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강해39

윤주만목사 2016. 12. 27. 11:04

갈라디아서6: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교회 안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고 하나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을 하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육체의 모양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성도만이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가 많이 있습니까?

창세기6장에서 보면 노아의 홍수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의 신이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그들은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아 한 사람만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다른 신이 없었습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다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육체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육체의 일을 하면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노아 한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기독교인이 천만이라고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노아 시대에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들은 육체가 되었습니다. 지금 역시 수십억명이 이 지구 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육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노아 때 모두가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수명이 길기 때문에 지금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적인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육체가 되어서 다 홍수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것을 경계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육체가 되어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처음 강해할 때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다른 복음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를 배웠습니다. 육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 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육체가 되어 있으면서도 아니 멸망을 당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자기가 육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어느 정도 적은가 하면 마치 노아 시대에 노아 한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입는 것과 같이 적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바람이 임의로 물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다 자기들이 성령으로 났다고 세뇌를 당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그리고 못 봅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난 사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적은가 하는 것은 성경의 예표들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초대 교회에는 그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이제 막 복음이 전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스라엘에 비하면 아주 적었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적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적은 무리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도 않는 사람은 절대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래도 복음이 전파 되었습니다.

아주 잠깐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되기 시작을 하면서부터는 복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왔습니다. 그 자체가 다른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와 같이 처음부터 복음이 전파가 된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 전파가 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그 안에서 복음이 나올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복음이 다른 복음으로는 변해도 다른 복음에서 복음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소욕은 지금도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에서 빠져 나오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제 복음을 들은 성도는 이 육체의 소욕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그리고 얼마나 빨리 육체의 일을 하고 있는가를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육체의 소욕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입니다,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것은 선언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하지 않고는 우리가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아주 잘하는데 실상은 육체의 소욕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을 하지 않는 성도만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게 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로는 너무도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을 성령만이 거스리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이성으로는 그리고 육체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를 하셔 야지만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한 가지라도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이성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그 이성과 싸우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대적을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육체로 살고자 하는 그 이성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만이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헛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헛됩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행위가 다 헛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육체의 소욕이라는 것을 또한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잘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함에도 도리어 그 소욕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거의 다 육체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육체의 일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모르는 어디 다른 곳에서는 있을지 몰라도 제가 알고 있는 곳에서는 아직까지 못 보았습니다. 그렇게 육체의 소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세뇌입니다

아니 아편이라는 마약에 취해 있어 정신이 혼미해져 있습니다. 종교는 그저 교회 안에만 있으면 구원을 받은 것 같이 세뇌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많은 예표들을 통해서 교회 안에 있는 다수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통해서 육체가 되어 있는 그들을 보면서도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너무도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그 사람을 바로 잡아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죄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어기는 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가 드러나면 자기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영적인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죄입니까?

갈라디아서5:19-2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 죄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짓는 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5장에서 말씀을 한 육체의 일을 함으로 해서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는 죄를 범한 것이 드러나거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따라 사는 사람이 온유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로 잡아주라는 말씀입니다.

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신 이 세상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면서 대적하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신 죄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성령을 거스리는 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죄입니까?

이제 주님께서 지고 가신 죄는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짓는 죄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심으로 그 죄로는 사단이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갈 수 없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죄 입니다

오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 도덕적인 죄는 죄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죄입니다. 우리 역시 아직까지는 육체를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육체를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해서 말씀할 때는 그것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기억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죄를 보고 죄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말씀들은 이제 초보입니다 더 이상 이런 것을 가지고 논한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초보에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혹시라도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말씀을 보는 사람들이 오해할까 생각해서 말씀을 합니다.

어떤 죄입니까?

