 의가 이렇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자기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욥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 눈으로 볼 때 자기의 의가 그렇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욥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욥기29:15-16절을 보겠습니다. (구 788쪽)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 하여 주었으며”
욥은 소경의 눈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소경의 눈이 되어 준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밥 먹을 때 밥 먹여줘야 되고 소경이 어디를 가더라도 동행해 주어야 합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을 곁에서 다 해주어야 합니다. 욥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욥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욥은 자신이 못하면 종을 시켜서라도 소경의 눈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자신이 해 준 것을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절름발이의 발도 되어 주었고 가난한 사람의 아비도 되어 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 보다도 욥은 의롭게 살았습니다.
또한 생소한자의 일을 사실 하여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대로 판단하여 주었다는 말입니다 욥이 살던 시대는 족장 시대였기 때문에 욥은 그가 사는 곳에서 재판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툼이 일어나면 욥에게 와서 판결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돈만 많으면 재판에서 이긴다고 합니다.
더구나 판사가 자기 친척이나 형제나 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법조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전관예우를 아실 것 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는 재판은 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팔이 안으로 굽는 것과 같이 어떤 외적인 것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생소한 자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처음 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잘못 했으면 잘못 했다고 판결 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니고 욥이 살던 시대는 족장 시대입니다 아마 웬만한 것은 자기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생각해서라도 편을 들 수밖에 없는 데도 욥은 그런 상황에서도 공정 하게 판결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법부가 그런 판단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은 공정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은 처음 본 사람 일지라도 공정하게 판결을 내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 욥의 친구들이 아무리 공격해도 자신이 생각할 때 어떤 죄도 드러나거나 생각나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잘 아는 친구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사실 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했다가는 그 친구와는 평생 의리가 상해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될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가 그런 일이 있을 때 과연 욥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욥기31:1-6절을 보겠습니다. (구 790쪽)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 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란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언제 내가 행위에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 하노라”
욥은 자기 눈과 언약을 맺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언약을 맺어서 처녀에게 눈을 안돌려 봤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말로 욥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입니다 예쁜 처녀를 보고도 눈을 안 돌렸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실 욥의 주장을 보면 숨이 탁 막힐 정도가 됩니다. 어떻게 예쁜 여자를 보고도 눈을 맞추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왜 그렇게 했습니까?
혹시라도 예쁜 처녀를 보고 자기가 딴 마음을 먹으면 그것이 죄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당할까봐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생각은 지극히 이 세상의 사상이라는 것을 욥의 변론 한마디 한마디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길을 다 감찰하시고 또 걸음을 다 세시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삶을 하나하나 다 보시고 그것을 다 감찰하고 있습니까? 내가 오늘은 무슨 죄를 지었고 또 내일을 무슨 죄를 지었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세고 있습니까?
욥의 변론이 참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내 길을 감찰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내 걸음을 다 세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세고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욥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악을 일일이 세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굳이 세지 않아도 우리는 죄악의 종자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람 죄를 세고 또 저 사람 죄를 셉니까?
세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죄인입니다 지금 욥은 자기가 의롭게 산 그것을 보면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도 욥과 같이 자기들이 의롭게 산 그것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일일이 세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데 그것을 세고 말고 할 것이 뭐 있습니까?
썩었습니다.
하나도 먹을 것이 없이 완전히 썩어서 냄새만 나고 있는 사과를 누가 세겠습니까? 율법의 의는 사람의 눈을 이렇게 가리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사형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사형입니다
그런데 세고 말 것이 어디 있습니까? 혹시라도 무기징역형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세야겠지요. 그러나 모두가 사형 판결을 받아야 하는 인생인데 세고 말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욥과 같이 이렇게 세고 있는 사람은 아직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하나를 범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살인도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이렇게 자기 걸음을 세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욥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기 걸음을 세고 있다고 할 정도로 흠이 없을 정도로 산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자신이 잘못 했으면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판단 받기를 원한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리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욥은 진짜로 그렇게 자기 눈과 언약을 맺어서 어떤 여자에게도 눈도 돌리지 않았고 한 가지라도 죄를 짓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죽음같이 무서운 것 이었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기 자녀들이 혹시 범죄 하지 않을까 하면서 생일 때가 되면 자녀들의 죄를 낱낱이 용서 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욥은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보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울에 달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죄를 저울에 달라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욥의 생각이 얼마나 이 세상 적이고 또 율법을 보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면 이렇게 죄가 있나 없나를 저울에 달아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진짜 저울에 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편62:9절을 보겠습니다. (구 846쪽)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저울에 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달아 보아야 역시 사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죽어야 하는 사형수인데 달아 보고 말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율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아니 진리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저울에 달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저울에 달면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너무도 어리석은 사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은 세상에서 제일 의롭게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울에 달아 보니까 성경은 입김보다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입김보다 경한 것을 달아보고 말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그리고 원수가 자기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모르면 이렇게 사람들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면 바로 자기가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은 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과 자기를 저울에 달아보면 자기 쪽으로 확 기울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고 그것이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냅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킵니다. 또 새벽 기도에 나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당연히 저울에 달아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더구나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인데 오죽하겠습니까?
