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로마서 강해 - 구원론

로마서 강해 156강, 초대교회 입니다

윤주만목사 2019. 2. 24. 20:49

156, 로마서 15:22절을 보겠습니다. (260)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서 정말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서 자기가 사는 동안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힘써 행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우리 이방인들의 구원을 바랬는가를 성경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도들이 쌓아 놓은 터 위에서 이 시대 성경을 보면서 복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육체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담대하게 순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특히 사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지만 우리는 인간적으로 늘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럼에도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분명히 사도 바울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으로 분명히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영의 일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다보니까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능력으로 역사를 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쌓아 놓은 터 위에서 우리가 지금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사도들은 아니 초대교회에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집사들은 이 일에 정말 힘써 행했습니다. 우리는 늘 이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지만 저는 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편하게 교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걱정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을 강하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이 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같이는 하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초대교회의 집사들이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힘써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지만 너무 편안하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영의 일이 너무도 딱딱하고 어렵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 외적인 것은 거의 말씀을 안 드리고 있는데 그것이 여러분에게 도리어 발목을 잡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글을 쓰면서 조금 찹찹한 마음이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초대 교회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심히 걱정을 했는데 이 시대 너무 편안해서 복음 외적인 것으로 제가 심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는 이 말씀 그대로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도 성령이 오셔서 역사를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입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가 지금 주의 소식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계시가 되어서 우리가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도들이 쌓아 놓은 터 위에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구약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로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제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듣지를 못 했습니다.

누가 복음을 들었습니까?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기독교가 태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종교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종교 안에서는 복음이 전해지지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꿈만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복음을 생각할 때마다 꿈만 같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제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꿈꾸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일락에 빠져 들어감으로 해서 빼앗기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를 생각을 하고 또 오늘 우리가 교제를 하고 있는 이 상황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락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복음이 우리에게 모든 것에서 자유를 준다 해도 성경을 보면 그 답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일락에 빠지는 것과 같은 생각을 지을 수 없어서 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저를 근심하게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힘쓰고 싶습니다. 그런데 복음 외적인 것으로 제가 근심을 하게 되면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금 더 강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우리 성도님들이 저를 도와 주셔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이사야 말씀 그대로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 자리에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끝까지 임하실 줄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만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저 역시도 정말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이런 말씀을 볼 때마다 제가 얼마나 미약한 사람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그들이 간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좇아가고 싶은데 저는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도 힘에 버거운 사람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가는 것을 얼마나 바랐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물론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좇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간절함이 묻어나고 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가려했던 것이 여러 번 막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개인의 일로 가지 못해서 여러 번 막힌 것이 아니라 다른 이방에 복음을 전하다보니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지를 못해서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로마서를 통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이 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을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금은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있습니다. 사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이 성경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바울이 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감동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지금 이 로마서를 보고 있습니다.

 

성경만 보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 성경이 기록이 다 되지 않았던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기가 직접 가지를 못해서 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인쇄술이 발달을 해서 미디어까지 발달을 해서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이 로마서를 쉽게 보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물론 그들이 누구에게 복음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사도 바울을 기다렸던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을 받은 후로 그들이 복음 안에서 더욱 든든히 서서 교제를 했던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환경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 시대 로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볼 수 있게 역사를 하셨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그들은 오직 복음만을 사모 했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서신을 받은 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로마서를 거의 마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마음이 곳곳에서 묻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 역시도 복음을 듣기를 사모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만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로마에 있는 성도들 역시도 사도 바울을 보고 복음을 듣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이 복음의 서신의 명맥이 사실상 초대교회를 지나오면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감사하게도 이 시대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보고 있고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편지인 성도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로마서 15:23절을 보겠습니다. (260)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사도 바울입니다.

