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29강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윤주만목사 2018. 8. 2. 07:53


로마서12:12절을 보겠습니다. (256)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의 신령한 것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물론 각각이 받은 은사는 다르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은사를 받은 성도는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받은 것은 우리 인생의 언어로 상상이 안 되는 선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율법주의자들이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살리는 자들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하는 자들인데도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열심을 내는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망에 이르는가를 모르고 저주를 받게 하는 율법을 지키는 일에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미련한 자가 열심을 내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 줄을 모르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충분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인들을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에게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방인이 종교가 되고 나니까 이제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자기 백성들에게 열심을 냈지만 이방인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열심을 품고 일을 하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선한 일을 하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악한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악을 미워하기 보다는 악을 더 좋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그러니까 영적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하는데 악한 자가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누구입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정말 좋은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라고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저희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할례 한 가지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율법을 대표하는 것이 할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시대 받지도 않은 할례를 가지고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 같으면 우리는 성경을 볼 필요도 없고 믿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을 것을 모르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믿어 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할례라는 율법을 받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할례 안 받습니다.

지금 이 시대 할례를 받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볼 필요성이 없습니다. 볼 필요성이 없는 성경을 보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이 되고 우리가 바라는 것 역시도 거짓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할례 악한 일입니다

미워하시기 바랍니다. 그 할례는 율법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율법 악한 일입니다 미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당연히 미워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사망에 빠지게 하는 아니 저주를 받게 하는 그것을 당연히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에 대해서 부지런해야 하는가 하면 영생에 있어서 부지런해야 합니다. 우리 청년의 때를 아끼며 부지런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게으른 자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율법을 지키면 우리는 그만큼 시간을 빼앗기게 되고 또 그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영생을 얻는 일에 게으를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게으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함으로 해서 선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늘 깨어서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아야 하고 지혜를 구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 자기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고 있는 성도는 더욱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는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영의 일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이유는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소망

바라고 원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을 볼 때는 늘 국어의 뜻을 바로 알고 보아야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목사들은 국어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보고 있지만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를 못하고 있고 그 이유는 국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성도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복음을 알고 우리 인생의 존재를 알고 나면 이 세상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더기 같은 인생이 벌래 같은 인생이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이 더 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소망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천국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의 구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소망이 있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어떤 소망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8절을 보겠습니다. (332)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데살로니가전서4:16-18절을 보겠습니다. (332)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가 받을 구원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성도에게 이 구원이 없다면 아니 이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사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가지고 즐거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런 행위를 전혀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의미 합니까?

정말 우리가 이 복음을 깨닫고 믿는다는 것은 무미건조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소망 중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보여 지지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예배를 드립니까?

그렇다고 내가 힘이 들 때 육체의 것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또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잠시 위안을 받기도 하고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성에 젖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니 이 모든 것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남들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감성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성경을 보고 있고 그 안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얻는 구원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누리는 그런 감성적인 것을 다 포기를 하고 오직 진리를 따라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망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막연하게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천국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국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습니까? 기독교인들도 천국을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이성으로 알고 있는 천국을 이야기를 하고 있고 우리는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이 구원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습니까? 심지어는 데살로니가를 보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은 휴거에 대해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순교를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마치 자기들이 휴거를 당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의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구원이 육의 구원인지 영의 구원인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소망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원은 사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체의 구원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교리로 신체의 구원을 배우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배우고 있고 그렇게 배운 목사들이 신체의 구원을 교회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과 전혀 다른 구원을 이야기를 하는 그들은 사실 소망이 없는 자인데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마음껏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신체의 구원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아니고 소망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신체의 구원이 아니라 영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데 자기 신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는 속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초입니다

