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7:7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영입니다
성도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이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게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영생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새로운 영이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있는데 영의 새로운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다 보니까 섬기고 싶어도 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쇠하였습니다.
아니 반드시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썩어 없어지는 것에 사람들은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의 비밀을 알면 그 썩어 없어지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영의 비밀을 모르니까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어떻게 역사를 하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섬기라고 하니까 내가 무엇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을 느끼지도 만지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섬길 수 있습니까? 영이라는 것을 알면 섬긴다는 뜻을 이해할 수 있지만 영을 모르니까 자기 육체로 섬기면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막연하게 섬기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해 주어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심으로 믿어지는 역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육체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영을 모릅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영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불교에 있는 스님이 성경을 보고 알 수 있는 지식의 초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점점 더 초보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초보로 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까지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구원이 영의 일이기 때문에 영의 일을 알고 있는 성령을 보내주셔야지 만 우리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어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을 전혀 모르고 성령이라고 하면서 샤머니즘에 빠져 있습니다.
영의 지혜입니다
영의 일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이상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정말 우리에게 이 지식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영의 일이 믿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고 하지 마시고 그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의문의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일이 불가능 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의문의 묵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그것을 내어 버려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의문의 묵은 것이 하나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의문의 묵은 것을 내어 버리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의문이 없으면 이단이라고 까지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유대교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유대교나 기독교나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고 있고 기독교 역시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파가 있고 정통이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습니까? 똑같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이들 역시 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의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이단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룩입니다
그것이 적게 들어갔느냐 많이 들어갔느냐의 차이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누룩이 없는 떡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누룩이 몇% 들어간 떡이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룩이 없는 떡과 누룩이 10% 들어가 있는 떡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누룩이 없다고 했지 누룩이 조금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으로 섬깁니다.
그리고 의문으로 섬깁니다. 그러면 영으로 섬기는 성도는 의문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또 의문으로 섬기는 사람에게는 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온갖 율법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만 지킵니까?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은 다 율법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 뿐 아니라 성경에도 없는 것을 교회 안에 끌고 들어와 율법을 만들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성도는 누룩이 없는 자인데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누룩까지도 끌고 들어와서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누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영의 새로운 것은 여러분에게 거할 수 없습니다.
더럽습니다.
그리고 깨끗합니다. 이 둘이 서로 공존할 수 있습니까?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공존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더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깨끗한 것이라도 더러운 것과 섞이게 되는 순간에 그것은 더러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은 깨끗합니다.
그리고 의문은 더럽습니다. 이 둘을 함께 섞으면 더러움이 있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내어버려야지만 내 안에 깨끗한 영이 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묵은 누룩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율법의 행위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함께 하지 못 합니다
그것을 함께하는 순간에 간음하는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율법을 지키는 순간에 우리는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을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고 그대로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왜 벗어났는가 하면 율법은 우리로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이 율법은 죽고 사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열매입니다
사망을 위하여 맺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율법이 하나님의 성도로서 조금 더 의롭게 사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10:1절을 보겠습니다. (신 362쪽)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제까지 율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우리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서 죽어서 이제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내가 하는 이것이 왜 나쁘냐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에서 아무리 타당성에 있다 해도 성경에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한다면 율법을 지키면 반드시 사망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이 왜 나쁘냐고 말을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왜 율법이냐고 말을 합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백번 옳습니다. 저 역시도 예전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니 저 뿐 아니라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정도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망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지키면 그 열매가 사망이라고 하면 사망입니다 율법이 그것에 대해서 증거를 해 주고 있지만 이 시대 사람들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열매입니다
율법의 열매가 사망이라고 하니까 분명히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다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율법을 세우지 않았으면 좋지 않으냐고 말할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에덴에 선악과를 두지 않았으면 아담이 따 먹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 자체를 비판을 합니다.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반포하셔서 사람들이 다 사망에 이르게 했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 자체가 나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 중에는 율법이 나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는 이 말씀은 이제까지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이해를 하는 사람 중에는 차라리 하나님께서 율법을 반포를 하시지 않았으면 되는데 왜 율법을 반포하셔서 우리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억지를 부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변명을 하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율법의 정욕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니까 그럼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죄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혹시라도 율법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까봐서 사도 바울은 정말 율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도 사울이 로마서 그리고 갈라디아서 그리고 다른 성경에서 왜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분명히 히브리서에서도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에 그림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고 있지만 이 율법은 장체 오는 좋은 일에 그림자입니다 그림자가 무엇입니까? 참 형상에 빛이 반사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율법은 필요합니다.
