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6-1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초대교회입니다
이 데살로니가전서는 당시 로마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쓴 성경입니다 당시에는 로마의 핍박이 너무 심해서 인간적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갔는데 그런 성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게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핍박을 하는가 하면 주님께서 세상이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이 세상 어느 종교도 그리고 국가도 이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이 영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도들은 이 영의 일을 듣고 믿었고 또 그럼으로 해서 종교가 지키고 있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종말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을 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당시 너무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종말을 이야기를 하면서 이상하게 해석을 하고 있고 특히 휴거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장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고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휴거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상은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오해를 해서 휴거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휴거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성경에 없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휴거도 그렇고 삼위일체도 그렇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말을 마치 성경에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종말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종말을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때부터 종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이 승천을 하시면서 내가 다시 오리라고 한 그 말씀 때문에 당시 고난을 받던 사람들은 주님이 그 시대에 다시 오시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입니다.
누구라도 육체적으로 고난을 당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당시에는 성도들이 너무도 많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있어 재림이라는 말씀은 너무도 기다리는 일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마치 당장 재림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사람들은 재림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습니다. 특히 전쟁이 난다든지 아니면 자연재해가 심하게 일어나면 재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많은 큰 일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아직까지 오시지 않습니다.
성경입니다
이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마치 성경을 이 세상의 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다보니까 자기들에게 조금이라도 큰 일이 있으면 성경을 비유로 해서 재림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성경적 그때는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주님이 오실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성경이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저희가 편안하다, 안전하다고 할 때가 그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교회는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아직은 종말의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일입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평안하다고 할 때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없다고 할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노아의 홍수를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절대로 멸망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노아의 홍수입니다.
노아가 삼백년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방주를 짓고 있는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왜 비웃었는가 하면 당시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평안하다고 또 안전하다고 느낄 그때가 종말의 때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그때가 종말의 때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았을 때 이 시대는 절대로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종말은 있습니다.
육체의 사람은 분명히 한번 죽습니다. 그런 개인적인 종말은 지금도 계속해서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전체적인 종말은 아직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개인적인 죽음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지 종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종말을 이야기를 합니까?
모두가 거짓에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지구의 종말이 곧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때에 대해서 그래도 대강 알 수 있게 계시를 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지금 이 시대는 그런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죽음입니다.
전체적인 종말은 없어도 개인적인 죽음을 늘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생각하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4절에서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어두움에 있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이스라엘과 같이 어두움에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추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은 모두가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모두가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어두움이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빛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이 빛을 보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어두움에 있어서 이 빛을 못 보았습니다. 주님이 빛으로 오셔서 비추어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주님께서 빛으로 비춰주셨지만 그것이 빛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복음은 빛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어두움입니다.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은 빛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수도 없고 아니 설령 듣는다 해도 그 복음을 믿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편지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어떻습니까? 그냥 스쳐지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추는 빛에 즐거워하다가 도로 어두움에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들이 잠시라도 이 복음을 보고 다시 어두움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 마음을 지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붙잡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리고 진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고 또 진노를 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반드시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주님의 말씀과 같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성경을 바로 보고 또 성령을 구해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성도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종말의 때를 말씀을 하면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입니다
이 다른 이들이 누구입니까? 잠자는 자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잡을 자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어두움에 있어서 잠자고 있었지만 이방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빛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의 일이다보니까 자기가 잠을 자는지 아니면 빛에 있는지를 사람의 이성으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잠을 자는 사람들이 자기가 잠을 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사도 바울은 굳이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잠을 자는 것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니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 6:4절을 보면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잠언 6:9절을 보면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성경입니다
그냥 기록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거의 남의 집에 불구경하듯이 보고 있습니다. 자기는 부지런하고 늘 깨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우시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어느 지극히 일부의 사람이 잠을 자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통해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말씀을 보고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어느 사람이 잠을 자는 것을 깨우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여
어느 때까지 네가 눕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잠언의 말씀을 보면서도 그저 육체적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만 게을러서 잠을 잤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방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다른 이들이 누군가 하면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기도 하고 있고 또 이방의 교회 안에서 잠자는 자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자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늘 잠을 잤기 때문에 잠언에서 이미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교회도 역시 잠을 자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잠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자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 19:15절을 보면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25:26절을 보면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게으름입니다.
