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 그리스도 편지 선교회(37)
요한복음 20:16-18절을 보겠습니다. (신 184쪽)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부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 합니다. 우리 육체는 쇠퇴해서 썩어 땅으로 들어가고 이제 새로운 형체를 입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부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세상도 같은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부활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늘 성경을 볼 때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사상을 경계를 하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그렇게 이야기 한다 해서 성경도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상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씀을 한 것은 신약입니다
구약에서는 내세에 대해서 다 의미적으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에서도 내세를 의미하고 또 부활을 의미하는 말씀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내세 그리고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다 보니까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나라가 세워 질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물론 부활을 해서 우리가 어떻게 신령한 몸을 입을 것인가는 잘 알 수는 없을지라도 부활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성경이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옥, 천국, 부활
우리가 내세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내세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것이라고 규정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세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안 됩니다
설령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내세의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을 하셨다 해도 그것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세를 그대로 말씀을 하셨다 해도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생들은 도무지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 우주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별들을 관측을 하고 있지만 과연 우주에 있는 별들 중에 얼마나 볼 수 있고 또 그 별들이 어떤 별인지는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우리 눈에 비추고 있는 빛을 보고 그 별을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또 그 별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이 안 됩니다 피조물과 창조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컴퓨터를 잘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슈퍼컴퓨터라고 해도 물론 기능은 뛰어날 수 있지만 인생의 생각과 감성과 그리고 상상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체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인류가 우리 인체를 연구를 했습니다. 물론 의학이 발달을 한 시기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다는 것을 의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 11:33-34절을 보겠습니다. (신 256쪽)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어떠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또 종교적으로 빠지게 만들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지렁이가 있습니다. 그 지렁이가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니 집에 개를 기르고 있습니다. 그 개가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알 수 있습니까? 개가 사람을 아는 것은 개의 생각에서 사람을 아는 것이고 그것은 개의 생각입니다 땅 속에 있다가 땅 밖으로 나와서 꿈틀거리고 있는 지렁이가 어떻게 사람을 보고 사람의 지혜를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생들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렁이가 사람을 보고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그렇다가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내 이성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를 구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여 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을 생각을 하고 있고 더구나 내세의 일을 마음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내세에 대해서 너무 세상 적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너무도 신비롭고 또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부활이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이 부활에 대해서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 부활에 대해서 바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판단을 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실 내세의 일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나마 우리에게 보혜사가 임하셔서 그것을 믿게 역사를 해 주시고 있기 때문에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부활에 대해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성령이 역사를 해 주셔서 우리가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믿게 역사를 해 주심으로 그나마 그것이 믿어지고 있는 것이지 우리 안에 느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영의 탄생을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제 안에 영이 어떻게 탄생이 되어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것은 인생이 느끼고 만지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심으로 해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다는 것을 믿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어진다는 자체가 신비입니다
아니 은혜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비밀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서 믿는 그대로 우리에게 능력이 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세의 일은 사람이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비밀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부활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해 주고 있습니다. 내세의 일에 대해서 이것이다, 라고 정의를 내릴 수는 없으나 그래도 성경에서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내세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고 그 부활을 믿고 바래야 합니다.
부활에 관한 문제를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부활에 관한 문제는 내세의 일이기 때문에 이단들이 자의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을 해서 부활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정의를 내려 주다 보니까 오히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이 부활에 대해서 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부활은 그래도 천국과 지옥 보다는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지는 잘 몰라도 그래도 어떻게 부활을 할 것인가는 어느 정도로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한 모습은 내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지렁이 같은 이성적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을 먼저 인정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세에 대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을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부활에 대해서 바르게 정립을 하고 있어야 하고 잘못 알고 있는 지식들이 우리가 믿음을 갖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인하여 오히려 이단에게 쉽게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실 것을 이미 구약에서 제사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고 이 세상에 오셔서 구약의 그림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신 것이 그대로 성경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0:26-28절을 보겠습니다. (신 184쪽)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아나셨습니까? 영의 부활입니까? 육체의 부활입니까? 이 말을 가지고 서로 공격을 합니다. 육체의 부활이면 어떻게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냐고 말 합니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서커스를 하는 것 같습니다.