욥기31:33-35절을 보겠습니다. (구 792쪽)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며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찌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참 대단합니다.
자기 대적이 기록한 소송장이 있으면 내가 서명을 할 테니까 하나님께서 판결을 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사람의 이성적 생각으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할 정도로 완벽하게 산 사람입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 대적에게서 소송을 당할 것이 없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대적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대적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내게 대해서 기록한 소송장이 있으면 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얼마나 철저하게 살았는가를 잘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처녀에게 눈도 돌리지 않았을 정도로 살았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습니까? 욥은 지금 율법이 나를 정죄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큰 무리가 와서 약한 무리를 괴롭게 하는데 내가 무서워서 안도와 주었냐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죄를 조금 안 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는 걸 도와주기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욥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것도 죄가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욥에게 와서 도움을 청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거절하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사실 요즘 같이 무서운 세상에서 괜한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욥은 아무리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게 해도 외면하지 않고 약한 자를 도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아무리 자신이 생각해도 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리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대답 좀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금 자신을 떳떳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욥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왜 고난을 당했겠습니까? 욥은 죄인이기 때문에 고난당했습니다. 그 죄가 정말로 큰 죄인데 엄청나게 큰 죄 인데 우리는 죄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죄가 무엇인지 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욥과 같이 육적인 것에서는 너무도 잘 알고 그것을 스스로 판단을 하고 있지만 영적인 죄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욥이 정당하다고 한 변론이 사실은 하나도 정당한 것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욥의 말이 정당합니까?
물론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욥의 변론은 절대로 정당하지 않습니다. 욥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고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면서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큰 죄를 짓고 있는 죄인입니다 자기가 주장하는 의로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너무도 큰 죄를 짓고 있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욥기3:25절을 보겠습니다. (구 764쪽)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은 두려워하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은 지금 자신이 두려워하는 그것이 임했다고 말합니다. 평소에 두려워했다는 것 입니다 자기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드디어 자신에게 닥쳐왔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 몸에 무슨 병이 나지 않을까 늘 걱정 했습니다
그것을 항상 무서워했고 재난 당할 것을 늘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생각하고 있던 모든 일들이 자신에게 닥쳐온 것입니다 욥이 생각하던 재난이 왔고 욥의 몸에는 자기가 생각하던 병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그대로 욥에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그대로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도 자기가 믿고 있던 그대로 되었다고 지금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소에 늘 생각하던 것이 자기에게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욥의 죄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범한 교인들이라면 혹시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욥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면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지금 욥의 육을 통해서 우리의 영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는 절대로 두려워하지를 않습니다. 또 사단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욥의 상태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욥을 통해서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욥의 죄는 두려워하는 것이 죄 입니다
또 무서워하는 것 역시 죄입니다. 성도가 두려워하는 것은 죄 입니다 성도가 무서워하는 것 역시 죄 입니다 욥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가 어떤 상태의 신앙에 있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역시 교회에는 나와 있지만 욥과 같이 이렇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고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가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교인들은 자기가 항상 두려워하던 것이 미치게 될 때 아마 욥과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내가 이렇게 하다가 지옥가지 내가 이러다 지옥가지 그러면 진짜 지옥에 가서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 내게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욥이 그렇게 생각하던 것이 왔다고 이야기 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어떤 죄인가를 보겠습니다.
요한일서4: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92쪽)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면 욥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욥이 진짜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아 버리는데 욥은 평생을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데는 아주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데는 순전하고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인정 합니다 네가 순전한 자를 보았느냐 말씀합니다. 그것은 인정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인정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한 사랑은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죄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두려워 하다가 형벌을 당한 것입니다 욥은 육적으로 형벌을 당했지만 지금 이 시대 두려워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형벌을 당한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욥기31장은 욥이 선하게 살았던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욥기31:16-22절을 보겠습니다. (구 791쪽)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 하였었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의 손길을 막은 적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가 와서 부탁을 하면 다 들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또 과부가 요구 했을 때 과부를 실망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나만 홀로 식물을 먹지 않고 고아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욥 옆에는 배고픈 사람이 없었습니다.