육체의 일을 하는 것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죄인가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라는 말씀입니다. 죄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죄가 있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말씀하고 있는 육체의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못 들어가는 죄 입니다

성도는 이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 교인들은 이런 죄를 짓는 일에 너무도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아니 죄를 지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그저 천국에 간다는 그 말 한 마디에 모두가 속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을 하면서 천국에 간다고 아주 자신 있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죄를 짓고 있으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이 중에 어느 한 가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육체의 일을 모두 다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5장 강해를 보시면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보시면 됩니다, 육체의 일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했으면 영적인 죄가 되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육적인 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상은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바로 육체의 일입니다. 육체의 죄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일을 하는 죄는 그가 아무리 깨끗하게 살았다 해도 그 죄를 지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육체의 죄를 짓는 것은 두려워하는 그들이 육체의 일을 하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두려워해야 하는 죄는 그런 육제의 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육체의 일을 하면서 성령의 소욕을 대적하고 거스리는 것인데도 지혜가 없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육체의 일을 더 많이 하려고 심지어는 그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 시대는 진짜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죄를 모르다 보니까 죄를 지라고 서로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죄를 짓는 것을 보면서 서로 칭찬을 하고 있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3:28-29절을 보겠습니다, (신 57쪽)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사람의 모든 죄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사하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그런 죄를 가지고 왈가불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사하신 죄를 가지고 사람이 이야기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죄를 가지고 왈가불가하면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를 두둔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느 목사가 육체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 죄가 드러남으로 해서 그 목사는 이미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 죄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죄를 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라면 모든 일에서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도 우리와 똑같은 체질을 가지고 있어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죄들은 다 우리에게 영적인 일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은 죄를 가지고 논하지 마시고 오직 영적인 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절대로 성령을 훼방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은 죄는 어떤 것이라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일은 어느 한 가지라도 범하게 되면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죄입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사하심을 받았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사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가지라도 범하게 되면 그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을지라도 이 죄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범하고 있다면 절대로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육체의 소욕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소욕입니다 이 둘이 서로 거스리고 대적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스리고 대적한다는 말씀은 다시 말해서 훼방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훼방이라는 단어의 뜻이 바로 거스리고 대적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알면 뭐 합니까? 육체의 일을 하면서 성령을 훼방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일을 하면서 성령을 훼방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면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 훼방을 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말로만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대 강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성령을 훼방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육체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육체의 일을 다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5장에서 육체의 일을 하나씩 다 살펴보았습니다. 솔직히 그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안 하고 있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어느 한 가지면 다행입니다.

그것은 그래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고쳐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는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고칠 수 있습니까? 어느 한 가지 범죄한 것이 드러나면 다행인데 이 시대는 이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성령을 훼방하고 있지만 지혜가 없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죄에 처합니다.

누가 영원히 죄에 처하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의 일에 빠져 있는 그 사람들이 영원히 죄에 처한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두려워하지는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이 모든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죄에 처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정말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체적인 죄를 우리가 죄를 짓기도 전에 다 사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육체의 일을 하지 말고 이제 성령을 따라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까지는 육체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 인생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다 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시 육체로 돌아가서 육체의 일을 함으로 해서 영원히 사하심을 받을 수 없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3:6절을 보겠습니다. (신 390쪽)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죄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이 세상에서 죄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범죄를 하지 않는가 하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범죄하지 않습니다.

어떤 죄를 범하지 않는가 하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5장에서 말씀하는 육체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육체의 일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이 시대 교인들은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육체의 일을 도리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서로 격려를 하면서 그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아니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죄를 범하는 줄을 모르면서 그저 사람의 이성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순간 성령을 훼방하는 범죄를 짓는다는 것을 모르고 그 일을 하는 자기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누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범죄를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시대 모든 교회에 사람들이 범죄를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니 그것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그저 문자적으로만 보고 있다 보니까 자기들이 이런 범죄를 하면서도 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범죄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고 있지만 그들의 눈이 소경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가 않기 때문에 범죄를 하면서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예수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서 다른 복음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들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 시대에 비하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그들에게는 그래도 사도들이 있어서 바로 책망을 듣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2000년 가까이 다른 복음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고 있습니다, 못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아는 것으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 정도는 이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보면 뭐 합니까?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전혀 발견이 안 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에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자기들이 마치 다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다 아는 척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그런 문자를 아는 것으로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지면서도 감각이 없이 그저 문둥병자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범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범죄한 것이 드러나면 그것을 신령한 성도가 분별을 해 주고 바로 잡아 줄 수 있는데 범죄를 하는 자도 모르고 신령한 자도 없습니다.