마술을 하는 사람들이 눈속임을 해서 벽을 뚫고 들어오고 또 갑자기 없어지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실제 세트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속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관객들은 모르지만 마술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정해 놓은 대로 진행을 하니까 마치 사람이 없어졌다가 나타나는 것 같이 관객들에게 보여 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들이 닫혀 있는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이런 부활의 모습을 보고 서로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영의 부활이라고 하고 있고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에서는 육체의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제자들도 도무지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실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본 제자들이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후에 자기들이 장사를 지내고 모두가 이제 실망을 하고 돌아가 있던 때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믿었다면 제자들이 실망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하던 일로 돌아갔습니다.
실제 제자들 중에 다수는 고기를 잡던 본연의 일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활을 하시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지를 않고 있는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 자가 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예수님께서 창에 찔린 자리가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만져 보고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을 하셨습니다.
도마가 이렇게 옆구리를 만져 본 것을 가지고 그리고 창 자국이 있는 것을 가지고 육체의 부활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입니다. 그런데 과연 천국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옆구리에 창에 찔린 자국이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이것이 부활의 본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나면 천국에 부활한 모습들은 완전한 모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창에 찔린 자국이 그대로 있다고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다리가 잘린 사람은 천국에서도 다리가 잘려 있을 것 아닙니까? 과연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까?
실제 예수님의 몸에는 창 자국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육의 부활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십일을 계시다가 500명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그럼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 그대로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부활도 내세의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문자를 보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데 이 말씀을 보면서 육의 부활이다 영의 부활이다 논쟁을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 입니까? 기독교인들이 아니 목사들이 성경을 얼마나 쉽게 보고 있는 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신학자들입니다
성경을 수백 독을 읽고 또 그것을 평생을 연구를 한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면 자기들이 이성적 지식에 갇혀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적인 지식으로는 뛰어날지 몰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구속의 은혜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육의 부활이냐 영의 부활이냐를 말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키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다른 것을 보면서 육의 부활이다 아니라 영의 부활이다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논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키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믿지를 못하니까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다고 하니까 그것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 오셔서 믿게 하시려면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실제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손과 발에 못이 박혔고 또 로마의 군병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보여 주어야 제자들이 믿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육신의 모습으로 죽은 그대로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믿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천국에서 예수님이 지금 계시는데 손에 못 자국이 있고 창 자국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아마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부활한 모습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의 부활한 모습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보면 절대로 제자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부활의 모습은 제자들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 보여 주신 것이고 지금 천국에서의 모습은 우리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99쪽)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사도 요한이 본 모습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던 것을 보면서 그것을 육의 부활이냐 영의 부활이냐 논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부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그저 문자에 갇혀서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시고 이 세상에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던 몸과 하늘에 올라가셔서 천국에 계시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고 믿고 있습니다.
내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 이성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우리 인생들의 것으로 생각을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런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부활에 대해서 우리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6:14절을 보겠습니다. (신 85쪽)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아서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을 확실하게 보이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믿는다는 것이 더 이상할 것입니다
왜 믿지를 못 합니까?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눈으로 직접 죽은 것을 보았고 또 장사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완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완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마음으로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향해서 완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냥 부활을 하셔서 승천하시고 난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수도 있지만 이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일일이 나타나셔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누가복음 24:13-17절을 보겠습니다. (신 140쪽)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부활의 모습을 보이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가는데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두 사람이 예수님을 못 알고보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글로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요한복음 19장 25절에서 보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한 예수님과 한참을 대화를 하면서 가면서도 그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가고 있습니다. 부활 하시고 난 후에 예수님의 모습은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보여 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 그대로 부활을 하셨다면 알아보아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자기들이 당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오히려 예수님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슬픈 빛을 띠고 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을 수 있게 나타내주시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25-27절을 보겠습니다. (신 140쪽)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믿지를 않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역시 예수님께서 부활을 할 것을 구약에서 그림자로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실 때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지만 믿지를 않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 부활할 것을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이 믿지를 못하는 것을 아시고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을 믿게 하시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 믿게 하실 수도 있지만 제자들에게는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고 믿게 부활을 보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30-31절을 보겠습니다. (신 141쪽)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같이 오면서 몰랐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음식 먹을 때에야 눈을 열어서 그들이 보게끔 하시고 예수님 인줄 알았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지만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내가 살아났다는 것을 증거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활을 믿게 하시고 있습니다. 