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야고보서 강해

야고보서 강해 32강

윤주만목사 2017. 4. 4. 16:34

야고보서5: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76쪽)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병이 어떤 병인가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즘 교회는 거의 병원이 되다 시피하고 있고 또 그것을 여러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얼마나 진리에 반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어느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도 늘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행위들은 이 세상 모든 종교들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영의 일입니다.

성경을 육적인 일로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또 자기에게 필요한 문장만을 인용을 하면서 육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 다음에 이 병든 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보아도 압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성경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성으로 먼저 생각을 하고 나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실제 그런 연구들이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자기 이성을 가지고 보는가를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글을 보게 합니다.

거기에는 틀린 글이나 문장들이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글을 보고 틀린 것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틀린 글을 보고도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이성적 지식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실험을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성경도 역시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보고 있습니다. 정말 자기 생명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면 보고 또 보면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혹시라도 틀리지 않은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쉽게 생각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합니다.

육체에 병이 든 자를 낫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병든 자는 육체의 병이 아니라 영의 일에 있어서 병든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병든 자에게 기도를 하면 믿음이 있는 성도가 기도를 하면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병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병든 자입니다. 그러나 자기 행위가 좋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병든 자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의 기도를 하지도 않고 그저 이 세상 종교에 의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는 반드시 한 번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육체를 살려서 무엇 합니까?

이상하게도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는 그들이 이 세상 종교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보다 육체에 대해서 더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육체가 한번 죽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성경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암 병이 걸렸는데도 기적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심지어는 그런 일을 해서 환자들을 괴롭게 하고 돈을 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병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에게서 그런 은사가 조금이라고 나타나기 시작을 하면 그 일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병이 들었다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말기 암에 걸렸을 때는 이제 주님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것이 바른 성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병든 자들을 쉬지도 못하게 하고 또 조용히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못하게 하고 더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 이 시대 종교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기도입니다.

병든 자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병이 들어 있는 사람이 장로를 청해서 기도를 받게 되면 그 기도로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장로는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1:30절을 보겠습니다. (신 277쪽)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주의 만찬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의 만찬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을 먹고 있으면 건강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보니까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병이 들었습니까?

주의 만찬을 바로 먹지를 않아서 병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르치던 고린도교회 안에서 이렇게 병든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육체의 병이 아니라 영의 일에 있어서 병든 자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서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둥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각이 없는 병입니다. 성령께서 책망을 해 주시는데도 감각이 없어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을 가르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혼자서 서지를 못하는 병이 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모르다 보니까 서 있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소경이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보아도 그 안에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물론 육적인 병을 고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병들은 다 영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영생을 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네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을 꼭 하셨습니다.

 

육적인 병을 통해서 영적인 병을 고쳐 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보고 마치 그런 육적인 병을 고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고린도교회와 같이 주의 만찬을 먹고 있지만 병이 들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주의 만찬을 먹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 병이 들고 말 것도 없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주의 만찬을 먹지 않는데 그들에게 어떻게 생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 주의 만찬을 먹어도 병이 드는데 주의 만찬을 먹지 않으면 그들은 다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 시대는 주의 만찬을 먹도 있는 성도가 거의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주의 만찬을 먹고 있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의 만찬을 먹고 있다면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 발달을 한 시대에서 그들이 먹고 있는 만찬이 인터넷에 올라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시대는 병이 들 것도 없이 모두가 음녀에게 그리고 짐승에게 미혹이 되어서 죽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병이 들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상태를 말 합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병이 들고 말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최소한 주의 만찬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의 만찬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없어서 병이 들었다는 것 자체도 맞지가 않습니다.

