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계20:9.)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101-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윤주만목사 2025. 3. 1. 16:02

로마서10:13절을 보겠습니다. (25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문자에 감추어져 있는 비유와 은유를 바로 앎으로 해서 복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복음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빠져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모두가 종교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빠릅니다.

솔직히 먹고 살기도 어려운 때입니다.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에서 복음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사단은 점점 더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서 사람들의 혼을 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굳이 성경을 안 보아도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자기들이 구원받은 성도로 믿을 수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식을 좇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가하게 지식을 좇을 시간을 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군가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쫓아 올 사람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예배만 한번 참석을 하면 되는데 머리 아프게 성경에서 복음을 알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단은 점점 더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의를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안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사실 그리스도편지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를 알고 그것이 내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하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쉬운 방법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경에서 이 의에 대해서 바르게 정립을 하지 못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헬라인 역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그가 어떤 사람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셔서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부요하십니까?

이 시대는 주님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주님이 부요하시다고 하니까 세상의 것도 부요하신 것으로 알고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주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영생에 대해서는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의입니다. 유대인입니까? 헬라인입니까? 그가 누군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심을 주시고 있고 저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요하신 분입니다

구약에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먹여 배부르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먹을 것을 안 먹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십일조를 내서 스스로 부요하게 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주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일조를 하심으로 우리가 그것을 먹고 배부를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배가 부를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십일조를 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토지소산도 없는 자들이 이 시대는 자기들이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같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스스로 부자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토지소산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토지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토지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리고 그것을 우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먹여 배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부요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이 내신 십일조를 통해서 우리 배가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들이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내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님께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바리새인과 같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주님이 드린 십일조를 먹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가져와서 우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배부르게 하고 있는데 자기가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까? 오직 주님만이 부요하신 분인데 이 시대는 모두가 부자가 되어서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소득의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요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배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마치 우리가 배가 부른 것과 같이 천국에 가는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얼마나 부자인가를 모르고 있고 심지어는 자기가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가난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할 수 없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모두가 부자가 되어서 십일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십일조를 하는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시대 역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절대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는 점점 더 십일조를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수많은 헌금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다 율법이고 성경은 그것을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그것으로 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난해지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만이 드리실 수 있는 십일조를 자기들이 드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드리신 십일조를 이 시대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먹고 있습니다. 그 십일조를 우리가 먹음으로 해서 부요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실 정도로 주님은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내 스스로 부요해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셔서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오직 주님만이 부요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매 삼년 끝에 창고에 가득 쌓아 놓은 것을 우리가 먹고 배불러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는 데는 어느 누구도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누구든지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누구든지 에는 어느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로마서1장에서 여자가 여자로 순리로 쓸 것을 버리고 역리로 쓰고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런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습니다.

이 시대는 교회가 동성연애자들을 막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들을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누구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동성연애 하는 자들은 안 된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에 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복음을 전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해야 합니다.

왜 차별을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차별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차별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차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여기에 제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누군데 감히 성경에서 누구든지 라고 말씀을 하는데 반대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한 성경에 있는 말씀과 다르게 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라고 말씀을 하는데 이 시대 교인들은 누구는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23:42절을 보겠습니다. (139)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강도입니다

성경에는 강도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단순한 강도짓을 했다고 해서 그가 십자가형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 아무리 법이 강했다 해도 단순히 강도짓을 한 것을 가지고는 십자가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모릅니다.

이 강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당할 정도라면 아마도 중죄를 지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고 할 정도로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있습니다.

