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팔복에 대하여

5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윤주만목사 2018. 10. 15. 14:24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5:7절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공부를 잘 하면 공부 못하는 사람을 이해 못 합니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는 분명한 차이가 있고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은 아이가 5시간 공부를 하는 것과 머리가 나쁜 아이가 같은 5시간을 공부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머리가 나쁜 아이는 때로 10시간을 공부해도 못 따라가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자의 은사를 주셨는데 어느 사람에게는 다양한 많은 은사를 주셨고 어느 사람에게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또 아주 부족하게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은사가 좋은 사람은 그 결과가 아주 빨리 나타나고 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은사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멸시를 받게 됩니다.

 

운동을 잘 하기도 합니다.

또 노래를 잘해 어려서부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난해인가 어느 시상식에 갔는데 이미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하는 여자 아이인데 우리나라 판소리를 정말 문외한인 제가 들어도 감동을 받을 정도로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까지 가끔 판소리를 들었어도 별로 감동을 받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그 아이가 하는 것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끔 이렇게 신동이라는 말을 듣는 은사 자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은사를 보면서 열광을 하고 있고 또 딸을 키우는 사람들은 자기 아이도 그렇게 해 보고 싶어 학습을 시키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안 짓습니다.

정말 성실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늘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고 하는 일 마다 정말 위태위태해 도무지 보아 줄 수 없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계속해서 실수를 하는 것을 보면 도무지 이해를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말썽만 피웁니다.

그리고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도박을 일삼기도 하고 늘 주정뱅이가 되어 술이 취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술이 취해 있다 보니까 행동이 거칠어 질 수밖에 없고 때로는 사람들을 아주 불쾌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이해를 못 합니다

아니 오히려 정죄의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면서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면서 때로는 왜 세상을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심지어는 귀신은 뭐하나 저런 사람을 안 잡아가는지 모르겠다고 말 합니다.

 

참 불공평 하게 보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다 주시고 왜 이 사람이게는 아주 나쁜 것을 많이 주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고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부정하기 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절대 불공평 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천국을 가는데 어떤 영향을 준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지만 그런 은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구원을 하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평생 강도짓만 하다가 잡혀서 십자가에서 죽는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은사를 주신 것이 불공평 하다면 예수님 곁에 달렸던 한편 강도는 절대로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되고 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 관점으로 보면 불공평 합니다.

누구는 노래를 잘하고 누구는 공부를 잘하고 또 누구는 운동을 잘하는데 나는 아무리 보아도 별고 잘하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누구는 사랑도 잘하고 누구는 헌신도 잘하고 또 누구는 은사를 행하기도 하는데 나는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내 세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 영향을 준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칭찬을 받았다 해도 그가 구원을 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더구나 하나님께서 실제 더 불쌍히 보이는 그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묘합니다

자기가 도둑질을 해 본 사람은 처벌을 받는 도둑을 그나나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도둑질을 미화하고자 드리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사람은 공부를 못하는 사람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조금만 노력을 하면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공부를 못하는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못 하느냐고 합니다.

아니 못하는 자체가 더 이상 합니다.

조금만 노력을 하면 아니 더 많은 노력을 하면 될 텐데 노력도 하지 많고 포기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해 보았지만 안 되니까 포기를 한 것이지 처음부터 누가 포기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포기를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포기를 하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포기를 안 하고 그것과 싸워 기어이 공부를 잘 하게 된 사람은 절대 이해를 못 합니다

 

지는 사람은 지는 사람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타고 나서 이겼든 아니면 그가 노력을 해서 이겼든 이긴 사람은 진 사람을 보면서 이해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30년간 술 담배를 하다가 그것을 단번에 끊은 사람은 그것을 못 끊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전도에 미쳐 있습니다.