 

주의 만찬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거의 실족을 하고 넘어지려고 하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주의 만찬을 먹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은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죽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안 지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은사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가려지고 있고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병이 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병이 든 자가 있으면 장로를 청해서 기도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장로가 기도를 해 주고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참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보다 사실은 믿음이 있는 성도가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율법을 버렸고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성화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주의 만찬을 잘 먹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로 외식을 하고 있고 찬송가로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병이 들어 있는 아주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잠언18:14절을 보겠습니다. (구 931쪽)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사람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심령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죽을병이 들었다면 아무리 강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 해도 병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바로 영혼입니다.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병이 젊었을 때 걸리면 그것을 마음이 강한 자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상하면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을 먹고 있지만 영의 일로 병이 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니고는 일으키실 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켜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병이 들어서 믿음으로 기도를 하면 주님께서 저를 일으키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가 어떤 병에 거렸는지도 모르고 있고 또 가장 기본이 되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조차 정의를 못 내리고 있습니다.

 

병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육체의 병은 자기 몸이 아프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영적인 병은 성경을 몰라서 자기가 어떤 병이 걸렸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병을 알아야 믿음의 기도로 치유하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 병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진리입니다.

진리가 전해져야 내가 병이 들었는지 아니면 건강한지 알 수 있는데 병이 들었다는 것조차 분별이 안 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해 주어야 주님께서 저를 일으켜 주실 수 있는데 믿음도 모르고 병도 모르다 보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저 육체적인 병은 잘 알고 그것을 가지고 정죄를 하기는 참 잘하는데 정작 중요한 영적인 병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일으켜 주십니다.

그것은 믿음의 기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있는 성도가 그것을 분별을 해 주고 그가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믿음이 있는 성도도 없고 병이 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죽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열심입니다.

그런 자기 행위를 보면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열심이 자기를 죽게 만들었는데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일으켜 주고 싶어도 이 시대는 병든 자가 없고 죽은 자만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은사를 통해 체험을 하고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 성화가 되고 있습니까? 이들은 병은 자가 아니라 아예 죽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어 있는 자들은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조차 인지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죽었는데 병이 들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만찬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진리도 사라졌고 또 주의 만찬을 먹는 교회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내 몸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명이 있어야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죽은 자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만찬입니다.

반드시 성도들은 주의 만찬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의 만찬을 먹는 교회가 없습니다. 솔직히 율법과 은사 그리고 육체의 성화에서 자유로운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은 율법주의가 아닌 교회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율법주의 교회입니다.

 

제가 구원파를 안 가봐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영지주의입니까? 그들은 십일조를 내고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율법주의가 아닌 교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 교회는 율법주의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16:9절을 보겠습니다. (신 175쪽)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병이 들었습니다. 그가 혹시 죄를 범했을찌라도 사하심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이 들었는데 그가 장로를 불러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병만 들은 것이 아니라 그가 믿지를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의 만찬을 먹고 있는 성도라면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믿지 않는 죄를 지었어도 사하심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의 만찬을 먹고 있는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다 버렸는데 그가 무슨 죄를 범하겠습니까? 그러나 병든 자는 모르는 일입니다 혹시 병이 든 자가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를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장로가 하는 기도가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의 기도가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진심으로 기도를 한다 해도 그것은 믿음의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기도라는 것은 반드시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도 없는 자가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 기도가 믿음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믿음의 기도라는 말씀은 그 사람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 반드시 율법을 버리는 행함이 있는 성도라야 합니다.

 