떡을 떼어 축사를 하실 때 그들의 눈을 열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사라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36-43절을 보겠습니다. (신 141쪽)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제자들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지금 누가복음에서 영으로 생각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개역 성경에서는 영으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에서는 유령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들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죽은 사람을 헛것으로 본 것과 같이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령한 몸을 입고 계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육과 같이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이것이 육의 부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심각한 문제를 가져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육의 부활이냐 영의 부활이냐 하는 논쟁은 한 마디로 본질을 모르는 어리석은 다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같은 육이면 어떻게 문이 닫혀 있는데 들어 올 수 있습니까? 또 유령과 같이 부활을 했다면 어떻게 구운 생선을 드실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가 되고 있습니다. 영으로 부활했다 육으로 부활했다 하는 자체가 모순이 되고 있습니다. 육으로 부활을 했으면 문이 닫혀 있는데 들어 올 수 없고 또 영으로 부활을 했다면 구운 생선을 잡수실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그리고 모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시 내세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한 신령한 모습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해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말씀 그대로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보이시던 예수님의 모습과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하늘의 일은 우리 인생들이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모습도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성경에 영으로 탄생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신령한 몸을 입는다고 말씀을 하니까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어떤 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신령한 몸입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것을 누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다만 인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적인 능력으로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실제 내세에서 부활을 한 모습이 어떠할지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인생의 생각은 우물 안에 개구리에 불과 합니다. 부활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구리가 부활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문자로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의 부활이 맞다 아니다 육의 부활의 맞다 하는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부활은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셨고 그것을 통해서 제자들이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논하고 있고 서로 네가 맞니 내가 맞니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자 같으신 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삼년 반 동안 함께 있었던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못 알아보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라고 하지를 않고 인자 같은 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세 상상도 못 합니다
부활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라는 우물 안에 갇혀 있는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부활의 모습을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 인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부활이라면 그곳은 천국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런 말에 미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 세상 이성적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보여 주셨다는 것을 바로 깨닫기 바랍니다. 그렇게 보여 주신 것을 가지고 부활의 모습이 어떻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모습은 분명히 신령한 몸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 신령한 몸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생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설령 가르쳐 준다 해도 알아듣지를 못 한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3-8절을 보겠습니다. (신 281쪽)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500명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확실하게 살아나신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보여 주신 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대로 부활을 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게 하시기 위해서 보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 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은 우리도 틀림없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살아나지 못했다면 우리도 살아날 가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부활에 대해서 확실하게 믿게 하시기 위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6-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82쪽)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산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사기를 친 것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고난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기복주의에 빠져 축복을 받고 있지만 실제 예수를 믿었던 믿음의 선진들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이 없으면 천국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더욱 불쌍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을 바라고 고난을 참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부활이 없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가 믿은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우리에게 고난만 준 것이 되고 또 예수를 믿고 고난을 당하다가 죽은 믿음의 선진들은 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아갑니다.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늘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활을 해서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82쪽)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왜 우리가 죽습니까?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죄를 진자나 안진 자나 다 죽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왔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왔기 때문에 죽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의로 부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역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우리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혀 다른 신령한 몸을 입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의 씨냐 하는 것을 비유로 해서 땅의 형상을 입었느냐 하늘의 형상을 입었느냐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도 역시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5-40절을 보겠습니다. (신 283쪽)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씨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씨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 안에 뿌려져 있는 씨가 죽지 아니하면 그것이 살아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뿌려져 있는 씨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대로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뿌리는 씨와 나오는 몸이 다르다는 것을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뿌려지는 육체와 나오는 육체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보이셨으니까 우리는 똑같은 육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에는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심을 때는 알갱이 밖에 안 심지만 나올 때는 다른 형체를 입고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부활체는 심을 때와는 다른 형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알갱이와 싹은 다릅니다.
