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3:25절을 보겠습니다. (신 40쪽)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만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가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려 있는 사람은 다 바리새인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에게만 이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만의 문제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인들 역시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예표와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입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잠시 복음이 전해지고 난 이후에 이방의 교회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만 보더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말로는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하지만 역시 가서 보면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입니다
지금의 이방의 교회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 못지않게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말씀이 있으면 이 시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마치 자기들은 율법을 안 지키고 바리새인만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가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탐욕입니다
그들이 무엇으로 탐욕을 부렸습니까? 그들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얻기 위해서 탐욕을 부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탐욕과 방탕이 없는데 바리새인들은 뭔지 모르지만 탐욕과 방탕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으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있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이 죄가 사도 바울이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득합니다.
어느 정도 가득한가 하면 바리새인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가득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이 정해서 지키고자 하는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그 죄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탐욕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보고도 마치 세상에서 탐욕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씀하고 있는데 탐욕이 무엇이고 방탕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깨닫지를 못 합니다.
무엇이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의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이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역시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의 속에 있는 탐욕과 방탕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바리새인은 온 율법을 문자 적으로 지키고자 했고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들이 정한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바리새인만 화를 당하고 자기들은 율법을 지켜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율법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탐욕과 방탕으로 율법을 지켰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 진실 된 믿음으로 율법을 지킨다고 정당성을 찾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는 죄는 똑같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15쪽)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내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바리새인의 속에 방탕이 있었습니다. 그 방탕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바리새인에게만 있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없습니까? 이 시대 역시 모든 교회가 술에 취해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그 속에 방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렇게 방탕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것을 행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죄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어느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죄인으로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처음부터 죄인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죄인으로 살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방탕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탐욕이 있습니다. 이것이 속에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원합니까?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원했습니까?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살아서 구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탐욕과 방탕이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행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죄를 짓고 싶었겠습니까? 그는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구원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교회에 나온 것은 내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꼭 내세만이 아니라 이생에서 복을 받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결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천국이며 구원입니다.
모두 다입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죄를 행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는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행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사도 바울은 정말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그것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행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습니다.
술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탕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리새인의 안에 있었습니다. 또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를 짓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거하는 죄로 인하여 원치 아니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함으로 내가 죽습니다. 그렇게 죽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 때문에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렇게 다 탐욕과 방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가 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술 취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려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령이 오시면 도리어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면서 더 술에 취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인가 하면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이 그들 안에 가득한 탐욕과 방탕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을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도 역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속에는 이것이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죄가 있습니다.
탐욕과 방탕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에 죄라고 그리고 탐욕과 방탕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로서 살아가는 당연한 행위라고 생각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것에서 자기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속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마음이 대단히 선하고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래도 잘 이해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영의 일이다 보니까 어떤 말씀은 정말 설명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이 말씀도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부터 7장 마지막 절까지 하고 있는 말씀이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제 율법이 영적인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율법주의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면서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문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서7장에서는 자기가 지키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면서 율법을 우리 육신이 어떻게 지키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렵지만 그래도 말씀에서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육신입니다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육신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지만 자기 육신이 죄에 팔린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속입니다.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습니다. 그것이 육신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육신으로 선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육신입니다
이 육신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무엇만 행하고 있는가 하면 죄만 짓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말씀을 하면서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율법을 말씀했습니다. 그 율법을 무엇이 지키고 있는가 하면 육신이 지키고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육신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육신으로 선을 행하려고 하고 선한 것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 속입니다.
그 속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과 그리고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선한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데 이 시대는 마치 선한 것이 거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육과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육을 사도 바울이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내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고 그것을 내 육신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도 육입니다
혼도 육입니다. 정신도 육입니다. 사람들은 이 마음을 육이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8장에서 영과 육에 대해서 분명하게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전에 율법에 대해서 정의를 하면서 내 속 곧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영적인 것을 안다고 해서 그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선한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으로 한 것은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육신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입니까?
그리고 육신입니까? 어느 것도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무엇을 하는 순간에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 순간에 육신이 속하여 죄에 팔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으로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육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육신으로 하는 예배를 드리는 일, 찬양을 부르는 일, 기도를 하는 일, 헌금을 하는 일 등 모든 일들이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입니까?
이것은 선한 것이 있습니까? 만약에 이 마음에 선한 것이 있다면 거듭남은 잘못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속, 그리고 육신의 어느 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려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5쪽)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성화주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 역시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은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하는 말씀을 왜 하고 있습니까?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렸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죄 아래 팔려서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해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했습니다.