이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이치로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잠자는 자들은 다 게으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게으른 사람이 깊이 잠들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육적인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을 통해서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육체의 게으름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성경을 보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성경은 우리 사람의 육체의 일을 통해서 그것을 비유로 해서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입니다
잠언의 말씀을 보고 문자 그대로 본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정도를 가지고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영의 일을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잠언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게으른 사람이 누군가를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들 모두에게 이 달란트를 남길 수 있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있지만 게으른 사람은 달란트를 남기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게으릅니까?
달란트는 남기지 못한 사람이 게으른 사람입니다 이 달란트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영의 생명이 그의 안에 있지 못하는 사람이 게으른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데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님께서 달란트도 주시고 재능도 주셨지만 남기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남기지를 못 합니까?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을렀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을렀는가 하면 어두움에 있어서 그 어두움의 일을 하느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을러서 주님께서 재능까지 주셨지만 달란트를 남기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에 빠져 이 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게으른 사람을 잠을 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잠언의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과 같이 모두가 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움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3절을 보면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고린도전서 15:34절을 보면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깨어 근신할찌니라
근신,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 깨어 근신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깨어 근신하라고 하는가 하면 복음을 듣고 있지만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이 잘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자고 깨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에 있어서 그러니까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두움에 있어서 자기가 깨어 있는지 자고 있는지를 모르고 그저 사람의 이성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교회에 나가서 종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서 구원을 받으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깨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깨어 있는다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잠언에 그런 말씀들을 기록하게 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잠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자들도 밤에 취합니다.“”
자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언제 잡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낮과 밤에서 밤에 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밤에 자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는 자들은 밤에 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밤입니다.
주님은 참 빛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빛이 비추어지지 않고 있는 영적인 상태를 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 빛에 비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밤에 자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 23:21절을 보면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잡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그 말씀이 영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낮과 밤이 아니라 영의 일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밤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취함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는 것은 실제 술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역시 밤에 자고 있습니다. 밤에 자고 있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술 취하는 것으로 다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도 역시 잠을 자는 것이 무엇이고 술 취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다 빛의 아들들이요 낮에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낮과 밤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빛을 보고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 갑옷으로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우리는 낮에 속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육체의 일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을 어두움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다 밤에 속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낮입니다
그리고 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보고 믿는 성도는 낮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다 밤에 속해 있다는 것을 실제 낮과 밤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어두움에 있는지 낮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가 낮에 속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낮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낮에 속해 있다고 하면서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낮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아니 먼저 낮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낮에 속해 있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고 그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를 주님께서 사랑을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반드시 낮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지만 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무엇에 취하고 있는가 하면 율법의 술에 취해 있습니다. 그것을 진노의 포도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진노의 포도주에 취해 있으면서도 자기가 밤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낮입니다 율법입니다 밤입니다 그리고 취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어느 교회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해서 취하는 자들이 되어서 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새 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게 하셨습니다. 정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속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심은 우리를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분명히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은 노하심을 받고 있고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노하심을 받는 사람과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보더라도 낮에 속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자는 자들과 같이 밤에 있고 모두가 취하는 자들이 되어서 밤에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낮에 속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낮에 속해 있는 것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왜 우리를 세우셨는가 하면 노하심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밤에 있지 말고 낮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낮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얻는 성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밤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낮에 속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밤에 있는 사람은 술이 취해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노하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깨든지 자든지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잔다는 말씀은 육체가 죽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한 것과 같이 밤에 자는 자들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가 죽은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는 일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합니다. 육체는 분명히 한번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시 오실 때는 우리는 반드시 삽니다. 어떻게 사는가 하면 우리 영이 부활을 해서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주님과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노하심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노하심을 받는가 하면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한다고 하면서 그들이 노하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아니고는 우리는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움에 있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노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입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로마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위로를 하기 위해서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이 피차에 서로 격려를 하고 덕을 세움으로 해서 구원을 얻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이 말씀을 보고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함으로 해서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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