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팔복에 대하여

제2강, 애통하는 자는

윤주만목사 2018. 10. 15. 14:17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4절을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팔복입니다

이 복은 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 성도는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복을 추구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 삶들 보다 더 복에 환장을 해서 복이라고 하면 양잿물이라도 마시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현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심지어는 복을 받기 위해 도박을 하는 사람들과 같이 돈 놓고 돈 먹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영은 사라지고 육만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성령의 시대라고 떠들어 대면서도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는 육체가 되어 가고 있고 그 육체의 모습을 영이라고 생각하는 참으로 이상한 사상에 미혹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이 복보다는 육체의 복을 얻기 위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치열하게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잘 먹고 하기 위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고난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늘의 복을 바라보면서 참고 또 참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묵묵히 나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 애통을 하고 있습니까?

밤새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 눈물이 구원에 관한 눈물이 아니라 자기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슬퍼하고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밤을 새워 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교인들의 모습이고 그것이 마치 잘 하는 것인 줄 알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구약과 차이가 없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과 지금의 교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람들이 육체를 따라 산 이스라엘을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고 그들이 실패를 한 것을 따라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그림자와 실체를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 하나의 예표가 되었고 그들이 왜 망하였고 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는가를 그들을 통해 배워야 함에도 그들 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들을 함부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무엇을 믿는지 조차 모르고 있고 자기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전혀 애통해 하지도 않고 있고 오히려 그 일에 열심을 내면서 주님을 애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왜 달리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면서 죽어간 그 십자가의 사건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폐하였고 제사 제도를 폐하였는데도 아직도 제사 제도가 그대로 교회 안에 있고 율법이 살아서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예수를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애통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리고 애통해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습니다.

기껏 애통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 육체가 한스러워서 세상적인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자기 영혼을 위해 애통을 했지만 지금 이 시대는 애통을 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자기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싸구려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믿음은 고귀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배로운 것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성도가 가진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말은 그저 세상 종교인들이 사용하는 그 믿음이라는 단어로 전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시편42:3절을 보면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어떻게 애통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지금 처지가 어떻다는 말씀입니까? 자기 처지가 하나님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과 같기에 사람들이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시편42:9절을 보면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누가 잊은 자 입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면 나사로는 하나님께서 잊는 자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자이고 나사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거지 나사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을 너무 좋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행위가 좋은 사람과 행위가 나쁜 사람이 있다면 누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은 행위가 좋은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원수의 압제로 슬퍼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얼마나 압제를 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슬퍼하겠습니까?

그러나 더 애통한 사실은 자기 원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압제를 오히려 달갑게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원수는 자기가 죄를 짓는 모습이었습니다.

 

내 죄를 보니 슬퍼했습니다.

죄를 안 질 수 없는 연약한 인생의 모습을 보니 스스로 너무 슬퍼 애통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슬퍼했고 그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내 원수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이방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늘 이방인과의 싸움을 했고 그 싸움에서 지면 포로가 되어 잡혀 가고 했습니다. 그렇게 잡혀가는 자기들을 보면서 조롱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실 수천 년 전에는 신의 싸움이었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면 자기들의 신이 싸움에서 이기게 해 주었다고 믿는 사상이 강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게도 하시고 또 이기게도 하셨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이나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의 신이 싸움에서 이기게 해 주었습니다. 그 진 자들은 원수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 가면서 얼마나 슬퍼했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하나님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의 압제로 고난 중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원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럼 이 시대 우리 신앙인들에게 원수는 누구입니까?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반대하는 사람을 원수로 생각합니다

더구나 신앙인들은 자기가 하는 하나님을 위한 선한 일을 하는데 그것을 방해를 하면 마치 원수를 대하듯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영의 일로 오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자기 육체의 일인데 그 육체의 일을 하면서 그것에 반대한다고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를 짓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을 방해를 하고 그것에 반대를 하면 원수로 생각을 하고 심지어는 사단이라고 공격을 합니다. 그가 또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그것에 대해서 누군가 반대를 하면 마치 사단이 들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심하게 다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육체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영의 일로 오해를 하기 때문에 원수로 생각을 하고 상대를 사단에게 미혹된 자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그가 사단에 미혹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도 그것에 대한 분별력이 전혀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면을 하면 사단입니다

하긴 사단에게 미혹된 자를 권면을 하면 오히려 사단이라고 공격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려서 귀신의 힘을 빌어서 병자를 고치고 능력을 행한다고 말 했습니다 이 시대도 율법주의의 행위에 빠진 자들은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사단에 미혹되었다고 공격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내 원수가 누구입니까?

 

에베소서2:15절을 보면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내 원수는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 원수에게서 위를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원수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자유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율법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원수로 인하여 슬퍼하고 있습니다.

