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9:9절을 보겠습니다. (신 191쪽)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말씀은 이사야9장6절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을 한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 인생은 과학적이고 또 감성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실제로 보고 근거에 의해서 믿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들이 생각을 하는 지혜적은 사고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이 우주 안에는 수많은 피조물들과 물질의 구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우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생인 피조물들이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하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보이지 않은 형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안다고 해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 유대교인들은 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교리가 있고 또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교리대로 성경을 보고 있고 율법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교리를 지키지 않는 주님은 이단으로 정죄가 될 수밖에 없고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서 죽여야만 하는 존재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어떻게 이루셨는가를 알 수는 있지만 본질 그 자체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피조물들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보고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는 일을 증거를 받고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를 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 발달을 하고 있었고 인생들은 그 철학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고소를 해서 십자가형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로마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벌써 종교인들이 선동을 해서 돌로 쳐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 성경을 안 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도 분명히 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철학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방인들 역시 문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문자 그대로 다 지키고 있고 이방인들은 문자 그대로 지키면서 자기들에게 성전이 없으니까 어느 기준도 없이 자기들의 종교에서 지키고 싶은 것을 정해서 지키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감동을 해서 기록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은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맞고 신약 성경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는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시고 난 후에 하늘에 올라가시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그들이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서 기록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지만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마치 인생의 철학으로 이해를 해서 정의를 내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그것을 물리적으로 정의를 내려서 말할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신데 그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보고 우리가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고 있고 그것을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성경은 진리로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역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도 모르면서 그저 성경에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말씀을 보고 자기들에게도 성령이 오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다시 말씀을 하지만 창조하신 일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율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일을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입니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고하신 율법과는 반대가 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문자를 아는 유대인들에게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방자히 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다른 신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그 자체로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고 말씀을 하는 것은 마치 다른 신을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들렸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지금 유대인들이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이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니까 자기 땅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면 율법에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철학으로는 마땅히 죽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있는 말씀을 우리 인생들의 법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학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성문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법을 자기들이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있는 말씀을 우리 인생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의 철학으로는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에서 문자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방인은 헬라 사상의 철학에 따라 삼위일체라는 것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성자라고 하면서 성경에서도 증거를 하지 않는 것을 자기들이 감동을 받는다고 하면서 믿는다고 하는 샤머니즘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목적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그런 성도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일을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고 우리가 얻은 생명이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말씀합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데 바로 그 분이 참 하나님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들의 철학으로는 성경을 보면서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인들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문자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못하니까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고 있고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못하니까 당시 철학적 지식에 따라 삼위일체라는 것을 만들어서 믿는다고 하고 있고 이 삼위일체라는 교리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13:3절을 보겠습니다. (신 170쪽)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많은 말씀들이 있고 두껍기도 하고 또 어려운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비유와 예표 등으로 말씀을 하다보니까 우리가 깨닫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서로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피조물과 피조물입니다
우리 지구에서도 수많은 피조물들이 있습니다. 그 피조물들끼리도 우리는 의사를 소통할 수 없고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특히 벌레 같은 경우에는 우리 인생들과 소통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그 피조물 중에 한 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런 인생들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를 벌레라고 구더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피조물간의 대화가 아닙니다.
피조물과 피조물도 어려운데 창조주께서 선지자들로 성경에 계시를 해 주시고 있고 우리 피조물이 태초에 있는 말씀대로 창조주께서 하신 일을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 믿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역사를 하게 하심으로 해서 영생을 얻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들입니다
자기들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같은 피조물이지만 지적인 능력이 없고 말을 할 수 없는 생명체들이 많다보니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인생들이 자기들이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특히 성경에 특별하다는 말씀이 선택했다는 말씀이 있다 보니까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하니까 마치 자기들이 성령을 받으면 거의 창조주와 같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속된 말입니다
맞장을 뜬다고 합니다. 그저 알량한 지식이 있는 것으로 이제는 하나님과 맞장을 뜨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문제가 되었던 어느 종교인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기 존재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도 자기 존재를 망각하니까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떠들고 있습니다.
지금은 현대화가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어렸을 때 경험이 있습니다. 화장실이 다 밖에 있었고 여름에는 구더기가 때로 너무 많아 위에까지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때는 생활환경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변소를 사용을 했습니다.
같은 피조물입니다
그런데도 그 구더기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아니 생각하고 말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것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더기가 저에게 너 누구냐고 묻는다면 어떻겠습니까?
피조물과 피조물입니다
그 관계에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우리 성도들은 믿고 있습니다. 우리 언어로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우리 성도는 그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지를 않고 있지만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대화가 안 됩니다
아니 가르쳐 주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 변소에 갔는데 구더기가 우리에게 너 어디서 왔고 너 누구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이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되겠습니까? 구더기는 우리가 사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명을 해 줍니다.
