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팔복에 대하여

제4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윤주만목사 2018. 10. 15. 14:2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5:6절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易地思之]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에게 처한 처지는 너무도 잘 이해를 하면서도 바꾸어서 생각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아니 어쩌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죄를 하고 그것에 대해서 판단을 하기를 좋아하지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입니다

 

의롭게 살고 싶습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열이면 열 사람 모두가 정말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살고 싶어 하고 죄를 안 짓고 의롭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바람이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죄 진다고 합니다.

아니 어쩌면 분명히 일부러 죄 짓는 것 같이 보여 집니다.

그 사람을 보면 늘 그것에 대해서 문제가 되고 있고 내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가도 나장에는 화가 납니다

 

교회 안에 보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얼굴을 붉히고 또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화를 벌컥 내서 분위기를 아주 사납게 만들어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까지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화 낼 일도 아니고 좀 참으면 될 일인데 꼭 그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 폼 나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라고 화를 내면서 살고 싶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하고 나면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또 그런 일을 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겸손하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고 절제를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죽을 때 까지 그 버릇을 못 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롭게 살고 싶습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완전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누가 처음부터 강도가 되고 누가 처음부터 나는 살인을 하면서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살아가겠습니까? 설령 그가 살인자라 해도 처음부터 나는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고 이 세상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그렇게 살고 싶지만 어느 새 보면 나도 모르게 죄 가운데 서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고 그것을 이기지 못해 나중에는 포기를 하고 살아가고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목사인 저도 제 연약한 부분에 대해서 늘 자책을 하고 있고 그 문제를 아직도 해결을 하지 못하고 늘 안타까워하면서도 또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의롭게 살고 싶습니다.

정말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밤을 새워 가면서 기도를 하고 또 금식을 하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그때 뿐 의롭지 못한 내 자신을 보면서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신학을 권유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 자신의 연약함을 볼 때 제가 목사가 되면 오히려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들까봐 정말 자신이 없어서 포기를 하고 살았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제 자신이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신학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아니 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목사의 기준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목사를 하겠느냐고 하면서 손을 내 저었습니다.

 

가장 큰 고민입니다

지금 주님의 은혜로 신학을 공부하고 이렇게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역시 제가 의롭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세상 사람보다 더 연약하다는 것을 늘 알고 있고 제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아마 모든 사람이 그럴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양심에 있는 정직한 마음입니다

자기가 연약해서 죄인 일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가 고민을 하고 있고 그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어 죄책감에 빠져서 스스로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이렇게 자기 자신이 연약함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의 행위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남들이 못하는 것을 자신이 하게 되면 마치 대단한 것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그것에 대해서 아주 부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고 그들은 절대로 의에 주리지를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은 상대 비교를 할 수 있고 내가 하고 남이 안 하면 나를 의로운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민감한 것을 예로 들겠습니다.

정말 적은 수입이지만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람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십일조를 안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십일조를 하는 나는 스스로 의로워 져서 마치 자기가 많이 의로운 것으로 오해를 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 한 가지만으로도 자기는 의인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율법의 단 한가지만으로도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할 때 나는 정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십일조를 안 내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 나는 의롭고 저 사람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또 누군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아직도 술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안 하는 나는 그 사람과 비교할 때 분명히 의인이 되어서 스스로 생각할 때 성도라고 자칭을 하게 됩니다.

 

행위는 그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고 남이 그 행위를 안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스스로 의인이 되어서 의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정도하면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고 실제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의롭지 못 합니까?

죄를 짓기 때문에 의롭지 못한 것이고 또 사회에서는 정말 깨끗하게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교회 안에 있는 율법을 자기가 지키지 못할 때는 스스로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한국 교회 안에는 너무 많이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행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분명히 스스로 생각할 때 차이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정말 역지사지입니다

내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의에 주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면 의가 주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도 의롭게 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의롭게 살면 의에 주릴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의에 주리려면 의롭지 못해야 하고 또 죄를 져야지만 의에 주릴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또 죄를 진 사람만이 의에 주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도는 의롭게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 배부를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의롭게 살지 말라고 하는 말씀과고 같습니다. 율법을 못 지키고 또 죄를 져야지만 의에 주린 자가 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상이 다릅니다.