알갱이와 싹이 다른 것 같이 다른 물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물론 몸은 몸인데 너희가 뿌릴 때는 알갱이지만 나올 때는 그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은 몸이지만 다른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체로 부활했다고 말할 때 한가지로 같은 육체로 말을 하는데 성경에는 육체를 말할 때 똑 같은 몸이 아니고 뿌려지는 육체와 나오는 육체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0-44절을 보겠습니다. (신 283쪽)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형체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은 하고 있는 부활은 정말로 신비로운 부활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씨로 비유를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몸은 몸인데 하나는 육의 몸이고 하나는 신령한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의 몸은 문을 닫으면 못 들어옵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은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기 전에 몸과 부활한 후의 몸은 다른 것입니다 부활하기 전에는 육에 몸으로 심고 살아날 때는 신령한 몸으로 살아난다고 말씀합니다. 몸은 몸인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고기를 먹고 손을 보이면서 육체로 살아났다고 하는 말씀은 어찌 보면 지금 우리와 같은 육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찌른 상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에 몸이요 하나는 신령한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하셨지만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제자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셨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은 우리가 어떻게 표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도 역시 부활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영으로 부활을 했다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을 하는 것은 바로 문이 닫혀 있는데 예수님께서 들어왔다는 것을 문자로 가지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부활을 우리 인생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인데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영의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분명히 신령한 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신령한 몸이 어떤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성경에서 신령한 몸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령한 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도 그렇게 밖에는 기록할 수 없지 않았나. 믿고 있습니다.
계란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을 생각을 합니다. 성도가 부활을 하는 것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이 얼마나 신비로운가를 조금이나마 이해를 한다면 그렇게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5:47-49절을 보겠습니다. (신 284쪽)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 있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육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다가 나중에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살아 나셨습니다. 그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은 자유자대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때로는 문이 닫혀 있는 곳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 음식을 먹기도 하고 또 창에 찔린 자국을 만지게도 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역시 지금은 육에 속한 자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할 때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살아납니다.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습니까? 천국도 우리가 표현을 못하는 것과 같이 내세에 우리가 부활을 하는 신령한 몸도 우리 인생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시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50절을 보겠습니다. (신 284쪽)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땅에 속한 것은 어느 것도 하늘에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할 때는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혈과 육은 다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탄생이 되어 있는 영에 하늘로부터 입혀지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합니다.
신비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느냐면 우리가 부활을 할 때는 완전한 것으로 부활을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혈과 육은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썩어 없어지는 것으로는 하늘에 갈 수 없고 하늘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 성도의 부활은 신비로운 일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부활을 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6절을 보겠습니다. (신 146쪽)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천국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육으로는 난 것은 어느 것도 부활한 신령한 몸과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왜 씨에 대해서 그토록 강조를 하느냐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부활을 한 우리 신령한 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령한 몸에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혈과 육의 어떤 것도 포함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육은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지금 육으로 난 “나”는 부활한 신령한 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분명히 정립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육을 제가 전혀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나”는 이 육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영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 영의 사람이라고 합니까?
우리 성도는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입니다 그것은 내 육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람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살아서 이성적으로 느끼고 사고(思考)하는 이 육체는 분명히 “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 육을 부정하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육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것을 가지고 하늘에 간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안식일 교회에서는 우리가 천국에 갈 때 유일하게 가지고 가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화가 된 성품을 가지고 간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화가 되어 있는 성품이라고 해도 그것 역시 육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해야 합니다. 성화된 성품이 영입니까? 그것이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상들이 지금 교회 안에 깊숙이 침투를 해서 성화주의가 싹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어느 것도 절대로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안 됩니다
육의 거룩함은 천국 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육에 있는 것은 0.001%도 하늘에 가는 것이 없습니다. 흙에 속한 것은 다 흙으로 가는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영의 신비로운 일이지 그것이 육과 연결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세는 우리 육과 상관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을 시키고 있습니다.
언제 부활하는가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51-52절을 보겠습니다. (신 284쪽)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나팔 불 때 살아납니다.