그것이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한다 해도 우리에게 반드시 율법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반포하셨습니다. 왜 필요한가 하면 그림자로서 충분히 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 형상의 그림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은 일로 생각하다가 사망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율법은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림자라는 의미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림자라고 했으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 그 좋은 일에 그림자라고 알면 되는데 사람들은 좋은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의 그림자로서 율법을 보아야 하는데 성경에 분명히 그림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율법을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지켜야 하는 도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못 알면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을 로마서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율법은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알려고 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에 율법을 보고 복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 막연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좋은 일에 그림자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모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율법이 죄냐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을 그냥 기록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좋은 일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율법을 지키면 죄라고 악이라고 말씀을 하면 꼭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구약의 율법을 안 보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약의 율법을 보고 있습니까?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보지도 않고 있고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편지에서 구약의 율법을 바로 보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좋은 일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율법을 나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좋은 일에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율법을 죄로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으로 죄를 언제 알았습니까? 그가 율법을 지킬 때는 율법으로 죄를 알지 못 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율법의 흠 없는 의를 가졌을 때는 죄를 알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자기에게 계시가 되니까 율법을 보고 죄를 알았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좋은 일을 보니까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평생을 교회 안에서 죄인의 괴수로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여러 가지 율법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율법이 아니고는 우리는 죄를 알지 못 합니다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서 우리가 살인을 한 자로 살았다는 것을 이제 복음이 오니까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살인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고 나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고 살인한 자였고 간음한 자였고 우상숭배를 한 자였습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내가 무슨 일을 했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시지 않았다면 살인을 했는지 우상숭배를 했는지 다른 신을 섬겼는지를 모르고 살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사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고 나니까 율법에서 죄를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그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죄를 모르면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우리는 이 율법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율법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고 나니까 좋은 일에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았습니다.
죄를 알았겠습니까?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좋은 일에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보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좋은 일에 그림자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어 필요합니다.
다만 사람의 이성이 문제입니다
율법을 보면 죄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왜 주셨는가 하면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보고 죄를 알기보다는 그 율법을 지키는 죄를 범함으로 해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신명기7:25절을 보겠습니다. (구 274쪽)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그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율법을 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아라비아로 가서 율법을 알았을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인용입니다
로마서7장7절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어느 율법을 인용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탐내지 말라는 말씀 앞에 ㄱ) 자가 있고 그 아래를 보면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을 인용해서 말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물론 전혀 틀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장의 연결을 보면 분명히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다면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보다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인용입니다
그 말씀이 어디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가를 알려 주는 것은 성경을 보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알고 인용을 하면 안 됩니다 제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을 인용한 것이 완전히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장의 연결을 볼 때는 신명기7장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인용입니다
저 역시도 이 부분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인용을 이렇게 표시를 하다보니까 인용이 되어 있는 것만 인용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거의 모든 말씀은 성경에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성경을 편찬한 사람들이 인용했다고 표시한 것만 인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인용이 되어 있는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이것이 마치 성경의 정답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것을 인용을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이 말씀을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십계명을 인용했다고 성경 원문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차라리 이 인용을 안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대는 이렇게 표시를 해 놓은 것만 인용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거의 모든 말씀이 다른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지금 로마서7장의 말씀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 인용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앞에 있는 많은 말씀들도 인용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인용은 보면서 이 말씀만 인용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말씀은 인용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니까 도무지 풀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사람들의 생각이 굳어져 있습니다. 성경에 인용이 되어 있다고 표시가 되어 있는 말씀만 인용이 된 것으로 알고 표시가 안 되어 있으면 인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풀고 있습니까?