율법주의자는 자기들이 노력을 하면 죄를 안 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복음주의자는 자기가 아무리 의롭게 살았어도 역시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성경을 보고 기도만 하면 율법주의자는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설령 그렇게 살았다 해도 복음주의자는 자기가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고 또 한 사람은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 과연 누가 의에 주린 자인가를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두 사람은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19:16-20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청년은 유대인입니다

이 청년은 자기가 말한 그대로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자기 나름대로는 스스로 흠이 없는 자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정말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아왔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킨 이 청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청년의 입장에서는 자기는 율법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고 또 그 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 그렇게 배워 왔습니다. 의에 주리고 싶어도 주릴 수가 없는 부자 청년입니다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이 부자 청년과 같이 여러분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행위 하나가 바로 의로 배부르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의롭게 사는 것이 나쁘다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죄를 지라고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나는 정말 예수님처럼 살고 싶지만 사단이 너무 강해 죄를 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사상은 자기가 노력을 하면 죄를 안 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복음주의자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어 의에 주린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3:4-6절을 보면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하면서 내가 이스라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기를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부자 청년과 똑 같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기가 지킨 율법의 의를 내세우면서 아직도 무엇이 내가 부족하냐고 묻고 있는 것과 똑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나 부자 청년의 삶이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으로 똑 같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가 지킨 율법의 의로 배가 부른 자가 되었고 한 사람은 자기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이지만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그 의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의에 주린 자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3:7-9절을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의에 주린 자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율법의 흠 없는 의로는 도저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오히려 해로 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흠 없는 율법의 의가 사도 바울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고 있고 부자 청년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귀한 것이 되어 의로 배가 불러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도 바울과 같이 산다 해도 그것으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는데 있고 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그런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성도는 정말 할 수 있다면 사도 바울보다 더 의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도 바울의 심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부자 청년과 같이 내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 라고 스스로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율법주의와 복음주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행위를 보면서 자기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자기 행위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기에 의에 주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간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의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면 아니 그 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의는 내가 무엇을 행해서 얻을 수 있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의 같으면 어떻게 노력이라고 해 보겠지만 이 의는 하나님께 로서 난 의입니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켜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무엇을 잘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부자 청년과 같이 노력을 해서 혹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성도는 당연히 의가 주리고 목이 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69:3절을 보면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부르짖고 있습니다.

도저히 자기의 의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성도만이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역시 죄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볼 때 목이 마를 정도로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 청년과 같이 내가 아직 무엇이 부족하나이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아는 성도만이 아니 율법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성도만이 부르짖게 됩니다.

 

얼마나 간절합니까?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쇄하였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성도만이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고 정말 의에 주려 목이 마를 수 있습니다.

 

시편69:4절을 보면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

 

내 원수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바로 613가지의 율법이 내 원수로 나를 정죄를 하고 있고 나로 스스로 정죄에 빠져 천국 문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율법은 내가 지키지 못하면 나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나는 못 지키면 나를 괜스레 미워한다는 말씀입니다

 

역지사지입니다

율법을 못 지키는 사람만이 의에 주릴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 부자 청년과 같이 이 세상을 살아야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 배를 부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지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죄가 있어야 은혜가 가슴에 와 닫는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5:20절을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을 못 지키니까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

내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으면 은혜가 절대로 은혜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죄가 있는 사람만이 의에 주리고 하나님께 로서 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얻기 위해서 목이 마를 정도로 간절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로마서6:1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죄를 지라고 사도 바울이 5장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하면 그럼 일부러 죄를 지라는 말이냐고 반문을 할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살고 싶겠습니까? 정말 예수님같이 사도 바울과 같이 살고 싶지만 우리 육신은 사단보다 연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죄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죄를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우리는 안 됩니다

안 되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이 마릅니다.

하나님께 로서 난 의가 아니고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종일 바라고 그 의를 얻기 위해서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과 같이 그렇게 의에 주리고 있습니다.

 

그 의를 누가 채워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해 주셨습니다.

죄로 가득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가 다 없어졌습니다. 내가 의로워 지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그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있습니다.

 

요하복음7:37절을 보면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의가 없습니다.

유대인과 같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수도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런 우리를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는 아니 죄를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지금도 부르시고 있고 누구든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행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행위로 인하여 의가 주리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도 잘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이 교회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복음7:38절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오직 믿음입니다.

부자 청년과 같이 자기가 노력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이 설령 그렇게 살았어도 그것이 부자 청년과 같이 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기에게서 난 의를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의가 주립니까?

죄가 보여서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어 부르짖어 목이 마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그 배에서 생수가 넘쳐흘러 의에 주리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고 그 배가 부를 것입니다

 

의로워 지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죄를 지라고 드리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역지사지를 잘 생각해야지만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며 이것이 해결이 안 되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고 하다가 패망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내가 의로워 지려고 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가져와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율법은 의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단 한가지의 율법이 나를 부자 청년으로 만들고 있고 그런 사람은 의에 주리지도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느라 부르짖어서 목마르지도 않다는 것을 분명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7:16절을 보면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예수를 믿으세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은 성도는 천국에서 다시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아무 뜨거운 것으로도 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께서 말씀을 하는 이에 주리고 목마른 자인가 아닌가를 살펴보시고 율법주의에 빠지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얻기 위해서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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