그런 기초도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이 소망이 있다고 부자가 되어서 마음껏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운 베옷과 자색 옷을 입고 부자가 되어서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확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신체의 구원으로 알고 있는데 영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가 알고 있는 소망이라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고 아니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준다고 하고 있는데 전혀 다른 것을 받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소망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가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직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은사 자가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면서도 기꺼이 즐거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신체의 구원을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다 신체의 구원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이 구원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신체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망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는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는 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4장의 말씀은 설교로 이미 올려드렸기 때문에 성도님들이 깨닫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3-4절을 보겠습니다. (377)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산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산 소망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에게 있는 소망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어떻게 부활하셨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신체로 부활하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영으로 부활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체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안 믿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영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신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신체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성경은 영으로 부활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그 뿌리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배우고 있는 교리는 성경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기독교 조직 신학이라는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거듭남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일부 이단이라고 말하는 교회에서 거듭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오해하지 말고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다가 이제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거듭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으로 한번 낳고 성령으로 또 다시 낳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성령으로 난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고 그 거듭난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부활의 형상을 입는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소망이 무엇입니까?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복권이 열풍입니다 사는 것이 다 힘들어 지다보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복권을 구입한다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복권을 사고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 합니다

그래도 복권을 사 놓으면 일주일이 즐겁다고 말을 합니다. 그들이 복권을 살 때는 어떠한 소망을 가지고 삽니까? 1등에 당첨이 되는 소망을 가지고 사고 있고 그것을 사 가지고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라는 것은 사실 불확실한 소망입니다 누구에게는 정말 소망이 되어서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아니 우리가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있는 이 소망은 그런 복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 복권을 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소망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을 해서 복권 1등에 당첨이 되었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복권을 산 사람이 물론 그것을 가지고 바라는 마음으로 즐거워할 수는 있지만 1등에 당첨이 안 되면 실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즐거움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실상을 가지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부활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은 복권 1등이 당첨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짜라고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부활이 어떻게 되는가를 모르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휴지 조각입니다

아니 휴지보다도 쓸모가 없어집니다. 내가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휴지보다도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성경과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소망 중에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의 영의 부활은 상상이 안 되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망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으로 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산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하늘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우리가 소망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믿음으로 즐거워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부활입니까?

그것은 하늘에 간직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썩어 없어질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산 소망은 하나님이 하늘에 간직하신 비밀한 영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을 보면서도 이 영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같이 신체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체가 어떻게 부활합니까?

아니 우리 신체는 썩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썩는 것으로 부활을 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하늘에 간직하신 것인데 썩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썩어 없어지고 오직 하늘에 있는 것만 썩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거듭난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소망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당첨이 되지도 않은 복권을 가지고 당첨이 된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더욱 큰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영입니다

우리의 신체는 육입니다 육과 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씀은 이 육과 영이 혼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육으로 난 것은 절대로 영이 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난 영은 육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육과 영을 혼합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애매모호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 영이 없는 사람이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은 마치 열처녀의 비유에서 버림을 받은 다섯 처녀와 같이 주님을 기다리다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는 사람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쫓겨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활을 해야 하는데 그 영이 없다면 어떻게 부활을 할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난 영이 있어야 주님이 오실 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부활을 할 수 있는데 그 영이 없다면 그는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영의 거듭남을 이 시대 교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교회 안에서 한 부자와 같이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즐거우면 연락을 하겠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이 드리는 예배로 기도로 그리고 찬송으로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을 아무리 잘 해도 그 안에 거듭난 영이 없으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정말 자기가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부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체가 성령과 결합을 해서 영이 되어서 부활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영이 어떻게 내 안에 거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을 베드로전서에서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시대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의 문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를 죽게 하는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고 그 안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 우리가 거듭나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박국3:18절을 보겠습니다. (1305)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그것을 하박국 선지자가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는 말씀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이 없는데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런 즐거움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믿음은 정말 무미건조합니다. 어떤 즐거움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무슨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까? 자기 육체적으로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비유에서와 같이 그는 자기의 의로 교회 안에서 연락을 하고 있는 한 부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무엇으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찬양을 부릅니까? 우리가 남들이 보기에 근사한 아니 부러워할만한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즐거움을 다 버린 성도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확실하게 증거를 해 주시는 영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 즐거움이 육체의 즐거움이 아니라 앞에 있는 즐거움을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즐거워합니까?

