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로마서 강해 - 구원론

로마서 강해 158강, 복음입니다

윤주만목사 2019. 3. 10. 22:22


로마서16:1절을 보겠습니다. (2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로마서15장까지 복음을 모두 전했습니다. 그것을 마치면서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 모든 사람에게 함께 있을찌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영의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그 육체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초대교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로마의 극심한 박해와 그리고 유대인들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있었던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아무리 사도 바울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라고 선포를 해도 그것을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 중에 다수는 아마도 노예가 아니었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귀족들도 있었고 평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든지 로마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박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평강을 말씀한다는 것은 사실 맞지가 않는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실찌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에 살아가고 있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전혀 맞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모든 복음을 듣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닫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의 일을 생각을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육적으로는 고난을 받고 있는 성도들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이 복음은 전혀 걱정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걱정하고 있습니까?

물론 성도라 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에 있어서는 이제 모든 복음의 비밀을 알고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믿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 걱정도 없고 탈이 없습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있는 성도는 그런 평강 가운데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그의 안에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복음에 대해서 밝히 알고 있는 우리는 걱정이 없습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해서 걱정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생에 있어서 걱정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늘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생에 있어서도 걱정을 하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제가 죽는다 해도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어차피 육체는 이제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믿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영이 탄생이 되고 그 영이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일에 대해서는 걱정이 전혀 없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자체가 우리에게는 너무도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면서 영생에 대해서 전혀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은혜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누구와 함께 계시는가 하면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과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에서 이 복음을 전혀 못 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른 것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만은 평강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이 로마서를 다 기록하고 나서 그 평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구원에 있어서 평강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평강이 있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요 우리의 자매인 뵈뵈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로마서입니다

그가 로마서를 다 마치고 나서 이제 자기를 도왔던 사람들을 일일이 열거를 하면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로마서 마지막에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렸지만 이 로마서를 다 알고 나면 이제 성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 혼자서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물론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도 바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도왔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합니다.

 

복음의 일입니다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그 일에 협력을 함으로 해서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장을 기록했다고 해도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로마서입니다

교리서라고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 로마서는 성경의 중심이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이 로마서를 모두 다 알고 나면 성경의 거의 모든 말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로마서를 마치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와 함께 사역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열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우리 성도님들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그리스도편지와 복음과 율법 이라는 사이트를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저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 이제까지 많은 분들이 도와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정말 내 이성의 생각은 다 버리고 오직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일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난 후에 어떻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기가 복음의 일을 할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적으로도 도움을 주었고 영적으로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겐그리아에 있는 교회

고린도 동남쪽 10km떨어진 곳의 그리스 남쪽 사론만에 있는 항구였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지방에 있었던 작은 항구 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들었던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에 자매 뵈뵈를 천거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겐그리아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건물의 교회는 없었습니다. 그런 건물을 보고 교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런 건물이 있었다면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았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겐그리아 지방입니다

그 항구 도시에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과 같은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과 같이 그런 이름을 가진 교회도 아닙니다. 다만 그 지방의 이름을 써서 알아듣기 쉽게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4:1절을 보겠습니다. (266)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일군입니다

자매 뵈뵈를 천거하면서 그녀를 겐그리아에 있는 교회의 일군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일군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육체적으로 어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일군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시대는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그 지방에 있는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건물을 지어 놓고 그 이름을 짓고서 어느 교회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의 이름을 짓는 것부터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지금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교회를 세우고 그 이름을 짓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사실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교회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세라입니다

구약의 아세라가 이 시대 교회라는 건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아세라가 음녀가 되어서 교회라는 건물을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음행을 하게 만들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보이는 모든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구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아세라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군입니다

마치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일군에 대해서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매 뵈뵈입니다

그녀가 누구입니까? 단순히 교회 안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복음이라고도 말씀을 하고 있고 믿음이라고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매 뵈뵈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의 일군이라고 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자매 뵈뵈는 한 마디로 말씀을 드려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 일에 있어서 일군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매 뵈뵈를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복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매 뵈뵈를 천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여자가 가르치면 큰 일이 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라는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고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을 거절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자매 뵈뵈는 사도 바울이 잘못 천거를 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이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잡일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사도 바울이 자매 뵈뵈를 이야기를 했다고 말할 사람들입니다

 

성경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자가 안수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로마서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문자를 보고 바리새인과 같이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일군입니다

그냥 잡일을 하는 사람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매 뵈뵈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가대입니다

헌금 위원입니다. 강대상의 꽃꽂이를 하고 있습니다. 전도지를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마치 자기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자매 뵈뵈나 된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매 뵈뵈를 천거한다고 합니다.

