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20:6절을 보겠습니다. (신 420쪽)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누구나 바라고 있습니다.
아니 이 부활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하는 자가 되어서 복을 받는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에서 이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부활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열심을 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열심이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역설입니다. 이 세상의 이성과는 반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이 세상의 이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서 좋은 것은 다 자기들에게 맞추어서 해석을 하고 나쁜 것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아주 적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 부활에 들어가는 자가 얼마나 적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는 그 말씀을 거의 모든 사람이 하고 있어서 실제 부활에 참예를 하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막연하게 자기는 부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활에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부활이라는 것을 너무 막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교회 안에서 사람의 이성을 따라 잘 믿고 있는 자기는 부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막연함을 종교가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부활을 합니까?
물론 선하신 이를 믿는 자가 부활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선하신 이를 믿는 것에는 따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하신 이를 믿어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조건입니다
아니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냥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부활에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려면 먼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앞에 말씀을 싹둑 잘라버리고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말씀을 모릅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려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럼 연합한 자가 되려면 나도 죽어야 합니다. 무엇에서 죽어야 하는가 하면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로마서6장3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죽어야 합니다.
어디서 죽어야 하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들이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한다고 하면서 부활에 대해서 노래를 부르면서 부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부활절을 지키는 사람은 첫째 부활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다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가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조건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성막과 율법을 주시면서 네 앞에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모르다보니까 아니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율법의 행위에 모두가 깊이 빠져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 말씀합니까?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 할례라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할례는 모든 율법을 대표하는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을 바라고 있습니까?
먼저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지도 않은 사람이 성경에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는 말씀만 보고 자기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부활에 참예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율법으로 모두가 사망에 이르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빌립보서3: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21쪽)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입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막연하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단어를 아는 것으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만 생각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절대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찌하든지
사도 바울이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는 어떻게 하든지 부활을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한 가지의 목적입니다 이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입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어떻게 하든지 부활에 이르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말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자기는 부활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위해서라면 자기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신 성도는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부활의 영광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비유로 알고 있지만 부활의 영광은 정말 우리 인생들의 생각으로는 상상이 안 되는 그런 영광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표현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 성도가 부활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표현으로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바로 이 부활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영의 일이다 보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 부활이 얼마나 영광스럽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부활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어찌하든지 부활을 하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기 전에 사도 바울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 합니까?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흠 없는 율법의 의를 배설물로 버렸다고 하면서 왜 버렸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진 흠 없는 율법의 의를 배설물로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살았던 그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죽고 나서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배설물과 같은 자기들의 의 때문에 그의 죽으심을 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쓰레기 같은 율법의 의가 가로막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있지만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부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지도 않은 그들이 부활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단 하나라도 나타난다면 여러분은 그의 죽으심에 본받은 자가 아닙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여러분의 진심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는 진심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악한 일입니다
이 세상 이성으로는 분명히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의 행사가 악하다고 증거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이 어디입니까? 바로 주님이 오셨던 이스라엘입니다. 그 세상의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대적을 했던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의 행사가 악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해서 악합니까?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그것이 악하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이성으로는 말이 안 됩니다. 아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이 시대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별 미친놈이 다 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흠 없는 율법의 의를 보고 악하다고 말씀을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행사가 악하다고 말씀을 하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참을 수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교회에서 하고 있는 행사가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악하다고 하고 그들이 부르고 있는 찬양이 악하다고 하고 그들이 하는 기도가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못 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는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우리 성도는 반드시 부활에 참예를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이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붙잡으려고 쫓아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다 율법의 행위에 빠져서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3:6절을 보겠습니다. (신 146쪽)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부활입니다
이 시대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부활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성경에 있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막연하게 부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될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조직신학 책을 그대로 발췌를 했습니다.
