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태복음11:25-30절을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 보는 눈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이제까지 배워왔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볼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성경을 자기가 이제까지 생각해 오고 있던 그대로 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다 보니까 이미 자기의 사상의 틀이라는 구조 안에서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내 생각과 지식을 비우고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맞추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네모입니다
그렇게 배워왔던 사람은 성경을 볼 때도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네모라는 것 안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를 받고 있고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지혜를 사모하면서 성경을 보기 보다는 이미 자기 안에 있는 구조의 틀 안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을 보아도 더 이상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교리입니다
내 안에 바른 교리가 서 있나 아니면 비 성경적인 교리가 자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 교리가 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상태에서서는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 교리라는 틀 속에 갇혀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다르게 말씀을 하고 있어도 자기가 아는 교리에 갇혀서 성경이 그 교리대로 보여 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참 오묘합니다.
알미니안주의로 해석을 해도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하고 또 칼뱅주의로 해석을 해도 또 얼마든지 해석이 됩니다. 또 성경을 가지고 유교의 사상 그대로 말씀을 해석해도 얼마든지 가능 합니다 도덕책이 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될 수도 있고 성화주의가 될 수도 있고 기복주의가 될 수도 있소 은사주의가 될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또 극단적인 종말론 자들이 성경을 보면서 스스로 연구를 하고 있고 어느 사람들은 자기가 메시야라고 하기도 하고 또 자기가 특정한 사도가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가 보는 성경입니다 똑같이 성경을 보고 있지만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지식에 따라서 성경은 다양하게 해석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사상들에게 벗어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번 그런 사상에 붙들리게 되면 그것을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는 가장 큰 두 가지 줄기가 있습니다. 바로 알미니안주의와 칼뱅주의입니다 이 두 가지 뿌리가 큰 줄기가 된다고 보면 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미니안주의에서 율법주의가 나오고 있고 성화주의가 나오고 있고 기복주의가 나오고 있고 은사주의가 나오고 있고 극단적인 종말주의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가지 사상들이 나오고 지금도 여러 가지 형태로 자꾸 분열을 하고 있습니다. 뿌리가 든든하면 절대로 이런 사상들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지만 뿌리가 약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싶으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싶으면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로교에 다니고 있습니까?
지금 현재 장로교는 칼뱅주의라기보다는 알미니안주의에 가깝습니다.
내가 지금 장로교에 다닌다고 칼뱅주의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다고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 장로교는 알미니안주의와 칼뱅주의가 아주 교묘하게 혼합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두 사상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고 서로에게는 이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이단이라고 합니까?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불과 6-70년 전만 해도 서로가 이단이라고 하면서 교리적인 싸움을 치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여러 가지 사상들이 들어오면서 서로가 혼합이 되었습니다. 아니 혼합이 되었다기보다는 장로교가 자기들이 학교에서 배운 칼뱅주의를 버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극명하게 다른 두 사상을 가진 교회가 어떻게 한 단체 안에서 서로를 정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상을 버리고 정말 성령의 감동을 받기를 간구하면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바른 진리에 설 수 있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진리에 대해서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이 하는 행위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그것을 잘 해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회는 거대해졌습니다.
서로 기본 교리가 다른 장로교와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이 하나로 합쳐져서 한 단체 안에서 서로의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때 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 서로 이단이라고 공격을 했던 교회들이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고 그 단체 안에 있는 것으로 자기들이 정통인 것처럼 주장을 하고 있고 사람들도 또 그렇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장로교가 칼뱅주의를 버렸습니다.
알미나안주의는 아직도 그대로 가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장로교가 칼뱅주의의 사상을 버림으로서 서로가 아주 잘 통합을 하면서 이제는 이단 싸움을 굳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칼뱅주의라고 하니까 마치 칼뱅이 만든 교리로 착각을 하고 교리 이야기만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초가 없이 어떻게 성경을 봅니까?