천거, 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책임지고 소개하거나 내세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천거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매 뵈뵈를 천거한 것은 자기 스스로가 책임을 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매 뵈뵈입니다

사도 바울이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으로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사도 바울이 책임을 지고 자매 뵈뵈를 천거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매 뵈뵈입니다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니 이제까지 거의 모든 교회는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그 말씀을 가지고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여자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키고 있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매 뵈뵈입니다

그녀가 어떤 직분을 맡았는지는 말씀을 하지 않고 그냥 자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초대 교회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초대교회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제 막 복음이 전파가 되었고 이 시대 교회는 종교가 된지 거의 200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두 시대를 직접적으로 비교를 한다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도 바울이 자매 뵈뵈를 복음의 일군으로서 천거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교회의 직분입니다

초대교회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는 이방에 막 복음이 전파가 되었기 때문에 자매 뵈뵈와 같이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닙니다.

교통도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미디어도 없습니다. 순전히 사람의 말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던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일일이 사도 바울이 할 수 없었습니다. 자매 뵈뵈도 최전선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녀를 천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책임을 지고 소개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매 뵈뵈를 얼마나 신뢰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신뢰가 아니라 한 성령 안에서 교제를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녀가 성령을 받은 것을 알고 복음의 일군으로서 천거를 했습니다.

 

로마서16:2절을 보겠습니다. (261)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주님 안에서 그를 영접하고, 그가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을 원하든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나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자매 뵈뵈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잘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으로 먼저 생각을 하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봄으로 해서 얼마나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자입니다

자매 뵈뵈는 분명히 여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녀라고 하지 않고 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녀라는 단어가 기록이 안 되어 있습니다. 왜 안 되어 있는가 하면 여자라 해도 구원을 받았으면 남자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녀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분명히 자매 뵈뵈는 생리적으로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녀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기 위해서 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자라 해도 구원을 받은 사람을 남자로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하나부터가 다 구원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에 나와서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매 뵈뵈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자매 뵈뵈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다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자매 뵈뵈를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3:4절을 보겠습니다. (402)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성도입니다

누구를 성도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 진 자를 성도라고 부르시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어떻게 거룩해 지고 있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육체는 어떻게 해도 거룩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룩해 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썩어 없어지는 육체는 절대로 거룩해 지지 않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육체를 보면서 거룩해 졌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육체를 거룩해 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왜 성도가 될 수 없는가 하면 성경은 육체가 거룩해 진다는 말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룩함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육체가 거룩하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 자체로도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난 후에 거룩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거룩하여 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영을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룩하신 영이 있는 사람을 성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끼리 성도라 한다고 해서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에서 성도를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영이 거하는 자에게 성도라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어떻게 성도가 되었습니까?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짐으로 해서 성도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영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고 그 영이 거룩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입니다

남자가 있습니까? 여자가 있습니까? 자매 뵈뵈를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은 남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사두개인들과의 대화에서 너희가 하늘의 일을 몰라서 오해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의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하고 그 형수가 어떻게 되는가를 말을 하자 주님께서는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은 천사가 우리의 부림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은 정말 우리의 이성으로는 상상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성도는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합당한 예절입니다

성도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떻게 성도를 두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 시대 과연 성도가 몇 이나 됩니까? 숫자가 적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이 얼마나 거룩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영이 있는 성도를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겉모습입니다

분명히 자매 뵈뵈입니다. 지금 현대화가 되었어도 여자가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2000년 전에 여자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삼국시대 이전을 생각하면 되고 그 당시 여자들이 어떠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흰 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자매 뵈뵈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성도만이 아닙니다.

자매 뵈뵈는 당시에 복음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천거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증을 할 정도로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고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14절을 보겠습니다. (306)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영접하고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자매 뵈뵈를 천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귀한 자인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자매 뵈뵈를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인사치레로 영접을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회입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영접을 받은 것과 같이 형제들에게 자매 뵈뵈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진 성도인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다시 말씀을 하면 성령이 그 안에서 역사를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그의 안에 거룩한 영이 거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매 뵈뵈를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가르치는 자로서 영접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교회 안에서 많은 일을 해서 자매 뵈뵈를 영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 진 성도라서 영접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영접을 합니까?