마지막 나팔 불 때 변화된 몸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변화라는 단어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변화라고 하니까 나쁜 것이 좋아지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가 아닙니다. 어떤 것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변화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변화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변화가 된 것이 아니라 행위가 좋아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변화는 그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육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가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순식간에 변화가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떻게 변화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성경도 이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가 된다고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6절을 보겠습니다. (신 407쪽)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나팔을 불기 시작 합니다
마지막 나팔을 찾아보겠습니다. 일곱 번째 나팔입니다
요한계시록 11:1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410쪽)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마지막 나팔이 봅니다.
그때 일어난다는 말씀은 마지막 나팔이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이 부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상을 주신다는 말씀은 그들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해서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3-58절을 보겠습니다. (신 284쪽)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부활입니다
우리 육체는 분명히 썩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을 할 때는 절대로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 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이성적 사고로는 썩지 않는 것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됩니다 부활을 해서 신령한 몸을 입은 그 자체를 우리 인생의 지적인 능력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썩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아마도 다이나몬드나 썩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금도 방치를 해 두면 썩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을 하는데 썩지 않는 것으로 입는다는 것은 도무지 어떤 형체를 입는지 상상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상상을 하고 있고 또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형질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가지셨던 몸은 흙에 몸이고 두 번째 가졌던 몸은 하늘에서 온 것으로 입혀진 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신령한 몸이지만 몸을 가졌기 때문에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신령한 몸이 정말 그렇게 이 세상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아니면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인지 저도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부활의 차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일 처음 살아나는 것은 영의 탄생입니다.
요한복음 5:25절을 보겠습니다. (신 151쪽)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을 들으면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속에 있는 영은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죽어 있는 상태에서 복음을 들으면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살아나는 것이니까 부활하는 것입니다 처음 에덴에서는 살았었는데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죽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는 순간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2-24절을 보겠습니다. (신 282쪽)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부활은 예수님에게 붙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는 안 붙은 자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은 자가 먼저 살아나고 그 다음에는 안 붙은 자가 살아납니다. 안 붙은 자는 영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둘째 사망 불못에 던지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32쪽)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부활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 데살로니가 4장의 말씀으로 인하여 심각한 문제가 발생이 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저를 이단으로 공격을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번에 설교를 작성하면서 새롭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종말론 자들과 휴거론 자들이 많이 발생이 되고 있고 휴거를 기다린다 하면서 1992년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그들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이 휴거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어느 교회에 가면 그림으로 휴거가 되는 모습을 아주 크게 벽에 그려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휴거를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단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수도 없기 휴거론이 주장이 되어 왔고 그들로 인하여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을 하고 또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휴거가 있습니까? 휴거가 없습니까? 아마 제가 이렇게 물으면 대답은 뻔합니다. 지금은 이단 뿐 아니라 정통의 교회도 모두가 휴거가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도 이제까지 휴거가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설교에서도 휴거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는 글이 있는 것이 있음을 인정을 합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난해 합니다.
저도 이 설교를 준비를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휴거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을 해 왔기 때문에 사실 더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사실 이 시대 어느 누구도 휴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저 역시 너무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이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을 하고 난 후에 살아 있는 자들이 들려올라 가는 휴거가 있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휴거론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는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공동번역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살아남아 있다 해도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결코 먼저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남아 있다 해도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저도 어느 번역이 맞는다고 말씀을 드리기가 참으로 난해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서를 잘 이해하시면 됩니다.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으면 주님께서 빨리 이 세상에 오시기를 바랬고 그런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했기 때문에 마치 휴거가 있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초대교회에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은 빨리 주님께서 오셔서 자기들을 이 세상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시대적인 배경 가운데서 데살로니가서를 사도 바울이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성경을 바로 이해를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휴거를 뒷밭침할 만한 성경말씀들이 있어서 더욱 휴거에 대해서 아무도 이견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40-43절을 보겠습니다. (신 42쪽)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습니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할 것이고 하나는 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분명히 주님께서 오실 때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휴거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보고 누구라도 휴거를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휴거로 말씀을 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있으매 라고 하는 말씀은 그 자체가 비유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습니까? 구원을 받는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는 것이지 실제 그때에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때가 아니냐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래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에 반은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하실 때 둘을 놓고 비유를 했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가운데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진리 안에 거하고 있으라는 말씀이지 실제 깨어 있는 것을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깨어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깨어 있습니다. 그의 육체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그 영혼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상태를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 살아 있는 상태에서 들림을 당한다는 뜻으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너희 주가 언제 임할지 모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밭을 갈기도 했고 매를 갈기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렇게 밭을 갈고 있다가 매를 갈고 있다가 주님이 오시기 전에 육체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분명히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게 되고 하나는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30-31절을 보겠습니다. (신 42쪽)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나팔 불면서 부활시켜서 데려 들려 가는 것입니다
나팔 불면서 천사들이 각 곳에서 그 택하신 자들을 빨리 일어나게 해서 예수님께 데려가는 것입니다 부활되어서 변화되어서 끌려 올라가는 것입니다 변화 시키는 것도 육의 몸을 신령한 몸으로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살아 있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하는 말씀인지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기가 참으로 난해합니다.