그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범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는 범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범죄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는 자기가 범죄 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조차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불행한 일입니다.

고린도전서2:13-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65쪽)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너희입니다

사도 바울은 범죄한 자가 있으면 신령한 너희가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 잡아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신령한자가 거의 없습니다. 아니 말로는 자기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고 있습니다.

신령한 너희가 누구입니까?

먼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혜라고 하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 사람의 지혜도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늘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보아야 합니다.

누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목사들이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람 뿐 아니라 그에게서 듣는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 세상 사람이 성경을 봅니다, 그리고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말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 성경을 보았는데 거기서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목사의 말이 같다면 그것은 사람의 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절대로 도적질을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십계명으로 친히 쓰셔서 말씀을 하셨다고 가르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지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시대 성경을 거의 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고 그 문자 그대로 보면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면 모두가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 성경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라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배운 어떤 학문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지 마시고 성경을 보는데 그 안에서 사람의 지혜로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령한 너희가 누구입니까?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두 사람이 똑같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고 있고 한 사람은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해서 신령한 일을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남의 물건을 도적질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이것이 신령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성도는 신령한 것으로 분별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내 양을 도적질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입니다.

그들이 강도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도적질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령한 자가 되어서 그들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사람의 가르침으로 양들을 도적질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같이 도적질 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보고 있지만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과 사람의 지혜로 보는 사람이 이렇게 다릅니다.

신령한 일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일을 기록한 말씀이 아닙니다. 영의 일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예표와 그림자와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면서 양들을 도적질 했고 이 시대 역시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면서 양들을 죽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정말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아 신령한 일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말로는 성령이라고 하면서 실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사람의 지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사람의 지혜와 성령의 가르침 자체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는 육체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면서 대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에서 말씀하는 육체의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한 가지라도 하는 사람은 신령한 일을 받지도 않고 그것을 분별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육체에 속한 일을 하는 사람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면서 대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일입니다.

갈라디아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성령의 열매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맺어 놓으신 열매라고 하면 저를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더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냥 쉽게 성령의 열매를 자기들이 맺으면 되는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맺으신 열매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미련하게 들리겠습니까? 아니 믿음이라는 실체도 없는 그것을 보면서 아주 미련하다고 이야기 할 것이 분명합니다.

깨닫지도 못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고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씀을 드리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도리어 비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제가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문자 내용이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건방지기도 합니다.

자기가 신학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편지에서 몇 가지 말씀을 보았는데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 몇 가지를 자기 지식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치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동성연애에 대한 것을 로마서 강해에서 보고 그것은 제가 잘못 해석하고 있으니까 고쳤으면 좋겠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영적으로 말씀을 드렸지만 육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신령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먼저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육체의 일을 하지 말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이미 성령론에 대해서는 그 기초를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성령론을 보면 성령의 가르침이 무엇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일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말씀을 아무리 보아도 내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일을 하게 됩니다.

저 역시도 육체의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 역시도 육체의 일을 했었던 경험이 있고 또 이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의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왜 교회가 필요합니까?

바로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나 혼자 있으면 내가 육체의 일을 하는지 아니면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있으면 서로 교제를 나누다 보면 누가 육체의 일에 잠시 미혹이 되어 빠져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 교회를 저 혼자서 이끌어 나갈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도 사람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있어야 혹시라도 누군가 육체의 일을 해서 범죄를 하더라도 신령한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어 온유한 마음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 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25절을 보겠습니다. (신 345쪽)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온유

부드럽고 온화하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복음도 이제 막 들어왔습니다. 아직 복음에 든든히 서 있지 못하고 또 다른 복음이 들어오다 보니까 혼란이 시작이 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이제까지는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만 들었는데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 영향으로 육체의 일을 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거역을 하고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디모데후서에서는 징계를 함으로 해서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육체의 일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 형제가 들어와서 미혹을 하면 거의 다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교회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아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없는 사람은 그렇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때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성도나 장로가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입니다.