아니 애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서 애통을 하고 있고 밤새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코미디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이 율법에 속한 것을 하지 못하게 안타까워하고 있고 이 원수에 속한 것으로 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원수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으로 압제를 하는 것으로 애통을 해야 하는데 그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서 애통해 하고 있고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그 원수와 친해지고 싶어서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으로 애통해야 하는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육적인 것을 가지고 애통을 했다면 우리는 영적인 것을 가지고 애통해야 한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죄로 인하여 슬퍼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침상을 띠우며 요를 적셨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애통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자기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하여 애통하는 마음으로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양심이라는 거울이 있어서 죄를 지면 그것으로 인하여 가책을 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의 값을 지불했고 또 내 양심의 거울에 의해 죄에 대해서 이미 심하게 자책을 하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또 애통을 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죄를 마음 놓고 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살인을 해도 천국에 갈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하겠습니까?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의 사고에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살인을 해도 괜찮고 강도짓을 해도 괜찮은 것이냐고 저에게 따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양심의 거울을 보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애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서는 아닙니다. 설령 극단적으로 내가 살인을 했다 해도 그것으로 내 영혼의 구원이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이제는 내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6:2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누가 애통해야 합니까?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나사로의 비자의 비유에서 부자는 연락을 하면서 웃고 지냈지만 나중에 그는 애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너무 잘 되는 것은 웃을 일이 아닙니다.

 

기도 응답 참 좋아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서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너무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고 간증을 하면서 함빡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나를 웃게 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반드시 애통하게 될 날이 있게 됩니다.

 

내가 잘 됩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있고 칭찬을 받고 있습니까? 구약에는 그것이 안 되는 것을 보면서 애통했다면 지금 신약에서는 너무 잘 나가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애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응답이 너무 잘 되는 것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라 애통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안 되는 것을 보면서 애통할 일이 아니라 사실은 너무 잘 나가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애통해야 합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도와 주셨지만 신약은 오히려 그냥 놓아두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초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고난과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전혀 도우시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자기 생명이 죽임을 당하면서 간절히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분별을 하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으면서도 전해 애통하지 않고 있고 슬퍼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끌어 내리려고 하는데도 애통하지도 않고 있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이 사망으로 끌려 내려가고 있는데도 전혀 슬퍼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8:15절을 보면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바벨론이 무엇입니까?

약속을 믿지 않는 대표적인 예표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 살려고 바벨탑을 쌓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쌓은 바벨탑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치부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치부를 하고 있고 또 행위로 치부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무식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애통해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도 자기가 은혜를 받고 있는 가에 대해서는 전혀 애통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너무 잘 나가는 것 좋아하지 마세요.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런데 교회 건물로 바벨탑을 쌓고 있고 자기들의 신앙생활의 의로 바벨탑을 쌓고 있으면서도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애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다릅니다.

구약은 자기 육체가 고난을 받는 것을 보고 애통을 하였다면 이제는 그것으로 애통하는 시대가 아니라 혹시라도 내 육체로 인하여 사단에게 미혹이 되지는 않을까 하며 그런 육체를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육체의 연약함을 가지고 애통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위로 받기를 좋아 합니다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하는 가를 바로 깨닫고 내 육체의 연약함 그리고 내 영혼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기 위해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1:3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초대 교회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의 육체적인 기도는 전혀 응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육체의 고난 뿐 아니라 믿음을 갖는다는 자체가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며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혀 없고 그렇다고 해서 종말이 빨리 오는 것도 아니고 늘 그들은 불안한 가운데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위로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그런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너희에게 임하고 있다고 그 위로를 받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육체에 대해서 위로를 받기를 원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로를 받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육체의 위로가 아니라 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육체는 더 극한 고난 속에서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도 느끼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육체의 위로를 바라는 자가 아니라 영혼의 위로를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6:24절을 보면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너무 잘 나가는 것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로 위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 위로가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육체가 너무 잘 되는 것 내가 기도 하는 대로 응답이 되는 것 이미 위로를 다 받은 것입니다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이미 위로를 다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위로를 받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애통해야 하는 일인에도 바리새인과 같이 아주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의로 부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위로 부자가 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무렇게나 살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너무 잘하고 있는 그 행위들이 혹시나 육체로 이미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가 생각해 보시고 그런 위로를 받는 것을 너무 기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위해 주님을 위해 열심을 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서 이미 위로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라리 조금 못하는 것이 낫지 너무 잘 하다가가 그것에 미혹이 되어 자기가 이미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을 모른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한계시록21:4절을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 육체는 애통합니다.

아니 내 육체를 보면 도무지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죄의 문제는 다 해결이 되었는데 이제는 내 육체의 정욕이 자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거절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히 할 수는 또 없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를 발견하는 성도만이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기 위한 마음이 너무도 강해 그것을 해 보니까 그것이 도리어 악으로 변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문제가 해결이 되었지만 역시 육체는 죄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또 선을 행하기 위해서 하는 내 행위가 도리어 악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내 영혼의 문제를 보면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육체를 보면 도무지 방법이 없어 애통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로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 눈물을 닦아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 다시는 애통하는 일이 없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은 자는 반드시 애통하게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 애통하는 자는 천국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일에 애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가지고 애통해 하면 사단은 위로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간증을 하고 자랑을 하고 있고 기뻐하면서 마음에 부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애통해야 하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문제입니다

 

안 됩니다

선을 행해도 안 되고 의롭게 살아도 안 되고 어차피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자기 영혼을 보면서 애통해 하고 있고 주님께서는 그런 성도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셔서 그 마음에 믿음을 주셔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대로 구원을 해 주셔서 천국에서 그 눈물을 씻기시고 다시는 애통하지 않게 위로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그 방법이 아니고는 영혼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자기 육체로 너무 많은 위로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불행으로 다가올 줄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 진리를 분별하고 내가 어떻게 애통해야 하는 가 또 무엇으로 애통해야 하는 가를 알고 그런 심령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고 그 눈물을 씻기시고 다시는 애통하는 일이 없는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내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애통하는 성도를 이 시대도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며 애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