그 문장만을 보고는 어느 누구도 풀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 말씀이 어느 말씀과 연결이 되고 인용이 되었는가를 알아야 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학자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렇게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용이 안 되어 있는 말씀은 그 문장만 보고 해석을 하려고 하다가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첨삭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성경 원문만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잘못 인용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말씀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결국에는 사망의 길로 가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원문입니다
텍스트만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은 너무 잘못 편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첨삭된 것을 보면서 마치 그것이 성경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 하나가 진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성경을 깨닫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사람에 의해서 변형이 되고 있다면 그만큼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들의 열심이 성경을 상고해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장에서는 내가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사도 바울 본인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탐내지 말라
이 시대는 성경은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까지도 성경을 모르고 편찬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성경이 이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어디서부터 출발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탐내지 마라
이 율법을 이 시대 교인들이 알고 있습니까? 신명기7장25절의 율법을 이 시대 목사들이 알고 있습니까? 아마도 한 사람도 이 율법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도 역시 이 율법의 의미를 모르다보니까 인용하는 구절을 십계명에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렵건데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탐내지 말라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이 없었다면 사도 바울은 내가 탐심을 알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가 무슨 탐심을 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탐심을 냈습니다. 그가 바리새인으로 살 때 얼마나 탐심을 냈는가를 스스로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율법을 알았기 때문에 탐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탐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탐심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율법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 율법도 인용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율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조각한 신상입니다
신상, 우상 같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육의 일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 영의 일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육의 일을 보면서 이 시대는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율법을 보고 사람들은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입니다
왜 이 율법을 정하셨다고 생각합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하지 않고 그것을 쳐다보는 것조차 금하고 있는데 성경은 율법으로 정해서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이 아무 상관이 없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올무가 되고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보면서도 그림자를 걷어 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가증히 여기십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에서 탐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고 탐심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면 그 사람은 교회 안에서 탐심만 부리다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만 하다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렇게 탐심을 부리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탐심을 알지 못 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율법을 보고도 탐심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탐심을 부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율법을 보고 탐심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더 이상은 탐심을 부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각한 신상입니다
로마서1장에서 우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상과 신상은 같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점령해서 들어가는 가나안 땅에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이 있습니다. 그 신상에 은을 입히고 금을 입혔는데 그것을 탐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조각한 신상이 있습니다.
조각한 신상들이 가나안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있지만 아무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율법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 안에 마치 가나안 땅에 거민들이 조각한 신상과 같은 율법들이 우상이 되어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에 은을 입히고 금을 입혔는데 이 시대 교인들이 다 탐을 내고 있습니다.
은이 무엇입니까?
므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금은 달란트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생명과 믿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고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의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우상을 너무도 탐을 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이 시대 수많은 조각한 신상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은을 입히고 금을 입혀 놓아서 그것을 모두가 탐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탐하고 있는가 하면 바리새인 못지않게 이 시대 역시 율법의 의를 탐하고 있습니다.
다 올무에 걸려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조각한 신상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은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7절부터는 자기가 어떻게 살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조각한 신상에 입힌 금이나 은을 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느 정도 탐했습니까?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정도로 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율법을 알고 나니까 자기가 지키고 있었던 율법의 의가 다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모르면 사도 바울은 평생을 탐을 내면서 살다가 마귀의 자식이 되어서 지옥으로 들어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탐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탐내고 있습니까? 조각한 신상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너무 많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탐심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깨닫지를 못해서 올무에 걸려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신상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율법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 율법에 은을 입히고 금을 입혀서 모두가 탐을 내고 있습니다. 더 많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탐을 내고 있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말씀들이 깨달아지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우상을 탐내다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이 시대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탐내지 말라는 이 율법을 보고도 탐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에 은을 입히고 금을 입히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그것이 은이 되기도 하고 금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들도 하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사망입니다
문자를 아는 것으로 성경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모두가 탐심에 빠져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는 죄를 알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없었다면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탐을 내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탐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탐내지 말라는 그 단어의 의미가 나쁘니까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느 것을 탐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을 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조각한 신상이 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천국 모형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교회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가나안에 가지까지는 분명히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일단 가나안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그곳은 교회가 됩니다. 그 교회 안에 조각한 신상에 은을 입히고 금을 입혀 놓았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아시고 율법에 탐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증한 것입니다
그 가증한 일을 하면서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율법의 올무에 걸려 사망의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성경에서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3:5절을 보겠습니다. (신 327쪽)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아마도 이 시대 교인들에게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줄을 모를 것입니다 아니 제가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자기들은 절대로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상이 구약에만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서도 우상 숭배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성도들이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우상을 숭배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우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말씀은 드리지만 성경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부처와 같은 조각한 우상을 숭배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성경을 초등학문으로 만들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탐심을 부리지 말라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이 지체가 살아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지체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으니까 사도 바울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가 탐심을 내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탐심을 내고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탐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우상 숭배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하면서 자기도 그렇게 되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체입니다
율법을 누가 지키고 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땅에 있는 지체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탐내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지독한 율법주의자였는가를 로마서를 통해서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탐심을 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보니까 탐심이 율법을 지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몰라서 평생 탐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탐심이라고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탐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보고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지 못하고 의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탐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느 물건을 갖기 위해서 탐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조각한 신상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각 사람이 행한 율법입니다 그 율법에 은을 입히고 금을 입혀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에 탐을 내면서 다 올무에 걸려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 모르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있지만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체입니다
이 탐심을 없애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지를 않고 교회 안에서 탐을 내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하나라도 탐내서 가지려고 한다면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자기가 율법을 안 지키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킵니다.