그 강도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 사람은 낙원에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르는 이 강도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누가 더 나쁩니까? 이 강도가 나쁘겠습니까?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이 더 나쁘겠습니까? 우리가 솔직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상식으로 생각할 때 누가 더 나쁜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강도짓을 하다가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모순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 강도가 나쁘고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이 잘 한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도 도덕적으로 생각할 때 이 둘 다 나쁘다는 것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동성연애는 사형을 당할 정도로 나쁜 짓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죄를 짓고 있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내 곁에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고 흉악한 강도가 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서 피하겠습니까? 아마도 모든 사람이 그래도 흉악한 강도에게서 피하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그가 강도짓을 했습니까? 그가 간음을 했습니까? 그가 동성연애를 하고 있습니까? 제가 이런 사람들이 잘 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강도짓을 한 죄도 지고 가셨고 동성연애를 한 죄도 지고 가셨고 간음을 한 죄도 지고 가셨고 살인을 한 죄도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거기에 누구를 구별하고 차별을 하고 있다면 그는 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관데 감히 차별을 합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주일입니까?

십일조입니까? 그런 것으로 진리를 막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언제 주일을 지키라고 했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까? 성경의 의미를 모르고 그런 것으로 구원을 막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안 보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구원과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성경에 누구든지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셔도 그가 자의적으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점점 더 벽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지도 못했던 것과 같이 거의 그런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천국 문을 막고 있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한편 강도를 구원해 주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누구든지가 아니라 자기들의 암묵적인 조건에 맞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벌레 같은 인생입니다. 구더기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각이 없는 짐승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내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나를 무엇이라고 하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 안개와 같은 사람입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는데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그 율법의 기준을 가지고 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5:1절을 보겠습니다. (268)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성경이 기록이 될 때만 해도 2000년 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는 사람을 사고파는 것도 당연시 되었습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이 종을 사고팔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면 포로를 잡아와서 자기 노예로 삼았습니다. 전쟁에서 그런 것은 하나의 전리품으로 생각을 하고 마치 짐승과 같이 그 노예에게 자기 집의 문장을 낙인을 찍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 당시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당시 있었던 실제 일을 비유로 해서 우리의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비의 아내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았듯이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그는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와 2000년 전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일을 행한 자를 이미 판단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판단은 무엇입니까? 실제 있었던 일을 영적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을 판단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육으로 행하고 있는 사람을 판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회 안에서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자를 판단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판단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 일을 한 그 사람을 판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을 판단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판단을 했다는 말씀은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까?

육적으로 아비의 아내를 취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비의 아내를 취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기록하게 하셨습니까? 영적으로 실제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의 아내입니다

이미 그리스도편지에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이 아비의 아내는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음행이 심한가를 이 시대는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짓습니다.

누가 감히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 도리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저의 아내라고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주님의 아내입니다. 주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이사야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일입니다

교회의 이름을 짓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교회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이름을 지어서도 안 되고 또 그 이름을 불러서도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그리스도편지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처음에 세무서에 등록을 하려고 하다보니까 그리스도편지 선교회로 등록을 했습니다. 그냥 그리스도편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리스도편지선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삼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 역시 마음에 걸리고 있습니다. 선교회 역시도 교회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편지입니다

고린도후서3장에서 너희는 그리스도편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회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마음에 걸리고 있습니다. 일반 교회에서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제까지는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리스도편지라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체가 그리스도편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 이상의 호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이트에서도 어느 순간부터 선교회라는 것을 다 빼고 있습니다.

아비의 아내입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아비의 아내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판단을 받고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 교회에 대해서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일을 하면서도 통한히 여기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일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비의 아내를 취하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런 자를 판단했다는 말씀은 육적으로 실제 있었던 그런 자를 판단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하는 자를 판단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자는 사도 바울이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육적으로 그런 자는 사단에게 내어 주어 그 육신은 멸하고 영혼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우리 복음을 가진 자도 도무지 용납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누가 이 사람을 용납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용납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누구든지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누구든지 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내 이성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죄도 주님께서 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죄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그런 죄까지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이 계속해서 교회 안에 있는 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중에 물리치지 않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을 했을 때는 반드시 그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그러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도덕과 그리고 법이 허용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물리쳐서는 안 됩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동성연애가 세상 법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판단하고 물리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다 보면 저는 스스로가 고치려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남들이 용납을 하지 않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법이 허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일입니다

