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8:21절을 보겠습니다. (신 180쪽)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종교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생들의 철학적 지식으로 보고 있고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어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입니다
성경을 인생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자적으로 보고 있는 성경으로 인하여 스스로가 모순된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것을 비유로 해서 소경이라고 그리고 문둥병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런 말씀들 역시 문자적으로만 보고 있어 성경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차별을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인생들 스스로가 종교가 되어서 차별을 하고 있고 성경을 보고 오해를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있고 그들에게 옷과 양식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차별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스스로 차별을 하고 있고 그런 차별을 보면서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 종교를 보면 볼수록 모순이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그 종교 안에서 인생의 철학으로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종입니다
이 세상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아도 그때부터 벌써 종을 사고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 세상의 그런 풍습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말씀을 보면서 문자 그대로 보고 있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서 그렇게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십계명입니다
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말씀은 비유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이 종을 사고파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종교는 그런 말씀들을 오히려 이용을 하고 있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종입니다.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탐내지 말라고 십계명에서 말씀을 하니까 종을 두고 살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비유로 해서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고 있습니다.
물론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과 200년 전에만 해도 청교도들이 이주를 한 미국에서도 농사를 많이 짓기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가지고 사고팔면서 농사를 짓게 했고 그것이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 졌고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십계명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빌레몬서를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는 로마 시대에 부자이든지 아니면 고위 관리였습니다. 부자라는 말이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집이 커서 그 집에서 예배를 하게 자기 집을 내 놓았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자기 집에 있던 노예들도 같이 복음을 듣게 했던 사람입니다.
오네시모입니다
종 중에서 한 사람입니다. 그가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른 곳으로 갈 때도 그는 함께 다녔던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런 그를 다시 빌레몬으로 집으로 보내면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내가 동무로 나를 아는 것과 같이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이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레몬에게 강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승낙을 구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주님께서도 육체를 보고 판단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종교인들은 종을 삼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도 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이중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종교가 되어 있는 유대교의 어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잡기 위해서 묻고 있고 또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말씀을 하신 교훈에 대해서 물으면서 주님의 말씀에서 자기들의 교리와 다른 것을 찾아 증거로 삼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훈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의 교훈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모든 종교는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교훈입니다
그들은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보아서도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율법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부터 해서 주님을 대적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진리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그렇게 어두움의 길을 가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훈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거의 주님의 말씀을 감동을 받아서 기록한 성경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그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뒤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을 하심으로 해서 우리 안에 예수의 영이 거하심으로 해서 그 생명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부활에 영광에 참예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를 해 주고 있고 우리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성경대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증거를 받고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양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사도 요한을 통해서 환상으로 보여주시면서 우리 성도들로 믿음으로 역사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모든 귀결은 하나님 나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지만 인생들로서는 듣고도 너무 어렵다고 제자들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또 확인을 하기 위해서 다시 주님께 묻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답을 해 주시지 않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게 묻소?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오.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소."”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마태는 천국 복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천국 복음을 누가 듣는가 하면 가난한 자들이 듣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져도 그것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종교는 그 안에만 들어가면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고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훈입니다
영생을 얻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태초에 있는 생명을 얻은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자기 육체를 보게 되고 그런 그들은 태초에 있는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사람도 이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고 그것은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생명을 얻는 일을 모른다는 것을 경계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만 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이방의 종교는 신약성경까지 보고 있으면서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신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다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대제사장이 다시 묻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대제사장의 폐부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묻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53:7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3쪽)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을 대표로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어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대제사장이 그들의 어른이 되어서 모든 중요한 일에 있어서 결정을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종교가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의미는 전혀 모르고 그 문자는 아는 것으로 종교가 되어서 실제로 이 세상에서 어른 행세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있는 인생들의 철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철학에 우리 성도는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문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인생들은 종교 안에 들어가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속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쉽게 말씀을 하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그 문자를 알고 실제 안식일이라는 날을,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임수로 그러니까 그렇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아는 것으로 너희를 사망으로 끌고 가는 일에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역시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를 인생들은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 노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은 자기들이 육체적으로 대제사장직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렇게 성경을 보면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고 그것이 인생의 철학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어른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대제사장도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입니다
그런 그가 성경을 보고 그 문자대로 행하면서 도리어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에게 교훈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대제사장만의 일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인들을 대표로 하고 있고 그들이 지금도 이렇게 성경을 보고 있고 물론 대제사장은 없지만 대제사장과 같이 종교 안에서 어른으로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피조물이라는 것을 늘 명심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종교가 되고 그 안에서 어떤 직책을 맡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누군지를 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주님께 그 교훈에 대해서 묻고 있는 대제사장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보면서 종교의 속성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저 사도 요한이 당시 대제사장 개인의 일을 성경에 기록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인을 대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지금 이방의 종교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입니다
주님께 가르치셨던 교훈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만이 모른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말씀을 했지만 골로새서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종교인들입니다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종교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이 세상 철학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방의 종교인들입니다.