아무나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으로 기도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행하면서 자기가 믿음으로 기도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며 그 기도를 받는 사람 역시도 속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저 종교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지만 실제 그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병을 알고 죄를 아는 사람만이 믿음이 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기 않는 것이 죄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그것이 죄입니다, 결국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이 죄는 영적인 죄로 그 영혼이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사하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죄를 범하면 사하심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 혹시 그가 죄를 범했을지라도 사하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가 되는 말씀이 아니라 혹시 라는 것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죄로 발전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병이 들었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주의 만찬을 먹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병을 깨닫지 못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하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런데도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믿음은 전혀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했다 해도 믿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누가 보기에도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자기들이 어떤 병에 걸렸는가를 몰라서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디모데전서1: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37쪽)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안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하나님을 안 믿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모르고 율법의 행위에 빠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 믿음이 오기 전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믿지 않는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이방의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았지만 율법주의에 있을 때는 자기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지키고 있습니까? 그가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성도라고 인정을 받을지라도 율법의 한 모양이라고 지키고 있다면 그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다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가 믿는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고 또 자기 행함을 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으로 자기가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믿음이 오기 전에는 믿지 않는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유대교인이나 기독교인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있을 때 믿지 않았고 지금 이 시대는 기독교에 있으면서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유대교에 있으면서도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죄를 짓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지를 못 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오고 나니까 그때는 자기가 믿지 않았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그들이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지 않는 영적인 죄입니다, 혹시 그런 죄를 범했을지라도 믿음의 기도는 사하심을 얻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오지 않아서 유대교에 있는 것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받아 내가 병이 들었는지를 바로 분별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5: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76쪽)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

이 말씀을 보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5장을 계속해서 보았지만 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는 육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육적인 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적인 죄를 고해야 합니까?

내가 지은 치명적인 육적인 죄를 서로 이야기해야 합니까? 지금 교회 안에서 알파코스라고 하면서 서로 죄를 고하는 그런 것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명에서 몇 십 명단위로 그 코스가 진행이 되고 있는데 그 시간 중에 서로 자기 죄를 고하는 그런 시간이 있어 아무도 모르는 죄를 고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혀 모르고 믿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미혹하는 자들이 나와서 자기 죄를 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왜 합니까?

그리고 야고보서가 지금 그런 죄를 서로 고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죄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죄를 짓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죄입니다.

그것은 육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아가다 보면 내가 이제까지 해 온 일들 중에서 죄라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했는데 그리고 아직까지 진리를 몰라서 그저 종교에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해 왔는데 그것이 나중에 보니까 영적인 죄를 진 일 입니다.

 

그것이 병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기 전에는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성찬식이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 합니다. 교회가 2000년 가까이 그런 행위를 해 왔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성찬식이 죄라고 하면 저를 보고 이단이라고 공격할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입니다.

성경에서 주의 만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어디에도 성찬이라는 단어조차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설령 성찬이라는 단어가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을 본을 보여 주신 것이지 지금 교회에서 하는 것과 같이 작은 빵을 먹고 작은 양의 포도즙을 마시는 그런 행위를 가르쳐 주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저에게 이상하다고 이야기를 할 사람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그런 행위를 육적으로 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의 만찬을 먹어야 하는데 그런 행위를 함으로서 자기들이 주의 만찬에 참여를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입니다.

주의 만찬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듣는 것이 주의 만찬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행위로 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성찬식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라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죄를 서로 고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 뿐 아니라 신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 중에서도 이렇게 죄가 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발 씻는 것이라든지 일천번제를 한다고 하는 행위라든지 또 여러 가지 은사를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죄입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입니다.

그때 자기 죄를 서로 고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짓는 죄를 서로 고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몰라 성경을 보고 그것을 행위로 하고 있는 그런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으면 서로 고해서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죄입니다.

도덕적은 죄는 서로 고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진짜 샤머니즘 적인 행위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종교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기억지 않는 죄를 왜 사람들이 서로 그것을 고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잘하는 일로 생각하고 그런 샤머니즘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 세상 종교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시편91:15절을 보겠습니다. (구 871쪽)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어떤 의인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의인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의인입니다.