의인의 부활은 구속과 영화의 행위이다. 신체는 무덤에서 일으켜져 영혼과 재 연합하나, 그들의 부활에 있어서의 위대한 요점은 그들의 신체가 현재 영광과 축복받는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그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조직신학에서 배우고 있는 부활에 대한 정의입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부활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부활의 종교라고 하는 그들이 부활절을 성대하게 치르고 있는 그들이 배우고 있는 부활이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신체가 무덤에서 일으켜져 영혼과 재 연합한다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을 쓴 루이스뻘콥이라는 사람이 과연 성경을 봤는지 의문이 들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신체가 죽어서 무덤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실 때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신체와 영혼이 결합을 해서 생명을 부여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부활을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부활을 하는데 어떻게 부활을 하는가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살던 그 신체와 영혼이 결합을 해서 부활을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조직신학 책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신체가 무덤에서 일으킴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까?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무덤에 있던 자들이 깨어났다는 것을 인용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들의 상상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루이스뻘콥입니다.
저는 이 사람은 성경을 안 보고 신학서적만 보고 조직신학 책을 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직신학 책을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 채택을 해서 신학생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책에서 배운 그대로 또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 책이 기준에 되고 있고 이 책에 성경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까?
우리 신체와 영혼이 재 연합한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이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성경을 안 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신학자가 쓴 것을 인용을 하면 자기도 그 사람을 따르는 정통이 되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교인들에게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다시 씁니까?
성경에도 없는 말을 기독교조직신학이라는 책에 써 놓고서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하는지도 모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솔직히 루이스뻘콥이 지은 조직신학 책은 모순투성이지만 사람들은 그 책을 성경보다 더 신뢰를 하고 있고 먼저 그 책을 보고 난 후에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신학생들이 먼저 이 책을 공부하고 나서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사도가 그렇게 기록했습니까?
성경 어디에 신체와 영혼의 연합이라는 단어가 나옵니까? 아니 단어가 안 나오더라도 비유라도 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을 한다는 말씀은 나와도 우리 신체와 영혼이 연합을 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부활을 한다는 말씀은 어디에서도 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에서 배운 기독교조직신학 책에서 말하는 그런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노래도 만들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신체가 영혼과 결합을 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니까 천국에서 서로 만나서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랑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심합니다.
이미 기독교라는 종교는 성경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조직신학 책으로 인하여 삼위일체를 배우고 있고 물 세례를 하고 있고 성찬식을 하고 있고 교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조직신학 책입니다
말 그대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책입니다. 성도가 아니라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가 되기 위한 책입니다. 그리고 이 교리들 안에서 꼼짝을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책에 있는 세례를 반대하면 이단이 되고 있고 이 책에 있는 성찬식을 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고 있고 이 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루이스뻘쿱이 무엇입니까? 그가 무엇입니까? 그가 쓴 책이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루이스뻘콥의 사상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부활에 대해서도 전혀 성경과 다르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오실 때 일으킴을 받습니다. 그리고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연합을 해서 하나가 됩니다. 그 연합이 된 것이 생명을 얻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세상 적이고 얼마나 이해하기가 쉽습니까? 지금 이 시대 교회는 다 이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루이스뻘콥의 사상에 있는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로 난 것은 신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이스뻘콥은 신체로 난 것이 영과 연합을 해서 하나가 되어서 생명을 얻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난 영과 결합하는 것도 아니고 영혼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난 영이 없으면 여러분은 부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영이 있는 성도만이 주님이 오실 때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 세상에서 살던 신체가 부활을 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성령으로 난 영이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있어야 주님이 오실 때 여러분이 부활의 영광에 참예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으로 난 영의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있어야 부활을 할 수 있는데 이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도 모르고 있고 이 생명이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으로 난 영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는 예수의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난다고 하니까 우리 죽을 육체와 예수의 생명이 연합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그것에 예수의 생명이 연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는 그 말씀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맞습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인데 육과 성령으로 난 영이 연합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에 대해서 이분법으로 분명하게 구별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육은 죽지만 예수의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육체가 어떻게 변화가 되거나 연합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체는 죽지만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서 우리가 그의 부활을 본받아서 연합한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죽을 육체입니다
우리 육체는 죽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것이 변화되거나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육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죽을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부활을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들이 부활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육체는 죽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난 영과 연합을 해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루이스뻘콥의 개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단이 다른 것이 이단이 아니라 이렇게 부활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말하는 것이 이단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봅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 해도 성경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아니라고 하면 아닙니다. 그가 어거스틴입니까? 그가 칼뱅입니까? 그가 웨슬레입니까? 그들의 주장이 아무리 설득력이 있다 해도 성경의 권위를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이 어떻게 우리 안에 있는가 하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다시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우리 신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리스도와 같은 영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여러분의 육체에 나타나야 합니다.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지 않은 사람은 부활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 합니다. 반드시 예수의 생명이 있어야 하는데 기독교는 자기 신체가 깨어나서 영혼과 결합을 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영의 생명입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영의 생명을 주시고 그 이름대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육체의 이름대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생명의 이름대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 영의 생명이 하나님께 로서 난 자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을 안 보고 신학 서적을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쓴 책을 보면 여러분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첫째 부활에 참예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성경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으려 하지 않고 사람이 쓴 책에서 인도함을 받으려고 합니까?
