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1: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믿음입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일 같으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의 일이고 내세에 우리가 들어가서 영원한 축복을 받고 살아가는 천국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
그리고 내세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세는 천국이라고 말씀하면서 그것을 비유로 해서 정금 길이 깔려 있고 그리고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언어로는 설명 자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영을 누가 사람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게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을 환상으로 보고 그것을 또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언어로 누가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이해의 폭입니다 그것으로는 설명 자체가 안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역사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라는 것이 마음에 있다 보니까 그것까지도 누구에게 밝히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인생들이 이 영의 일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성이 있는 정상적인 사람은 이 영의 일을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게 하시고 있고 이 영의 일을 기적과도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믿기 힘들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져 가지가 꺾였습니다.
저희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습니까? 아마도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서 저희는 믿지 않았지만 우리는 믿고 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역시 믿음을 모르고 있고 믿지를 않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생활을 보면서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영의 생명에 대해서 믿는 것이고 또 내세의 일에 대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활동을 보면서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가지가 꺾인 이스라엘과 같은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가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같이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가 믿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이 잘 믿을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이 말씀을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묘하게 기록되었는지를 모르다보니까 사람들은 저희는 믿지 않았어도 자기들은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믿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고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지 않은 것을 어떻게 증거를 하고 있는가 하면 저희가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들이 구약의 율법을 보고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가지고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 역시 구약의 율법을 보고 문자 그대로 자기들의 육체로 행하고 있다면 믿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인생은 뼈 속부터 율법주의입니다 사람이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누구나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율법주의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율법주의에 빠지고 또 외식을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에 이성에 옳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타협을 하면서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가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을 하면 그 다음에는 더 쉽게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너무 높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지도 않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은 믿지 않아서 그 가지 얼마가 꺾였고 자기들은 잘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접붙임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역사를 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를 꺾으시고 나를 그 나무에 접붙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서는 복음이 전해지지도 않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는 접붙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참 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임이 된 것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은혜도 모르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하고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높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표입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지만 우리가 만약에 그때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똑같이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성지라는 것을 참 많이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천주교의 순교자들의 성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을 쌓고 비석을 가꾸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역시 그런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의 행위를 하면서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접붙은 가지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고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행위를 잘 해서 그것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두려워하고 말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빈핍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거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거지 나사로와 같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율법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거지가 율법을 지키면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서 이스라엘과 막힌 담을 헐어 버리셨는데 그것을 도로 세우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도리어 담대하게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이방인들은 원래부터 거지입니다 성경은 우리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에 빛을 비춰주시기 위해서 유대인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담과 같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심으로 거지와 같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누구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자적인 율법은 우리 이방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자적인 율법을 지키다가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였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던 이스라엘을 아끼지 않으시고 그 가지 얼마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율법을 이방인들이 지키면서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사를 통해서 보면 이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는 종교재판을 자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데 이스라엘과 같이 저희 눈이 흐려져서 율법의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호세아11:7절을 보겠습니다. (구 1266쪽)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원 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를 꺾어 버리셨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거의 도덕을 보는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들의 도덕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덕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공자가 되고 부처가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것을 말씀하지 않은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짓고는 살 수 없는 진토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셨는데 왜 우리 인생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 치우쳐서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면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을 행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은 자기들이 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 가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왜 아끼지 않았습니까?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어서 아끼지 않고 가지를 잘라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끼지 않고 이스라엘의 가지를 꺾어 버리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은 우리가 알 수 없어서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를 합니다. 그 영의 일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성경은 분명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을 말씀하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는 영의 일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조상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고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 가지 얼마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벗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이 믿지를 않고 율법의 행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가지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원 가지들도 아까워하지 않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경계입니다
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벗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도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우리 이방인들이겠습니까? 이스라엘도 아끼지 않고 그 가지 얼마를 꺾어 버리셨는데 우리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끼시겠느냐고 사도 바울이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인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의 일을 믿는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해도 아끼지 않고 그 가지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아끼지 않은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완악하여 져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아끼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완악하여졌습니다. 그런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 가지를 꺾어 버리셨는데 우리 이방인이 율법을 지킨다면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것을 사도 바울이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는 혹시라도 우리에게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있게 해서는 안 되고 또 외식의 모양이 나타나서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고 외식을 함으로 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시대는 성경을 보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공의를 구하고 진리를 찾는 자가 이 성에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호세아 시대에도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결심을 하고 물러감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지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표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성경을 보고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은 비록 그렇게 했을지라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이스라엘보다 더 외식에 빠져 있고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구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결심하고 물러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심하고 물러가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성경에서는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다.
