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전도서10:1-4절을 보면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타성이 젖습니다,
아니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가 하던 그대로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 저 같은 사람은 잠자리가 바뀌는 것조차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어디 여행을 가더라도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들지 못하고 그 피로가 다음 날에 그대로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벌써 15년 전부터 성경을 보고 글을 쓰고 있다 보니까 이제는 밖에 나가는 것이 힘듭니다, 사실 불편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고 어떤 일이 있어서 밖에 장시간 나가야 하면 벌써 긴장을 하게 되어서 가능한 외출하는 것을 삼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편한 상대이면 다행인데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외출을 하고 나서 집에 들어오면 무척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게 살아갑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늘 하던 일을 해야 익숙하지 전혀 새로운 일이 있으면 역시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매너리즘이 되어서 사람들은 그 틀을 깬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작은 변화만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큰 변화에는 몹시도 힘들어 하는 사람도 아주 작은 변화는 그냥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멀리 여행을 가는 것은 싫어할지라도 집 근처에서 외출을 잠시 하는 것은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에서 납득이 되는 일은 아주 잘 용납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용납입니다,
그것 역시 자기 생각에서 이미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용납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심하게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합니다, 그냥 비 좀 맞으면 어때 하는 그것이 어느새 자기 옷을 다 적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작은 것을 잘 용납을 하고 있습니다,
소나기가 오면 비를 맞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랑비가 오면 그까짓 것 하면서 비를 맞고 있습니다, 그까짓 것 하는 그것이 자기 옷을 다 젖을 때까지 모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소나기가 오면 잠시만 맞아도 옷이 젖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비사 내리면 우산이 없이는 밖으로 안 나가지만 가랑비는 그까짓 것 하다가 옷이 다 젖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분법입니다,
그리고 흑백의 논리라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영의 생명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라는 것은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이 생명이 조금 더 살고 조금 더 죽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으면 죽은 것이고 살아 있으면 산 것이 됩니다.
거기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산다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사람의 이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금 더 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 조금 더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데도 사람은 조금 더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인입니다,
그리고 의인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중간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성경에서 누구는 조금 더 의인이고 누구는 조금 더 죄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냥 죄인이면 죄인이고 의인이면 의인이라고 합니다,
누구는 의인에 가깝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죄인에 가깝다 의인에 가깝다는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나 하는 말이지 성경은 죄인이면 죄인이고 의인이면 의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이성을 따라 보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중간 단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성에는 분명히 중간 단계가 있습니다, 저 사람을 보면 더 의로워 보이고 저 사람을 보면 더 죄인과 같이 보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라는 말이 안 됩니다,
아니 그런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누구는 지혜가 더 있는 것 같아 누구는 조금 미련한 것 같아 이렇게 같아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혜자인가 아니면 미련한 자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누구는 성경을 더 많이 알아서 지혜가 많은 것 같이 보이지만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사람의 생각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는 정말 그런 생각부터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이 성경에서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조금 더 많이 알아가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지 지혜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미련한 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가복음12:34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사람들이 오해하는 대표적인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서기관입니다 주님과의 대화에서 이 서기관이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주님께서 이 서기관에게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서기관이 마치 천국을 들어가는 사람과 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어떤 지혜를 가지고 대답을 했습니까? 이 세상 지혜를 가지고 나름대로는 잘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과 멀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서기관이 천국에 들어갔습니까?
만약에 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었다면 분명히 성경에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서기관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기관 중에 한 사람이지만 세상 지혜로 지혜 있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고 말씀을 하셨지 네가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반드시 네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서기관과 같이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고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서기관은 율법주의자입니다, 그가 아직 율법주의에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지혜 있게 대답을 했다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 있습니까?
지금 주님과의 대화에서만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서기관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은 성경에 있는 문자를 알고 그것을 그대로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의 지혜라는 것은 세상의 지혜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을 받기 직전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는 말씀은 구원을 받기 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는 구원에 대해서 과거형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난 영이 있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 가 있는 성도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에베소서에서도 우리가 함께 앉아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사람이지 앞으로 멀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분법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 서기관을 칭찬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가 구원을 받았으면 주님께서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경을 보고 율법을 지키고 문자로 아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서기관의 말씀을 어떻게 보는가만 보아도 쉽게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이 서기관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것은 멀지 않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야 합니다,
태어나고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닙니다. 영이 내 안에 탄생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서서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태어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영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의 이성이 이것을 아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 풀려야 합니다,
성경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해서만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신 성도는 최소한 구원에 대해서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구원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없다고 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기독교입니까?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믿어집니까? 그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맹목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도 한 번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율법주의로 빠지고 말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입니다,
내가 이까짓 것 하고 무심히 넘어가는 그것이 구원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기관과 같이 자기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문자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받은 성도인가 아니면 가라지인가를 분명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공동번역입니다,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죽으면 향수 한 병을 버리게 된다. 그렇듯 하찮은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지혜로 얻은 영광을 물거품으로 돌려버리는 수가 있다.”
