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창세기38:1-10절을 보면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성경은 시적인 언어입니다.
우리가 보통 시를 쓰면 함축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산문을 쓸 때는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지만 시는 언어를 함축해야 하고 또 그 함축이 되어 있는 언어를 사용하다 보니까 언어에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보통 시를 쓰는 시인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언어의 의미를 어떻게 표현할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습니다,
장편의 시와 같다고 보면 맞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영의 일을 우리 인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함축을 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인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시적인 언어를 이해하기 보다는 그저 산문과 같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시를 산문으로 보면 어떻게 됩니까? 작가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시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 어느 시를 보면 그 함축이 되어 있는 언어가 참으로 잘 쓰여 있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는 시일수록 시인들은 좋은 시라고 평가를 하고 그런 시가 오래 동안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언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정말 오묘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저 언어를 아는 것으로 마치 성경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너무 문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식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부탁드리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 때문에 더 이상 성경이 보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은 정말 잘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 성경만 보아도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를 합니다,
헬라어를 하고 영어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과연 얼마만큼을 공부해야 국어를 아는 만큼 자유롭게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습니까? 평생을 히브리어만 사용을 한 이스라엘도 자기들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성경을 보고 이해를 못 했습니다,
국어입니다,
제발 국어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히브리어 핼라어에 비해서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무려 40종이 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 새번역, 공동번역, 킹제임스, 현재인의 성경 등만 보아도 성경에서 그 언어가 말씀하고자 하는 시적인 언어를 이해하는데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면 히브리어 핼라어입니다,
정말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다섯 가지 정도의 성경 번역본을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유명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원뜻을 조금 알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조금 공부를 한 사람은 사전을 찾아서 충분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국어도 모르는 사람이 국어로도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이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있고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고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런 언어가 여러분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 성경으로도 시적인 언어를 이해하는데 있어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국어를 모르고 설교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지식을 자랑하느라 히브리어나 핼라어 영어를 한 마디씩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 세상 지식이 병이 되어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부터 정말 세상의 어느 경전과는 다르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말씀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언어로 보면 이것이 성경인가 할 정도로 이상한 사건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셨습니까?
이방인들에게 이 성경이 전해지고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리고 지금과 같이 일부일처제가 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우리나라의 도덕적인 가치관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창세기에서부터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형이 죽었는데 동생이 그 형수를 취하는 것이 어떤 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도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형수에게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아마 이 시대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를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를 보면 어떻게 됩니까? 아니 이것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있었던 그저 그런 이야기라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지금 이 시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를 해 버리면 우리는 성경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는 성경의 문자를 보고 성경을 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먼저 지혜를 구하고 또 국어를 많이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도덕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도덕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도덕에 관한 말씀이라면 창세기의 말씀부터가 우리가 보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니 성경에 이런 말씀이 기록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혹시 있을 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지금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저 유다의 이야기로만 보고 있다면 그는 성경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악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악한 자가 되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악한 자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악한 자인가를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 있으면 마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악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변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아담의 생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새 생명에 대해서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내 육체가 다른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전혀 다른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그 생명이 탄생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이 잉태되지 않은 교회는 교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교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인이 백만 명이 되도 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고 짐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의 생명이 아닙니다.
내 육체와 연결이 되어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하늘로 내려오는 새 생명이며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생명이 탄생이 안 되는데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율법의 행위에 너무 깊이 빠져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있는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생명이 탄생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새번역입니다,
“그 무렵에 유다는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히라라고 하는 아둘람 사람이 사는 곳으로 가서, 그와 함께 살았다. 유다는 거기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고 하는 사람의 딸을 만나서 결혼하고, 아내와 동침하였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유다가 그 아들 이름을 에르라고 하였다”
창세기38장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12명입니다, 그 중에서 38장은 유다에 대한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요셉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의 비중으로 보았을 때는 요셉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형제입니다
그 형제들에 관해서는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유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유다의 자손으로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유다의 족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은 유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유대 개인을 기록했다기보다는 유다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며느리는 다말입니다.
