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한일서 2:7-1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들은 오직 믿음으로 역사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그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성령의 감동으로 내 안에서 믿어지는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빛이라고 합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이 아니라 내 눈에는 안 보이고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이 빛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의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그저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이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생명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난 영을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이 영이 이해가 안 되다 보니까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이해를 하려하고 있습니다,
영은 생명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아닙니다, 육체와 연결이 되어 있는 생명도 아닙니다. 마치 아담이 탄생이 된 것과 같이 우리 안에 전혀 새로운 생명이 탄생이 되는 신비로는 역사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영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면 그저 종교인으로 살다가 이스라엘과 같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두 사람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 두 사람을 비유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3가지 비유를 말씀을 했습니다, 모두가 구원을 받는 사람과 버림을 받는 사람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버림을 받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 과연 생명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영의 일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자기들에게 생명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고 또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막연하게 자기도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의 일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이 이 영을 알 수 없으니까 그저 남들이 이야기를 하면 자기 안에 생명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어떠한 생명인지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성령으로 난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생명을 얻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비유를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반드시 율법에 의해서 율법으로 죽어야 내 안에 생명이 탄생이 됩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서 죽은 성도만이 이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이 생명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한다 해도 이 생명이 여러분 안에 없다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이고 그리고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성도라 부를 정도로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이 생명이 없다면 그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2-3절을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생명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땅엣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땅엣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생명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한글도 모르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땅엣 것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보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자기 생각에서 다 정리를 하고 성경을 보다보니까 땅엣 것이 무엇이고 위엣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를 누가 보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누가 봅니까?
마치 이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고 땅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부터가 정립이 안 되고 있습니다,
땅엣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절대 다수가 땅엣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는 늘 이것을 생각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엣 것을 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땅엣 것을 보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노아 시대에 노아 한 사람만이 은혜를 입은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 정도로 위엣 것을 보는 사람이 적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좋은 것을 말씀할 때는 그런 사람이 교회 안에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땅엣 것입니다,
나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엣 것을 보는 사람은 마치 이와 같다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몇이나 되는 가를 생각하면 됩니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이 누군가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땅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다수가 땅엣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자기들이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에게 이롭게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이 저주를 받게 하는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합니까?
그럼 그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이 이제 너희는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땅엣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도 땅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땅에 있습니다, 그 땅에서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땅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찬송가를 부르고 있고 기도를 하고 있고 또 십일조를 내고 있고 자기 육체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잘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땅엣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는 것을 잘하려고 하고 있고 그것을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땅엣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감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엣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땅에 일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압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 있는 기초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면 땅엣 것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땅엣 것이고 그것을 잘하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는 땅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생명이 없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싶습니까?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싶습니까? 찬송가를 은혜롭게 부르고 싶습니까? 아니 찬송가를 부르면서 살아가고 싶습니까?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고 싶습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십일조라든지 헌금을 많이 하고 싶습니까?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 해야 하는 일들을 잘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까?
겸손하고 싶습니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습니까? 그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를 교회 안에 불러 들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싶습니까? 그리고 그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습니까? 제가 일일이 다 열거를 할 수 없지만 이러한 일들이 다 땅엣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땅엣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지도 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 까지도 땅엣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땅엣 것과 위엣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땅엣 것을 생각하면서도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기들을 보면서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새번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계명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말씀이라고 우리에게 계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이 있는데 이 계명은 새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너희가 들은 계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명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공식화가 되어서 다른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계명은 율법만 있는 것으로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명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미 생각에서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옛 계명입니다,
성경의 계명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이 말씀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실 율법을 법대로 행하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용서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용서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율법을 어겨도 죽지 않은 이유는 내 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모든 율법이 있다 해도 내 몸같이 사랑하면 그를 법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을 하나 범한 자는 모든 율법을 범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율법을 범한 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나를 죽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범했는데도 스스로가 죽지 않는 것은 자기 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내 이웃이 진 죄에 대해서도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율법은 사실 우리에게 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가진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어긴 내 이웃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가 받았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을 보고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이웃을 정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새번역입니다,
“나는 다시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써 보냅니다. 이 새 계명은 하나님께도 참되고 여러분에게도 참됩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씀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참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계명도 이제는 어두움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그런 계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을 비춰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두움이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자기들이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어두움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런 어두움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을 비춰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절을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율법입니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해서 어두움이 지나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육체로 행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그것이 어두움이 되어서 지나가고 참 빛이 우리에게 비춰졌다는 말씀입니다,