그에게서 복음을 듣기 위해서 영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매 뵈뵈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단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 진 성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시 사도 바울을 대신 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천거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당시는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는 곳 마다 복음을 전하면 몇 사람이라도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때 남겨져 있는 사람들에게 자매 뵈뵈를 보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천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합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사도 바울이 이야기를 하니까 그를 영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사람으로서 영접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름입니다.

그냥 기록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로마서의 기록을 다 마치고 처음으로 언급을 하는 사람이 바로 자매 뵈뵈입니다. 그녀가 얼마나 복음 안에서 든든히 서 있었는가를 로마서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영접했습니다.

자매 뵈뵈를 로마에 있는 형제들이 영접을 했습니다. 그를 영접을 하고 그에게서 복음을 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정도로 자매 뵈뵈는 사도 바울이 믿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천거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복음이 있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영접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면서 자매 뵈뵈를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자매 뵈뵈는 성경에 부각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디모데나 디도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생리적인 여자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닙니다.

여자가 복음을 가르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이 자매 뵈뵈를 천거를 하면서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자매 뵈뵈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여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고 그에게 은사를 주시면 그가 여자이든지 남자이든지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과 같은 시대라면 자매 뵈뵈는 디모데나 디도 보다 더 장로로서 충분히 일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35:24절을 보겠습니다. (138)

무릇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자는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무릇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자는 가져왔으며

 

자매 뵈뵈입니다.

아마도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자매 뵈뵈를 말씀을 하면서 거의 교회 안에서 여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뜻에서 자매 뵈뵈를 천거한 것이 아니라 자매 뵈뵈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천거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전은 저의 육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그것에 소용되는 물건들을 가져왔던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소용이 되는 물건들을 가지고 오면 성전을 짓는 지혜로운 자들이 사용을 했습니다.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소용되는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짓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이 왜 소용이 되는 물건을 가져왔는가 하면 성전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이 성전은 저의 육체입니다

 

자매 뵈뵈입니다

그가 성전을 짓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에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에게 소용이 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전을 짓는데 있어서 소용이 되는 것이 있으면 도와주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터 위에서 성전을 지어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건물이 되어 연결이 됨으로 해서 성전이 지어져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매 뵈뵈가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성전이 지어져 갈 때 그에게 소용이 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생각이 안 납니다.

무엇으로 어떻게 도와주라고 하는지를 저도 잘 생각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을 추론해 볼 때 성경이 필요할 수도 있고 또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짓는 조각목이 필요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복음을 전합니다.

지금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 100여 년 전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입니다 그때 자매 뵈뵈가 아무리 성령의 감동을 받고 복음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소용되는 것이 있으면 도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을 지어가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소용이 되는 것이 있으면 도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매 뵈뵈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이 말씀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얼마나 딱딱합니까? 그래서 단단한 식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런 복음을 당시 여자가 전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디모데 전서를 보아서 잘 알고 있듯이 그가 나이가 어려서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나이가 어린 것으로도 그랬는데 여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우리는 당시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로마 시대입니다. 그러나 문화는 헬라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그리고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군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여자입니다

감히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볼 때 자매 뵈뵈는 복음의 비밀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천거를 하고 있고 영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소용되는 것이 있으면 도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호자

사실 성경에 거의 기록이 되지 않은 단어입니다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로마서에서 딱 한번 사용이 되어 있는 헬라어의 단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보호자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매 뵈뵈를 말씀을 하면서 사도 바울은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나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매 뵈뵈를 정말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든든히 서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마치면서 먼저 그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여러 사람은 진짜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자매 뵈뵈가 많은 역할을 했다는 의미에서 보호자라고 말씀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호자입니다

여러 사람의 보호자였습니다. 자매 뵈뵈가 여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인도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자매 뵈뵈는 당시에 아주 드물게 그런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자매 뵈뵈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여자입니까? 내가 남자입니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든지 보호자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복음을 듣는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을 때까지 보호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말씀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큰 의미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자매 뵈뵈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자매 뵈뵈는 여러 사람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매 뵈뵈가 당시 초대교회 안에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로마서에서 이 복음의 말씀을 다 마치고 난 후에 가장 먼저 자매 뵈뵈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복음을 들었으면 자매 뵈뵈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자매 뵈뵈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도와주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다 전할 때까지 도와주었다는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자매 뵈뵈를 이야기를 합니다.