이 다말이라는 이름이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는가 하면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이 되어 있는 4명의 여자 중에 한 명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있기 때문에 창세기 38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는 성경에서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는 4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그 유다가 이제 장성을 해서 자기 형제에게서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내려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고 하는 사람의 딸을 취해서 아들을 셋을 낳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엘입니다,
엘은 간수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가 오난입니다, 오난은 강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셋째가 셀라입니다, 무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름의 뜻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왜 이 사람들을 낳게 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셀라를 낳고 나서 거십이라는 곳에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지명은 고유명사입니다 우리는 때로 히브리어를 알아서 그 뜻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유식하게 히브리어를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십이라는 그 단어의 뜻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면 되는 것이지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식이 병이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지혜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뜻을 알았으면 그것으로 충분한데 굳이 알아들지도 못하는 히브리어를 이야기 하면서 이 시대 목사들이 자기가 신학에서 제대로 공부를 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하면 뭐 합니까?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 지혜를 자랑하고 있고 그것이 복음에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거십이라는 지명입니다,
이 지명은 여호수아에서 나오는 악십이라는 지명과 동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후에 유다지파가 점령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악십이라는 뜻이 속이는 이라는 뜻과 물이 없는 시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없는 시내다 보니까 속인다는 뜻입니다,
그곳에 거했습니다,
그 지명에서부터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그 지명은 속이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속이는 일로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물이 없는 시내다 보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편 1편에서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입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입니다, 그 자손에게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십이라는 지명은 속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물이 없는 시내라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곳 지명에서부터 어떠한 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필요합니다,
제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 나라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 거십이라는 단어가 있고 그 뜻을 이렇게 사전에서 찾아서 알면 됩니다, 그 정도만 배워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너무 지나치게 배우고 있습니다, 국어도 몰라서 한글개역성경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히브리어를 하는 것을 보면 교만이 넘칩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내가 여러 가지의 방언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 교만한 자는 절대로 성경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적인 은사를 주셔서 방언을 할 수 있으면 더 겸손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자기들이 하는 방언을 가지고 지식을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방언입니다,
히브리어도 핼라어도 영어도 다 방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네가 일천 마디의 방언을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설령 히브리어에 능통하다고 해도 그것은 겨우 한 언어의 방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일천 마디의 방언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언어를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은가 주어졌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 방언의 은사가 도리어 이 세상 지혜가 되어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구어체입니다,
시적인 언어라는 말씀입니다 일천 마디의 방언을 한다고 해서 시적인 언어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심지어는 일반 교인들까지도 히브리어를 배우고 헬라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국어도 몰라서 시적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방언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시간이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영어를 더 많이 배우고 싶지만 솔직히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너무 아깝습니다, 제가 히브리어나 헬라어 영어를 조금 못한다고 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때를 아끼시기 바랍니다,
우리 청년의 때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과 총명이 사라지는 시기를 빼면 약 40년입니다, 그리고 40년의 대부분을 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성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까? 한글 성경도 볼 시간이 부족한데 사람들이 교만해 져서 다른 나라의 방언을 공부하면서 그것으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40년 금세 지나갑니다,
저 역시도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정말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는 대로 가능한 설교와 강해를 작성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 성경을 해석할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마도 그 이전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불과 10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60대 중반을 넘어갑니다,
그때는 이미 총기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요즘 오래 산다고 해도 60대 중반이 넘어가는 순간에는 총기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때를 아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지혜에 마음을 빼앗기기 보다는 성경에서 생명에 대한 말씀을 깨닫기를 위해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새번역입니다,
“유다가 자기 맏아들 에르를 결혼시켰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다말이다.”
장자 엘입니다,
그의 아내가 다말입니다, 그 다말이라는 이름의 뜻은 종려나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말의 이름은 종려나무입니다, 이 종려나무는 대추야자과에 속한 나무라는 것은 성경을 조금 공부한 사람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이 다말입니다.
아내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아내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교회입니다, 성경에서 그때에 따라 상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말은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 인물의 뜻에서도 종려나무라는 것은 교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편92:12절을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아가7:7절을 보면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종려나무는 번성해야 합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말은 반드시 번성을 해야 합니다, 그 이름의 뜻이 종려나무이기 때문에 반드시 번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종려나무에서는 의인이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가서의 말씀입니다,
아가서는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와 은유 그리고 의인화를 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까지 거의 모든 성경학자들이 아가서를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습니까?