18절부터 보겠습니다.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 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 하였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욥의 옆에는 추운 사람도 없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사람들이 요구하면 다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욥 주변에는 가난한자나 배고픈 자나 추운 자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선을 행하면서 살았습니다. 욥이 그럼 왜 이렇게 했는가를 보겠습니다.
욥기31:23절을 보겠습니다. (구 791쪽)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이 죄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고아를 도와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양털로 덮어 주었습니다. 욥은 만약 이렇게 안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당한다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까지 욥은 왜 그렇게 순전하고 정직하게 살았느냐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재앙을 당할 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배고픈 사람을 먹이지 않으면 재앙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선한 일들을 하나님이 두려워서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죄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무엇을 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그가 불쌍해서 그를 사랑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욥에게는 이런 엄청난 문제가 있었습니다. 욥 스스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고아를 안도와 줄 수도 있고 과부를 안도와 줄 수 있는데 재앙 때문에 무서워서 안도와 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조금만 잘못해도 하나님께 재앙을 당할까 징계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해서 도와주기도 하지만 가나한 사람을 보고 안도와 주면 혹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없애고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만 그렇게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도움 받을 그 사람도 독생자를 버리시면서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도 사랑하고 불쌍한 사람도 똑 같이 사랑 하시는데 내가 당연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사람도 사랑하고 계시는데 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아 가지고 나만 만족을 누린다면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욥과 같은 의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욥이 아무리 책망 받을 것이 없고 공평한 저울에 달려 드러날 것이 없고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어 찾아 낼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율법을 잘 지켰을 지라도 두려워서 그들을 도와주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복음적인 글을 보았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려운 자들에게 구제 하는 것 까지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상한 말 아닙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구제하는 것 까지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기뻐할까요? 기뻐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기뻐하시겠지요. 그러나 이 말속에는 그렇게 하는 행위에서도 내가 그곳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내 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욥의 또 한 가지 죄가 무엇입니까?
로마서8: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49쪽)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욥은 무서워했습니다.
욥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욥은 종의 영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워했다는 말씀입니다 종은 자기가 잘못을 하면 늘 쫓겨 날 것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욥은 늘 이렇게 자기가 쫓겨 날 것을 무서워해서 순전하고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종과 아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는 종과 아들이 있습니다. 종은 쫓겨 날 것을 늘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자기가 조금 실수해도 절대로 쫓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아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은 아들입니까? 이삭과 같은 아들이라고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은 천국을 이미 약속으로 받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집에서 쫓겨 날 것을 무서워하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아버지를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아들이 자기가 잘못한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날 것을 무서워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4:28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우리는 아들입니다
이삭과 같이 약속을 받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욥은 종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종이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아들은 조금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설령 매를 맞아도 자기를 쫓아낸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은 어떻습니까?
늘 무서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더 율법을 잘 지켜서 안 쫓겨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은 조금만 실수를 해도 자기가 쫓겨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무서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이렇게 종의 영을 받아 율법의 행위를 아주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종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종은 못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쫓겨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것을 너무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죄가 하나라도 보이면 그것으로 쫓겨난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명기1:29절을 보겠습니다. (구 260쪽)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가나안은 천국 모형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 있는 아낙 자손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들이 그 땅을 탐지하고 와서 무서워서 땅을 악평을 하다가 결국에는 그들이 무서워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이 왜 무서워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어떻게 인도하여 내셨는가를 몰랐기 때문에 무서워했습니다.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안는 것 같이 이스라엘을 안아서 광야를 지나게 하셨지만 그들은 가나안에 있는 족속들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무서워했던 모든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은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무서워합니까?
아니 겁을 주고 있습니까? 모두가 종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고 또 겁을 주고 있습니다. 아들은 자기가 조금 잘못을 했어도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매는 맞을지라도 자기를 집에서 쫓아내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모르면 무서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욥은 무서워하다가 육적으로 고난을 당했지만 이 시대 무서워하고 있는 사람은 영혼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욥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악에서 떠난 자 같이 보였지만 더 큰 죄를 짓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욥기31:3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구 792쪽)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 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하나님이 대답 하시기를 원한다고 욥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변백을 들을지니라고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욥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 친구들도 더 이상 대답을 못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욥기38:1-6절을 보겠습니다. (구 799쪽)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으며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아무도 욥을 더 이상 정죄를 할 수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욥이 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고 욥도 자기가 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욥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창조주다 내가 창조주인데 내가 창조할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욥의 죄를 말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창조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욥에게 하나님은 창조주라고 대답 하시겠습니까?