우리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믿고 있는 성도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즐거움이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부활을 해서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삽니다. 그것이 즐겁다는 말씀이지 인간적으로는 하나도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믿음에 든든히 서 있기 때문에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즐거워하라는 말씀이지 이 세상에서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실상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즐거움을 전혀 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성도는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믿음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소망입니다

먼저 이 소망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내 육체가 즐거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무엇인가 하면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부활을 해서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입고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즐거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즐거움을 내 육체로 누리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누리면서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자기들에게 임할 고통을 모르고 자기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6:33절을 보겠습니다. (17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16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자 제자들이 마음에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까지 자기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이제 죽임을 당한다고 하시니까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은 제자들로서는 속된 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성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오시지 않을 것이고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 보내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시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서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세상입니까? 물론 이 세상에서도 환난을 당합니다. 사실 진리는 이 세상에서도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환난은 어디서 당하는가 하면 교회라는 세상에서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닙니다. 광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광야는 세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교회를 마치 구원의 방주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가진 자는 비진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환난을 당합니까?

다수가 비진리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모두가 가지고 있다면 교회라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늘 비진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들이 진리를 알았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진리가 절대로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보여주셨고 이제까지 선지자들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도입니까?

우리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성령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하나 쯤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고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오신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많습니까?

교회 안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지 않는 자가 바다 모래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다 모래 같이 많은 사람과 남은 자가 있습니다. 누가 환난을 당하는가는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 있습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제 그들은 마귀의 자식이 되어서 자기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성도입니다

진리를 가진 자가 얼마나 적은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가 아직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말씀을 본다고 해도 아주 적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트에 접속을 해서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반드시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시대는 국가의 법이 더 강해서 우리에게 육체적으로 환난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단이라고 정죄를 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교회라는 세상에 의해서 우리는 환난을 받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다.

그것을 악한 일이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칭찬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악한 일이라고 하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당장 십일조 하나만 해도 그들은 여러 가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단의 미혹을 받은 자들이라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셨으면 내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고 주님의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환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난을 당하지 않고 있습니까?

지금은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떤 모양이라도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육적으로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육적인 환난보다도 영의 일로 인하여 환난을 당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가 무엇입니까? 세상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그것을 죄라 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이 정신까지 이상해 졌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죄가 무엇인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수가 그것을 모르면 그것을 아는 소수는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의가 아니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한다는 그 말씀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압니까?

이 의를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이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십일조를 내는 것이 악한 일이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십일조가 악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심판입니다

사단이 이미 죽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정신이 나갔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가를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누가 보혜사가 오셔서 세상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깨닫고 있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참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은 다수입니다 그 다수가 깨달을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그 다수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환난을 당하지만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 중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비록 환난을 당할지라도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기신 것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우리의 이김은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 역시 세상을 이기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더구나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피하려 하고 있다면 그는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이 더 낫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다수에 속해 있는 세상에서 소수이기 때문에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7절을 보겠습니다. (290)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환난 중에 참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사단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을 주시고 그 영이 부활을 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 육체적으로도 환난을 당하고 또 영적으로도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 속은 날로 새롭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입니다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 인생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인생은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노력을 해도 안 됩니다 그것을 후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후패하여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기독교인들은 그 겉 사람을 새롭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 겉 사람은 안 됩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우리 육체는 죄로 인하여 후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망이 찾아오고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썩어 없어지는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영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환난의 연속이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은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 팔십년을 생각하면 절대로 잠시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의 시간에서는 그저 점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시입니다