결심하고 물러갔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정말 열심을 다 했습니다. 그들은 결심을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심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겠다고 하는 결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결심을 하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10:39절을 보겠습니다. (신 364쪽)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결심을 하고 물러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결심을 하고 물러갔습니다.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사람들이 결심을 하고 뒤로 물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만 들어오면 율법을 잘 지키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결심을 하고 물러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그것을 내가 지키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결심을 하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원 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율법을 지키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들어와서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 세상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면서 율법을 잘 지키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원 가지들이 결심하고 물러가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 가지를 꺾어 버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두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 가지 얼마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너도 아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입니까? 말씀 그대로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아끼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결심하고 뒤로 물러가서 그들을 아끼지 않고 그 가지 얼마를 꺾어 버리셨는데 우리를 아끼시겠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을 히브리서에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 중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면서 물러가 있는 이스라엘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시대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면 그들을 아끼시겠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러가 있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뒤로 물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호세아 시대만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이방의 교회도 역시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호세에 시대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면 이 시대 역시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은 곳에 어디 있습니까?
구원파가 율법을 안 지킵니까?
그들은 주일을 지키고 있고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그들도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증거 하노니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 가지들입니다
그들이 왜 가지가 꺾였는가 하면 결심하고 물러가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뒤로 물러가 율법을 지키는 우리 이방인들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성경을 모르면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아까워하시지 않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똑같은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켰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알을 섬김으로 해서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율법주의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밥상입니다
이스라엘의 밥상은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다 무엇인가 하면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들의 밥상은 우상의 제물로 가득해서 결심을 하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먹고 있는 밥상이 무엇입니까? 거의 율법의 행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는 거의 도덕 선생이 되어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그들이 설교를 하면서 중간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고 있고 그 말을 들은 교인들은 자기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3:18절을 보겠습니다. (신 146쪽)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사람의 이성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지만 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역시 이런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종교적인 믿음을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 가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하면서 결심을 하고 율법을 지키는 그 행위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되고 그것으로 침륜에 빠져 심판을 받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의 가지가 왜 꺾였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제까지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벌써 심판을 받아 가지가 잘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없이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결심을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죽은 자입니다
그 죽은 자를 하나님께서 왜 아까워하시겠습니까? 살아 있어야 아까워하지 죽은 자는 아까워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명령인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 명령도 지키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왜 아까워하시겠습니까?
로마서11:22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십니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에게 인자하게 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꺾이었습니다. 그들을 경계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에게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을 어떻게 봅니까? 이 문자를 보고 이스라엘은 믿지 않아서 꺾이었고 자기들은 믿음으로 해서 접붙임이 되어서 뿌리에서 진액을 받아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경계입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었다고 말씀을 하면서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다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왜 안 믿는 것이 되었는가를 모르고 성경에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니까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져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진노를 받아 생명을 얻지 못한 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얻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얻지 못한 것을 사도 바울은 원 가지들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진노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아까워하지 않고 그들을 잘라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율법을 지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접붙임이 되지도 않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는 접붙임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이 시대 어느 교회가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 영생의 열매를 맺은 성도들이 있습니까? 사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입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원 가지들을 꺾으시고 너희를 접붙이셨다는 것이지 사실 로마서11장의 말씀은 이 시대 기독교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입니다 접붙이지도 않았는데 아까워하고 말 것이 어디 있습니까?
원 가지를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도 율법을 지킨다면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자와 엄위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넘어졌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아까워하지 않고 있습니까?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아까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면 그 말씀을 깨달아야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엄위
엄격하고 위엄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가 있는데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넘어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에서 넘어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하면 믿음에서 넘어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희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그 가지가 꺾이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없어 넘어진 원 가지를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셨다고 말씀을 하면서 너희도 믿음이 없으면 아끼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고 하면서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2:7-8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영의 일이고 내세의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도 않고 또 그것을 우리 인생의 언어로는 설명도 안 됩니다 사실 그런 영의 일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기에 더욱 우리에게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일을 믿음으로 굳게 서 있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 믿음이라는 것이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10개 들은 사람과 1000개를 들은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 더 믿음에 굳게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말을 하나마나입니다.
믿음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겨우 몇 가지 복음을 보았다고 해서 믿음이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가 셀 수 없이 많은 복음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평생을 그 복음을 알기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믿음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1.000개의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10.000개 아니 그 이상의 복음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에서 복음을 볼 때 우리는 믿을 수 있고 믿음에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우리가 평생을 이 복음만 보아도 사람의 이성으로는 서 있기가 어려운데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넘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에 서 있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넘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서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기가 넘어져 있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교회 안에서 악한 일만 하다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에게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왜 화가 있습니까?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넘어졌습니까?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이 세상의 어느 책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이것에 다 넘어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믿음에 서 있지를 못하고 거의 모든 사람이 넘어져 있습니다. 넘어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넘어졌다는 것도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은 넘어졌어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 율법을 지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을 거절을 하고 넘어져서 세상 초등학문인 율법을 지켰습니다.