이제 로마서를 거의 마치고 있습니다. 사실 15장부터는 거의 인사의 말씀이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알아야 하는 말씀은 로마서 14장까지입니다 그리고 15장부터는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들의 말씀입니다

 

15장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8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해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그것을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분명한 이유로 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마도 고린도교회에 있을 당시에 이 서신을 쓴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다 전하고 나서 다시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도중에 로마서를 써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니 초대교회를 지나오면서 복음을 전했던 전도자들이 사도바울과 같이 이렇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방 더 많은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 사도 바울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깨닫고 있습니까? 사실 이 시대도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어렵게 복음을 전했지만 우리는 너무도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복음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까?

왜 우리가 지금 이 시대 복음을 듣고 있습니까? 더구나 많은 사람도 아니고 아주 적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기를 바랐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소원을 말하는 것과 같이 사도 바울은 내가 원이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려는 원이었습니다.

정말 이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진 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이 이래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다릅니다.

저는 이 은사를 무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일을 하더라도 이 은사를 따라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것은 이 시대 성경을 바로 풀어서 그것을 글로 남기는 일을 주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솔직한 마음입니다

저는 이 일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사도 바울과 같이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니 제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하게 성경을 보고 말씀을 풀어서 그것을 글로 남겨 놓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일입니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몸이 아파서 그동안 거의 설교를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있었습니다. 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제가 할 수 없는 상태가 거의 2년 가까이 지나가니까 복음을 전하는 제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원하시기 바랍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모든 사람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사람은 교회에 나와서 교제를 하면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안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은사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그 일에 대해서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든지 성령의 감동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전하는 것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인가를 알 수 없으면 먼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그것에 대해서 검증을 받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기에 계신 분들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디모데나 디도 같은 사람들도 다 장로 회의에서 안수를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입니다

내가 한 가지 잘못 전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도님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까지는 적어도 4-5번을 확인을 하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제 스스로 확인을 하면서 확신이 있어야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해도 역시 전하고 나면 또 부족한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 귀한 일입니다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책임감도 따른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전하는 이 복음으로 그가 실족을 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것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을 받은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늘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저는 늘 이 생명을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원입니다

우리도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 원입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구약의 신명기나 레위기를 강해를 해 보고 싶습니다. 아니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더 많은 성경을 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제 원이지 사람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일에 대한 원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쓴 이 로마서를 보아도 그 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로마서를 보고 있고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딱 한번입니다

성경에 이 원이라는 단어가 한번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소원이라는 비슷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우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모든 복음의 비밀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로마서 15:24절을 보겠습니다. (260)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바나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서바나로 가려고 하는가 하면 이미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복음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보내면서 너희가 알고 있는 복음이 맞는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서바나로 가는 길에 잠깐 너희를 만나 교제를 하고 싶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들려서 가기는 하는데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와 교제를 해서 약간의 만족을 받고 싶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의 스페인 지방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로마서를 먼저 보내고 난 후에 사도 바울이 스페인으로 가는 도중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보고 교제를 하여 약간 만족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동안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습니다. 누구에게서 복음을 들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듣기에는 그들이 복음을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를 그들에게 보내는 이유는 그들이 들은 복음과 사도 바울이 이방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그 말씀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페인으로 갑니다.

그 도중에 로마를 들려서 가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듣지 않았고 복음을 들었어도 다른 복음에 빠져 있었다면 사도 바울은 서바나로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복음을 들었고 그들은 믿음으로 든든히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문장의 흐름만 보아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어떻게 들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잠시 교제를 해도 될 정도로 복음을 들었던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잠시 동안만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입니다

우리가 전체적인 흐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제 15장 마지막에 와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서신으로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동일한 복음을 들었고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을 확인해 보라고 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한 성령입니다

사도가 아니라 어느 집사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이 시대는 복음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누가 교제할 수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없고 한 성령 안에서 교제를 하는 성도들도 없다보니까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교제가 되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렇지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어서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초대 교회는 교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빌레몬서 1:6절을 보겠습니다. (351)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했습니다.

우리는 이 교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교제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이 교제라는 단어가 10여 번 나오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교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교제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분명히 사전적인 뜻은 이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라는 것을 늘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이 만나는 것과 같이 서로 사귀기 위해서 교제를 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탁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만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이라는 미명 아래서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만남이 되는 순간 우리의 교제는 타락의 길로 간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그런 인간적인 교제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교제를 합니까?

