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19-2, 네가 율법을 행한즉

윤주만목사 2024. 6. 21. 08:23

로마서2:27절을 보겠습니다. (242)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사람인 그대를 정죄할 것입니다.”

무할례자입니다

우리 이방인은 모두가 무할례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할례를 받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실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고 유대인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람의 이성을 따라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데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가정이라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14절을 보겠습니다. (308)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할례를 한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흠 없는 율법의 의가 가졌다고 했지만 실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로 율법을 범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은 어떻게 율법을 온전히 지켰는가 하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여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잘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욥과 같이 산다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이루었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뜻과 같습니다.

율법을 이루었습니까?

율법을 온전히 지켰습니까? 먼저 내 몸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몸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율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몸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는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네 몸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온 율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몸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몸도 사랑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무슨 이웃을 사랑합니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들 말대로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종교가 맞은데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는 육체의 행위는 잘하고 있지만 자기 몸을 사랑하지를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유대인과 같이 할례를 받아서 온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케 하신 율법으로 내가 부요한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킨 사람만이 영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자기 몸을 사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할례자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말씀과 같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으로 이루었습니다. 비록 무할례자라서 율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해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켰을지라도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아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판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6:2절을 보겠습니다. (268)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영의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그저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성경을 보다가는 유대인들과 같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율법을 범합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율법을 범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범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의문에 쓴 계명을 그들은 지킨다고 지켰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다 범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무할례자이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도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문자적으로 지켰을지 몰라도 그들은 그 율법으로 인하여 살인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살인을 한 것으로 판단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영혼을 살인한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해서 판단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판단합니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살인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으로 판단을 한다면 성도들 역시도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그런 율법을 범한 자인데 어떻게 똑같이 율법을 범한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키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사실 이 문제를 깨닫는다는 것은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이 됩니까? 그러나 성도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알기에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판단합니다.

바로 그것으로 판단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율법을 범하는 것에 대해서 판단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을 범하는 것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세상 사람을 판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로마서2장에서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판단을 받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과 다름이 없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율법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율법을 범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에 쓴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너희들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판단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의문에 율법입니다

그것으로는 아무도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는 한편 강도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문에 대해서 판단한다는 것이 아니라 의문을 가지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는 것에 대해서 판단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의문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는 것을 판단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같이 의문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의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러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의문의 쓴 계명의 율법을 지키고 있지만 실상은 율법을 범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판단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으로 판단합니까?

성도는 율법을 온전히 지켰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을 범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율법을 온전히 지켰습니다. 어떻게 지켰는가 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내 몸이 먼저 구원을 받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몸도 사랑하지 않고 또 이웃의 몸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의문과 할례를 가졌다는 말씀은 율법을 지키면서 가나안 땅의 기업을 받은 것과 같이 천국을 선물로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입니다

율법을 안 지키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등 정통교단도 다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단이라고 하는 구원파라든지 다락방이라든지 지방교회라든지 그런 모든 교회가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는 유대인들과 같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유대인이라고 비유를 하면서 율법을 온전히 지킨 성도들이 그들을 판단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하는 것은 다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할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시면서 가나안 일경으로 기업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같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성도가 판단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입니다

교회도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영의 성도는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사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로마서2:28절을 보겠습니다. (242)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을 선택해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23:37절을 보겠습니다. (138)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자 로마의 병사들이 주님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도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왕이면 하나님이 되니까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이면 너를 구원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병사들입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표면적 유대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표면적 유대인을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글을 보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왕이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육적으로는 그들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그들이 누구의 자녀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유대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단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행한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표면적 유대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 표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의문과 할레는 표면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런 것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그런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는 성도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4:22절을 보겠습니다. (148)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유대 사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하는 자가 유대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는 것을 예배하는 자가 유대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는 것을 예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도행전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중심의 도시 예루살렘에 왔지만 예배하는 자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표면적 유대인이었습니다. 분명히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왜 그들에게 구원이 없었는가 하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유대인이 맞지만 구원이 없어서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 정통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유대인도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할례를 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천국을 기업으로 얻은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가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성도들에게 판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바로 유대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종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종교가 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무슨 말씀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기독교라는 간판을 내 걸고 있는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다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모르는 것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아는 것을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아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 시대 유대인입니다

반드시 구원이 그들에게서 납니다. 아는 것을 예배하고 있지만 지금 기독교는 아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과 할레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지만 실상은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표면이 무엇입니까?