육체의 일이 현저합니다, 아주 많다는 말씀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의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신령한 자가 있어야 이것을 분별해서 그를 바로 잡아 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오히려 범죄를 하라고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 한 모습을 보고 도리어 성도라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돌아보라고 합니다.

네 자신도 돌아보아서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거의 다 미혹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 육체의 일을 하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험 받습니다.

누구라도 다 시험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일이라는 것이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도 바르기 때문에 육체의 시험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에서 그것이 그른 것이라면 시험을 받지 않을 수 있지만 너무도 옳기 때문에 시험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시험을 받지 않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험을 받아서 넘어가는 순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일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에 얼마나 좋게 보입니까? 정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시험을 받아서 육체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내 육체로 무슨 일을 할 때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데 이 일이 육체의 일인가 아니면 복음을 전하는데 해야 하는 일인가를 잘 모를 때는 그것을 분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 까지는 가능한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지 않아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무엇을 하려고 하다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5: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41쪽)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범죄한 자들입니다.

물론 성도가 있고 장로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말씀하는 범죄한 자는 일반 성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범죄한 자는 장로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목사라도 보는 것이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에서는 조금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니골라당의 형태의 교회가 아닙니다. 디모데에게 쓴 서신에서 보아서 잘 알겠지만 장로가 한 교회에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합니다

장로를 모든 사람이 있는데서 꾸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있는데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목사가 범죄를 했을 때 누가 감히 목사를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서 꾸짖을 수 있습니까? 지금은 너무 제왕적인 교회의 타락한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입니다.

장로가 한 사람만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커지면 장로들을 계속해서 안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장로가 혼자서 치리하는 교회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두세 명이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일반 성도는 범죄를 하더라도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 주면 됩니다. 그러나 장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장로는 가르치는 자이기 때문에 그가 잘못 가르치게 되면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장로가 되었을 때는 분명한 책임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장로가 범죄를 하면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역시 사람입니다. 제가 시험을 받으면 여러분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이 문제는 구원이 걸린 일입니다, 세상의 일이라면 좋은 것이 좋다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장에서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그가 외식하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서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혼 구원의 문제는 이렇게 단호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장로는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복음이 사라졌습니다.

사실 누구를 징계하고 말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범죄하지 않는 목사가 없고 교인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이 시대 우리 성도님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있습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 시험을 받는 순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6:2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집을 지라

이제까지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앞에 보면 (1)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성경 아래를 보면 (1)에 대한 숫자에 대해서 무거운 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율법을 무거운 짐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라면 마치 남이 지켜야 하는 율법을 내가 지켜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번역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잘 안 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이 무거운 짐이 율법을 서로 지라는 말씀이면 이제까지의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뒤집어 버리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늘 지혜를 구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생명은 육체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짐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대한 짐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일에 대해서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그렇습니다. 누구는 분복을 100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는 분복을 50을 받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에 시험에 있어서 누가 더 많이 받겠습니까?

더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분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람은 그 중에 반 정도를 지킬 수 있는 분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꼭 분복만이 아니라도 은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은 시험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찬양을 잘 부르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찬양을 부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그 찬양이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찬양을 더 이상은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찬양을 잘 부르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육체의 일을 하지 못함으로 해서 때로는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서로 남의 짐을 나누어지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아니 구원을 받으려면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그 짐을 져 주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은사나 분복으로 받은 그것을 육체로 하고 싶은 마음이 사람에게는 너무도 강한데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소욕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입니다. 그것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말씀한 육체의 일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에 그 시험을 받을 때에 그 시험 받는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렇더라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머리에서는 정확하게 알겠는데 글이나 말로 표현을 하려고 하니까 한계가 있습니다. 무슨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육체의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시험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시험을 받을 때 그 사람을 도와주라는 뜻에서 짐을 나누어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못 지키는 사람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많은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시대로 말을 하면 십일조도 낼 수 있고 주일도 아주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제까지 해 오던 것을 하지 않으려면 사실 그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에 처음 들어옵니다.