그것이 탐심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그는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지만 그것이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이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율법을 안 지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교회 안에 들어와서 평생 율법을 지키다가 사망으로 가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7:8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죄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입니다. 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바리새인으로 살아온 것을 로마서7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죄입니다.
그 죄가 기회를 탔습니다. 어떻게 기회를 탔는가 하면 계명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의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에만 나오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탑니다.
어떠한 일이나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기회를 어떻게 타는가 하면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 사도 바울의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어서 자기가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율법을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깊이 빠져 본 사람만이 압니다.
아니 성령이 오셔서 자기가 예전에 지키던 율법이 사망의 열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율법을 지키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수많은 목사들이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교회입니다
축복은 아주 적은 수가 받습니다. 모두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에 빠져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유기하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은혜라는 말 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내가 이 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 주셔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우리 성도는 정말 은혜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경을 깨닫게 되면 정말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탐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보고 탐심을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릅니다.
아니 이제까지의 교회가 다 그렇게 성경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죄가 기회를 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깨달아 질 수 있습니까? 저는 늘 성경을 보면서 제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가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에 더욱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죄가 그 안에서 각양 탐심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바리새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예전에는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기 전에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입니다
아니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복음을 주셨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깨닫고도 은혜를 모르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가능합니까?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가능합니까? 그러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함으로 해서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우리가 굳게 서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보고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도 율법이 탐내지 말라는 그 말씀을 몰랐으면 역시 탐을 내면서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율법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아니 이제 더 이상 탐을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과정이 있었습니까?
우리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율법의 의로는 감히 사도 바울을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역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모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로마서의 말씀을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제까지 로마서 강해를 썼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죄가 어떻게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는가를 깨달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입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더 진심이 있어서 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정말 이런 말씀들을 깨달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놀라운 생각밖에는 안 듭니다.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제는 성령의 감동으로 탐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경을 보고 율법을 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탐심을 내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언12:12절을 보겠습니다. (구 923쪽)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각양 탐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은 자기들이 탐심을 이루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악인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악인이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탐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도리어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악인들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고 있지만 그 탐심을 도리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탐심을 부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교회에 탐심을 부리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적인 탐심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 나와서 정말 헌신 적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이 다 탐심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그것이 탐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악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탐심을 부리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악인입니다
누가 악인입니까? 사람의 이성으로 악인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이성에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같이 보이는 그 사람이 아니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몸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이 탐심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우상이 되어서 또 다른 사람에게 탐심이 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불의의 이를 탐하게 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 탐심을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십일조를 하면 자기도 하고 싶어 하고 있고 누군가 새벽 예배를 빠지지 않고 나가면 자기도 나가서 기도를 하고 싶어 합니다.
탐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탐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탐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합니다. 그 불의의 이가 무엇인가 하면 율법의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불의의 이를 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입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마치 있는 것처럼 만들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 다른 사람까지도 탐심을 내게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교회는 악인들로 가득 차 있지만 어느 누구도 성경을 보고 악인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나쁜 의미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일부의 사람이 악인이라면 성경에 굳이 악인이라고 말씀할 필요성이 있습니까? 모두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일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경계입니다
그리고 책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느 일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이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자기 일을 직접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는 교회 안에서 다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악인이라 해도 자기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니까 의인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난도질을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모두가 자기들에게 이로운 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뜻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좋은 의미는 자기가 하고 있고 나쁜 의미는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누군지 의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는 의인이고 다른 누군가는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성경에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 했습니다 그가 율법의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구원을 못 받았습니다. 저를 비난해도 좋고 저를 욕해도 좋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정의를 하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까?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모두가 하고 있는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그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저는 혼자라도 상관없습니다.