저도 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법도 처벌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법에 처벌을 받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법과 제도를 스스로 따르려고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강제는 할 수 없다 해도 세상 법을 따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이 사람도 그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었어도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주님이 부탁하신 이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의 도덕과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도 막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막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악한 자입니다. 왜 성경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자기들이 정한 법을 세워 놓고서 그것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어떤 행위를 해야 직분을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8:24절을 보겠습니다. (31)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시편62:9절을 보겠습니다. (846)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부자가 되어서 자기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믿음은 나를 아는데서 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영생이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입니다

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 아담의 자손 모두를 대표하는 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하나,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할 때는 대표성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을 어느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모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비유로 일만 달란트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이 말씀은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교회 안에 있든 교회 밖에 있든 모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거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입니다

우리 인생이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우리가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어느 한 사람이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인가를 모르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잘 지킵니다.

그리고 십일조도 잘 드리고 있습니다. 또 예배도 아주 잘 드리고 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분명히 저들은 죄인이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절대로 자기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제가 우리 인생 모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고 하면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죄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렇게 묻고 있는 자체가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자기가 누군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육체를 죽이는 사람이 나쁩니까? 영혼을 죽이는 사람이 나쁩니까? 세상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될지 몰라도 성경은 육체를 죽이는 사람보다 영혼을 죽이는 사람이 더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죽이는 사람은 죄인이지만 영혼을 죽이는 자는 악인이라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인에게는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누가 더 나쁩니까? 히틀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악인입니다. 그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천주교 안에서 율법주의가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을 다 살인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어거스틴을 말씀하겠습니다.

그는 위대한 교부입니다. 지금 이 시대 천주교나 기독교할 것 없이 모두가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어거스틴이 누구입니까? 대표적인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어거스틴하고 히틀러하고 누가 더 악한 자입니까?

히틀러는 육적인 생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고 또 그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히틀러가 죽인 육체의 생명보다 더 많은 영혼들이 사망으로 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입니다. 한명의 위대하다고 하는 신학자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죽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히틀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생명을 죽였습니다. 그가 진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습니다. 다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입니다.

그가 쓴 참회록은 거의 모든 목사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하고자 했던 신학적인 사상을 목사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천주교인이나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보면 저를 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로 인하여 히틀러가 죽인 사람보다 더 많은 영혼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더 악합니까? 히틀러가 유대인을 천만 명을 학살을 하고 또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인명을 죽게 했습니다. 그 히틀러의 죄가 큽니까? 내가 교회 안에서 나로 말미암아 율법주의로 빠지게 해서 한 영혼을 죽게 한 것이 더 큽니까?

누가 더 악합니까?

영의 생명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화가 날 사람도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이 다 죽는다 해도 아무 상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진노를 참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이 영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육체 수천만 명보다 아니 수억 명보다 한 영혼이 더 귀합니다. 이 시대는 이성에 사로 잡혀서 제가 드리는 말씀을 도무지 이해를 못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죄 입니다

그것은 입김보다 더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진 죄입니까? 그리고 내가 진 죄입니까? 그것을 저울에 달아 보니까 입김보다 더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틀러도 율법을 하나도 못 지켰고 나 역시도 율법을 하나도 못 지켰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까지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자로 영혼을 죽이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어떠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한 영혼이 죽는 것이 어떠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까?

누가 율법을 지켰다고 말을 합니까? 우리는 어느 한 가지도 율법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613가지 율법 중에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심으로 해서 내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마치 주님 앞에 찾아온 부자 청년과 같이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최소한 다른 신은 섬기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최소한 살인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누구든지가 용납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라는 이 말씀이 너무 은혜가 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정말로 이상한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가 용납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사마리아 사람을 마주치면 개를 만나는 것과 같이 아주 싫어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마음에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가 안 됩니다

로마서의 이 말씀을 보면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이런 말씀들을 보고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우리에게는 이 누구든지가 너무도 큰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어떤 죄인인가 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아는 성도만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로마서의 말씀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next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