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복음과 율법

언약궤와 웃사의 죽음

윤주만목사 2019. 2. 17. 05:13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역대상 15:25-29절을 보면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으로 제사를 드렸더라 다윗과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 두목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어다보다가 다윗 왕의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더라

 

성경은 예표입니다.

특히 구약성경은 거의 다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왜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다 문자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바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목사들이라고 해 보아야 솔직히 이단들보다 더 성경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 목사는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보다 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의 입으로는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금세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다시 성경의 삶이라고 하면서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설교 안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원칙도 없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세대입니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은 뚜렷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자기들만의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통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원칙이 없습니다.

말로 교인들의 혼을 쏙 빼놓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분명한 율법을 율법이라고 했다가 또 그것이 믿음이 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 마음대로 이야길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되기도 하고 믿음이 되기도 하는 것은 목사의 말에 따라 바뀌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율법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도 목사가 믿음이라고 하면 믿음이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까지는 안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실수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 불행하게도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지 몰라도 이 시대는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원칙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초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 기초가 없습니다. 그것이 일반 교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목사들의 문제라고 더 심각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기초가 서 있는 상태에서 말씀을 전했는데도 그 가운데서 다른 복음들이 들어왔고 이단이 들어왔습니다. 기초가 서 있는 상태에서도 그랬는데 기초도 안 서 있는 상태에서는 이것은 무방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모르면 죽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알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은 아니 목사들은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 비하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이 조족지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히브리어를 사용했던 민족이었습니다.

 

히브리어를 배웁니까?

과연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보다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것을 아는 것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목사들은 이스라엘의 발꿈치도 쫓아가지 못하는 히브리어를 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지혜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초도 모르면서 그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가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자적으로 신약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단어를 읽으면서 그것을 아는 것으로 자기가 은혜를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알고 마치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초등학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문자적으로 아는 것은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에 있는 그 말씀을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입술로 거의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 아무 의미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백날 떠들어 보아야 그것은 마치 불교인들이 부처님의 은덕이라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너무 막연하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서 은혜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에 불과합니다. 율법도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서 자기가 그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은혜라고 하면 마치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기16: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것이 법궤로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습니까? 성경을 읽지도 않고 그저 목사가 하는 말만 듣고도 자기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맹목적인가를 모르고 있고 그저 교회라는 목사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법궤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기록이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성경을 보았다고 하는 목사들도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얼마나 성경을 쉽게 보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목사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성경에서 법궤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바르게 대답을 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 한번입니다.

우리는 법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법궤라는 단어가 지금 레위기 16장에 단 한번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법궤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증거궤 또는 언약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다 법궤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십계명이 들어 있으니까 사람들은 법궤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절대로 그렇게 기록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궤는 법궤가 아닙니다. 법만 들어 있는 궤만 말을 할 때는 지금 레위기에서 말씀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법궤는 반드시 속죄소로 덮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법궤라고 할 때는 속죄소를 따로 떼어 놓고 말을 할 때는 그것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법궤는 따로 뚜껑이 없습니다. 법궤는 그 자체로 위에 뚜껑이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뚜껑이 없을 때는 그것이 법궤가 맞는데 이 법궤가 만들어 지고 난 이후에는 반드시 속죄소로 덮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덮었습니다.

그것을 언약궤라고 하고 또 증거궤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법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만들 때 그때는 법궤가 맞습니다. 그러나 만들어 지고 난 이후로는 그것은 법궤가 아닙니다. 속죄소가 덮어짐으로 해서 그것은 언약궤가 되고 또 증거궤가 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이 모르다 보니까 그것을 자연스럽게 법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무식한 말입니다.

아직도 법궤라는 말을 하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법궤와 속죄소를 따로 떼어 놓았을 때는 그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법궤를 만들고 속죄소를 덮어 놓고서는 한 번도 법궤라고 부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 시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것을 법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법만 따로 넣어서 만들어서 그것에 뚜껑을 했다면 그것은 법궤가 맞습니다. 그것을 지금 레위기에서 정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이 들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것을 법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법궤라고 부르는 사람은 반드시 그 법에 의해서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성막론이 중요합니까?

이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초를 모르다 보니까 법이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법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법궤를 만들라고 하시지 않았고 반드시 증거궤 또는 언약궤를 만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법을 보면 죽습니다.

