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방황하는 교인들에게

65강, 악한 일에 참여 하는 자들(1)

윤주만목사 2019. 4. 15. 06:42


65, 요한2서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들(1)

 

요한21:10-11절을 보겠습니다. (395)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육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성경을 보다보니까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악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선과 악에 대해서 모르면 그는 결국 그 영혼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도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것이 도덕입니다 이 도덕적인 행위를 보고 사람들은 선과 악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알고 있는 보편적인 선과 악을 가지고 성경을 보려 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있는지 악을 행하고 있는 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정말 그를 위해서 내 모든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돕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의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인생의 생각으로는 너무도 선하고 의로운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장ㅇㅇ 박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고 있고 또 예수처럼 살고자 했던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예수처럼 살았다고 말 합니다. 그의 묘비에는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히 그는 이 세상의 이성적으로 볼 때 의롭게 살다간 사람입니다 제가 그분이 이 세상에 살다간 그 행위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 분은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이 세상 사람도 인정을 하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도 말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의롭게 살아갔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들도 그에 대해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까지 말을 하겠습니까? 저는 그분이 어떠한 신앙을 가졌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분의 믿음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분이 한 행위만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믿음을 가졌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이 세상 사람들이나 그를 성자로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도 그를 선하다고 하고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그를 선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선입니다.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이나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악이나 똑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악한 일을 한 사람을 보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나 세상 사람이나 똑같이 악이라고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보편적인 악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보편적인 선이나 악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선이나 악을 이야기 할 때는 그런 세상의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그런 보편적인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묻겠습니다.

저는 장ㅇㅇ 박사의 믿음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세상의 보편적인 행위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한 행위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선이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선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장ㅇㅇ 박사와 같은 선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교회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그런 보편적인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교회도 자기들이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교인들에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영생입니다 장ㅇㅇ 박사가 어떠한 선을 행했다 해도 그것으로 영생을 얻지 못했다면 아니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보편적인 선이지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는 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런 일에 관심이 많고 또 눈으로 직접 보여 지는 일이라서 그런지 그런 선한 일을 하면 자기가 무엇인가를 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도가 되어서 내 이웃이 굶고 있는데 외면을 하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선한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기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악입니다

ㅇㅇ 박사가 행한 일도 악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제가 그 악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성경에서는 그것을 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굳이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진리가 없다 보니까 자기들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고 이 세상에 보편적인 것을 따라가고 있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제가 늘 강조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택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9절을 보겠습니다. (291)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마태복음 2819-20절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분명히 부탁을 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 바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네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과정이 조금 나빠도 그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그 과정이 나쁘면 절대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명분은 참 좋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이 십자군 전쟁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를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좋은 결과들이 나타나는 것을 직접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볼 때는 좋은 결과로 나타났을지 몰라도 실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변화에 맞추어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나쁘면 절대로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았자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초기 기독교가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그때는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선을 잘 못 알고 있는 미주의 교회들이 착각을 했습니다. 세계 각국으로 선교사를 파송을 하면서 그들은 진리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보편적인 선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인생들의 생각으로는 너무도 좋은 방법이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정이 선이 아닌 악을 가지고 온 상태에서는 진리가 바로 전해질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지금 한국교회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방법이 나빴습니다.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세상의 보편적인 선을 전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는 했지만 실제 그들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선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교회만이 술에 대해서 아주 혐오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 계몽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열강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정도로 국가가 흔들리고 있었고 또 사람들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주에서 온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사회의 계몽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뒷전으로 가 있었고 술을 먹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계몽운동을 했고 그것이 지금 한국기독교에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과정이 나빴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너무 좋았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던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사회의 계몽으로 인하여 선과 악을 이 세상의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생겨 지금 이 시대 교회에서 진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럼 그 부탁한 것을 전했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주님께서 부탁한 말씀을 전했지만 바로 타락을 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지만 그대로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해야 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선을 행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나야 바로 그것이 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은 것이고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구원을 받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서 그 역시도 구원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가지고 헌신을 해야 합니다.

 

요한21:1절을 보겠습니다. (395)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사도 요한입니다

자신을 장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목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소한 것에 씨름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목사면 어떻고 장로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제가 볼 때는 장로라고 부르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목사라고 한다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기에 그냥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성경을 우리는 늘 주의 깊게 보아야 하고 왜 이 단어로 쓰여 졌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당연히 집이라면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그 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부녀와 그 자녀에게 편지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녀가 누구입니까?

지난번에 교회에 대해서 강의를 했을 때 잠언 6장에서 부녀와 간음을 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부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인 교회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부녀가 아니라 초대교회를 보고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자녀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에서 우리는 메타포를 찾아야 합니다. 이 부녀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는 가를 모르게 되면 전혀 이상한 해석이 되고 진리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한다는 말씀은 교회와 그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2:17절을 보겠습니다. (411)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그 여자의 남은 자손입니다

이 여자는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고 남은 자손은 성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는 뜻을 바로 깨달아야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교회와 그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편지를 받아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유형의 교회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의 자녀들이 교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의 자녀가 있다는 말씀은 성도가 있다는 말씀이고 이 성도는 또 교회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그 성도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녀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녀와 라고 하는 말씀은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는 그의 자녀도 있지만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를 한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고 또 진리를 깨달은 모든 성도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입니다.