사실 그 전도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라기보다는 그저 교회 안에 숫자를 늘리기 위한 전도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깨어 있는 성도라면 작금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전도에 대해서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 왕이 대세입니다

제가 누구라고 꼭 집어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지만 전도 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전도하는 것이 너무도 쉽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전도 세미나를 하기 위해서 스케줄이 꽉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웬만한 유명 강사보다도 더 유명하고 교회 안에서 가장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마다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간증을 듣고 그렇게 되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500명을 전도 했다고 하면 그 사람대로 할 수 있다면 내 교회에 교인이 100명이면 50.000명이 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렇게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쉬울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전도에 욕심을 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불러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 안 되냐고 합니다.

그 사람의 상식으로는 안 되는 것이 더 이상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았다면 아무리 노력을 해고 평생 한 사람도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00명을 아니 10명을 전도해본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겨 돌보아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는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사라지고 있고 교회가 원하는 교인만이 남아 있게 되어 있습니다. 못 하는 사람은 그 교회에 붙어 있을 수 없는 환경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따라 하지 않으면 직분도 주지 않고 능력이 있어야 교회를 다닐 수 있는 그런 구조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교회 인원이 10여명도 안 되는데 정말 가난한 자를 어떻게 해서 교회 안에 들여왔는데 헌금시간마다 바구니를 돌리고 있습니다. 헌금을 하는 자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정말 가난한 자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는 충분히 할 수 있고 그것을 하는 것이 교인으로서의 바른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의 벽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의 영혼을 정말 불쌍히 여긴다면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헌금 바구니를 돌릴 수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제가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잠언19:17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교회가 그나마 잘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교회는 지역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그래도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도 교인들이 해야 하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가난은 그런 물질이 없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에서 다윗은 내 소유가 이것이니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재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그 마지막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율법을 못 지킵니다.

지금은 율법이 폐해 졌는데도 아직도 율법을 세워 놓고서는 못 지키는 사람들을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를 하고 있고 또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하는 일에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하지 않지만 은근히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위가 나쁩니다.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가 보이고 또 실수가 보이는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멀쩡한 사람이 왜 못하느냐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꾸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진 사람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는 것은 하나님이 빚을 진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내 주변에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게 빚을 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없는 사람에게 적선하는 것은 하나님께 빚을 주는 셈.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갚아 주신다”

 

사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빚을 지시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그래서 그를 도와주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빚을 지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 대해서 오히려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재물이 가난한 자에게는 잘 합니다

그러나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하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하는 사람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 행해야 하는 일을 잘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도 인색하고 또 그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빚을 지시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께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는 행위를 통일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안 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왜 못하느냐고 하면서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아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를 긍휼이 여기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빚을 지는 일인데 그 일을 마다하고 있고 오히려 자기들과 같아 지지 않는다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빚을 지시면 가만히 있으시겠습니까?

 

왜 나에게 좋은 은사를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빚을 지시기를 원하시고 있고 그렇게 빚지신 것을 갚아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를 보면서 오히려 자기와 같이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십일조를 못한다고 하면서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고 하면서 선교 헌금을 못한다고 하면서 또 전도를 못한다고 하면서 가난한 자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가 다고다고만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교인들을 향해서 다고다고 하면서 교회라는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그들에게 다고다고를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통해 자기들의 생각을 이루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못 이루고 또 그것에 대해 반대를 하면 정죄의 서슬 퍼런 칼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정말 내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로 율법의 행위를 강조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강조를 합니까? 하지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오히려 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빚을 지시겠다고 주시는 기회를 다 날려 버리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못 지키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아주 상종을 하지 않고 정죄를 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법은 절대로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19:13절을 보면

“네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고 무죄한 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신명기19:21절을 보면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이래도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겠습니까?

율법을 지킨다는 자체가 아니 율법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그 마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법은 절대로 긍휼히 여기지 않고 법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율법이 살아 있다면 그 법대로 해야 합니다.

 

물론 정상 참작은 있습니다.

삼일 굶은 사람이 빵 한 조각을 훔쳤다면 분명히 정상 참작을 해 주어야 하지만 그러나 법은 반드시 법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법으로 우선 처벌을 하고 난 후에 정산 참작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법대로 처벌을 하지 않는다면 그 법은 이미 죽은 법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이 그냥 자기 욕심에 빵을 훔쳐서 처벌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고 싶습니까?