거의 모든 목사들이 그저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는데 있어서 육체적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막연하게 상상을 하면서 특히 여전도회 헌신 예배를 드릴 때면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이 자매 뵈뵈입니다

 

그러면서 말 합니다.

너희도 성경에 기록이 될 정도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자매 뵈뵈와 같이 도와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호자가 된 것과 같이 목사들의 보호자가 되어서 도와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말을 들은 교회 안에 있는 여자들은 자기도 자매 뵈뵈가 되려고 교회 안에서 더욱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자매 뵈뵈는 복음을 전하는 일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복음을 전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없는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사도 바울이 그를 천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실제적으로 여러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보호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자매 뵈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도 우리 그리스도 편지 안에도 자매 뵈뵈와 같은 사람이 있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천거를 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어떻게 복음을 전했고 또 어떻게 여러 사람의 보호자로서 살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호자입니다

성경에 개인을 보호자라고 기록한 것은 딱 한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자매 뵈뵈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단 한번 기록이 되어 있는 보호자라는 호칭을 자매 뵈뵈가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자매 뵈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성경에서 자매 뵈뵈가 어떤 인물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녀는 여러 사람과 사도 바울의 보호자로서 당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자 중에서는 자매 뵈뵈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있습니까?

자매 뵈뵈 만큼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몇몇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매 뵈뵈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말미에 그를 가장 먼저 천거를 할 정도로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 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매 뵈뵈를 이 시대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을 해서 마치 자매 뵈뵈가 교회에 헌신을 하는 사람의 모델로 만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당시 여자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매 뵈뵈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자매 뵈뵈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6:3절을 보겠습니다. (261)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면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동역을 한 사람들을 일일이 열거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씀은 이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육체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나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믿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이 거하는 성도들을 주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 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 안이라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으면 마치 주 안에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반드시 주님과 같은 영이 있어야 합니다. 영이 없다면 그는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그는 주 안에서 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 안에서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생명이 있는 우리가 주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말씀을 하고 난 후에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없다면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교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전혀 모르면서도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동역자입니다

예수 안에서 동역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동역자라는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4:3절을 보겠습니다. (322)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동역자

사전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라고 보면 맞습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동역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동역자라는 단어도 성경에 그렇게 많이 나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거의 사도 바울이 쓰고 있습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던 사람들을 동역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에서만 이 동역자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난 후에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부부입니다 좀 특별한 부부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함께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특별한 사례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부부의 이름이 나온 것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많이 나오고 있지만 신약에서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도들의 아내조차도 그 이름이 기록이 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부부이면서도 함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간단하게만 말씀을 드립니다.

브리스가는 로마의 귀족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굴라는 유대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 로마의 귀족이었던 브리스가의 가문 때문에 로마서에 기록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사도 바울을 만나서 믿음에 든든히 서고 자기 집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축복입니다

부부가 함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민족이 다른데도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면서 자기 집에서 예배를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부리스가와 아굴라를 사도 바울은 동역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사실 이 시대 목사라고 하는 직함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라는 직책이 성경적으로 나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사용은 하고 있지만 실상은 동역자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장로라는 직책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문자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동역자입니까?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사람을 동역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이름이라고 하니까 김병덕이나 윤주만이라는 이름으로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름대로 부르시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나 동역자가 아닙니다.

이 시대 동역을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동역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동역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내 안에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생명에 대해서 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생명이 없는 사람이 생명에 대해서 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먼저 내가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구원에 대해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만 있으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그 백성으로 사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듯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브리스가입니다

그녀는 로마의 귀족 출신입니다 이 세상 학문적으로도 많이 배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굴라는 유대인입니다 이 두 사람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을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문안하라

이제부터 계속해서 문안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안부를 알아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둘라가 어떻게 사도 바울과 동역을 했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에서 그들의 집을 교회로 사용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16:4절을 보겠습니다. (261)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부부가 함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경우는 굉장히 드믑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수고를 했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또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자기 집을 내 놓으면서 교회로 사용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당시의 교회는 거의 이렇게 누구의 집이었습니다. 당시에 지금과 같은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브리스가가 재산이 많았다 해도 지금과 같은 교회를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고 그 안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교제를 했던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동역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전해지고 있는 글들을 보면 성경과 많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출처가 불분명한 글들로 인하여 더욱 기독교는 종교가 되고 있습니다.