비유입니다,
파리가 얼마나 더럽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식사를 하다가 같이 먹던 사람이 함께 먹던 찌게에서 파리가 빠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식사를 반 이상 한 상태라서 그 반찬은 더 이상 먹지를 않고 식사를 했지만 밥을 먹고 나서도 영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아마 처음에 나왔으면 그 집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고 먹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하게 되었고 파리 한 마리 때문에 그날 식사가 찝찝했습니다, 파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반찬 중에 하나에 그것이 들어가 있지만 밥을 먹고도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향기름입니다,
우리나라와 중동은 기후가 다릅니다, 그리고 환경도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거의 향수를 쓰지 않지만 중동 지역에서는 향기름을 거의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이 문명이 발달한 때가 아니라 수 천년 전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나라에 향기름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파리가 죽습니다,
그러면 그 자체로 썩어 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향기름이라고 해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은 그 파리만 꺼내고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파리가 썩고 있다면 향기름 전체를 다 버려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식사할 때 죽은 파리가 있으면 그것을 건져내고 먹을 수 없습니다, 물론 배가 고픈 나라에서는 그것이라도 먹지만 보통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얼마나 귀한 향기름입니까? 그런데 파리 한 마리가 죽은 것으로 버린다면 너무 아깝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은 파리와 같은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3:27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죽은 파리입니다,
그것을 죽은 시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파리가 악취가 심합니까? 죽은 시체가 악취가 심합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외식을 보면서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시체 썩는 냄새가 제일 지독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외식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한 가지의 외식이 향기름에 악취가 나게 하고 있고 그것이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임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도 이 외식을 모르다 보니까 사람들은 외식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식입니다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입니다, 내가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의롭고 선하다고 보고 있는 모든 행위가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저 사람이 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죽은 파리입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외식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바리새인은 외식을 해서 주님으로부터 화를 받았어도 자기들은 똑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자기들은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옳게 보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누구에게 옳게 보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옳게 보신다는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는 그 행위를 옳다고 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니 더 열심을 내서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에게 옳게 안 보이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여러분이 식사 기도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십일조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찬송가를 부르겠습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옳게 보신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순전히 여러분의 주장이고 실제로는 여러분에게 옳게 보이니까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예배가 잘못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천주교에서 하고 미사와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내가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가 어떤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드리는 예배를 기독교인에 옳게 보이고 있고 천주교에서 드리는 미사는 천주교인에게 옳게 보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외식입니다,
그것이 죽은 파리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악취가 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짜 악취가 난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악취가 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그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며 죽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파리입니다,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향기름에 죽은 파리가 빠져 악취가 나면 버려야 하는 것과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편16:3절을 보면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성도는 존귀한 자입니다,
그런데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폐하게 만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매해서 외식을 했습니다. 이 시대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외식에 빠져 있는가를 또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외식에 빠져 있습니다,
적은 우매입니다,
이 적은 우매가 무엇인가 하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저 무심히 하고 있는 행위들이고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행위 하나가 성도가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는 이 적은 우매를 바로 알아야 하고 우리에게서 단 한 가지라도 이 우매가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찮게 생각하는 행동입니다,
아니 이 정도는 하는 그 행위가 우매입니다. 아니 성도로서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그것이 우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성도로서 이 정도는 하는 그것이 성도가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서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성도라고 하는 것이 폐하게 되고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너무 안일하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보듯 하고 있습니다, 적은 우매라고 하니까 솔로몬 시대의 어느 사람이 우매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그 우매가 존귀를 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찮은 행위가 없습니다,
내가 하는 행위는 다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하찮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교회에 나가서 남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따라 하고 있고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이 드는데 그것이 적은 우매가 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적은 우매가 아니라 너무 많은 우매한 행위를 하고 있어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지를 모를 정도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행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거절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찮게 생각하면서 하고 있는 그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적은 우매가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혜와 존귀를 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적은 우매가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바로 알고 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지혜와 존귀를 폐하는 자가 되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5:9절을 보면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적은 우매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폐하는 것과 같이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아주 적은 율법의 단 한 가지가 그리고 외식의 행위 하나가 존귀를 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적은 누룩입니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것은 갈라디아에 있는 거짓 형제인 유대인들이 와서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지키게 해서 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습니다,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이 적은 누룩이 되어서 온 덩이를 퍼지게 하고 있고 그것을 솔로몬은 지혜와 존귀를 폐하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이 적은 누룩입니다, 그것으로 온 덩이를 퍼지게 했습니다, 존귀를 폐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얼마나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적은 누룩이 아니라 아주 많은 누룩이 있습니다, 빵도 아주 맛있는 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아주 달콤한 빵을 만들어서 온 덩이를 퍼지게 해서 그것을 먹고 지혜와 존귀가 폐해지고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율법이라고 하는데 왜 믿음이라고 합니까? 성경에 어디 믿음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도 자기들 마음대로 변역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율법이고 그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해서 지혜와 존귀를 폐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습니까?