육체적으로 의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내 육체가 의인이 아니라 내 안에 새롭게 탄생이 된 영이 의롭다는 말씀입니다. 의인이라고 하니까 마치 육체까지도 의인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체는 죽을 때까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탄생이 된 영이 의롭다는 말씀입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의인이 간구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겠다고 이미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습니다. 의인은 무엇에 대해서 간구를 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병이 든 사람에 대해서 그를 위해서 간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영적인 병이 여러 가지의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늘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서로 기도하라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기도를 하라고 하니까 아무 것이나 서로 기도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 시대는 그것을 중보기도라고 하면서 열심을 내서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중보기도를 하는 것을 자기의 의로 삼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도 중에 과연 죄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있는 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자기 생명을 위해서 그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죄에 대해서 서로 기도를 해 주어야 하는데 의인이 아니다 보니까 이 세상의 일을 가지고 서로 기도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기도는 기독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당도 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당을 찾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장 부탁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아니다 보니까 자기가 무슨 기도를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이 세상 무당이 하는 그런 기복적인 기도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인이 기도가 아니라 악인의 기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기도는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는 기도고 발람이 불의의 삯을 위해서 한 기도입니다.

 

의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간구하는 것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인은 교회 안에서 육적인 것을 서로 기도하고 있고 의인은 오직 생명에 대한 기도를 하면서 그가 이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죄를 짓고 있다면 그 죄를 알고 그것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모든 성경은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모든 생각이 이 생명에 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생명이 없으면서도 마치 자기가 이미 생명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더 의롭게 살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내가 응답하리라

아무 것이나 다 응답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에 관한 것만 응답을 해 주십니다. 늘 강조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응답을 해 주신다는 말씀이지 마치 교회 안에서 자기 열심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것을 응답해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오직 이 생명에 대해서만 기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인의 간구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무엇으로 간구하는가 하면 서로 영적인 죄를 범하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영적인 죄를 짓고 있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 죄를 서로 고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장로도 없습니다.

의인이 되어 있는 장로가 없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도 모르고 또 청해서 기도를 받아야 하는 의인인 장로도 없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교회 안에서 서로 성도라고 칭한다 해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의인이 없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의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죄입니다.

이것은 악한 일입니다. 사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왜 그것을 모르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하면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 죄입니다.

도덕적인 죄는 누구나 압니다. 아주 어린아이라 해도 자기가 죄를 지면 그것을 감추려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정작 알아야 하는 자기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영적인 죄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다보니까 그 죄를 더 짓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교인들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죄를 안 짓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죄를 더 많이 짓게 해 달라고 심지어는 밤을 세워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를 짓는 자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고 하면서 간증을 하고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아무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역사를 해 주셔서 그가 기도하는 죄에 대해서 이길 수 있게 역사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그 죄를 이기지 못하지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아서 하나님께서 들어 주심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5: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91쪽)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간구합니다.

누가 간구를 합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 하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다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입니다.

물론 성도도 의인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씀을 드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인입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의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의인에 대해서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의인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비록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이지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구를 하시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을 해 주십니다. 비록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이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를 하면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 역사를 합니까?

죄인의 죄를 사해 주셔서 그가 병이 나서 구원을 받을 정도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죄는 반드시 사망에 이르러야 하는데 서로 그 죄를 고하고 병 낫기를 기도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아서 비록 그런 죄를 지었을지라도 구원을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의인입니다, 그들이 죄를 위해서 기도를 하면 역사하는 힘이 많아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구를 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런 의인이 있어야 하고 또 병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의인도 없고 병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다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어떤 병이 들었는가를 알 수 있고 그것을 형제들에게 고해서 서로 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의인인 형제가 기도를 해주면 그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아서 그가 혹시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5:17-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76쪽)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은 그 열매를 맺었습니다.”

 

간구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을 엘리야를 통해서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얼마나 많은 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일을 비유로 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비입니다.

그것을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안 내리고 또 기도를 한다고 해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기독교 안에서는 참으로 이상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의 것도 자기가 간구를 하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가 안 옵니다.

그러면 정말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교회가 나서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기우제를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그렇고 모든 샤머니즘이 세상에 비가 오지 않으면 그것을 기원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환난과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비가 오지 않으면 교회가 그것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7절에서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열매가 무슨 열매입니까? 구원의 열매입니다. 지금 앞 절에서 말씀을 한 것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열매를 말씀하는 것이지 이 세상의 어떤 과실의 열매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입니다.

