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로마서 강해 - 구원론

로마서 강해 157강, 교제입니다

윤주만목사 2019. 3. 4. 20:44


로마서 15:26절을 보겠습니다. (260)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교제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교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정말 우리 성도가 믿음으로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교제가 우리 가운데서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서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들의 교제입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것으로 교제를 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충분히 교제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시대 우리에게 복음을 밝히 보여주시고 교제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그 역사가 너무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누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이 누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했습니까? 그들은 물론 복음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아는 것으로는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으로 교제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싶습니까?

반드시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매너리즘에 빠져 복음이 아닌 것으로 복음이라고 교제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늘 이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저 역시도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욱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것을 나중에라도 알게 하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서 교제를 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제를 하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교제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의 교제입니다

선을 알게 하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모든 구속의 일이 선입니다 그 선을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선을 모른다면 우리는 교제를 한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 기독교입니다

그들이 선을 알고 있습니까? 악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선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교제를 하게 하시고 있고 그것으로 우리가 선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선하신 이를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선하신 이가 하신 일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제입니다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교제가 선을 알게 하고 있고 그리스도에게 미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안타깝게도 교제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마치 교제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교제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으로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제를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늘 깨어 믿음 안에서 선을 알게 하는 교제를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이제 로마서를 마치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서 잠시 동안이라도 교제하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가르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내가 너희와 교제를 한 후에 약간의 만족을 받고 싶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제 서바나로 가는데 후원을 받고 싶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헌금과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헌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헌금을 하는 순간 여러분은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연보궤에 헌금을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만 부자가 아닙니다.

이 시대 역시 연보궤에 헌금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교회 안에서 십여 가지의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기들이 얼마나 부자가 되고 있는 줄을 꿈에도 모르고 헌금을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헌금

유대교를 믿었던 바리새인이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헌금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사도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헌금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배를 하고 난 후에는 헌금을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아니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헌금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지도 않으시는데 억지로 받으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선교를 합니까?

전도를 합니까? 그것이 아무리 우리 이성에 타당성이 있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헌금을 하는 자는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아니 부자를 만들고 있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종교입니다

그것에 붙잡히는 순간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사망 보다 독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모두가 종교에 빠져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점점 더 부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육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부터 우리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까지가 복음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말씀을 하면서 당시 실제 있었던 일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너무도 평안한 시대를 살다보니까 우리에게 실감이 나지 않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유럽에 전쟁과 질병으로 환난이 왔을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입니다

그들도 물론 이런 일을 아주 잘 했습니다. 그들은 영의 일보다는 이러한 일을 잘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그들도 육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교인들을 위해서 자기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구제금을 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는 있지 않는 일이지만 우리 역시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입니다

유럽에는 많은 재난이 있었습니다. 로마서의 이 말씀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구제금을 내는데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구제금이라고 하지 않고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냈습니다. 같은 돈을 내더라도 헌금을 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육적으로 구제금을 낸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헌금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이 헌금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은 교회에다가 자기들이 내고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면서 마치 보험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이 헌금은 바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연보궤에 넣는 것을 보시면서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실제 부자가 아니라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을 입고 있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너무 영의 일을 말씀을 드리면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의 일은 전부 무시를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영적인 형제가 밥을 굶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의 일만 생각을 하고 그 형제를 모른다 하면 그는 믿음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형제가 육체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무시를 하고 있고 영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면 그는 더 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반드시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그에게 최소한의 끼니를 제공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시대 밥을 주는 목사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후원을 받아서 자기들의 이름을 위해서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복음이 있는 성도라면 그런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국가나 그리고 사회단체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성도가 가난으로 고난을 받고 있으면 그것을 우리에게 도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런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가야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부자였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풍요롭게 살기 때문에 당시 2000년 전의 일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불과 1000년 전만 해도 일반 서민들은 하루 밥 한 끼 내지 두 끼를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아닙니다.