유대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방인들 역시 경계로 삼기 보다는 자기 합리화를 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유아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 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과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시고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다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기 때문에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전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내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하는 그런 말씀은 제자들까지도 어려워서 누가 듣겠느냐고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내가 너희가 믿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을 말씀을 하니까 그들은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내 양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면서 내 양은 내 말을 듣는다고 말씀을 하시니까 유대인들로서는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모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것은 다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또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죽어 장사 되어 무덤에 있는 나사로까지 살려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주님께로 와서 말씀을 듣자 자기들의 종교가 영향을 받는 것을 그들은 싫어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모두가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오시자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 유대교인들은 두려운 마음까지 있었고 어떻게 하든지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생의 철학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된 세상에서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고 있는 철학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깨닫지를 못하니까 자기들이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인생들입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주님께서는 이루셔야 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지금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입니다
그들은 종교인이고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이미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님을 죽이기 위해서 이제 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 묻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그들에게 아무 말씀을 해 주시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대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냥 문자를 알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기 위해서 보아야 하고 그 일도 인생의 철학으로 안 되기 때문에 먼저 유월절을 먹어야 하고 반드시 성령을 구해야 하고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종교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는 것을 방해를 했고 그들의 신학에서는 이렇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알레고리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이 서로를 인용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 세상초등학문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오히려 알레고리하다고 말을 하고 있고 유대인들과 같이 문자에 집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들이 믿는다고 하는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성경에 문자적으로도 어떤 근거도 없는데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보는 자세가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알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종교에 들어가면 소자가 되어 그 교리를 먼저 배우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입니다
그냥 기록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그 문자를 보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을 수 없고 그러면 그들은 절대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53장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제사장이 그 교훈에 대해서 묻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응하게 하는 말씀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설령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해도 그들에게는 성령이 오시지가 않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의 말씀입니다
이 시대 종교인들도 문자적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용을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사야 말씀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서로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는 것을 그들의 교리가 차단을 하고 있어서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마지막 일을 앞에 두시고 있습니다. 이제 대제사장들의 생각과 같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서 그리고 그들은 모르겠지만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을 하심으로 해서 영생을 얻게 하는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더 이상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주님께서는 죽으시고 또 성경대로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을 하심으로 해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8:22절을 보겠습니다. (신 180쪽)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경비병 한 사람이 곁에 서 있다가 "대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대답이냐?" 하면서, 손바닥으로 예수를 때렸다.”
모릅니다.