어느 정도 잠시인가 하면 마치 안개가 끼었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이 잠시 받는 환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은 그 환난이 때로는 너무 크고 너무 길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니 초대 교회 같은 경우에는 생명까지도 빼앗아 가는 환난이 왔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를 하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있는 성도는 절대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의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참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우리는 거의 환난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나 중세 시대에 비하면 우리는 환난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환난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환난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참을 수 있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환난이 왔어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닻 같은 믿음이 있어서 소망을 가지고 참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정말 잠깐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정말 잠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프고 때로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왜 사도 바울이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소망으로 가지고 있는 천국과 영의 부활을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은 아주 잠깐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은 기꺼이 자기 생명까지도 내 놓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복음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 설교를 하고 그는 이스라엘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까지도 자기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저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주님께 자기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그런 용기는 없습니다. 만약에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두려워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면 또한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으로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겉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잠시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는 어떻게 우리에게 환난이 올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환난이 없이 지나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이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한 성도는 잠시 받는 그 환난을 경히 여기면서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일반 성도도 물론 환난이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는 더욱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환난이 오더라도 영의 생명이 있는 성도는 잠시 받는 그 환난이 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환난이 오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소망입니다

소망이 없는 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아니 소망이 없어서 종교적 신념으로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도 받아들이는데 우리는 소망이 확실히 있는 성도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극히 경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21:36절을 보겠습니다. (133)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5:17절을 보겠습니다. (333)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

이 세상 모든 종교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자기들의 전유물이나 되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 자기들만이 기도를 하는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종교는 다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샤머니즘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도가 샤머니즘이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기도는 거의 샤머니즘에 빠져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이 샤머니즘적인 행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당도 기도를 합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무당이 더 많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 속된 말로 영험하다고 하는 무당들은 늘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들이 기도를 합니까? 자기들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고 또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 시대는 예배, 찬송, 기도가 진리를 가로 막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배와 찬송은 나중에 기회가 되는 대로 말씀을 하기로 하고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겠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무당의 기도와 차이가 무엇입니까?

내용은 같습니다.

다만 그 기도 대상이 다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고 무당은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참으로 기분이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누구에게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어도 그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 자가 누군가를 바로 알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아니 그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 자에게 하는 내용이라고 하면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어도 그 기도는 샤머니즘적인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정말 이 말씀 그대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쉬지 않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을 시각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고 마치면서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에 있는 문자 그대로 쉬지 않고 기도를 하려고 하고 있고 목사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이 신령하다는 것을 은근히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왜 합니까?

이 시대는 기도를 왜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데 왜 기도를 해야 하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의 문자를 보고 쉬지 말고 기도를 하라고 하니까 기도를 쉬지 않고 하면 마치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너무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는 늘 말씀을 드리지만 내가 기도를 하는 그 내용을 누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인가를 정말 바로 알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아무 것이나 가지고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저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기도를 하라고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왜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까?

은사입니다 이 은사가 다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구원을 받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아무 것을 가지고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불의의 삯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무당이 기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기도와 무당이 하는 기도가 같으면 그 기도는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고 있는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 기도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무당이 하는 기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제가 이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무당이 하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지 그냥 아무 기도나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기도합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 기도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를 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이 기도에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기도는 전혀 하지를 않고 무당이 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것은 영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자기들의 마음이 둔하여 져 있으면서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지적인 능력이 있어서 모두가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탕함이 무엇인지 술취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그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늘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자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방탕하면 안 됩니다 술취하면 안 됩니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기도를 하고 바리새인과 같이 외식으로 기도를 하는 그 행위를 보면서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는 구원을 받은 성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런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아니 무당의 기도입니다 성도는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깨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위해서만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2:13절을 보겠습니다. (256)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너희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씀을 하면서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인가는 이제까지 충분히 말씀을 드려서 알고 있습니다.

예배입니다

성도는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는 성령이 오심으로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각각 다르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에 대해서 로마서 12장에서 이제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6-8절까지는 은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13절까지는 은사를 가진 자가 어떻게 자기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는 자기들의 교리에 매여서 성경을 억지로 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입니다 이 둘이 뭐가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우리가 본 유대교나 지금 이 시대 우리가 보고 있는 기독교는 사실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는 그들의 생각은 조금도 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은사도 모르고 있습니다.