그가 기도를 한 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그가 다시 기도를 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앞에서 병든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병이 든 자는 영적인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습니다.

그가 기도를 한 즉 하늘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실제 엘리야 시대에 삼년 반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일 년만 비가 안 와도 사람들이 살 수 없는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삼년 반 동안 비가 안 왔으면 열매가 맺을 수 없습니다.

 

열왕기상18:1절을 보겠습니다. (구 546쪽)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다시 기도한즉 비를 내려 주셨습니까?

마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고 자기들이 기도를 하면 마치 엘리야가 기도를 하니까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은 것 같이 자기들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17장1절에서는 마치 엘리야가 기도를 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8장에서 누가 기도를 하게 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아무 기도나 많이 하면 아니 자기가 진심으로 기도를 하면 다 들어 주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야고보서에서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데 그가 기도를 하니까 비가 안 오고 또 기도를 하니까 비가 왔다고 말씀을 하니까 자기도 성정이 엘리야와 같음으로 기도를 하면 다 들어 주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는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기도가 영혼을 망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저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보고 자기가 엘리야나 되는 것처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엘리야가 대단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제 이 말씀을 듣고 엘리야는 아합에게 보이고 자기가 기도를 하겠다고 하면서 머리가 무릎에 들어갈 정도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를 하자 지면에 비가 내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누가 말씀을 하셨습니까?

엘리야가 먼저 자기 스스로 알아서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도를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을 믿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믿고 아합에게 가서 제사를 드리면서 기도를 했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 비를 내리시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에 모든 선지자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는데 그들을 다 죽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믿는 제사장들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보여주신 예표는 분명히 육적인 일이지만 이것은 영적으로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 비는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는 비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비가 오니까 열매를 맺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그랬던 것과 같이 야고보는 병이 들어 있는 사람 죄를 진 사람을 위해서 의인이 간구를 하면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간구하여 역사하는 힘이 마치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가 기도를 한 즉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고 그가 다시 기도를 한즉 지면에 비가 내렸습니다.

 

엘리야의 능력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나 그 능력도 그가 뛰어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엘리야에게 기도를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를 오지 않겠다고 하시고 또 비가 내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그와 같이 우리도 엘리야와 성정이 같지만 우리가 기도를 하면 병이 들어 영적인 죄를 진 사람에게 역사하는 힘이 많아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물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기도를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미리 땅에 비가 오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고 또 비를 내리시기 전에 엘리야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뛰어 나서가 아니라 그가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도 인간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함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의롭다 함을 얻는 성도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의인이 기도를 하면 병이 들고 영적인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로 고하고 기도를 해 주면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더 큰 일입니까?

엘리야의 육적으로 삼년 반 동안 비가 안 오고 다시 기도를 한즉 비가 온 것이 더 큰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영적인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성도가 기도를 해서 그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많아 그 죄가 사하심을 받는 것이 더 큰 일입니까? 사실 엘리야의 기도보다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기도가 더 큰 일입니다.

 

엘리야는 육적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 역시 사람이지만 그보다 더 큰일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엘리야의 간구보다 성도의 간구로 인하여 그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이 더 큰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엘리야도 사람이고 우리도 역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구약에서 실제 비가 오고 안 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도 그런 역사가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는 역사는 다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을 해 주셔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엘리야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 영혼이 죄에 빠져 병이 들었는데 그것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더 큰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열리야가 비를 안 오게 하고 또 비를 내리게 한 일은 우리가 간구해서 병자가 낫고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는 그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의인이 된 성도들에게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야고보를 통해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엘리야의 그 간구도 열매를 냈습니다.

그것은 육적인 열매도 되겠지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저지들을 다 죽임으로 해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것 역시 열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육의 일을 통해서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보다 더 힘이 많다는 것을 야고보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65:10절절을 보겠습니다. (구 847쪽)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비입니다.