정말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해도 저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킬 바에는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다가 죽겠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서 악인이 받을 형벌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사야56:11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7쪽)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개들입니다
성경에서 누구를 개로 비유로 하고 있습니까?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개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들이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을 대표하는 한 부자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주의를 따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개들입니다
이스라엘을 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꾀나 도덕적으로 잘못하면서 산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민족보다도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탐욕이 심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탐욕이 심합니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율법을 아주 잘 지켰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잡혀 갔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타락을 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한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수십 년을 교회 안에서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개가 되었기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율법을 대표하는 나라인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해서 율법주의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도덕적인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개들이 되어서 탐욕이 족한 줄을 모르다보니까 그럼 율법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보라고 포로로 잡혀 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포로가 되어서 7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들은 더욱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의 조상이 율법을 잘 못 지켜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갔다고 생각하면서 지독한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율법을 탐하는 자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각양 탐심을 이루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각양 탐심을 이룸으로 해서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 율법을 알고 나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탐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살았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죄를 짓고 싶어도 질 수 없습니다.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율법을 폐하여야 하는가 하면 아니 죽여야 하는가 하면 죄가 죽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있으면 죄가 기회를 타서 우리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게 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법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죄를 짓고 싶어도 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없애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알았습니다. 율법을 없애라고 하는 말씀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탐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법이 우리에게 없으면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율법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죄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탐내지 말라는 그 말씀이 있어서 우리가 이 시대 우상 숭배를 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아예 안 보라는 뜻에서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기회를 타는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9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내가 한때는 율법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알게 되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로마서7장은 사도 바울의 개인의 고백이라고 해도 맞습니다. 그가 실제 경험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율법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망입니다
율법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율법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는 교인의 숫자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은 부흥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없는 부흥을 이루었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 이후에 어느 국가에서도 없었던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인구 대비로 그리고 연수 대비로 이렇게 빨리 부흥을 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축복해 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외적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와서 부흥을 이루었지만 그 대신 진리는 사라졌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아니 애초부터 복음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입니다
기독교는 이미 성경에서 너무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이 공허하게 들릴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영적으로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다른 복음이 들어옴으로 해서 죄의 정욕이 역사를 해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율법 없이 살았습니까? 그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너무 잘 지켰고 율법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를 못했을 때는 내가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법을 깨닫지를 못 했습니까? 율법에 탐하지 말라는 법을 보고 그것을 깨닫지를 못했을 때는 사울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그가 바리새인으로 살 때는 율법을 깨닫지를 못해서 자기가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율법을 깨닫지를 못하고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율법을 지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실상은 같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이 시대는 신약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법을 깨닫지를 못해서 여러분이 살아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예전에 율법을 지킬 때 율법을 깨닫지 못 했다고 하면서 그때는 내가 살아서 율법을 지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내가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하면 자기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1: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37쪽)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 있을 때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사람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내가 살면 안 됩니다
말로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감성적인 말에 이 시대 교인들은 다 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죽었으면 내가 살면 안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율법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같다는 것을 또한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법을 깨닫지 못하면 내가 삽니다.
어떻게 삽니까?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법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 당연히 법은 더 이상 지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법을 알지 못 했을 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지키면서 훼방자로 핍박자로 포행자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자기가 죽었다고 입에 바른 말로는 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들은 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깨달은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가 사망에 이르는 것을 알고도 지킬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아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지켜서 바리새인이 아니라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살려서 내가 지키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 시대는 종교인으로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살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법을 지키고 싶어도 절대로 지키지 못 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는가 하면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율법을 깨닫지 못해서 자기가 살아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이 들어왔습니다.
율법이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죄가 살아났습니다. 교회 안에 계명이 들어오면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게 되면 나는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순간에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으로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너무 단순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사람은 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았습니다.
계명이 들어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수많은 계명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율법이 계명이 되어서 들어와 있습니다. 제가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계명이 들어와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계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고 매너리즘에 빠져서 교회가 유전으로 지켜왔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 계명을 지키고 있지만 그 계명으로 사도 바울이 내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전입니다
사람들은 이 유전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에 들어가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전통으로 해 왔던 행위들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이 그것으로 죄가 살아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습니다.
계명이 살아나면 여러분은 반드시 죽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계명이 살아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계명이 죄가 되어서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율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서 계명이 되어서 죄가 살아나서 사망을 당하는 길로 가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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