여자와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대화하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대화를 하다보니까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인 것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국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아가서는 의인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의인화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비유와 은유입니다,
그리고 의인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인법을 쓰고 있는 것을 모르고 그저 대화를 하는 내용을 보면서 마치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오해가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말입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당당히 기록이 되어 있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교회로 지금 비유를 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미를 모르고 그저 문자로 성경을 보아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문자를 알기 보다는 의미를 알기에 힘쓰는 성도가 되고 모르면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왜 다말과 혼인을 했습니까?
의인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다말과 혼인을 한 장자 엘은 그 혼인의 책무가 무엇인가 하면 의인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이 다말은 그저 이 세상의 어느 여자가 아니라 교회이기 때문에 그 교회에서는 반드시 의인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새번역입니다,
“유다의 맏아들 에르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 주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
너무 뜬금이 없습니다,
유다의 맏아들인 엘이 다말과 혼인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바로 맏아들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악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결혼을 했다는 말씀이 있은 후에 바로 그가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악합니다,
엘이 왜 악합니까? 그것이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의 아내 다말은 종려나무입니다,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엘은 다말에게서 의인이 번성케 하지를 않았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를 치라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 교회에서는 의인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의인이 나오지 않으면 악하게 됩니다, 의인이 나오지 않게 하고 있다면 그는 악한 자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그것으로 자기가 의인이 되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인이 번성하지 않으면 그는 악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이십니다,
마태복음 25:26절을 보면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이 달란트의 비유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달란트를 남길 수 있는 재능을 주셨는데도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은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를 못 했습니다, 이 달란트의 비유는 그리스도편지에 아카데미 강의에 올려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면 됩니다,
왜 악합니까?
엘은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말이라는 종려나무가 있는데 그 다말에게서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않은 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그가 악하므로 죽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않는 사람은 악한 자입니다,
교회에 있습니까?
그렇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과 같은 사람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엘은 이 시대 교인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려나무인 교회에 들어가서도 의인을 번성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육적인 아들입니다,
그것은 영의 생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이 그저 아들을 낳지 않은 것으로 악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엘은 반드시 의인을 낳아야 합니다, 생명의 달란트를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종려나무 안에서 반드시 생명의 달란트를 남겨야 하는데 엘은 그 일을 하는데 있어 게을러서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새번역입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말하였다. "너는 형수와 결혼해서, 시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해라. 너는 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
형수입니다,
물론 그 당시 근동지방은 풍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형수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말은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종려나무입니다, 그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왔으면 반드시 생명의 달란트를 남겨야 합니다,
상식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인들이 수천 년이 지나서 어떻게 살아가고 그들의 도덕적 가치관이 어떤가를 모르시고 이 말씀을 기록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본분을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본분이 주어졌는가를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행위를 보고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막연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13절을 보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요한복음 12:50절을 보면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본분이 무엇입니까?
솔로몬이 전도서를 다 기록하고 나서 마지막에 사람의 본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가 하면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그의 명령을 지키면서 사람의 본분을 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다른 명령이 없습니다. 오직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그저 자기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여 주여 하고 있고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것으로 마치 영생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고 있는 성도가 얼마나 적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본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종교에 빠져서 올무와 포승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입니다,
지금 유다는 오난에게 사람의 본분을 행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역시 사람의 본분을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이고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까? 이 시대는 자기 본분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내 안에 생명이 어떻게 탄생이 됩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바울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 본분을 망각하면서 그저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새번역입니다.
그러나 오난은 아들을 낳아도 그가 자기 아들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
성경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리얼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차마 대놓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너무도 귀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난은 엘의 동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서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이 싫어서 오난과 같은 자가 이 시대 얼마나 많은 가를 알아야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오난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자기 안에 거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고 그 영의 비밀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난은 싫어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모르고 있습니다,
아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난 영을 말씀하고 있고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난은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을 싫어했고 이 시대는 그것이 무엇인가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그저 문자적으로 아는 자식을 가지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고 말 합니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새번역입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난도 죽게 하셨다”
악합니다,
왜 악한가 하면 오난은 사람의 본분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서 이렇게 오난과 같은 자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난은 악합니다,
그는 사람의 본분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싫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못하고 있고 오난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악한 오난을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도 그 악한 종을 죽이셨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이렇게 죽는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람의 본분을 행해야 합니다. 그 본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난과 같이 악한 자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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