그 본질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그것에 대해서 타당성을 이야기를 한다 해도 교제를 왜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타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잘 아는 사람입니다

본래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물론 그가 개종을 하게 된 이유는 처가에서 전주교로 개종하라고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정작 그는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천주교로 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술을 마시는 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 삼아서 우리는 술을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되었던 그들은 술을 마시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요일입니다

그들이 예배를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레지오 모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레지오 모임은 성당에 나오는 또래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의 말대로라면 교제를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당 안에서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를 하러 간다든지 아니면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입니다

그들은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서로 교제를 하면서 신앙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식사를 하기도 하고 있고 차를 마시기도 하고 있고 또 남자들은 술을 마시기도 하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제라고 합니다.

이것을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교제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제입니다

성경에 교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주교에서 하고 있는 그런 교제를 교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정말 우리 교제가 천주교에서 하고 있는 그런 레지오 교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어느 사도가 어느 집사가 술을 마시면서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제를 했습니까? 저는 솔직히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배를 하고 난 후에 식사를 하는 것도 사실 부담이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서 교제를 한다는 것은 제 성경적 지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합리화 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에서 하고 있는 교제가 부족합니까? 그럼 차라리 더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절대로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몸이 아파서 설교를 쓰지 못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강의를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설교를 올려 드리면 충분한 교제가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족합니까?

제가 앞으로 더 하겠습니다. 아니 더 하고 덜 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가 천주교에서 하고 있는 레지오와 같은 교제가 된다는 것에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다 읽는다 해도 복음에 방해가 되는 일이 있다면 저는 제 할 말을 하고 싶습니다.

 

교제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임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아주 작은 것에 있어서 합리화를 시키는 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는 그 교제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차라리 저 혼자서 설교를 쓰고 그것을 사이트에 올리는 일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레지오와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이 하고 있는 교제가 성경적입니까? 오늘은 제가 작정을 하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천주교에서 하고 있는 레지오도 그들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술자리를 만들어서 그곳에서도 레지오의 장이 있습니다. 그가 주도를 해서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있고 레지오의 장이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교제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도가 술자리에서 복음을 교제를 했습니까? 그것이 성경에 문자적으로 없다고 해서 우리가 해도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12번의 교제에 대한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을 교제를 하는데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이 잘못 되었다면 여러분이 다 떠나도 좋습니다.

 

교제입니다

그것을 빌레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생명을 얻기 위한 교제입니다 인간적으로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내는 것이 교제가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이 교제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제를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이런 교제를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믿음의 교제라는 것은 성경에서 믿음의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을 교제를 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제를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교제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제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교제에 대해서 우리는 바로 알고 그런 교제를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이 교제가 어떤 교제라는 것을 이제까지 로마서의 말씀을 들은 성도님들은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만을 생각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 다른 것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오직 영생을 위해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자유를 주었다고 해서 일락을 위해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교제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것을 핑계로 일락을 위해서 인가를 냉정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저는 교제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이 생명에 대해서만 교제를 하고 싶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면 일반 교회와 우리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주 적은 일 하나를 합리화 시키는 그것으로 내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제를 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그는 교제를 했습니다. 우리의 교제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교제인가 아니면 그것에서 지나고 있는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린 다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믿음의 교제입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는 일입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제를 하는 성도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에 미치는 역사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교제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서바나로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하고 난 후에 서바나로 갈 때에 약간의 만족을 받고 싶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은 약간의 만족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고 다른 성경은 후원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1:1절을 보겠습니다. (123)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과부의 두 렙돈입니다.