자기들도 한 끼 또는 두 끼를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굶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구제금을 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영적으로 영생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우리 육체의 생명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 중 가난한 자들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일반 사람들을 위하여 구제를 할 정도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2절을 보겠습니다. (324)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들을 성도라고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 성도들을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성도라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적으로는 우리를 형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입니다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라고 부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와 우리 역시 형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형제인가 하면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교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형제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에서 낳기 때문에 형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물론 육체로 혈육을 나눈 형제는 아닙니다. 혈육을 나눈 형제가 인정으로는 더 끌리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육적으로는 남남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혈육입니다

그것은 인정에 매여 있습니다. 영입니다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육체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혈육의 정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형제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육의 형제보다 더 가까운 형제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서 구제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솔직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굳이 설교를 하지 않아도 여기에 계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 중에 굶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외면할 수 있습니까?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굳이 설교로 말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우리 형제가 여러 가지 이유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육적으로도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이 시대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말씀을 가지고 길게 설교를 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27절을 보겠습니다. (260)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으니, 육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가야 사람입니다 그들이 결코 부자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부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육적으로 부자도 이 복음을 깨닫기는 어렵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게도냐 사람들이나 아가야 사람들은 정말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구제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구제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기쁜 마음으로 했는가 하면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나 아가야 사람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빚을 지었다가 그것을 갚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로마서를 보고 세상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난한 세상 사람들을 돕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과연 성도들이 그런 부자가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게도냐의 교회입니다

아가야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교회입니다 지금 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교회 밖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가난한 형제가 있을 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교회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큰 흉년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빚진 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빚진 자입니까? 복음이 유대인들로부터 전파가 되었기 때문에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입니다. 그들을 예표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었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방에 참 빛을 비춰주셨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복음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 본인부터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당시 초대 교회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방으로 흩어짐으로 해서 복음이 전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로 받았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하면서 너희가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된 것은 물론 사도들이 개인적으로 가서 전한 것도 있지만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이방으로 흩어짐으로 해서 복음이 전파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박해입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이방에 빠르게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를 주셨다고 해도 틀지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의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빚진 자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에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이방의 교회는 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가 여러 가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고향을 버리고 떠남으로 해서 이방에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가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던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고 그럼으로 해서 그들이 은혜를 입었다면 빚진 자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3절을 보겠습니다. (31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것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신령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자기들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하면 받은 것으로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의 육체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육체가 천국에 간다고 말을 하고 있고 그저 막연하게 천국에 간다는 것으로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 자체가 모순이 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그것은 다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신령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 육체는 이 신령한 것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육의 일과 영의 일을 가지고 분명하게 구별을 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영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영의 구원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 받아들이지를 못하는가 하면 사람이 혈육의 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육체가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하고 있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영의 구원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고 하늘의 신령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신령한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통해서 받았기 때문에 너희가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신령한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받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늘의 신령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있고 그것을 듣고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습니다.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신령한 것을 나눠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경은 헌금을 하라고 하지 않고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헌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마 이 시대 기독교 같으면 헌금을 하라고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헌금을 말씀하지 않고 너희가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헌금을 하라고 하면 되는데도 사도 바울은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쟁일 수도 있고 기근일 수도 있고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 형제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때에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서 구제를 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가 아닙니다.

그들은 신령한 것을 주지도 않고 있습니다. 신령한 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을 통해서 어느 누구도 신령한 것을 나눠가지지도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그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마치 목사가 사례를 받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이 말씀을 가지고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예도 아닙니다.

설령 목사가 신령한 것으로 나눠주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은 이제 디모데전서에서 따로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은 구제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에 가난한 형제가 있을 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이방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그들의 것을 나눠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도 어느 정도 맞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예표로 삼아서 그들의 일부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방에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을 나눠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입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모두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었다면 우리 이방인들에게 혹시라도 복음이 전파가 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이방인들이 신령한 것을 나눠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목사가 일을 해서 신령한 것을 나눠주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부터 복음이 전파가 되었다는 의미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로부터 복음을 들어서 하늘의 신령한 것을 나눠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먼저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복음이 전파가 된 곳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기 때문에 아니 그들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복음을 전파한 곳이 육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마땅히 구제를 해서 도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28-29절을 보겠습니다. (261)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하게 전해 준 뒤에,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것으로 압니다.”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늘 이방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그리고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가를 잘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고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와 성도 사이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구제입니다

당시 상황을 우리는 정확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이 굉장히 어려움에 빠져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방의 형제들로 하여금 구제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의 형제들로부터 받은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들러서 그 일을 하고 이제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려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형제들이 어려운 형제들을 구제를 하고 있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사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영의 일을 말씀을 한 것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말미에 왜 이 말씀을 하겠습니까? 이제까지 영의 일만 말씀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육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육적인 일이라 해도 모두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우리 성도님들에게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계속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복음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이런 일도 하지 않고 싶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한 일이지만 이 말씀의 의미는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만 말씀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육의 일을 무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2절부터 33절까지입니다