욥38:34-40절을 보겠습니다. (구 800쪽)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 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 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 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가슴속에 지혜 하나님이 준 것이다
마음속의 총명 하나님이 준 것이다 욥에게 하나님은 욥의 가슴과 마음을 만들어 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암사자가 배고플 때 음식을 주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욥이 고아도 먹였고 과부도 먹였고 요구하는 사람의 필요를 다 들어 주었다고 하니까 하나님은 짐승들의 요구도 다 들어 주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지혜를 논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서로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과 그 친구들의 변론은 하나님의 지혜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서로가 알고 있는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알고 바르게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지식과 총명이라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8절을 보겠습니다. (신 279쪽)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설령 욥의 변론이 맞습니다.
또 그 친구들이 하는 말이 맞다 해도 그것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비밀과 지혜를 다 알고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입니다
욥은 자기가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 욥의 생애를 보면 이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도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도 물론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평생을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안에서 모든 비밀을 깨달았다 해도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욥38:41절을 보겠습니다. (구 800쪽)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한 자가 누구냐”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할 때에 주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욥에게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진짜 사자의 먹이를 주고 까마귀의 먹이를 주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먹이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살리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이제까지 변론을 하면서 이야기를 한 것 같이 그런 행위를 잘 해서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서도 절대 기울어지지 않는 그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렇게 행하면서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누가 먹이고 까마귀가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누가 그것을 먹였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욥에게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먹을 것이 아니라 영혼의 먹을 것을 누가 주고 있는 가를 하나님께서 지금 사자와 까마귀를 통해서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위해 내가 먹이고 있는데 하물며 너를 먹이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스스로 율법의 의를 가지고 그것으로 생명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누가 주십니까?
만나를 누가 내려 주셨습니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자기들이 농사를 지어 만나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도 우리 영혼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사람들이 먹으려 하지를 않고 있고 이스라엘과 같이 탐욕을 부리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생명을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아무 것도 안 해도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믿기만 하면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양식을 누가 준비를 하고 있느냐면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정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참 떡을 먹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시고 농사도 짓고 또 알곡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보고 있는데도 이 시대 역시 욥과 같은 사상에 빠져 생명을 위해서 자기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입니다
종이 아닙니다. 종은 일을 해야 먹을 것을 주지만 아들은 일을 하든 안 하든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은 종의 영을 받아서 자기가 일을 해서 생명의 떡을 먹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반드시 일을 해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라고 해서 전혀 일을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들도 일은 하지만 종과 같이 그렇게 무서운 마음으로 일을 해서 먹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편78:24절을 보겠습니다. (구 859쪽)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사자를 먹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까마귀가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먹이시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일까 봅니까? 하늘 양식 예수 그리스도를 먹게 해 주시고 있지만 아직도 이방인과 같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지 않고는 다른 어떤 것을 먹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참 떡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 있지만 욥과 같이 종의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스스로 먹을 것을 찾고 있습니다. 욥은 하늘에 가기 위해서 정말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욥이 한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참 떡을 하늘에서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이 먹을 수 있는 떡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먹여서 구원하고도 남을 수 있는 그런 양식을 풍성하게 주셨지만 종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욥과 같이 자기의 행위로 천국에 갈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조금이라고 실수를 하면 천국에 못 갈까봐 두려워하고 있고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욥기40:1-9절을 보겠습니다. (구 801쪽)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찌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 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여호와께서 폭풍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 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지금 하나님께서 욥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욥이 죄가 있기 때문에 심판하고 있는 겁니다.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이 잘못되었냐고 욥에게 묻고 있습니다. 욥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 시대도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모르면 욥과 같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의 고난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욥은 육체적으로 고난을 당했지만 이것은 우리 영혼의 문제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욥기42:1-6절을 보겠습니다. (구 803쪽)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이 회개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회개합니까? 욥은 이 세상 최고의 의인이지만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종의 영을 받아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율법적으로는 그럴지라도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 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가 이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까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주시고 있는 가를 깨달을 때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11:22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느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도 찍히는바 되리라”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무서운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이 선민이고 그 특별함을 받았기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징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율법에 메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성도들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그 사랑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후서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43쪽)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 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죄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 입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는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가져갔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는 죄는 아무리 많아도 천국갈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 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많은 곳에서 영생은 무엇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이 예전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마음으로 바뀌어 졌을 때 병도 없어지고 축복이 배가 되었습니다 참아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은 날부터 축복 받았습니다 욥이 이렇게 축복을 받은 것은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어 양자의 영을 받게 되면 하늘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욥의 고난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가 육적으로 고난을 받은 것은 우리의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래도 욥은 육으로 고난을 받다가 다시 회복을 했지만 그 회복은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데도 아직도 욥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욥은 육적으로 고난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런 고난이 없이 사망을 당한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이 세상에서 자유 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영접을 받아서 욥이 누린 모든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하늘에서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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