이 설교는 이제까지 많이 들어서 모두가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도 이 말씀에 대해서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글을 쓰면서 예전에 썼던 설교를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전에 썼던 설교들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 두렵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쓰고 난 후에 정말 잘 썼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난 후에 지금 보니까 이 설교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는 있지만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새삼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우리는 정말 붙잡기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제가 전하고 있는 복음이라는 것도 실제 뒤 돌아보면 너무도 부족한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해서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도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을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 부터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경계를 하고 선한 싸움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헌금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제가 누가복음의 말씀을 설교로 쓸 때는 헌금을 하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헌금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헌금이라는 단어가 딱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누가복음 21장에서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아니 헌금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아마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누가복음 21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헌금을 하라고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 헌금에 정당성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헌금 하면 안 됩니다

부자의 헌금과 과부의 두 렙돈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한 것도 헌금이고 과부의 두 랩돈도 헌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헌금을 하고 있는 두 사람 다 책망을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자의 헌금만 책망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부의 두 렙돈도 책망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미 설교로 올려 드려서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은 헌금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1장은 부자의 헌금에 미혹을 당해서 자기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고 있는 과부를 책망하시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연보궤에 넣은 것은 헌금이라고 하시고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은 헌금이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같이 넣고 있습니다.

부자도 연보궤에 넣고 있고 과부도 연보궤에 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자가 넣은 것은 헌금이라고 하시고 있고 과부가 넣는 것은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잘 보아야 합니다.

 

헌금이 있습니까?

먼저 헌금을 사전에서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주일이나 일정한 축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돈을 바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전에서는 분명히 교회에 바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성경은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헌금에 대해서 누가복음에 딱 두 번 나오고 있는데 부자가 연보궤에 넣는 것을 헌금이라고 합니다.

 

부자입니다

가난한 자는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재물이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과 율법의 의가 없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부자가 연보궤에 넣는 것을 헌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해야합니까?

만약에 이 시대도 누군가 헌금을 하고 있다면 그는 부자가 되어서 연보궤에 넣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헌금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아무 감각이 없이 사람들이 헌금을 하고 있고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입니다

이 부자를 보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다 이 부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헌금을 하는 부자를 성경에서 보고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이 설교를 그리스도편지에 올려드렸습니다. 그때는 분명히 헌금을 해야 하는 것으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헌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모양으로도 헌금이라는 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 헌금은 분명히 부자(율법의 행위)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금을 하고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헌금이 교회 안에 있습니까? 더구나 그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께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아주 열심을 내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가 헌금을 하는가 하면 부자가 헌금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합니까?

과부가 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하고 있는 헌금을 보면서 과부가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도 감사해서 자기 생활비 전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과부는 부자가 하는 헌금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목사들은 이 말씀을 보고 마치 주님께서 이 과부를 칭찬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부자에게 미혹이 되어서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고 있는 과부의 불쌍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헌금을 하면 안 됩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주님께서 헌금을 누가 하고 있는가를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과부의 헌금을 하려고 노력을 하게 되어 있고 그 과부의 헌금이 무엇인가 하면 부자들에게 미혹을 당해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풍족한 가운데서의 헌금입니다.

그리고 구차한 가운데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헌금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과부와 같이 헌금을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헌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연보궤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도 정당성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으니까 헌금을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연보

자기 재물을 내어서 남을 도와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뜻으로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을 연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연보는 헌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서 남을 도와주는 것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연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헌금을 하면서 자기는 연보를 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연보궤에 넣고 있는 모든 재물은 다 헌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체가 부자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해 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자기가 가난하면서도 부자가 연보궤에 헌금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함으로 해서 부자가 되고 있는데도 과부는 그것을 모르고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해도 헌금을 하는 순간 그는 부자가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과부를 책망하시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시편 40:6절을 보겠습니다. (831)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바로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물을 받으십니까? 아니 우리가 드리는 재물을 받으십니까? 그것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너무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을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런데 육의 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설령 우리의 것을 받는다 해도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기들이 헌금하는 것으로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겨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재물이 없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는 말은 다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재물이 있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말도 다 거짓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자기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 예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아니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경을 보고 자기들의 이성으로 옳다고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 헌금을 한다고 하면서 억지로 받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하신 일만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일만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는 부자가 되기 때문에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헌금을 합니다.

