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2:32절을 보겠습니다. (구 1273쪽)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마태복음1:21절을 보겠습니다. (신 1쪽)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누구든지 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누구든지가 아니라 앞에 전제조건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니까 목청을 높여서 주여 주여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귀가 안 들리시는지 그것도 큰 소리로 온 교회의 교인들이 만세 삼창을 부르듯이 주여 주여 주여를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불러야 합니까? 이 시대는 교회가 민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어느 건물에 교회가 들어가면 아주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주의 이름을 아주 큰 소리로 부르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니까 초등학생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참 끔찍합니다.
저 역시도 종교의 포승에 묶여 있을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누구보다도 더 큰 소리를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다 종교의 세뇌에 의한 행위라는 것을 이제 알고 나니까 사람의 이성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 시대 교회입니다. 주여 삼창을 하고 나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불러야 주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왜 불러야 하는 줄도 모르고 아무 때나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단 한 가지의 이유입니다. 그것 외에는 우리는 주님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의의 삯을 위해서 주님을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이성의 탐욕을 이기지 못해서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럼 주의 이름을 언제 불러야 합니까? 이 구원을 위해서 내 죄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할 때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언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줄을 모르고 교회 안에 나와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을 알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냥 아무 때나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주의 이름의 뜻을 알고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을 아무 때나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아무 때나 부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육적인 재물을 위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고 자기 가족의 출세를 위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야 그때 주님을 부를 수 있는데 아무 때나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단 한 가지의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의 이름을 부르지를 않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바알을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 모릅니까?
예수 그리스도, 여호와 그 이름을 모릅니까? 그런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의 이름을 알고 불러야 합니다. 이름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그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45쪽)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를 때는 반드시 모든 불의에서 떠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불의에 대해서는 로마서1장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대는 불의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입니다
그것이 다 율법의 행위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닙니다.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구원을 받기 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그는 불의에서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부르고 있습니까?
이 시대 율법을 안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솔직히 여기 그리스도편지에서 교제를 하는 성도들 빼고는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을 못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그는 주의 이름을 모르고 부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안다고 해서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불러 보아야 대통령이 알지 못하면 절대로 대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것을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누군가를 이렇게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나와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불의에서 떠난 사람만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불의에서 떠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불의를 행하고 있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떠나시기 바랍니다.
불의에서 떠나지 않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불의를 행하고 있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안 불렀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제사를 드리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의를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누구나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에서 떠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만 부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모든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의에서 떠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살인을 한 자라도 마찬가지고 그가 간음을 한 자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고 설령 동성연애를 했다 해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이 불의가 무엇인가 하면 거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그 어떤 죄를 지었어도 상관이 없지만 그러나 율법을 지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를 보면 모두가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불의에서 떠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서의 말씀만 보고 자기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만 보면 그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의 말씀을 보면 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그 문장을 아는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디모데후서의 말씀을 찾아서 누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의도 모르고 있고 디모데후서의 말씀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입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그 어떤 죄를 지었어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 주의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그렇게 알았으면 이제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불의에서 떠나 있는 성도만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을 바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세상과 같이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구원이 없다면 정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다 죽이고 살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감성으로 느꼈습니까?
그렇다고 누구처럼 자랑을 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무색무취합니다.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내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에 없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내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믿게 역사를 하고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믿음의 말씀을 보고 듣고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똑같이 느끼고 감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님들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나도 자랑하고 싶고 사람의 이성에 옳은 것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우리는 버리고 있습니다. 아니 불의에서 떠나서 이렇게 무색무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이 구원이 있어서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이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우리가 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77쪽)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구원입니다.
앞에 있는 즐거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이라고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천국이 어떠한지는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러나 유일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신체가 아니라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구원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달마다 생명나무 과실이 열린다고 하고 있고 길이 정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우리의 부림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많다고 하면 아마도 조금은 퇴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지극히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시대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천만 명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100명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30명이 넘고 있지만 그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구원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 구원입니다.
우리 앞 세대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오고 나서 과연 누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 전에 누가 복음을 알았습니까? 이미 한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그 세대는 복음을 모르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최소한 2천만 명 중에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구원입니다
2천만 명 중에 만 명만 받아도 제가 이런 말씀을 안 드립니다. 아니 천명 만 받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100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을 이 시대 우리가 교제를 하고 있고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저 은혜라는 단어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혜가 있습니까?