만약에 법궤를 만들었다면 이스라엘은 벌써 다 사망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십계명을 보는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궤를 법궤로 알고 있고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그 뚜껑을 열고 십계명을 꺼내서 그것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학자들이 그랬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랬고 또 칼뱅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모든 신학자들이 이 법궤에서 십계명을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은좌로 그 법궤를 덮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두지를 않고 꺼내서 자기들이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보고 그것을 자키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거스틴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천주교나 기독교 할 것 없이 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어거스틴도 언약궤를 열어서 십계명을 끄집어 낸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시은좌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악한 행위라는 것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십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법궤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에 그것이 법궤라고 인식이 되어 있는가 하면 십계명을 이미 그 궤에서 끄집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도 자기들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역대상에서도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언약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대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언약궤 증거궤가 되어야지 법궤가 되는 순간에는 모두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언약궤와 증거궤에 대해서는 이미 그리스도편지 아카데미에 성막론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속죄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것으로 이 법궤를 덮어 버렸습니다. 왜 하나님의 보좌로 덮어 버렸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 법궤를 꺼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보좌를 치우고 그 안에 있는 십계명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기록하면서도 십계명을 따로 첫 페이지에 기록을 해 놓고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이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계명을 자기 보좌로 덮어 버리셨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편찬하면서도 이 십계명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면서 아주 큰 글자로 따로 성경에서 빼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입니다.

그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폐하시는 것을 예표로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증거하는 궤라고 해서 증거궤라고도 하고 있고 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가르쳐 주기 위한 언약궤이기도 합니다.

 

법궤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법궤가 되는 순간 여러분은 다 죽습니다. 성경에서 그 법궤를 들여다보았다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궤이며 또 증거를 해 주시고 있는 궤입니다. 율법은 그 궤 속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이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 하다가 웃사가 죽었습니다.

그가 왜 죽었습니까? 소가 끄는 수레로 옮기려 하다가 그 소가 뛰는 것을 보고 궤가 엎어질 것을 염려해서 그 궤를 자기 손으로 잡다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두려워해서 다윗 성으로 옮기려 하다가 다시 오밷에돔의 집으로 돌이켰습니다.

 

웃사가 왜 죽었습니까?

물론 율법에는 반드시 이 언약궤를 옮길 때에는 제사장들이 어께에 메고 옮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설이 있기도 합니다. 웃사는 제사장 집안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성경에서 나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웃사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언약궤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동할 때는 반드시 채를 꿰서 그것을 어께에 메고 옮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언약이라는 것은 사람의 손으로 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이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언약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람이 만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언약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는 분명히 소가 날 뛰므로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옮길 때도 반드시 제사장이 먼저 지성소에 들어가서 해달의 가죽으로 그것을 덮어 사람이 보지 못하게 했고 또 그 네 모퉁이에 구멍을 만들어서 채로 꿸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라고 해도 그것을 만지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사무엘 사사가 죽고 난 후에 율법에 대해서 바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제사장이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을 가지고 했습니다. 그는 레위 지파의 왕이지 제사장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블레셋이 그 언약궤를 보낼 때 하던 그 방법 그대로 수레에 실고 옮기려 하다가 소들이 뛰니까 그것을 웃사가 자기 손을 들어 잡으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율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언약궤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의 손으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 옮기는 방법도 이방이 자기들에게 보낸 그대로 옮기려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보이셨습니다.

 

그 일로 웃사가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윗에 두려워해서 오벧에돔의 집으로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오밷에돔의 집을 축복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벧에돔은 레위 자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가 고라의 자손 래위 사람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웃사는 레위 자손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 집에서 언약궤를 옮길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모르고 블레셋에 가기들에게 보낸 그대로 다윗 성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벧에돔은 고라의 자손으로 알려지고 있어서 그가 궤를 어떻게 옮겨야 하는 가를 알고 있었고 아마도 다윗이 그에게 물었을 때 그가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편 32:1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삼 개월을 오벧에돔의 집에 있었습니다.

웃가가 죽고 나서 다윗이 삼 개월 만에 다시 언약궤를 옮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불과 삼 개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웃사가 죽을 때는 그들이 즐거워하지 않고 그저 당연하게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웃사가 죽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던 다윗이 즐거이 언약궤를 옮기려하고 있습니다.

 

왜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사실 웃사가 죽는 것을 보고 다윗은 무척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오벧에돔의 집으로 언약궤를 들였습니다. 하지만 불과 삼 개월 만에 다윗은 다시 오벧에돔의 집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와서 언약궤를 옮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다윗은 이 언약궤를 그저 자기 성으로 옮기려고만 했지 실제 이 언약궤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13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이 언약궤를 옮기는 일을 누구와 상의 했습니까? 천부장 백부장 모둔 장수들과 의논을 하고 또 백성들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을 불러 모아서 언약궤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언약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의논을 했고 그것을 백성에게 이야기를 해서 제사장을 불러서 그것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잘못입니다.

만약에 이 언약궤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었다면 웃사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언약궤를 모르다 보니까 사람의 이성으로 그냥 그것을 옮기고자 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얼마나 강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일로 웃사가 죽었습니다. 실제 다윗은 자기가 성전을 짓고 싶어 했을 정도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달라졌습니다.

장로와 천부장이 함께 오밷에돔의 집으로 갔고 또 그들이 즐거워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시편에서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정직한 것이 무엇입니까? 언약궤를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장로들이 가장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장로들에게서 언약궤에 대해서 알고 그것을 알다 보니까 마음이 정직해서 즐거이 이 언약궤를 옮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이 있는 이 궤를 옮길 때는 즐거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웃사가 죽은 것은 물론 개인의 실수 일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특히 다윗이 이 언약궤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삼 개월입니다.