사전에서 외부, 외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문에 쓴 계명은 다 외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십일조라는 것이 나타나고 있고 주일이라고 하는 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표면적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반드시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문에 속해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유대인이 누군가 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는 것을 예배하는 유대인이 되기보다는 표면적 유대인이 되려고 의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땅을 영원히 갖지 못 합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지금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땅을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지금 있는 가나안 땅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갑니까?

교회 안에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표면적으로 아무리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할례는 할례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구원입니까?

그리고 육신이 교회 안에 있습니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할례가 무엇인가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성경을 누가 보고 있습니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할례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성도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2:29절을 보겠습니다. (242)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 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 나는데 유대인이 누군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그가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또한 그가 이방인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도 않고 또 유대인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유대인들보다 더 혈통을 따지고 있습니다.

목사입니다

정말 이 목사라는 것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가 문제가 많습니다. 그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어느 신학교를 나오고 또 어느 총회에 속해 있고 어느 노회에 속해 있는가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목사라고 하는 것 역시도 표면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주님이 오셔서 사도들을 세우시고 또 사도들이 장로들을 안수를 했습니다. 그 장로를 목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호칭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이 무엇이고 이면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표면입니다. 그리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이면이라고 합니다. 사전만 찾아보아도 표면이 무엇이고 이면이 무엇인가를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자기가 표면적 유대인인지 이면적 유대인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표면적 유대인인 사람이 있고 이면적 유대인인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를 떠나 어떻게 하고 있는 사람이 표면적 유대인이고 어떻게 하는 사람이 이면적 유대인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켰습니다.

이 사람을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이 유대인에게 난다는 유대인인가 하면 율법을 온전히 지킨 그 사람이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온전히 지키는가 하면 오직 믿음으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구원이 있는 성도가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믿음이 있는 성도가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10:16절을 보겠습니다. (278)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로마서10:10절을 보겠습니다. (253)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할례가 무엇입니까?

창세기에서 가나안 땅에 영원히 거하는 것을 할례를 행함으로 해서 표징을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것의 표징을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할례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는 그 할례를 몸에 하라고 했지만 신명기에서 할례는 마음에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마음에 합니다.

왜 할례는 마음에 행해야 하는가 하면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기 때문에 할레는 마음에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 구원이 할례를 몸에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거하는 것과 같이 신령에 있는 성도는 천국에 영원히 거한다는 말씀입니다.

신령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믿는 역사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내 마음에 역사를 해서 믿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명기에서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하는 할례는 신령에 있는 것이고 의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모릅니까?

의문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는 의문입니다. 그것을 지식으로 알고 행하는 것이 다 의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영원히 사는 것과 같이 천국에 영원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마음에 하는가 하면 의문으로는 안 되고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지는 역사가 있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니까 문자 그대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으로 믿으면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집니까? 그리고 믿기 싫다고 해서 안 믿어집니까?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자의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어지는 역사가 성령의 감동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 고 묻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내 마음에서 믿어지는 역사가 있는 것이 성령이 오셔서 감동을 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성령이 오시지 않고 어떻게 이 복음을 믿을 수 있습니까?

의문에 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온전히 지킵니다. 의문에 쓴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세상의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들으면 이 사람이 너무 예수에 미쳐서 정신이 좀 이상하게 되었다고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에 미치더니 사람이 이성까지도 버렸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율법을 안 지키는 것이 온전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믿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할례를 마음에 한 성도는 신령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이성에 반하는 이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0:18절을 보겠습니다. (396)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그 칭찬입니다

어느 칭찬입니까? 할례를 마음에 하는 성도를 칭찬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성도는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보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하나님에게서 라고 하니까 사람의 칭찬은 아무 소용이 없고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할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행하면 사람이 칭찬을 합니까? 사람은 절대로 칭찬을 하지 않고 예수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누가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습니까? 의문에 쓴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가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많이 있다면 그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칭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칭찬까지도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할례를 마음에 하고 신령에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성도라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의인이라고 하고 성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칭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면적 유대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는 다 표면적 유대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표면적 유대인인가 이면적 유대인인가를 알 수 있는 가장 기초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가를 보면 됩니다.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가 마음으로 믿어서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사람은 다 표면적 유대인입니다. 그런 표면적 유대인은 율법을 온전히 지킨 우리 무할례자에게 판단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자라야 합니다.

그는 먼저 율법을 온전히 지킨 성도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10장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는 사람에게는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대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영원히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next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