성경의 문자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경의 문자를 조금 아는 것으로 마치 고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그 정도는 대학을 공부한 사람이 혼자서 독학으로 성경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수준의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성경을 보았으면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하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 있습니다. 자기들이 넘어졌다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평생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다가 죽으면서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로마서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하고 넘어지면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음에 굳게 서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의 행위를 보면 마치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아니 그들은 정말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믿음이 있는 성도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 넘어져 있습니다. 무엇에 넘어져 있는가 하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넘어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 초등학문을 좇으면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누가 보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성경을 봅니까?
그들이 성경을 보고 있어서 사도 바울이 세상 초등학문을 좇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 초등학문을 좇지 말고 그리스도를 좇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않았는데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을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율법을 지킨 이스라엘을 아끼지 않고 꺾어 버리셨는데 율법을 지키는 이방인들을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시겠습니까?
종교입니다
그들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노략하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저주를 받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도 옳기 때문에 거기에 모두가 노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는 온갖 율법을 다 지키면서 교회를 세워 놓고 그 건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주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종교에 의해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당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서 있으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는 말씀은 있어도 율법에 서 있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넘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교회 안에 있는 소자들이 이리들에게 노략을 당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사야59:9-10절을 보겠습니다. (구 1040쪽)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넘어지는 자에게 엄위가 있습니다.
성경이 넘어지는 자에게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면 누가 넘어지는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로마서의 말씀만 보면서 자기들의 이성을 가지고 넘어지는 자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안 지키는 것으로 넘어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막연함입니다.
그런 말에 미혹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는 자에게 엄위가 있으면 그 넘어지는 자가 누군가를 성경에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경에서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설령 누군가 찾아 주어도 성경을 그렇게 보면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지는 자가 누군가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에게 엄위가 있습니다.
백 명이 있는 교회에서 한두 명이 넘어진다면 사도 바울은 굳이 로마서에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셨는가 하면 이방의 교인들이 모두가 넘어지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솔직히 안 넘어져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두가 넘어져 있으면서도 성경을 모르니까 자기가 넘어져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넘어진 자인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입니다.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공평이 무엇입니까? 공평한 도리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재능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이 공평입니다
의가 미치지 못 합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의가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시고 있지만 어두움에 있던 이스라엘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이사야 시대와 같이 어두움에 있어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어두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어두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셨지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은 어두움에 있어서 참 빛을 보고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그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움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시대만 있었습니까? 주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어두움에 있어서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문제입니까? 이방의 교회 역시 어두움에 있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이스라엘과 다르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빛을 바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어두움뿐이었습니다.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경입니다
누가 소경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산과 바다를 두루 다니며 교인 하나를 얻으면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이 안 보이는 소경입니다.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가 넘어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을 넘어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들이 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넘어졌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넘어진 자입니다 소경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경이 혼자서 길을 가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이 서 있고 세상 사람들이 넘어졌다고 하면서 막연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장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자 같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강장한 자 같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율법을 그렇게 잘 지키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자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 강장한 자 같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도 똑같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 있는 성도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지만 믿음이 없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장한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지라도 죽은 자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죽은 자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보아도 그렇고 이 시대를 보더라도 모두가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4:18-19절을 보겠습니다. (구 915쪽)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의인의 길입니다
그리고 악인의 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길 중에 반드시 하나를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죄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라고 기록한 말씀이지 세상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의인의 길은 돋은 해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의인은 그 빛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정말 바로 알아야합니다.
단번에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만한 광명에 이르기 까지는 그러니까 구원을 받기 까지는 점점 빛이 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점점 더 많이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늘 성경을 보고 있고 성경에서 참 빛을 보고 있습니다. 그 빛이 점점 더 빛나서 결국에는 완전한 빛에 참예를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악인도 있습니다.