그 동안 장로들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알다 보니까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법궤라고 한다면 그들은 절대로 즐거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우리가 얼마나 자세히 보아야 하고 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뜻을 얼마나 바로 알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알고 있는 성도는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그저 눈으로 보이는 궤를 옮기려고 하다가는 반드시 웃사와 같이 죽고 만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웃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전체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알아야 합니다.

언약궤를 옮기고 안 옮기는 것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웃사가 육적으로 죽은 것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약궤를 모르고 웃사와 같이 손을 들어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언약궤를 어깨에 메지 않았던 자체가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언약궤를 바로 알고 그것을 어께에 메는 사람은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으로 제사를 드렸더라

 

처음에는 수레로 옮겼습니다.

그것은 이방의 블레셋 사람들이 생각하는 언약궤입니다. 그러나 이제 웃사가 죽는 것을 보고 다윗이 언약궤에 대해서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를 레위 사람들이 어께에 맸습니다. 그렇게 언약궤를 맨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육체로 도와 주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영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무엇인가 하면 법이 들어 있는 궤를 하나님께서 시은좌로 덮은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언약의 피를 흘려주신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들을 도와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언약궤를 몰랐기 때문에 소가 뛰어 오르니까 언약궤를 웃사가 손을 펴서 잡으려 했습니다. 언약궤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그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지식으로는 이 언약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을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누가 도와주시고 있는가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믿을 수 있게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주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게 성령께서 오셔서 도와주시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다 보니까 왜 웃사가 죽고 또 다윗이 왜 삼 개월 만에 다윗 성으로 다시 언약궤를 메고 가는 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웃사가 죽은 것을 마치 웃사 개인의 실수로 생각하고 있고 율법을 어긴 것으로 치부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심령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반드시 언약궤가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믿고 있다면 너무도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언약궤가 들어오지를 않고 있고 오히려 그 궤를 열어서 그 안에 있는 십계명을 보다가 다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믿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처음에서 도와주시는 것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이 논의를 하고 옮기려 했다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로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윗은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궤를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믿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언약궤를 모르고 이 시대도 법궤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누구든지 웃사와 같이 죽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믿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과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 두목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세마포를 입었습니다.

처음과는 너무도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믿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레위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메기 위해서 그들이 만든 세마포를 입었습니다. 또 다윗은 베 에봇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8절을 보면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누구입니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육적인 세마포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믿음으로 해서 세마포를 입게 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늘 이 말씀을 말씀드리지만 행실이라고 하니까 율법이나 어떤 행위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이 가장 좋은 행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다시 언약궤를 옮길 때의 레위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웃사가 그런 일을 당한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그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믿음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도와주심으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 믿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윗은 베 에봇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깨끗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고 다윗이 베 에봇을 입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자기 행실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다는 것을 베 에봇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행실은 성도의 믿음이라고 요한계시록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표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예표들을 모르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의 책을 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의 예표들을 통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 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구원입니다.

이 성경은 모두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는 성도들이 크게 하나님을 부르고 또 각과 나팔과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 있게 타면서 언약궤를 메어 올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왜 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왜 믿고 있습니까? 그 기초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언약궤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서 언약궤 증거궤를 법궤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믿지 않고 있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모든 기쁨이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언약궤를 올리는 사람도 믿고 다윗도 믿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기쁨 마음으로 여러 가지 악기로 소리를 높이면서 언약궤를 메어 올렸습니다.

 

다윗은 춤을 춥니까?

단순히 이 언약궤가 자기 궁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춤을 추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이 믿어짐으로 해서 다윗은 맨 앞에서 자기 바지가 벗겨지는 것을 모를 정도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기쁨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기쁨을 모르고 있습니다. 언약궤 속에 있어야 할 십계명이 밖으로 나와 있다 보니까 그 십계명으로 인하여 모든 율법이 살아나서 그것을 지키느라 기뻐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을 지키는 자기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것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모르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어다보다가 다윗 왕의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더라

 

이런 말씀들을 보고 오해를 합니다.

다윗이 언약궤가 자기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춤을 추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교회 안에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육은 우리의 영입니다, 다윗이 겉으로 춤을 추었다면 우리의 영혼이 춤을 추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행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이방과 같이 춤을 추는 자들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육적인 행위를 보고 이 시대 그대로 따라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의 육은 우리의 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다윗과 같은 춤이 내 영혼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을 실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기쁘면 바지가 벗어지는 것을 모르고 춤을 추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마포를 입은 성도들의 영혼이 그렇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처 사울의 딸 미갈이 이것을 업신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업신여깁니까?

언약의 피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눈앞에 언약궤가 보이는데도 믿지를 않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이 언약궤를 자기 안으로 들여와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세마포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마포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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