영적인 의미입니다. 엘리야가 오지 않게 한 비 그리고 내리게 한 비는 영적으로 다 싹에 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비를 내려서 채소가 자라면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싹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싹이 나야 합니다,

그 싹이 바로 영생의 싹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엘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싹을 내게 해서 열매를 맺게 한 그것은 이스라엘에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 엘리야가 비가 오기를 기도한즉 지면에 비가 내려서 생명의 싹이 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가 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은혜가 내려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체소를 내는 비가 아니라 영혼을 살게 하고 싹이 나는 비가 와야 합니다. 그 비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들이 행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 거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임하고 또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야고보서5: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76쪽)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갈 때에 누가 그를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한다고 합시다.”

 

미혹을 당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체가 미혹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미혹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거의 다 미혹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떻게 미혹을 당하는지를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제 야고보서를 거의 마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화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미혹을 하면서 진리에서 떠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떠나는 순간 그 영혼은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진리를 모르고 진리에서 자기가 얼마나 떠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의 하나님이라고도 말씀을 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실 진리에 대해서 바로 알지를 못해서 떠나 있습니다.

 

누가 떠나 있습니다.

5장 시작을 보시면 들으라 부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율법의 의로 성화로 그리고 은사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진리에서 떠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억지로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고 있고 율법의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고 또 은사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진리에서 벗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진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서 떠난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사도들이 가르치고 있던 그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초대 교회입니다

그들이 벌써 진리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진리에 서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고 2000년이 안 되어서 모두가 율법주의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기간을 비교를 해도 이 시대는 얼마나 진리에서 떠나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진리에서 떠나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 못한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알아야 진리에서 떠나지 않을 수 있는데 진리 자체를 모르다 보니까 자기들이 얼마나 미혹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다.

 

누가 미혹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이 미혹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다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미혹이 되어 있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도 그 의미를 모르고 그저 문자적으로 보다보니까 미혹을 당해서 진리를 떠나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언20:1절을 보겠습니다. (구 932쪽)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입니다,

진노의 포도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거만한 자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입니다. 누가 거만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거만하겠습니까? 거지 나사로와 같이 자기의 의가 전혀 없는 사람이 거만하겠습니까?

 

율법은 거만케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너무도 쉽게 미혹이 되고 있습니다. 자기는 겸손해서 하나님께 순종해서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 율법이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예배를 다 드리고 또 모든 일을 다 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거만해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자기도 모르게 거만해 지고 있습니다.

 

누가 거만합니까?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가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거만합니다. 포도주는 이렇게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진노의 포도주라고 하기도 하고 이것을 율법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을 행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거만해 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는 이미 미혹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는 절대로 거만해 질 수 없습니다. 부자가 되어야 거만해 질 수 있지 가난한 자가 거만해 지면 조롱거리 밖에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으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이 거만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무릇 이에 미혹이 되는 자는 지혜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왜 지킵니까?

지혜가 없기 때문에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늘의 지혜가 임한 성도라면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율법을 안 지키다 보니까 부자가 될 수 없고 그런 성도는 거만해지고 싶어도 안 됩니다. 야고보서는 끝까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떤 결과는 가져 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미혹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늘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이성으로 생각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너무도 바른 일입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쉽게 사람들이 진리에서 떠나 율법에 미혹이 되는데도 성경을 모르다 보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모두가 미혹이 되어 넘어지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거만하게 하고 부자가 되게 만들어서 미혹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율법의 문제는 사단이 일하고 말 것도 없이 그저 교회를 세워 놓으면 거기로 다 들어가 미혹을 당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옳기 때문에 쉽게 진리에서 떠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거만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행위입니다.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오직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그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또 설령 지식적으로 안다 해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 믿는 것 같아 쉽게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미혹당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니 너희 중에 미혹이 되어 진리를 떠난 자가 있으면 돌이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니까 이 말씀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이 시대는 너희 중에 미혹이 되어서 진리에서 떠난 자가 몇 사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이 미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다 미혹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누누이 말씀을 해 주고 있지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아주 쉽게 미혹이 되고 있습니다.