그럼 헌금을 하지 않는 사람에 비하면 부자가 됩니다. 주님께서도 헌금을 하는 바리새인들을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절대로 안 받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영의 일을 모르고 그저 하나님에 대한 열심만 가지고 헌금을 하면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왜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자가 되기 때문에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면 당연히 헌금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서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예물에 대해서 말씀을 하니까 자기들이 부자가 되는 줄도 모르고 헌금을 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의입니다

하나님께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의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한 모든 행위는 다 의가 됩니다. 의가 되어서 부자가 되기 때문에 부자가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부자가 구원을 받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헌금을 받지 않으십니다.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율배반적이신 분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받으면 우리는 부자가 되고 그러면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가 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헌금을 받으시겠습니까?

 

영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 영의 일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부자가 헌금을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부자가 되는 그 행위를 열심을 내서하고 있습니다.

 

선교 헌금입니까?

전도를 위해서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다 종교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헌금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자를 따라서 구차한 중에서도 연보궤에 넣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3:18절을 보겠습니다. (29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창기의 번 돈입니다

그리고 개 같은 자의 소득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기의 번 돈이라고 하니까 실제 이 시대 창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창기가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 시대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실제 창기로 산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과연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을 들었다 해도 그렇습니다. 그가 아직 창기의 일을 하고 있다면 아마도 권면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그 시대에 여호와의 전에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창기입니다

음녀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창기와 같은 사람들이 참 많이 있지만 창기가 되어 있는 사람은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창기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기의 번 돈입니다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두 남편을 섬기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의 의로 재물이 있는 사람을 창기의 번 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두 남편을 섬기면서 자기의 의를 쌓아 두고 있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증한 일입니다

이 돈 안에는 물론 여러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헌금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헌금을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면 가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모두가 창기가 되어서 그것을 억지로 하나님께 받으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창기의 번 돈입니다

그리고 개 같은 자의 소득입니다 거의 비슷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음녀를 창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주의자를 개 같은 자라고 말씀을 하면서 그들이 쌓은 의를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가증한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더욱 창기가 되기를 원하고 있고 개 같은 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수십 가지의 명목으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상상도 하기 힘든 헌금 봉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성도는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왜 하지 않는가 하면 부자가 되기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10여 가지가 넘는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헌금을 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개 같은 자의 소득입니다

율법주의자의 행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가 하면 그들의 행위로 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사람의 이성에 타당성이 있다 해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의 율법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 율법을 정하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창기의 소득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을 하나님 앞에 가져 와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 율법을 정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정한 시민법은 율법을 폐하여 졌다고 하면서 이런 율법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있고 어느 누구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그 안에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의미를 이 시대 사람들이 하면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창기는 음녀입니다

음녀가 되어 있는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개 같은 자는 율법주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부자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주님께서 율법주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개들이라고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 율법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는 창기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비유로 해서 이스라엘이 창기가 된 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도 거의 문자에 사로 잡혀서 자기가 하는 행위가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서바나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려하고 있습니다. 그 가는 도중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복음을 교제를 하면서 약간의 만족을 누리려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글개역성경에는 분명하게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서 그곳으로 가려고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연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헌금이라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자기 교회에 누가 와서 다른 곳으로 전도를 하려고 떠나려고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선교헌금이라든지 전도헌금을 해서 그에게 전달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그 지방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헌금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헌금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헌금을 가지고 서바나로 간다고 하지 않고 여러분의 후원금이라든지 기부금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은 그것조차도 너희의 그리고 보내줌을 바람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창기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개 같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부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자를 따라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런 돈을 받아서 서바나로 전도를 하러 가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것이 아무리 귀한 일이라 해도 우리는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선교헌금 봉투가 있고 또 심지어는 단기 선교를 간다고 하면서 종교의 행위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사람이 이성으로 생각을 하고 그렇게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행위가 자기를 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의미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 지식으로 인생의 이성으로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대로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세상 초등학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4:36-37절을 보겠습니다. (193)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대교회입니다

이제 막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때입니다 지금 종교가 되는 있는 교회는 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도 않고 복음이 없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교인들이 헌금한 돈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헌금을 하는 행위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신명기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했는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는 레위인이기 때문에 사실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레위 인입니다.