문제는 악인입니다 의인은 자기가 점점 더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회개라도 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있지만 어두움 같아서 넘어져도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악인입니다
그래도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저 사람은 악하다고 하면 본인도 자기가 어느 정도는 인지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악인은 어두움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쳐 넘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 합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누가 넘어지는 줄도 모르고 누가 악인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악인이라고 하고 있고 또 자기들의 이성의 도덕적 관념에 따라 넘어졌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넘어졌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이 넘어졌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진 자를 악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넘어 졌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악인은 자기가 악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악인은 이렇게 거쳐 넘어져도 자기가 왜 넘어졌는지도 모르고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악인이 많습니까? 의인이 많이 있습니까? 성경에 악인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는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넘어진 자가 자기가 왜 넘어졌는가를 알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면 다시 털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넘어졌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넘어졌습니다. 율법주의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의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 역시 모두가 넘어져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조차 넘어져 있으면서도 무엇이 넘어졌는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래도 알기나 하면 낫지 않습니까? 자기가 악을 행한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고난을 당하면 그나마 좀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악을 행하는 자는 자기가 왜 넘어졌는지를 모르고 평생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그 행위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아주 잘 믿었다고 하면서 죽을 때까지도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죽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자기가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고 넘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면 덜 슬픕니다. 그런데 자기는 선한 일을 하고 있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지만 한 평생의 신앙생활이 실상은 넘어져 있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서도 막연하게 자기는 의인이고 넘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 뭐 합니까?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알면 뭐 합니까? 아니 히브리어에 능통하고 헬라어에 능통하면 뭐 합니까? 자기가 넘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평생을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곁에서 보는 사람이 얼마나 안쓰럽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넘어져 있는 자에게 누군가 넘어져 있다고 가르쳐 줘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왜 받아들이지를 못하는가 하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넘어졌다고 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세상일이라면 차라리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어두움에 있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보고 또 기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대가 율법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가를 생각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만은 잘 믿고 있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시편66:5절을 보겠습니다. (구 848쪽)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엄위
엄격하고 위엄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사랑만 있으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는 것도 이 엄위하심이 있기에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엄격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법대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반포를 하셨습니까? 그것은 법대로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법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보았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누가 법대로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의롭다고 하셔서 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있는 그대로를 다 하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시고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엄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에 대해서 엄위하신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생각이 나는 대로 이때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고 저때는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법대로 하십니다.
제가 법대로 하신다고 하니까 율법대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 육체는 법대로 행하셔서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을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한번 죽어야 합니다. 이 한번 죽는다는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 한번 죽습니까?
하나님은 엄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한번 죽어야 합니다. 죄를 진 인생은 모두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한번 죽지도 않고 휴거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죽지 않고 휴거가 되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엄위가 훼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엄위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반드시 한번 죽어야 합니다. 휴거가 된다는 말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은 휴거를 왜 이야기를 합니까? 설령 종말의 때가 와도 휴거가 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을 정하셨다고 하는데 이 시대는 누군가에 의해서 휴거가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엄위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 죽음은 엄위입니다 그러나 그 엄위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또 그 영이 주님의 날에 부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들에게 엄위가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5:29절을 보겠습니다. (신 151쪽)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태복음25:30절을 보겠습니다. (신 44쪽)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넘어지는 자입니다
이 시대는 넘어지는 자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잠언의 말씀대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고 악한 일은 율법의 행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엄위와 인자입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히 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받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악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무익한 종이 누구입니까? 율법은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킨 사람을 주님께서 이 무익한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익한 종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살 때 무익한 일을 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율법을 아주 잘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는 율법을 지킨 그 일이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무익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 있는 자보다는 넘어지는 자가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믿음에 서 있는 성도가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서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비유로 말씀하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적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말씀 그대로 비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몇 달란트를 받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교회 안에서 생명을 얻었는가 아니면 생명에 대해서 무익한 일을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무익한 일, 율법을 지킨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갊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교회 안에서 대충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다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 정도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가 한 모든 일이 그러니까 율법을 지킨 일이 무익한 일이 되어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는 모두가 넘어져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3절을 보겠습니다. (신 279쪽)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한글개역성경이 정말 잘 번역에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엄위에는 만일이라는 단어를 안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자에는 만일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성경이 잘못 번역이 된 것과 보입니다. 만일이라는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다는 것을 이 단어 하나로만도 쉽게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있을지도 모를 뜻밖의 경우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한국 교회가 천만 명이라는 숫자가 있다 보니까 로마서를 보고도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지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이 만일이라는 말씀이 충분히 깨달아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모두가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 적은가 하면 있을지도 모를 뜻밖의 경우와 같이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두 가지를 놓고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둘 중에 하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쁜 의미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의미는 정말 있을지도 모를 뜻밖의 경우와 같이 아주 극소수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자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니까 교회 안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니까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13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강의를 통해서 이 사랑에 대해서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 성도님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 가를 알고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자기 행위로는 넘어져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넘어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다보니까 성경의 문자만 보고 이스라엘은 넘어져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온갖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확증해 나가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거의 모든 사람이 넘어져 있고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7:19절을 보겠습니다. (신 10쪽)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영생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영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런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우리 안에 있어서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넘어져 있으면 하나님의 인자가 그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를 않으면 찍혀 불에 던지 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자에 있습니까?
말로만 인자에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넘어진 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야 그 다음에 인자에 거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가 누군지도 모르면 자기가 넘어져 있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반드시 찍혀 불에 던지 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여 버렸습니다.
그들이 왜 가지 얼마가 꺾였는가 하면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넘어졌는가 하면 율법을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고 있으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육의 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생명이 탄생을 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을 하면서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마치 자기들이 생명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아주 쉽게 넘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로마서의 말씀만 보다보니까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는지를 모르고 자기가 인자에 거하는지 아니면 넘어져 있는지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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