제가 교회에 대해서 강의를 드렸지만 이 둘의 관계는 정말로 우리가 바로 정립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모임 자체가 교회다 보니까 성도와 교회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음녀가 되기도 하고 또 성도가 주님의 아내를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이 둘을 말씀을 하면서 진리를 알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사랑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냅니다.

 

요한21:2절을 보겠습니다. (395)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있고 또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진리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왜 사랑합니까?

사도요한에게 진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리가 있는 성도는 진리가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부녀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진리가 사도요한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사랑을 아주 쉽게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아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이성적인 사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진리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함께 있을 진리 때문에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성도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성경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왜 사랑합니까?

진리가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저 이성적으로 사랑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을 드린 장ㅇㅇ 박사와 같이 그런 사랑만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진리가 있는 성도는 어떠한 사랑을 하고 있는 가를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3:17-19절을 보겠습니다. (313)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진리가 마음에 계십니다.

진리가 이렇게 마음에 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를 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말로만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셨는가를 깨닫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진리가 없기 때문에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육적인 사랑은 외적으로 모양을 아주 잘 내고 있지만 영적인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고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있을 진리 때문에 사랑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말로 어떤 행위로 사랑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게 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영혼 구원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구원받게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아야 너희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영혼이 구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우리가 진리 가운데 있어 사랑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몸을 다 내어 줄지라도 진리가 없으면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입니다

그가 아무리 장ㅇㅇ 박사와 같은 사랑을 한다 해도 또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랑을 한다 해도 진리가 없다면 그것은 자기 이성에 따르는 사랑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에게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저 외적인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그것이 육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어느 사람도 육적으로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볼 때 장ㅇㅇ박사나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다고 한 그가 생명을 얻지 못했다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리는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내 안에 임재를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서 믿어지는 역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사도요한이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21:3절을 보겠습니다. (395)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 서두부터 자기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은 진리가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사도요한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사도 요한이 자기에 대해서 먼저 확실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받았습니다.

이미 사도 요한은 이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은혜와 평강과 긍휼을 이미 다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사도와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과 긍휼이 내려 주시기를 빌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에 대해서 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이 지금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받지 못해서 우리에게 있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은혜와 평강과 긍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계속해서 그것을 바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진리가 있는 성도는 늘 진리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는 사람은 자기들이 이미 진리를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 더 이상 진리에 대해서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를 쓰면서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요한이 내가 이렇게 진리에 대해서 사모하는 것과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원 단번에 받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끝이 납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이 구원에 대해서 성경에서 자기 자신을 확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영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늘 그것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못 받아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았다는 것을 믿고 있지만 계속해서 확증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교파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은 몇 날 몇 시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구원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실 것을 몰라서 땀방울을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를 하셨습니까? 성도는 구원을 받았더라도 늘 그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성도는 다릅니다.

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에 대해서 늘 은혜를 구하고 있고 또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를 하면서 먼저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과 긍휼을 바라고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성경적으로 조금 안다 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과 긍휼과 사랑과 진리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21:4절을 보겠습니다. (395)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너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부녀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는 성도입니다.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가 진리를 쫓아 행하는 것을 보니 심히 기쁘다는 말씀입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대의 자녀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교회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렇게 교회를 의인화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의 모임이기도 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교회를 사람 대하듯이 지금 사도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서도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하는 말씀과 같다고 보면 맞습니다.

 

요한2서는 교회를 의인화 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교회를 마치 사람과 이야기를 하듯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사도요한이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이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 교회에 대해서 부녀, 자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타락을 하지 않은 교회에 대해서 사도요한이 의인화를 해서 마치 부녀와 자매에게 대하듯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너희 자녀 중에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어서 매우 기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쁘면 심히 기쁘다고 말씀을 하겠습니까?

 

아버지의 계명대로입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계명하면 율법을 먼저 떠올리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세뇌가 되어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성경을 자기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습니다.

 

요한13:23절을 보겠습니다. (391)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그것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 아버지의 계명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이 계명은 지키려고 하지 않고 율법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계명으로 자기들이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살게 하는 계명은 지키려고 하지 않고 죽이는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 안에 아버지의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니 심히 기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녀에게는 자녀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니 심히 기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교회에 대해서 계속해서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교회와 성도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도 이런 교회가 있는 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있었던 때인데 교회가 있고 또 성도들이 있었으면 사도 요한이 편지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있는 것을 보니 심히 기쁘다고 하겠습니까?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심히 기쁩니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살아 있는 그 시대에 벌써 교회와 성도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히 기쁘다는 말은 그런 교회와 성도들을 사도요한이 찾아보기가 어려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만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부녀가 없고 그의 자녀들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아버지의 계명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보니 심히 기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사도요한의 절절한 마음이 있는 이 편지를 보고 내가 누구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21:5절을 보겠습니다. (39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부녀여

교회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마치 부녀를 대하듯이 하면서 사도요한이 청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심정을 알 필요성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정말 교회에게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타락을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부녀에게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교회를 향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녀에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말씀을 하면서 이 사랑은 우리가 처음부터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게 사도요한이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없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부녀에게 간청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2)-계속


'방황하는 교인들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66강, 남은 자(1)  (0) 2019.04.16
65강, 악한 일에 참여 하는 자들(2)  (0) 2019.04.15
64강, 마 24장 강해(豫言8)  (0) 2019.04.14
64강, 마 24장 강해(豫言7)  (0) 2019.04.14
64강, 마 24장 강해(豫言6)  (0) 2019.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