자기 육신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도 바울의 육신이 죄에 팔려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육신에는 마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마음을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그런 말씀들을 보고 진짜 자기 마음이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 마음이 믿는 다고 표현을 했을 뿐이지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선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마음에 선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마음이 감동을 받고 있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그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합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 역시도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자기 겉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기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어떠한 행위를 하게 역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은 결국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 마음이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문제는 성령이 오셔서 어떠한 일을 하시는 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자기들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성령이 오셔야지만 내가 선하신 이를 믿을 수 있는 것이지 내 마음 스스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면서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속 곧 내 육신으로는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속이라는 것은 마음도 될 수 있고 정신도 될 수 있고 지혜도 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과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 합니다
그러나 거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세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지으실 때부터 내세에 대한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인생은 죽기 때문에 죽은 후에 자기를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육신에는 정신, 혼, 마음까지도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사도 바울이 독백을 하듯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살아보았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선한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자기들이 선한 것을 하려하다가 도리어 악한 일을 함으로 해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에게 선한 것이 없다면 우리 역시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태복음12:35절을 보겠습니다. (신 20쪽)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들의 마음에서 생각을 하고 성경을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내 마음의 생각을 버리고 나서 성경을 보아야 하는데 이미 자기 마음에서 결정을 하고 나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선한 것을 좋아하고 있고 그 선한 것을 행위로 나타내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의는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했으면 사도 바울은 선한 것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것을 낼 수 없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사도 바울이라고 해도 자기 속 곧 자기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누구만이 선한 것이 거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만이 선한 것이 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을 하니까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선한 사람이고 선한 것을 낼 수 있는 것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선한 사람이니까 선한 것을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가도 모르면서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알고 있는 그런 선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서 선한 것을 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선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나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선한 것을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3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을 좋은 나무로 말씀을 하고 있고 악한 사람을 나쁜 나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가 있고 사단의 나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게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선한 것을 쌓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구속의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으로 낸다고 하신 것은 주님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선한 것을 쌓아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선한 것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습니다. 주님은 좋은 나무입니다 그래서 좋은 실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 실과가 무엇인가 하면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생명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모두가 사단에게 잡혀 있어서 선한 것을 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하는 그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선한 것을 낼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그도 자기 자신을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해 있는 우리 인생은 선한 것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죄 아래 팔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육신입니다
육체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육과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육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지적인 것도 혼도 그리고 마음도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육신에 속한 사람은 다 죄 아래 팔려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인생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한 것을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선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그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니까 자기들이 바리새인이 아니라서 선한 것을 낼 수 있는 선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아닙니까?
우리 역시 육신은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그들만 그 쌓은 것에서 악한 것을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선한 것은 우리 인생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나무만이 좋은 실과를 낼 수 있습니다.
어떤 나무입니까?
육신의 나무가 아니라 영의 나무입니다. 육신의 나무는 어떻게 해도 좋은 실과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나무는 좋은 것을 내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이 좋은 것을 내고 있고 그 좋은 것을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좋은 실과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탄생이 되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좋은 실과를 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 해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도 선한 것이 거할 수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그 실과만이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낼 수 있는가 하면 영의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11장에서 이제 그 영의 실과가 어떻게 맺을 수 있는 가를 말씀하면서 접붙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우리 인생이 선한 것을 하려고 하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163쪽)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만이 선한 목자입니다. 어떻게 선한 것을 내셨는가 하면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 해서 선한 것을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선한 것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살리심으로 받으심으로 해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선한 것을 내셨습니다.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오고 있습니까? 좋은 나무에서 선한 것이 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나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의 생명을 주는 나무가 좋은 나무라는 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선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 것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말씀 그대로 영의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육신에는 그 선한 것이 거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만이 선한 것을 쌓았습니다.
그 나무만이 좋은 실과는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에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받기를 모두가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 바울 속 곧 육신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원함은 있으나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 분만이 선한 것을 쌓아서 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선을 쌓아서 선한 것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원한다고 해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 없으면 선한 것을 내시는 분을 믿어야 지혜로운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next 64-1.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64-2,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0) | 2024.10.23 |
---|---|
64-1,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0) | 2024.10.23 |
63-1,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 | 2024.10.19 |
62-2,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0) | 2024.10.16 |
62-1,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1) | 2024.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