대제사장과 유대교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잡히신 것을 보고 그저 인생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다윗과 같은 왕이라면 그리고 그 선지자라면 자기들에게 잡히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타내신 표적과 병자들을 고치셨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일을 이야기를 들어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으신 분이고 하나님이 진짜 보내셨다면 자기들에게 잡히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엘리야입니다 아합 왕이 죽고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 그가 병이 들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신하를 보내어서 자기 병에 대해서 물으러 보낼 때 엘리야가 너희에게 여호와께서 계시는데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말을 하고 있고 왕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서 엘리야를 데리러 오라고 해서 갔다가 오십 부장과 군사 오십 명을 보냈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이 다 불에 살라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그를 잡으러 왕이 오십 명의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죽었고 다시 보냈는데도 또 그렇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오십 부장이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라고 하니까 엘리야가 내려갔다는 말씀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어려서부터 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사건 정도는 그들이 다 알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군대를 몇 명을 보냈는지는 정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지금 그들의 군대에 잡혀 왔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주님을 엘리야보다도 못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그가 엘리야보다도 더 능력이 있다면 자기들이 보낸 군대에 잡혀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셨다면 이 정도의 군대에 잡혀 오지도 않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문자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잡히셨을 때 그들은 더 함부로 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그리고 아는 것으로 진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면 그들이 보낸 군대 정도에는 잡히지도 않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잡혀 왔습니다.
사실 이때부터 그들은 더 자신감이 생겼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를 알기 때문에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영의 일에 대해서는 소경이었던 그들이 성경의 문자를 아는 데는 아주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주님을 인정할 수 없었고 주님께서 잡히시고 난 후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입을 열지 않음으로 해서 더욱 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유대교입니다
어찌되었든 표면적으로는 그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는 것을 믿고 있고 자기들의 조상들에게서 어떻게 역사를 하셨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영의 일을 모르는 그들에게는 주님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그들은 표적을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잡히시고 난 후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구속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털 깎는 자 앞에서 있는 양 같이 잠잠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정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면 지금 이렇게 자기들에게 수모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성경에서 선지자들의 말씀을 보고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와 같은, 엘리야와 같은, 그리고 다윗 왕과 같은 이를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대제사장은 안심을 하고 죽일 수 있었습니다.
시편13:2절을 보겠습니다. (구 811쪽)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종교입니다
주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종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지 않고 거의 다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다보니까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종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유대교라는 직접적인 단어도 성경에서 4회 정도 밖에는 말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거의 다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종교를 음녀로 그리고 짐승으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다보니까 사람들은 이런 비유의 말씀을 보면서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생각을 좋게만 하고 있고 더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니까 그런 표면적인 것만 보고 더욱 더 종교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요한복음을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주님이 누구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표입니다
그들은 우리 이방인들의 예표와 경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에 따라 우리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표로 삼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언제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성경을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믿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계속해서 보내주시고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그들을 계속해서 부르셨지만 그들은 더욱 더 종교가 되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초등학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상과 같은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을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국가와 그리고 종교 또 단체, 사회는 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율법을 기록했고 그런 말씀을 보고 문자 그대로 자기 육체로 행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 세상초등학문을 따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들이 같다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런 종교적인 행위에 빠져 그 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압제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악인이라고 주님께서는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우리가 유대교를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했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를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그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른이 되었고 모든 사람도 이 대제사장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들을 따라 하고자 하는 것을 누가복음21장에서 부자가 헌금을 하는 것과 과부가 그 구차한 가운데서 자기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내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우상입니다
그 우상을 보고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생활비 전부를 낼 정도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헌금 자체도 비유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행위로 부자를 따라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속담에 뱁새가 황세를 좇아가다가 다리가 찢어진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밥 먹고 율법만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일반 백성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입니다
인생의 철학으로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그대로 행위로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보고 그와 같이 되고 싶어 하면 그를 우상으로 만들어서 좇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율법주의를 좇아가고 있는 그들을 종교라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님의 원수입니까?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가 주님의 원수가 아닙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당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교의 어른이라고 하는 대제사장이 지금 주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그 교훈에 대해서 물으면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빌라도에게 고소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종교와의 싸움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인 자들이 바로 종교인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종교를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시면서 두 짐승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를 먼저 짐승으로 이방의 종교를 다음 짐승으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 비유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원수입니다
종교는 주님의 원수입니다. 주님의 원수면 우리 성도의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 역시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 종교에 의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또 우리 성도들의 수많은 숫자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목 베임을 받은 자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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