그것을 깨닫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수도원이야기를 했지만 수도원에 가서 죽을 때까지 있어도 제가 설명을 하는 말을 구더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도 구더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을 해 주어야 구더기가 믿는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더기가 깨달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과 피조물의 관계에서도 그런데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는 어떻겠습니까? 인생들이 너무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인생들 간에 지적인 능력이 있고 문자를 보고 지식을 배우고 하다보니까 자기들이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으로 큰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우주는 피조물입니다. 그 피조물도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추측을 하고 있고 과학적으로 이럴 것이다 하는 정도의 정의를 내리고 있고 우리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성경에서 보면 알겠지만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졌고 하늘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 내려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저는 상상이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을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설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의 언어로 설명을 하고 정의를 내리고 이해를 시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어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는 그 비유의 말씀을 듣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이 역사를 하면 우리가 그 실상을 보게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창조주의 세계를 자기들이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자기들이 갔다 왔다고 합니다. 또 주님과 대화를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또 간증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까? 우리 언어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간증을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니까 믿음으로 역사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믿음을 사도 바울은 비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아는 모든 것은 피조물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이 피조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차원의 생명체입니다
4차원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4차원의 생명체가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설령 듣는다 해도 3차원의 생명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도무지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차원을 뛰어 넘는 피조물의 세계와 창조주의 세계를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러면 먼저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누구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하는 말씀을 알아야 하고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 본질을 알 수는 없지만 비유적으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그렇구나. 성경이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가르쳐 주시는구나 하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지를 않습니다.
피조물들이 그것을 알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정의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성경이 왜 믿음, 믿음,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그분의 말씀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서 믿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를 합니까?
물론 선지자들이 성경을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역사를 하기 위해서 연구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연구를 하고 있고 그렇게 연구를 한 것을 자기들의 교리로 만들어서 정립을 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믿음으로 역사를 해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사람의 철학적 정의로 고상하게 교리로 만들어 놓은 곳이 바로 종교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빌라도입니다
그가 주님께 와서 다시 묻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대교인들로부터 주님을 구해서 살려주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막아서도 안 되고 방해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어디로서냐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으면 내 종들이 싸워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나는 네 말과 같이 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빌라도에게 고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빌라도에게 우리의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이다.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하니까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인 로마의 총독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을 하니까 자기가 재판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고 있습니다.
너는 어디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내가 말을 한 것과 같이 나는 왕이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지적인 사람이고 두려운 마음에 너는 어디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당연히 두렵습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전혀 두렵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네가 어디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나라가 어디에 있고 너는 어디의 왕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하신다 해도 빌라도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이제 유월절을 먹은 것을 기념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만 알고 계십니까? 주님만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아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주입니다
피조물의 세계입니다. 주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입니다.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을 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해서 그 모든 구속의 일을 다 이루시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영으로 부활을 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도무지 못 알아듣습니다. 우리 우주는 피조물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시는 곳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피조물의 세계가 어디까지고 어떻게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서 정의를 내리려고 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어디로서냐?
주님께서는 인생의 언어로 설명하실 수도 없고 설령 설명을 하신다고 해도 빌라도는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고소를 하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와서 다시 묻고 있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다 먹이시고 난 후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비록 우리 인생의 형체를 입고 오셨지만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설령 내가 하나님이라고 빌라도에게 말씀을 하신다고 해도 그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주님을 십자가가 못 박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요한복음13장에서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신다고 말씀을 하셔도 그들 역시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3:13절을 보겠습니다. (신 146쪽)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빌라도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면서 고소를 하니까 비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가 두려워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은 그 기본 철학이 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빌라도 역시 자기가 재판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이 세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을 죽이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면 자기들의 법대로 보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주님께서 방자히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을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그저 인생의 철학으로만 보기 때문에 자기들이 자기 땅에 나타내신 독생하신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려고 하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입니다
계속해서 강조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시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셔야지 만 주님께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 일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인생들은 이미 종교의 교리에 포승으로 묶여서 성경을 보는 눈이 소경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저 문자를 보고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영생을 얻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했지만 인생의 철학으로는 이미 교리에 포승으로 묶여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심위일체를 반대를 하고 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을 해도 성경에서 그렇게 증거를 하고 있는데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종교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교리에 확증편향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거기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 돌감람나무를 찍어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만큼 우리 인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빌라도는 그 말을 듣고 너는 어디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소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누군지를 그 의미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군지를 전혀 모르고 있고 그들은 당시 헬라 사상에 의해서 삼위일체를 만들었고 성자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너는 어디로서냐
주님께서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는 일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태초에 있는 생명을 얻는 일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고 주님께 너무 놀라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철학입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니고데모와 같이 어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묻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인생의 철학으로 알지 못하는 일을 말씀을 하면 그저 이단이라고 쉽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거듭나는 일에 대해서 모르는 그에게 주님께서는 책망을 하시면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제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렇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으로 부활을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셔야 우리가 거듭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하늘에 올라가시는 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으로는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너는 어디로서냐
주님은 창조에서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는 참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방의 재판관인 빌라도에게는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것을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입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주님께서 어디로서 이신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는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자를 아는 것으로 종교 안에서 온갖 율법의 행위를 하면서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셨고 이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초입니다
주님이 어디로서 오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에서 보면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말씀도 인생들은 믿지를 않고 있고 자기들이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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