제가 성경을 많이 보았습니까? 저는 한 번도 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지혜도 없는 사람이고 또 세상 적으로 보았을 때도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못 됩니다. 그런데 제가 상상하지도 못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가 이렇게 진리로 인도함을 받으면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세상 적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씀을 안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미련한 자를 택하사 세상에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떠한 구원을 받는가를 생각하면 정말 한 시도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얼마나 가슴 벅찹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살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은 안 되어 있어도 눈물을 펑펑 흘리는 기쁨을 만끽하지 않았겠습니까? 남의 종이 되었다가 자기 땅이 생기는 그런 것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이 구원을 생각하면 다른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지혜 있다 하고 세상에 능력 있다 하고 세상에 재물이 많다고 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을 주의 이름을 부른 그것으로 선물로 주시고 있습니다.
비밀입니다
누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제까지 유명하다고 하는 어느 신학자가 이것을 깨달았습니까? 어느 누가 불의에서 떠나서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이 시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 구원을 받았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동이 있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서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다른 길로 갈지라도 우리는 이 길이 참이기 때문에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로마서10: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53쪽)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부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성경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를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누구입니까?
저희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면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을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저희가 믿지 않아서 부르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합니다.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믿어야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은 그들이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경을 거의 다 육의 일로 보았습니다. 성경을 육의 일로 보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말라기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육입니다
육의 일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에 있어서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형편과 처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의 일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누구는 잘 믿으면 십일조를 많이 내게 해 주신다고 하고 있고 또 누구는 병도 고쳐 주신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십일조를 낼 수 있는 형편도 안 되고 병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14:4절을 보겠습니다. (구 811쪽)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믿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다면 이 시대 역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만은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늘 자기 조상과는 다르다고 한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죄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두가 죄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더라도 죄악을 행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죄가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문자적으로 부르고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악입니다
사람들이 짓는 도덕적인 죄악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으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죄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을 범하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실제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들 역시 진심으로 여호와를 부르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과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점점 타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이방에 복음이 전하고 나서 20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사실 초대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호와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시는 것을 모르고 사단이 주는 것을 바라면서 여호와를 부르고 있다면 그는 여호와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늘 제사를 드리면서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제사가 우상에게 절을 하는 것이 되었고 바알을 섬기는 제사가 되다 보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지라도 자기들이 바라는 것을 사단이 주고 있기 때문에 실상은 사단을 부른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마귀의 자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면서 죄악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정말 정성을 다 해서 제사를 드리고 또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지켰지만 사단이 율법을 지키게 해 줌으로 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죄악을 행합니까?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죄악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죄악을 알아야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데 죄악을 모르다 보니까 그것을 행하고 있고 그것을 행하다 보니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죄악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것이 악하다는 것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악을 행하고 있고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실상은 믿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5:21절을 보겠습니다. (구 1058쪽)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듣지도 못 했습니다.
말이 됩니까?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듣지도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었고 한 번도 하나님을 안 믿은 적이 없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에 대해서 듣지도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준합니다.
어리석고 둔 합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우준하여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주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우준하여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그들 스스로가 주의 이름을 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주시고 있지만 도리어 듣지도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 들을 수가 없는가 하면 우준하여 지각이 없어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듣지도 못한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듣지도 못한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니 주의 이름에 대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지혜의 은사를 주신 사람을 통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들으면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면 듣지를 않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습니다. 먼저 성경을 보고 복음을 안 사람을 통해서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없으니까 주의 이름에 대해서 들을 수도 없고 듣지를 못하니까 믿을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주의 이름을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듣지를 못하고 있고 듣지를 못하니까 믿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들어야 믿을 수 있는데 성경을 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보다보니까 주의 이름의 뜻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듣지도 못 했습니다.
성경이 좀 심하게 말씀을 합니까? 성경에서 듣지도 못했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짓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표면적인 것을 보면서 성경을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에 구원을 받을 사람이 얼마나 적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역시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이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이 시대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도리어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가 하면 차별이 없는 의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차별이 없는 의를 주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부요하신 분으로서 차별이 없는 의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 차별이 없는 의를 주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있지만 이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있고 믿지도 않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3:16절을 보겠습니다. (신 21쪽)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전파하는 자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파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스스로 지혜가 있어서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타락의 길로 갈 때마다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알아서 전했습니까? 우리가 선지자들을 보고 있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해서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이 전파하는 말을 듣지를 않았고 도리어 대적을 했습니다.
들을 수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다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역시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주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종교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종교가 다수를 이르다보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전파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굳이 전파하는 자가 없어도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성령을 보내 주시면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습니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누구나 성경을 볼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런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또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성경을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시대가 불과 100여 전 부터입니다. 이 성경을 보고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next 102-1.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2-2,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1) | 2025.03.05 |
---|---|
102-1,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0) | 2025.03.05 |
101-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0) | 2025.03.01 |
100-2,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0) | 2025.02.26 |
100-1,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0) | 2025.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