그럼 나에게서 우선 법을 폐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법이 살아 있다면 그 법으로 인하여 절대로 긍휼히 여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 행동으로는 긍휼히 여기는 척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마음에서는 절대로 긍휼이 여기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5:38-39절을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법으로 하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예외가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법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폐하시고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하시면서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율법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대로 갚아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율법을 폐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가 오른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 대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법을 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좋게 보일지 몰라도 그 법으로 인하여 여러분 스스로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법은 절대로 긍휼히 여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법이 있습니까?

 

율법이 없으면 교회가 망 합니까?

복음이 없으면 그렇게 생각하지만 복음이 있으면 절대로 안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 법이 없어도 선하고 의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라는 거울이 있어서 굳이 법이 아니더라도 교회가 진리 안에서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이미 세상 법에 다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이런 법들은 십계명이 아니더라도 이미 세상 법으로 규제를 하고 있고 이런 죄를 범한 사람을 국가가 그냥 두지를 않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이 없다 해도 우리나라 유교 사상이 얼마나 부모를 공경하게 하고 있습니까? 옛날에는 마을에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면 정말 멍석말이를 해서 그 버릇을 고쳐 주기도 했습니다.

 

내가 한 가지 법을 살리는 순간 그 법에 대해서는 절대 긍휼히 여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으며 강도짓을 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한편 강도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법대로 하시려고 했다면 그 두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긍휼히 여겨 서는 안 됩니다

 

긍휼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이웃을 긍휼히 여기려면 내 안에 있는 법부터 먼저 없애야 가능한 일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담배를 안 피고 술을 안 먹고 하는 그런 법들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면 절대로 긍휼히 여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나와 같이 행하지 않는 사람을 법대로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잠언29:7절을 보면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화를 냅니까?

자기 분을 참지 못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면서 술에 취해 나와서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긍휼이 여길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자기가 담배를 안 핀다 해서 담배 피는 사람들이 큰 죄나 진 것처럼 정조를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들에게 과연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저도 천식이 있어 담배 피는 사람 곁에 있으면 힘이 듭니다.

그럴지라도 그 사람을 한 번도 판단을 해 본 적도 없고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술 먹는 사람 곁에 있어도 그들이 술을 먹는 것에 대해서 한 번도 정죄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물론 술 담배를 안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하는 사람을 정죄하기 보다는 그 사정을 알아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내 곁에 죄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실 술 담배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죄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이상하게 변질이 되어 자기들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죄라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은 나를 통해서 그를 바로 잡고 그를 정죄를 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있어 복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법아래 있는 자들은 스스로 그 기회를 차 버리고 있고 오히려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보기에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를 정도로 한심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내 안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꾸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며 또 그 일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법을 버리세요.

교회 안에 어느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이 살아 있는 순간 절대로 긍휼이 여길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법이 긍휼이 여기지 못하게 하고 있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법대로 하라고 하기 때문에 그 법대로 안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정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법이 있으면 안 됩니다

긍휼히 여기고 싶어도 긍휼히 여길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법입니다 십일조는 내는 사람은 그리고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서 저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어 합니다.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려기보다는 그 법대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믿으면 가능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율법이 폐해졌다는 것을 믿고 또 내 평생의 죄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다 갚아 주시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설령 그가 살인을 했다 해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도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은사를 받아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데 그는 그런 것이 없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인정을 하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마워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서 그깟 주일을 못 지킨다고 정죄를 하고 그깟 십일조를 못 낸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고 하고 있고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것을 하지 않는다고 마치 사단이 들린 것으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법아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아는 성도는 설령 내 오른뺨을 치는 사람이 있어도 그를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못하는 그를 보면서 판단을 하기 보다는 왜 못할까? 그 사정이 무엇인가 하면서 그를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깨닫기 바랍니다. 내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긍휼히 여겨 주시고 그 영혼을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가능합니다.

율법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내 이웃을 긍휼히 여기시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 영혼 구원을 받아 하늘의 모든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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