지구의 종말입니다
만약에 아직 믿음이 있는 자가 있다면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물로 멸망을 시킬 때 노아 한 사람만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의인 열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을 시키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휴거 문제가 걸림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칠년 환란이니 또 삼년 반 환란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환란을 대비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뭉쳐서 살아가고 있고 또 환란을 대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겠지만 과연 주님께서 오실 때 이 세상에 믿음이 있는 자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제가 볼 때는 회의적입니다. 물론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택하신 자들을 모읍니다.
그런데 땅에서 모은다고 말씀을 하지 않고 하늘 이 끝에서 하늘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미 잠자는 영혼들은 하나님께서 보호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할 때는 그 영혼들이 깨어나서 변화되는 것을 마치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부활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부활에 대해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종말론 자들이 일어나고 있고 휴거가 된다고 하면서 휴거 일자를 정해 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은 다 부활에 대해서 잘못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32쪽)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저는 휴거론에 대해서 솔직히 반대를 하고 싶습니다.
저를 이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왜 제가 휴거에 대해서 반대를 하는가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기록을 했는가 하는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너무 고통 중에 있었던 것을 성경이 기록했고 그들은 주님께서 빨리 오시기를 바랬고 또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소망을 줄 필요가 있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8을 보겠습니다. (신 332쪽)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위로의 말씀입니다
당시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주님께서 당장이라도 오시면 너희를 공중에서 영접할 것이라고 그들을 위로하는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다른 번역에서 보면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를 위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한 구절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저도 이 휴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기는 곤란하지만 그러나 그 결론이 여러분이 이런 말로 서로를 위로하라는 것으로 보았을 때는 부활에 대한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 당시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기 위해서이고 또한 곧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을 하면서 위로를 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이 휴거론은 상당히 논란이 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 휴거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휴거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물론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휴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치고 율법주의 사상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았을 때 휴거론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사상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5-6절을 보겠습니다. (신 420쪽)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천년 왕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 하는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를 한 성도들은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데살로니가서에서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혹시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있다면 첫째 부활을 말씀을 하고 난 후에 휴거에 대해서 말씀을 했어야 합니다.
부활은 단 두 번입니다
성경에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휴거가 있다면 첫째 부활이 있은 후에 살아 있는 자들이 들려 올라갔다는 말씀을 요한계시록에서도 기록을 했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휴거론이 나왔습니까?
이것 역시 종말론을 통해서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잘 알겠지만 1992년에 사람들이 자기 전 재산을 다 교회에 가져다 바치고 휴거를 기다렸습니다. 비록 감옥에는 갔었지만 그는 막대한 부를 축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회가 불안할 때마다 유럽에서도 이 휴거론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교인들의 전 재산을 빼앗는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형태로 부활을 하는지는 성경에 언급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이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굳이 알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를 한 성도이기 때문에 굳이 둘째 부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역시 예수님과 똑같이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천국이나 부활을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은 지금 우리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어떤 몸이라는 것을 조금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번째 부활에 참예하는 성도님들이 되어서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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