그런 그들이 왜 할례는 하지 않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할례에 대해서 말씀하니까 할례를 하지 않는 자기들이 적은 누룩을 안 썩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하지 않고 있지만 이 시대 십일조를 내고 있고 주일을 지키고 있고 절기를 지키고 있고 수많은 율법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아닙니다.
이 시대는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무교병보다 그 가루보다 더 많은 누룩을 넣고서 지혜와 존귀를 폐하게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은혜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이 그리고 외식적인 행위로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전도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지혜와 존귀를 폐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누룩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새번역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옳은 일 쪽으로 기울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그릇된 일 쪽으로 기운다.”
한글개역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한글개역성경보다 번역이 잘되어 있는 성경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만 보아도 한글개역성경이 얼마나 번역이 잘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습니다,
마태복음25:33절을 보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성전의 두 기둥입니다,
왼편은 보아스고 오른편은 야긴입니다. 이 두 기둥에서 기름을 붙습니다, 대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을 때는 야긴에서 붙고 왕을 기름 부을 때는 보아스에서 붙습니다, 그러니까 야긴의 기둥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고 보아스의 기둥은 왕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사단이기도 합니다,
양은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으로 오신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것이 우리의 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 편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왕과 같이 되기를 바라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가 율법의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그의 마음은 왼편에 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른 편에 마음이 가 있는 성도는 주님이 하늘에 올라가신 것이 의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왕에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자기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으로 착각이 들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그의 마음은 왼편에 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있는 곳에 나도 있습니다,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어디에 마음에 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에 마음이 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해도 그의 마음이 왼편에 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그의 마음이 왼편에 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입니다, 아니 그의 믿음이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매자는 모릅니다,
자기가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 믿음이 거짓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율법을 지키면 내 믿음이 거짓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적은 누룩도 섞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비밀을 모르면 그는 우매자로 교회 안에서 율법으로 부자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세상입니다,
제가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보이는 교회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교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왼편에 두게 해서 그 보여 지는 것으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대제사장으로 오신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그것이 의가 되어 있습니다,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새번역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생각 없이 자기의 어리석음을 누구에게나 드러낸다.”
성도는 길을 갑니다.
그 길을 바로 알고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셔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를 알아가는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어떻습니까?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우매를 나타내는 일 밖에는 하지 않습니다, 정말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각 사람에게 우매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거의 율법과 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말 하고 있습니다, 특히 율법은 이제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독교의 교리가 되어 있습니다.
우매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율법의 행위를 이야기 하지 않으면 설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의 모든 이야기가 율법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얼마나 우매한 말인가를 모르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그 율법을 지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지혜가 있어야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할 수 있는데 지혜가 없다 보니까 자기 우매한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님이 오시기까지 그렇게 했고 또 이방의 교회가 초대교회에 벌써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을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망의 길입니다,
우매자가 가는 길은 반드시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향기름에 파리가 죽어서 썩은 악취가 나면 버려야 합니다. 역시 우리 인생들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인생 자체가 다 썩는 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그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자기 우매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공동번역입니다,
“임금이 너에게 화를 내더라도 자리를 뜨지 마라. 침착하면 큰 실수를 미리 막을 수 있다.”
주권자입니다,
물론 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권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권자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을 일으켜도 자리를 뜨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주권자가 분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제 성경이 다 기록이 되어 있어서 이스라엘과 같이 분을 일으켜서 진노를 하시지 않습니다.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율법주의입니다, 늘 말씀은 드리지만 뼈 속부터 율법주의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아니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가난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회개를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욥이 하나님의 분을 샀습니다, 욥은 아주 철저한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분을 샀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분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미 최고의 율법주의자인 욥에게 하나님께서 분을 내시고 그가 회개를 해서 큰 허물을 벗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분을 내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매자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왜 분을 내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알기 때문에 이제는 절대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우매자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깨닫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감동을 해 주고 있습니다.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지혜자가 되셔서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어서 주님이 오실 때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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