그 사람이 종교를 따라 행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종교에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종교에서 하던 모든 일을 아주 잘 해왔는데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사실 이것이 더 힘들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육체의 일로 시험을 받을 때 그 시험을 서로 나누어서 지라는 말씀입니다

실제 나누어지라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험이라면 사실 나누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시험을 받는 자를 도와주라는 뜻입니다 분복을 받아서 육체의 일을 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소욕이 자꾸 자기 육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받을 때 그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시험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이런 시험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으로 설 수 있게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그 시험이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겁다는 표현보다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 더 맞을 듯 싶습니다.

시험에 대한 짐입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누구나 다 시험을 받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더 많은 받은 자가 더 많은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때 서로 짐을 나누어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험을 받은 것을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시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도 시험을 당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어떤 사람이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시험 당했던 일을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이 그것이 시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과 같이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이 말씀이 생각이 잘 나지 않아서 몇 시간을 저도 글을 못 쓰고 있었습니다. 국어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들은 국어를 모르면 거의 해석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국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이런 말씀들이 해석이 되려면 국어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시험의 짐입니다.

사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더 쉽게 시험을 당하게 되고 더 많이 시험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더 많이 시험을 당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그 시험을 나눠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시험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험을 받는 사람의 짐을 나눠짐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8:2절을 보겠습니다, (신 249쪽)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얻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을 나눠짐으로 해서 서로가 오직 믿음으로 든든히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려면 반드시 시험에서 이겨야 합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 인생은 육체의 일에 대해서 끊임이 없이 시험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험을 서로 나누어지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끊임이 없이 우리 육체는 시험하고 있습니다. 아니 죽을 때 까지 시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 외에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겁습니다.

아니 여러 가지가 됩니다. 그런 시험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서로 시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어야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도만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싸워서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거스리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남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또 내 밖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가지고 있는 내 육체는 늘 소욕에 이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시험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취

목적한 바를 이루어 내는 것을 말 합니다. 우리가 목적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정도로 싸워야 하는가 하면 전쟁을 하는 것과 같이 싸워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모두가 다 시험에 넘어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법입니다.

그것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에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믿음의 법을 모르다 보니까 그저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육체의 시험에 넘어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2: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20쪽)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취하라