그는 성막을 섬기는 일을 하면 성막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으로 먹고 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들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복음을 들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하루 종일 아니 며칠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고 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으면서 복음을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내 놓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종교가 되어서 자기들이 종교에서 만들어 놓은 것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라든지 헌금이라든지 하는 모든 행위도 다 종교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전승에 의해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레위인인 바나바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루살렘 교회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면서 복음을 듣는 것을 보고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했습니까?

그가 구제헌금을 했습니까? 그가 선교헌금을 했습니까? 그는 자기 전 재산인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했다고 하지 않고 왜 성경에 굳이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헌금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헌금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헌금이라는 것이 성경이 아무리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좋은 의미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설령 좋은 의미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도 역시 우리의 행위가 되기 때문에 헌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나바입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도 아니고 교회에 헌금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굶으면서 복음을 듣는 것을 보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돕는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를 돕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헌금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율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내가 일을 해서 아니 우리 집의 재산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내 의가 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의가 됩니다.

바나바가 밭을 팔아서 내 놓았기 때문에 바나바의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까지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바나바는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내 의가 되지 않게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자기는 복음을 전하러 떠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한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 15:25절을 보겠습니다. (260)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금을 전하러 갑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방에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로마서만 보아도 그가 우리 이방인의 사도로서 얼마나 충실하게 일을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로마서 15장을 통해서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 역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로마서를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 이방으로 다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자기가 가야 하는 곳은 많지만 다 가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이 로마서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복음을 듣고 있고 또 전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정말 어렵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얼마나 어려운 가운데서 복음을 들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평안합니다.

정말 투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바로 알고 있다면 이 시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편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고 듣는 자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이 복음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상상도 못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환경이 너무도 안 좋아서 복음을 듣는 것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시대는 너무 평안합니다. 그 평안함이 우리에게 있어 안일함이 될까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그때는 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치열하게 자기 생명을 걸고 싸움을 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면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지금이 더 기적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왜 가는가 하면 구제금을 전하러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흉년에 의해서 구제금을 전하러 가는지 아니면 종들이 많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구제금을 받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대였습니다.

 

복음을 들으러 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그들은 오직 복음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심지어는 며칠 씩 와서 복음을 듣는데 하루 한 끼 식사를 하기도 힘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생과 싸움을 하면서 복음을 들었는가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풍요롭습니다.

이런 풍요로운 시대에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을 보면 당시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 끼 식사도 하지 못하면서도 복음을 사모해서 와서 들었습니다.

 

지금이 아닙니다.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시에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들으러 가려면 심지어는 하루 아니 며칠을 걸어서 가야 하는 그런 시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영혼의 생명을 위해서 복음을 들으러 왔고 그 가운데는 한 끼 식사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지중해 지방입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아주 추운 날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오직 복음을 듣기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도 잃을 국가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교회가 서로 도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가 있는데 우리가 아는 교회가 어떤 어려움을 당해서 도와야 한다고 하면 우리도 역시 후원을 하는데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일이 빈번 했던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물론 영의 생명을 사모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까지는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그 육체의 어려움을 서로가 도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형제라고 하는 성도가 한 끼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가 배부르게 먹고 있다면 그것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육의 일을 무시를 하면 안 됩니다 정말 영의 일만 생각을 했다면 초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육적으로 서로 돕지를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우리가 육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 육의 일을 서로 도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편지 하나입니다

당시와 같이 지방 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더 외롭게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육적으로 더 힘이 들었고 지금 이 시대는 영적으로 더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영의 일에 대해서는 로마서 14장까지 거의 다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의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의 문제 중에서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을 위해서 교회가 어떻게 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보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당시에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일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육의 일을 지혜롭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삶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육의 일로 일락을 누리는데 사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제 이 구원의 일을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성도가 성도를 돕는 일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복음의 모든 비밀을 안다고 해도 역시 육을 입고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이 육의 일도 지혜롭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