 

진리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시대는 진리에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진리에 있다가 미혹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미혹을 당해서 진리에서 떠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진리에서 떠나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얼마나 진리에서 떠나 있는가를 깨닫기 보다는 오히려 율법의 행위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잠언7:25절을 보겠습니다. (구 918쪽)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음녀입니다,

그 길로 치우치면 미혹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음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큰 음녀의 받을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음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음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사실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전하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까? 아마 이 말씀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오직 예수를 전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고 저에게 따질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회는 주님의 신부가 아니라 아세라로 변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솔직히 교회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다 하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소중합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체가 이미 음녀가 되어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이미 이방의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환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짐승이 되어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녀입니다

그것은 이단의 교회가 아니라 정통의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단의 교회는 음녀하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종교 집단에 불과하지 음녀 축에도 못 낍니다. 잠언에서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다 음녀가 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음녀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를 위해서 수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미혹이 돼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미혹이 되는 것이 바로 율법과 교회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셨고 또 교회는 주님의 아내로서 주님께서 세우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거기에 너무도 쉽게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진리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교인들이 교회를 위해서 있습니다. 그 교회를 위해서 율법을 지키면서 십일조를 내고 있고 그 교회를 아름답게 하려고 수많은 예배들을 만들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어떻게 미혹이 되어 있는 지도 모르고 그저 교회라는 그 말에 모두가 정신이 혼미해져 있습니다.

 

돌아서게 하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제는 돌아서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지난 것 같습니다. 이 음녀가 너무도 강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포승에 묶여 있어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교회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 하는 그 행위들을 보면서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5: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76쪽)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죄인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육적인 죄인이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어서 율법을 지키고 또 성화가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은사를 통해서 자기 믿음을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미혹의 길입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 미혹을 당해서 영적인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서게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모두가 죄인으로서 미혹된 길을 가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자기들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 줄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릅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 그리고 성화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 은사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다 사단의 역사로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성경을 기록할 때만해도 적었습니다.

그래서 미혹한 길에서 돌이키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거의 모두가 미혹한 길을 가고 있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 미혹한 길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거꾸로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자기가 미혹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누가 진짜인지 누가 가짜인지도 분별이 안 됩니다.

 

그들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들을 돌이키게 해서 진리로 행하려고 하면 야고보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바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 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무엇인가를 바로 가르쳐 주어야 그들이 율법주의에서 성화주의에서 또한 은사주의에서 돌아서게 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죄를 덮어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왜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미혹을 당해 있으면서도 허다한 사람들이 자기가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미혹하는 길에서 돌아서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 시대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도 초대 교회에는 처음 복음이 전파가 되었기 때문에 누가 진리에서 벗어나 미혹을 당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는데 그리고 그 숫자가 많지 않아서 그들을 돌이키기가 쉬웠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단이라고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성도가 이단이 되고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모두가 다 진리에서 떠나 미혹의 길 행위로 빠져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것을 거대한 종교는 믿음이라는 말로 미혹을 해서 믿음이 좋아지려고 하니까 그 행위에 더욱 열심을 내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믿음을 좋게 보이려고 더욱 더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 진리를 알고 있는 성도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 미혹된 길을 가고 있는 자를 보면 어떻게 하든지 그를 돌이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고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에서 벗어나 미혹되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고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다 미혹이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 있는 성도가 그들을 어떻게 하든지 돌이켜서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야고보서2: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73쪽)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제 야고보서 강해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 야고보서의 전체 주제는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혈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율법은 폐하여 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당연히 이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을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버리는 자유 하는 율법을 들여다보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그것을 실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합니다.

행함이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을 하고 또 심판 받을 자처럼 행하기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버리는, 행위를 버리는 그 행위가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심판을 받을 사람과 같이 보입니다. 아니 율법을 폐하라고 하면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성경의 모든 주제가 믿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약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야고보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또한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 그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은 성도는 반드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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