너희 구원을 이루라 같은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을 이루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라면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성도가 어떻게 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은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사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육체의 소욕입니다 내 육체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도리 같이 판단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시험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물론 분명히 구원은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반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그 선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내 육체는 늘 소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 문자가 나를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훼방하는 육체의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는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육체의 시험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이겨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에서 이기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시험에서 벗어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항상 복음에 복종해서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이 육체의 소욕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어제까지고 복음을 듣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 사람이 시험에 넘어가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는 늘 복음에 복종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가 이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이루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험을 모르는 사람은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아는 성도는 그 육체의 소욕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복음에 복종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내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선물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악한 일을 잘 아는 성도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육체는 성령이 소욕을 일으켜 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의심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따라 영생을 얻는 성도입니다. 저 역시도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던 사람들 중에 육체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육체의 일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그가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는 끊임이 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 시험에서 이기고 그리스도의 법 생명을 성취하려면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지만 역시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그 시험은 나를 사망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알기에 정말 더욱 복음에 복종하려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3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서 생명을 받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제 막 육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사람에게도 가서 억지로 강요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입술로 시인하라고 하면서 그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죽음의 목전에 있어서 이성적으로 판단이 안 되는 사람에게도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라고 해서 그 사람이 죽으면서 강요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합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평생을 예수를 안 믿고 살았는데 그래도 임종 전에는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예수를 믿어서 부모를 천국에 보내 드린 것 같이 자랑 삼아서 간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런 사람은 영생이 무엇이라는 기본조차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생은 내가 입술로 시인하는 것으로 얻어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아무 것도 자기도 되지 못했으면서도 자기가 다 된 것같이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생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분명히 요한복음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정신이 혼미한 사람을 붙들고 강요를 하면서 천국에 가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시인을 했다고 해서 천국에 간다고 하면 요한복음의 말씀은 거짓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젊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타락한 것과 같이 보여도 그 안에 성령이 임재를 하고 있으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청년의 때에 정말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믿었다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죽을 때가 되어서 그렇게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 하는 한 마디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생을 알아야 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알았으면 육체의 소욕의 시험도 다 이겨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이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그가 어떻게 영생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조금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것은 영생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평생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아니 불과 1년 전에 썼던 설교가 해석이 잘못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가 되어 진다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돌아보아도 늘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 된 줄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하는 그 사람도 언제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내 자신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어야 하고 또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서 생명을 얻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교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도 마치 자기들이 성도나 된 것처럼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일에서 시험을 받지 않고 있습니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속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된 줄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도는 성경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러나 가라지는 너무도 태평하게 교회 안에서 자기가 다 된 것처럼 천국을 따 놓았다고 하면서 열락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닌 그들이 더 자신 만만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알면 두려워하는데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간다고 하지만 실상은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만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빌립보서3: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21쪽)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성경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알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육체의 소욕이 끊임이 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이 없습니까?

분명히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대로 믿은 사도 바울입니다. 조금도 믿음에 대해서 요동치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진리의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면 육체의 시험에서 성령이 소욕을 일으켜 줘서 거스리고 대적해 주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 믿어야 합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연약한 육체를 입고 있다는 것을 또한 인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아주 조금 아는 것으로 그리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다 이룬 것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성경을 보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왜 두려워하는가 하면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성령이 인도를 하시지 않으면 나는 육체의 소욕에 넘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이상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아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저 역시 사도 바울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된 것으로 속고 있지는 않습니다.

나를 속이는 일입니다. 내가 다 되었다고 하면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오묘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내 자신에게 속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입니다

내 스스로가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내가 하는 것 같으면 그렇게 말해도 됩니다. 제가 믿음을 포기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니까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다 되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물론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이 없어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믿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기 때문에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좇아가고 있는 성도입니다.

잠언20:17절을 보겠습니다, (구 933쪽)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스스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으로 속고 있습니까? 식물로 속고 있습니다. 식물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아는 지식을 식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은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속이고 취한 식물이나 스스로 속아서 먹고 있는 식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속인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속지 않을 수 있는데 성령이 임하시지도 않았는데 남들이 성령을 받았다니까 자기를 속이면서 자기도 성령을 받은 것으로 스스로 세뇌를 시키다가 자기에게 속아서 성경에서 식물을 먹고 있습니다. 그 식물이 나중에는 그 입에서 모래가 가득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속습니까?

자기 이성에 의해서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성경을 이성으로 보면서 아무 것도 되지 못한 그가 마치 다 된 것과 같이 생각하면서 속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역시 예전에는 스스로 속고 있었으면서도 그때는 속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지금 보니까 스스로 속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다 된 것으로 속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때에 얼마나 육체의 시험을 받아서 육체의 일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속고 있으면서도 그때는 마치 다 된 것으로 생각하면서 성도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속습니까?

자기 이성에 의해서 속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을 하면서 자기가 마치 다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을 하는 그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도 그 육체의 일로 속아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서 생명을 얻는 것 같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물론 사단이 속이는 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단이 속이기 전에 내 이성에 스스로 속아서 육체의 일을 하면서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 자신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이 나를 속이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령이 오시지 않아 속고 있는 줄로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체의 이성에 속지 않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를 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안 된 사람이 다 된 것으로 스스로 속아 육체의 일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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