어두움은 지나갔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는 어두움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그런 행위로가 아니라 이제는 참 빛이 우리에게 비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빛을 봄으로 해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너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옛 계명에서는 그것을 사람이 하려고 했지만 이제 그것은 어두움이 되어서 지나가고 참 빛이 비춰졌다는 말씀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이 옛 계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옛 계명은 이제 어두움이 되어서 사라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참 빛이 비췸으로 해서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그 옛 계명을 지킨 사람이 없습니다,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어두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세상에서 오셔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시고 또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참 빛으로 비췸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9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빛입니다,
이제 사도 요한이 세 계명을 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계명이 무엇인가 하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는 비추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빛에 거하는 것이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빛을 비춰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 빛에 비췸을 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계명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율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어두움이 되어서 지나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새 계명이 무엇인가 하면 이 빛에 비췸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빛에 거해야 합니다,
그 빛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빛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성막 안에 있었던 등대입니다, 그 등대의 빛이 우리에게 비췸으로 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빛에 비췸을 받는 그것이 새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새 계명을 우리에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 빛이 생명의 빛인데 그 빛에 비췸을 받는 것이 새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빛은 옛 계명에서 말씀하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이룬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빛에 비췸을 받으면 그것이 내가 한 일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다 이룬 빛이 내게 비췸으로 해서 나 역시 그 빛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빛에 비췸을 받는 성도는 어두움이 지나갔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영의 신비로운 것을 가르쳐 주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이 영의 비밀을 너무 모르고 육체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그런 어두움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육체로 내 이웃을 매 몸과 같이 사랑하고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을 하지 않아도 빛이 비췸으로 해서 우리가 그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는 것을 사도 요한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21절을 보면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비췸을 어떻게 받습니까?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는 빛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요한일서에서는 새 계명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참 된 것이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에 비췸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대는 빛에 비췸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비췸을 받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빛에 비췸을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고 그 빛에 비췸을 받아서 우리 역시 이룬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새 계명입니다.
이제 어두움은 지나갔습니다, 새 계명을 지키고 있는 성도는 어두움에서 지나갔습니다. 이 어두움은 율법을 자기 육체로 지키려고 하는 모든 행위에서 지나갔다는 말씀입니다, 새 계명은 우리가 참 빛에 비췸을 받기만 하면 이룬 것이고 그것은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정말 이 시대는 믿음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빛에 비췸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믿음의 비밀을 모르다 보니까 어떻게 빛에 비췸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새 계명도 모르고 있습니다,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옛 계명이 있습니다. 그 옛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그 옛 계명은 어두움인데 주님께서 이 계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빛이 되어서 우리에게 비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췸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그 옛 계명을 다 이룬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비췸을 받는가 하면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성도는 이 빛에 비췸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 빛에 비췸을 받으면 생명이 그 안에 있고 그 사람이 계명을 지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입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비치셨습니다, 어두움에 있던 우리가 비췸을 받아서 새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빛의 비췸을 받는 것은 오직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새번역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의 비췸을 받았습니다. 그 빛은 우리에게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진리로 인도함을 받은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듭난 생명입니다, 성도는 이 생명 가운데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 가운데 있습니다,
이 빛이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빛 가운데 있다는 말씀은 생명 가운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는 성경의 기초가 너무 안 되어 있고 그저 사람의 이성을 따라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생명이라고 하니까 너무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생명입니까?
그것을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난 영입니다, 그 영이 있는 성도는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미워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습니까? 이 생명은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육체를 보고 어두움에 있어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두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의 행위입니다, 빛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은 빛에 비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 생명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으로 미워하고 있는가 하면 육체의 행위를 보고 미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육체의 행위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빛에 비췸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만 보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 그 생명이 있는 성도는 형제자매 안에 있는 생명을 보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인데 어떻게 미워할 수 있습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고 있는 사람이고 빛에 비췸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형제자매입니다,
그것은 영의 형제자매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성도는 어두움을 보지 않기 때문에 형제자매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모든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새번역입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그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빛 가운데 거하고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형제자매가 아니라 참 빛의 비췸을 받아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형제자매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합니다,
누구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 형제자매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형제자매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형제자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다 형제자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 사람만이 형제자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형제자매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형제자매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 해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어떠한 은혜를 입었는가를 아는 성도는 절대로 형제자매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있는 성도는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나 역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세상 형제도 사랑합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비췸을 받아 생명이 탄생이 되어 있는 형제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두움의 육체를 보는 사람은 미워하게 되어 있지만 참 빛의 비췸을 받은 생명을 보는 성도는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형제자매가 나와 동일하게 은혜를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새번역입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되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무엇입니까?
로마서에서 율법을 어두움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형제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만 말씀하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데도 하지 말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연히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율법을 잘 지켜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은 부자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런 비유를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자가 음부의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이스라엘에게 화를 말씀하신 것을 보고도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어두움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멀어서 참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셨지만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눈이 멀어서 그 빛을 못 보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눈이 멀어 있는 소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 눈을 멀게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참 빛을 못 보게 눈을 멀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의 어두움에 눈이 멀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거절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 소경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빛에 비췸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어두움이 지나가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참 빛에 비췸을 받아 생명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 새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참 빛의 비췸을 받아 생명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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