사람입니다
더 이상의 책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성경만 보아도 아니 성경에서 지혜를 구하기만 해도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종교인이 쓴 책을 보면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부활을 생각하고 있는 그들이 어떻게 부활이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6:63절을 보겠습니다. (신 155쪽)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신체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분명하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은 육은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영에 생명이 있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릅니다.
살리는 것이 영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이 영이 어떻게 사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이 자기 안에 어떻게 거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하는 것은 우리 육이 아닙니다. 저를 이단이라고 해도 좋고 어떤 비판을 해도 좋습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하는 것은 이 영이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영이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고 살리심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육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 육체를 생각하면서 천국에서 만나보자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을 왜 갑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왕 노릇하기 위해서 가는 것 아닙니까? 거기서 다른 사람 만나려고 갑니까? 성경 어디에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육체는 무익합니다.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육으로 살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육체는 썩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익한 육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 육이 영혼과 연합해서 하늘의 생명을 얻는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썩을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아담의 이 썩을 것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것은 무익해서 다 썩어 없어집니다. 그 썩어 없어지는 것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난 영을 주셔서 구원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나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육체의 나는 썩어 없어집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 육체는 헛것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썩어 없어집니다. 그것을 나라고 하면서 혈과 정에 매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담과 같은 생명은 무익하기 때문에 썩어 없어지게 하시고 그 썩을 몸에 예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육체의 부활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 육체와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육체는 죽으시고 이제 영으로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부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상한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영이 바로 나입니다. 영원히 사는 나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나는 죽습니다. 그 죽어 썩어지는 것을 나라고 해 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육체의 정과 혈에 매여서 그것을 나라고 하고 있고 그것이 부활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아니 신학자들도 신체의 부활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목사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더 이상 성경을 볼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 교인들이 알고 있는 부활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주님의 부활을 본받아서 연합할 수 없습니다.
본질이 다릅니다.
신체의 부활과 영의 생명의 부활은 본질 자체가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부활도 내세의 일이기 때문에 인생들의 언어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나 영의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13-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99쪽)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부활의 형상입니다
그것도 사도 요한이 보고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되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3년 반 동안이나 같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인자 같은 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표현이 안 되니까 같다는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활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상으로 부활을 하는가를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모습으로 부활합니까?
정말 웃기는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지금의 형상으로 부활을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천사를 부릴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가 부활을 하고 나서 천사를 판단할 줄 모르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활을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세상의 샤머니즘적인 부활을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천사입니다
지금 우리 육체가 천사를 보면 죽은 자 같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을 하고 나서는 그 천사를 판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의 생명을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의 나입니까?
이 신체가 부활을 합니까? 그런 부활을 꿈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사도 우리에게 판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썩지 않을 형상을 입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왕 노릇합니다. 우리 성도의 부활을 시시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연합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과 같이 부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활을 소망하면서 붙잡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next 51-1.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2,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0) | 2024.09.15 |
---|---|
51-1,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0) | 2024.09.15 |
50-1,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1) | 2024.09.14 |
49-2,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1) | 2024.09.11 |
49-1,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1) | 2024.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