굳이 말씀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의 의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왜 굳이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의 일로 구원을 받은 성도라 해도 육의 일을 무시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러서 구제를 하고 난 후에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 가기를 원하고 있는가는 이미 말씀을 했습니다. 복음을 가진 자의 삶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고 또 성도와 성도사이에 삶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4:13절을 보겠습니다. (3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로마에 있는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만나서 잠깐 교제를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들려서 서바나로 간다고 하면서 그 길에 너희와 잠깐 교제를 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입니다

이 시대는 이런 말씀을 보면 거의 육신의 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우리 영생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는 기복주의에 깊이 빠져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로마서에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노의 그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진노의 그릇이 받는 것을 축복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우리가 축복을 받는다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큰 축복을 받았다 해도 결국에 진노를 받는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기독교인들이 모두가 너무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성경의 문자만 보고 축복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축복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성경을 보는가를 알고서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것을 가지고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축복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서 이 축복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니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영생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바로 이 영생입니다 만약에 이 영생이 없다면 주님은 이 세상에 괜스레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누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성경을 거의 모든 사람이 문자적으로 보고 그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문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데 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데까지 이른 성도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입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될 정도의 충만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영생입니다

그보다 더 충만한 축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자기들이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강해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보고서 내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정도 알고 있는 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날 까지 정말 이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만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로마서 15:30절을 보겠습니다. (261)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리고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도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로마에 있는 형제입니다

아직 사도 바울이 그들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가서 교제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서바나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는 도중에 로마에 있는 형제들과 교제를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어떻게 기도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이 기도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의 생각대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리지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기도를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에 대해서 로마서에서 처음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입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보고 막연하게 기도를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교회 안에 누군가 무슨 일을 하면 이 말씀을 생각을 하고 나서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기도를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를 하라고 하니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의 생각에 있는 것을 말을 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다고 하면 마치 그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를 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불의의 삯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아카데미 강의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불의의 삯을 위해서 말을 하고 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다고 하면 마치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를 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는 아카데미에 있는 불의 삯을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해야 하는 기도가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 기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기도를 왜 해야 하고 또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먼저 알고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충만한 축복입니다 그 충만한 축복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영생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형제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가 다를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너희 기도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기도나 로마에 있는 형제들의 기도나 같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충만한 축복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 영생을 얻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의 일을 위해서 권한다고 하면서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사랑을 합니까? 이 시대는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아마도 이 말씀을 보고 성령이 사랑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마치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랑입니다

성령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가르쳐 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고 마치 성령이 사랑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령은 말씀 그대로 진리의 영입니다 그 진리의 영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말씀을 하면서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기도를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기도를 함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부탁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고 성경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부탁을 해도 그가 기도를 하는 사람인가를 바로 알고 부탁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복음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8절을 보겠습니다. (404)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예레미야 11:13절을 보겠습니다. (1069)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효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효대로 그 수치되는 물건의 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단을 쌓았도다

 

기도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기도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심지어는 밤을 새워 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기도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누구에게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기도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의 기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의 기도를 말씀을 하고 있고 예레미야 시대에 있었던 유다 사람들의 기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도는 금 대접에 담겨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유다에게는 바알에게 분향하는 단을 쌓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 분향 같은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예레미야에서는 분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의 기도를 말씀을 하고 있고 예레미야는 당시 유다에 사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의 기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기도를 보면서 하나는 금대접에 담겨 있다고 말씀을 하고 하나는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금대접 생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그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기도는 생명에 대해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알의 기도입니다 바알이 무엇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로마서를 강해를 하면서 많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그러니까 내 육체가 가지고자 하는 풍요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어도 바알에게 분향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일부의 사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바알에게 분향을 했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분향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알이 주는 것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분향을 했고 그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알에게 분향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에게 모두가 분향을 했다면 이 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의 모든 사람이 바알에게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금대접에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영생에 대해서만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오직 영생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만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보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기도를 예레미야 선지자가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는 모두가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분향을 하고 있지만 바알이 주는 것을 위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분향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 빌어 달라고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너희에게 가기를 하나님께 빌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환상으로 보여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것을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너희에게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기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의 다른 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여러분에게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이 일을 위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아닙니다.

그에 비하면 세상 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서를 보고 알아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할 수 있는 기도는 오직 이 기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유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가 바알에게 분향을 하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모두가 바알이 주는 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상은 이 시대 교인들이 하고 있는 모든 기도가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그는 평생을 바알에게 기도만 하다가 사망으로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정말 이 기도 한 가지만 보아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의 기도는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의 백성들의 기도보다 더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5:31절을 보겠습니다. (26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내가 유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화를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또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무엇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까?