바른 기초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보아도 바로 해석이 될까 말까하는데 그런 기초가 없이 성경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특히 지방교회나 가정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교리를 이야기 하면 심하게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 지식은 버려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서 배운 것 역시도 이 세상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다시 구원에 이르기 까지는 정말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느낌이 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서 완전하게 내 가슴에 확신이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교회를 나온 것은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바로 그 홍해를 건넌 것을 가지고 세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육적인 세례만을 가지고는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두가 구름 아래서 홍해를 건넜지만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뿐 이었습니다
다 여기서 안주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세례를 바도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와 있으면서 다 거기서 안주를 하고 있고 더 이상 진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서 불기둥으로 보호를 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 수 있었지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모두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요단을 건너가야 합니다. 요단이라는 이름이 바로 죽음의 강입니다 죽음을 건너야지만 이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죽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칼뱅주의의 교리입니다 교리가 바탕이 되어 있으면 내가 죽기 싫어도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내가 살아 있으면 내 지혜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 저 사람은 대단하고 느끼는 그들에게서는 하늘의 복음을 숨겨 버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꼭 그렇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사도 바울만 해도 그 당시에 세상 적으로는 지혜가 넘치고 슬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버리게 해 주셨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혜와 슬기를 깨버리게 해 주시고 난 후에 사도 바울이 복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세상 적으로 볼 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숨겨 버리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있고 신뢰하는 그 목사 역시도 하나님께서 숨겨버리셨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분별이 안 됩니다
모태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일지라도 사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오직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이 자기 안에 임재 해 있어야 가능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들을 속일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속은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를 하지만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구원을 받을 사람이 더 적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지혜롭지도 못하고 슬기롭지도 못한 그런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도저히 그들에게서 진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기존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나타날 수 없고 그것이 비워져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누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시고 항상 그 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을 토해 검증을 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에 들어왔다 해도 그것을 분별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아버지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선택을 하느냐 유기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철저하게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하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도 있지만 자기들의 뜻도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 성경적입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와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반드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폄하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온전하게 인정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믿음에 대해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이 걸림이 될 수도 있고 또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면 절대로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인정을 하면 그 멍에가 쉽고 가벼운데 그것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순간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지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 하건 못 하건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고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지고 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입니다
내가 천국에 가고 싶어도 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천국에 가기 싫다고 해서 안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하기 보다는 내가 잘해야 갈 수 있고 또 내가 잘 못하면 안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자기가 침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인은 아버지입니다
누구에게 주는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뜻을 거기에 포함을 해서 자기들의 생각대로 자기가 잘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고 또 자기가 잘못하면 그것을 빼앗으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가로막으면서 방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칼뱅주의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거절한다고 해서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일방적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통제가 안 됩니다
자기들이 시키고 싶은 것을 시켜야 하는데 이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뿌리 깊게 박혀 있으면 자기들이 시키고 싶어도 그것에 대해서 안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이것을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이야기 하면서 방종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교묘한 말인가를 성경을 바로 알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꾸 구속을 시키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 불가항력적인 은혜 하나님의 주권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으면 사실 구속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것을 강하게 인정하게 되면 사실 그 다음부터는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성도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으면 방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은혜가 더욱 크기 때문에 복음의 일을 하는데 더욱 수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방종 합니까?
그리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까?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고 오히려 자기가 받은 은혜가 더욱 크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힘을 쓰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안타까워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누가 더 충성을 하겠습니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 달란트 빚진 자 중에 누가 더 충성을 하겠습니까? 두 사람이 똑같이 그 빚을 탕감 받았다면 당연히 그 은혜가 더욱 큰 사람이 충성을 더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은혜가 너무 커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복음을 전할까 늘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행위로 시키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교인들은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자기가 칭찬을 받고 싶어서 더욱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보기에는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입니다
내가 무엇을 조금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보면서 착각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설령 교회를 수십 개 건축을 하고 또 수만 명을 교회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해도 그것은 여러분의 뜻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을 안 받으시겠다면 여러분이 한 것은 한 마디로 말씀을 드려서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주님께 주셨습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셨고 또 주님은 주님의 주권에 의해 구원하실 자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냥 되어 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바로 소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정말 바라고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있기 길이 없기 때문에 지금도 역시 주님께서는 소원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을 성경을 많이 보고 또 신학을 공부해서 알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많이 보아야 하고 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선생이 되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이 세상 책이 아닙니다.
이 세상 책은 자기가 열심히 공부를 하면 어는 정도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백 독을 한다고 해서 알아질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이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있고 또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로 전할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기도 하고 있고 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늘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소원을 해 주시면 그가 어린아이와 같을지라도 주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나타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는 나와 있지만 예수님께 나아가려 하기보다는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기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력을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어지는 것임에도 자기가 노력을 해서 얻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그 짐이 무겁겠습니까? 그런데도 사상에 빠져 있어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서도 그것을 가볍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가를 미리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뜻을 주님께서는 인정을 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항을 하고 있고 이런 말씀을 드리면 공격을 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노력을 하고 있는 그 행위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기 보다는 그 주권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기들의 생각도 포함을 시키려 하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면 쉽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너무도 쉽고 가벼운데도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자기들의 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의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면 사실 내가 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너무도 가볍고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왜 쉽고 가볍습니까?
시편17:8절을 보면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또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감추어 두셨기 때문에 그렇게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데 내가 어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으로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그 짐이 무겁고 어렵겠지만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아주 쉽고 가볍습니다.
주님도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옳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옳은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하나님의 뜻을 거저하려고 꾀를 내고 있습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면 쉬운데 자꾸 자기 생각을 거기에 포함을 시키려고 하다 보니까 눈이 가려져서 도무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인정하세요.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부터 시작입니다
성도는 철저할 정도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축소시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성경을 볼 때 주님께서 그 소원하는 자에게 하늘의 것을 나타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도 주님이 소원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있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소원이 여러분에게 임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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