 

어디서 나온 글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신앙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성찬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런 출처 불명의 글들로 인하여 이 시대 성찬이 정당화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믿음이 있는 성도는 성찬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성찬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런 글들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분명히 성찬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은 그들이 성찬을 했다고 하면서 글로 남겨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그런 글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성찬을 했다는 것으로 성찬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그런 글을 마치 사실과 같이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고 목사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 됩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 종교적인 성찬을 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성찬식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이 그들을 미화하기 위해서 그런 글을 남겨 놓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종교가 그렇습니다.

그런 글이 얼마나 복음을 방해를 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목사들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혀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성찬을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싶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는 그대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저를 이단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한 사람도 제가 전하는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전해지고 있는 말을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모든 기준이 성경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아무리 타당성이 있다 해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동역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동역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찬을 했다는 것은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가 만들어 논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의 목숨을 위해서 자기 목숨이라도 내 놓은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 좋습니다. 로마서16장의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사도 바울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내 놓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했을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그럴 것이라고 말씀을 했다면 실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분명히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을 내 놓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 그냥 기록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충분히 사도 바울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을 내 놓았을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장막을 짓는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도 여러 지방에 머물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으로 가서 함께 동역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역을 했다는 것은 단순히 도와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뿐 아니라 이방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말씀을 드렸지만 브리스가는 로마의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재물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은 요즘으로 하면 고급 저택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을 거의 교회로 사용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의 교회입니다

사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이 사도 바울과 동역을 한다는 것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큰 집을 교회로 사용을 함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데 있어서 편안함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후에 로마의 박해가 심해졌을 때는 카타콤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카타콤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사막의 석회암 바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시에 있는 집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들은 단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16:5절을 보겠습니다. (261)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하여 주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열매입니다.”

 

저의 교회에도 문안하라

새번역에서는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하여 주십시오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는 교회에 대해서 너무도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보는 목사들은 교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막상 그들이 신학을 공부를 하고 난 후에 교회에 가든지 아니면 자기가 개척을 하든지 하면 그때부터는 교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 교회에 대해서 배울 때는 분명히 성도의 모임을 보고 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에서 뿐입니다

신학교를 졸업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는 교회를 특정 건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 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 주려고 하다보니까 자기들이 이름을 붙이고 건물로 지어 놓은 그 교회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건물이 교회입니까?

절대로 우리가 보고 있는 건물을 교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애써 자기들의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정의가 어떻게 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그 말씀은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모이는 모임을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가 되는 것을 저의 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건물을 지어 놓고 그것을 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는데도 사람들이 교회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 대한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건물을 지어 놓고 심지어는 00교회라고 이름까지 지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좋은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것으로 자기들이 사망으로 가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 일반 교인들은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목사들은 좀 낫습니다.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최소한 교회가 무엇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또 누군가 질문을 하면 답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는 것으로 끝을 내고 실제는 건물을 지어 놓고 그 이름을 무슨 교회라고 짓고 있습니다.

 

교회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아닌 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짓는 육적인 죄는 용서가 되어도 영적인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령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도 사람들은 그 죄에 대해서 고백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하여 주십시오.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브리스가와 아굴라로부터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문안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교회에도 문안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문안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그들이 장로인가 집사인가는 전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성령을 받아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반드시 신학이라는 곳에서 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하지만 당시에는 복음을 듣고 믿은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동역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복음의 깊은 비밀을 알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절대로 혼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에 따라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에 계시는 모든 분들이 자매 뵈뵈와 같이 되고 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이 동역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와는 조금 사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전적으로 이 복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직장이 있고 여러 가지 사회생활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성도님들 뿐 아니라 이 시대 저보다 더 복음적으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서 듣고 싶은 사람입니다 제가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것 중에 하나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입니다

에배네도에 대해서는 로마서에서만 기록이 되어 있어서 그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 대백과사전에 있는 것을 전하면 그의 이름의 뜻은 찬양받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를 알고 그 이름의 뜻을 아는 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를 무척이나 사랑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성경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누구에게 복음을 들었는가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어찌되었던 에배네도는 사도 바울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문안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16장에서는 문안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다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당시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의 이름을 열거를 하면서 문안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 성도가 아닙니다.

만약에 에배네도가 일반 성도였다면 굳이 따로 그 이름에 대해서 말씀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서 복음을 들었을지라도 에배네도는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문안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군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곁에는 그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서 복음을 들었어도 그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의 이름을 따로 이야기를 하면서 문안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배네도입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도 지역 적인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특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고 난 후에 그를 문안하라고 하는 말씀은 그에게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에배네도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