사도 바울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구제를 하고 난 후에 다시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잠깐 교제를 하고 난 후에 서바나로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복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가 이방에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이 한 일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를 두려워했습니까? 자기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유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화를 당하지 않도록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기도를 해 달라고 하고 있는가 하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지금 그가 자기 육체의 생명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정말 잘 보아야 합니다. 아니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을 보고 교제를 하고 난 후에 서바나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명입니다

그는 육체의 생명에 대해서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유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화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이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을 만나서 교제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그들에게 가져다주기를 원했습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육체의 생명이 유대에 있는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도를 부탁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을 만나 교제를 하기를 정말 원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유대에 있는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지켜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육체의 생명이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했습니까? 그는 그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왜 그런 기도를 부탁을 했습니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순교를 해서 죽을 때에는 절대로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일입니다

이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마치 우리도 이와 같은 기도를 부탁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런 기도를 부탁하라고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서 교제를 하고 싶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부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초대교회와 같은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령 내가 복음을 알고 그것을 전하는 자로 살아간다고 해도 이 부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생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을 이미 말씀을 했습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가를 말씀을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지도 않은 이방에 있는 형제들이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이 로마서를 기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신으로 보내고 이제 그들을 만나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유대입니다

그 당시 유대가 얼마나 위험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사도 바울이 다음에 유대에 갔다가 고소를 당해서 그것으로 결국에는 순교를 당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을 너무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향은 금대접에 담겨 있습니다. 그 외에 기도는 가능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 할 수 있다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성도의 교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합리화 시키면서 그런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입니다

그때는 정말 특별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런 때의 일을 마치 지금과 같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비록 사도 바울이 당시 상황에 맞게 기도를 부탁했어도 육체를 위해서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심합니까?

아니 어느 사람들은 또 다른 율법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런 말을 듣는다 해도 저는 이렇게 밖에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단 한 가지의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것만은 하고 생각하는 그것이 누룩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만 입니까?

그것이 누룩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생명에 대한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모르겠는 것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사람의 이성에 좋게 생각이 되면 더욱 그렇다는 것을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글로 남겨 놓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죽은 후에도 이 글이 남겨 있을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경계가 되게 하고 싶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이것 한 가지만 하는 그것이 누룩이 된다면 저는 복음을 바로 전하지 못한 자가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있습니까?

그렇다고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설령 선지자들이 하고 사도들이 했다고 해도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심하다고 해도 저는 어쩔 수 없이 이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직 생명입니다

이것 외에는 가능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생명에 반하는 일과 같이 생각이 된다면 안 하는 것이 좋다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에 대해서 더욱 이렇게 강하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안 받아드립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고집하고 싶다면 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그는 이제까지 제가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않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말 작은 누룩 한 덩어리가 온 덩이를 퍼지게 한다는 그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5:32절을 보겠습니다. (261)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안고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이제 로마서를 다 기록을 하고 난 후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방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이방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것에 비하면 이 시대는 너무도 불행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고 있지만 다 다른 복음이 되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성령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 나오면 자기들이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사람의 이성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고난을 받았을지 몰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있어서 복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들을 보고 교제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제는 종교만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만 있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는 그들이 모두가 초등학문으로 만들어서 율법의 행위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복음을 듣게 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없습니다. 그저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아들을 보고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아들을 보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이제까지의 신학자들이 남겨 놓은 글을 보아도 그들은 성경에서 아들을 본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이성을 따라 문자만을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성경에서 아들을 볼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고 있습니까?

그 율법에서 아들을 보아야 합니다. 구약을 보고 있습니까? 그 구약에서 아들을 보아야 합니다. 신약을 보고 있습니까? 그 성경에서 아들이 하신 일을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아니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아들을 못 보고 있습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수백 번씩 읽은 그들이 성경에서 아들을 못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를 모르고 그저 사람의 이성을 따라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자기들이 아들을 보고 있고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보고 믿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에 있는 스님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보았다고 해서 봤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구원을 받기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를 잘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너희도 원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너희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고 있고 그것이 기쁨이 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는 성도에게만 기쁨이 있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하나님의 뜻을 좇지를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을 보고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33절을 보겠습니다. (261)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 아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사도 바울이 이제 로마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15장까지가 로마서의 말씀이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이제 16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를 마치면서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평강

걱정이나 탈이 없는 것이라고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평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 복음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이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을 이제까지 무엇을 전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을 평강이라는 말씀으로 이제 로마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성도는 아무 걱정이나 탈이 없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믿지를 못하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하면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에 대해서 믿지를 못하니까 걱정을 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평강을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 가를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을 마치면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복음을 아는 성도는 평강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