은사를 모르다보니까 은사를 가진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문자로 보고 있는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고 앞 뒤 문장은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은사를 알아야 하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 줄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다보니까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교인들 중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 교회일수록 더 심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있는 교회일수록 이런 말씀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영의 일을 모르다보니까 성경을 보면서 육체적으로 그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누구에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은사를 받는 사람입니다

6-8절까지의 은사를 받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은 은사를 행함으로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고 그것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사 자들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최소한 집사 이상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 집사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집사는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이제 막 복음을 들은 성도들에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15:8절을 보겠습니다. (286)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성도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기독교는 본질에서 너무 벗어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들에게 성령이 오시지가 않아서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이런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누가 어떤 일을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쓸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쓸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부족한 것입니까? 쉽게 말씀을 드려서 초대교회에는 종들도 있고 해서 그들은 정말 끼니를 배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교회 안에서 형제가 굶고 있다면 당연히 육적으로 그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이 무엇인가를 신명기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천국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그 천국을 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가난한 자입니다 그 가난한 자에게 쓸 것을 꾸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고 율법에 정한 그대로 우리가 꾸어 달라고 하면 손을 펴서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넉넉히 꾸어 주시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어떻게 공급합니까?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의 율법을 알아야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해 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아는 성도는 그가 천국을 어떻게 가야 하는 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어떻게 공급하는가 하면 이 신명기의 말씀을 가르쳐 주면 됩니다.

누가 줍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요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시대 은사자들은 어떻게 성도들에게 쓸 것을 공급하는가 하면 신명기의 말씀을 알고 가르쳐 주면 성도들의 쓸 것이 공급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인과 성도는 다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수많은 것을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끊임이 없이 기도를 하고 있고 목사들은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는 오직 천국만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천국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가는데 쓸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은사자들을 통해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주려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의 목사들은 진리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여러 가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것을 자기들이 주려고 하는데 그것으로 도리어 교인들이 사망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목사와 교인들이 서로 그것을 주고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4:19절을 보겠습니다. (323)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누가 공급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꾸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에 나온 사람은 성경을 보아도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있고 그 은사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전해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하는 거룩한 산 제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일을 했습니다. 그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을 했습니다. 그것을 빌립보서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로다.

사도 바울도 이 일을 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계시를 받은 후에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방의 성도들에게 무엇을 공급했는가 하면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게 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복음을 알아서 공급을 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은사를 각 사람에게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면 먼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면서 어떻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할 수 있습니까?

이 시대는 모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의 쓸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과 단어만을 보다보니까 이런 말씀들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성도들의 쓸 것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가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받는가 하면 주님께서 우리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꾸어 주심으로 해서 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오직 예수입니까?

예수 안에 우리 성도들의 쓸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면서 예수는 사라지고 율법만 성행을 하고 있습니다.

풍성합니다.

넉넉히 꾸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은사를 받은 자들은 교회 안에 들어오는 성도들에게 이것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공급을 할 수 있는가 하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아야 그것을 공급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입니다

그리고 천국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한 가지의 목적입니다 영생이 없다면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3:2절을 보겠습니다. (338)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로마서12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은 영의 일입니다 육적으로 사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이며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손님들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손님들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손님이라고 하고 있고 다른 성경에서는 나그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전체를 나그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입니다

우리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왜 나그네인가 하면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나그네들의 마음에는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교회 밖에 세상 사람들도 자기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왜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써야 하는가 하면 그 중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구원을 하시고자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있습니다. 나그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을 하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우리는 최선을 다 해서 그를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대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밤낮으로 삼년 동안 너희를 눈물로 훈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도 잃어버린 한 어린 양을 찾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복음을 알고 있다면 정말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힘써 행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