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6:4절을 보겠습니다. (구 89쪽)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언약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가는 언약이 있다면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언약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이스라엘과 한 언약은 아니지만 그들의 조상을 통해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들에 대해서는 정말 한 시간도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두 가지 언약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해 주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는 그 언약이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하셨습니까? 어느 민족도 아닌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시고 그것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물론 그 언약들은 다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비유입니다. 실제 문자적인 언약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문자적인 언약들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를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믿지를 못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31:24절을 보겠습니다. (구 312쪽)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듣고 자기들이 다 지켜 행하겠다고 언약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은 모세가 낭독하여 들려 준 율법을 자기들이 다 준행하여 지키겠다고 언약을 했습니다.
누가 율법을 받았습니까?
이 세상 어느 민족도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율법을 반포를 하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그 율법의 의미를 모르고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세우신 목적을 몰랐습니다. 도리어 그 율법을 자기들이 지키겠다고 하다가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저주를 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지만 이스라엘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율법입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세우신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그 율법을 자기들이 지키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4:20절을 보겠습니다. (신 148쪽)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배입니다
기독교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배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먼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누군가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먼저 자기가 예배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 여인에게 주님께서 예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예배를 잘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입니다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가 예배를 하려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배하는 자가 없어서 다시 자기 나라로 돌라가는 중에 성령이 빌립에게 감동을 해서 이 내시를 만나서 예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에게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예배를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하는 자가 없었다고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자를 찾고 계시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역시 예배를 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지금 기독교를 판단을 한다고 해서 예배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배를 해야 합니까?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와 같이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가 얼마나 먼 거리를 예배하러 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온다는 것은 하루 이틀에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안전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예배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 지금 이 시대는 예배를 하는 자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수많은 예배를 드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가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배가 있으면 뭐 합니까?
예배를 어떻게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종교적인 형식에 맞추어서 하는 것을 예배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율법적인 제사에 불과합니다. 예배와 제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모두가 제사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의 대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단순히 대화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과 예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남자를 만나서 살아가고 있는 이 여인이지만 예배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예배를 원했는가 하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하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 이 여인의 마음을 아시고 주님께서 이 여인과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예배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있는데도 예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 역시 자기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예배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예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신앙생활을 알기 위해서 아니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0:2절을 보겠습니다. (신 33쪽)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 데나리온의 비유에 대한 말씀은 이미 아카데미 강의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아카데미 강의를 보면 되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포도원에 일군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시고 그들에게 일을 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이방인들이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주인은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해서 한 데나리온씩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더 받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자기들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주인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데나리온입니다
일을 한 품삯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데나리온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과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고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데나리온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일을 해서 가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주인과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것을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이스라엘과 약속한 데나리온을 주고 그들을 쫓아버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자기들의 것을 받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중 온 자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주인이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믿고 일을 하고 난 후에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나중 온 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데나리온을 받았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일한 삯의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에게는 약속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 데나리온은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 차별이 없는 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이스라엘과 같이 처음 온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차별이 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일을 많이 해서 자기들이 일한 삯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먼저 온 자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해서 삯으로 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차별이 없는 은혜를 따라 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먼저 들어온 자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교회 안에서 그 삯을 다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먼저 온 자는 자기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먼저 온 자가 누군가 하면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나중 온 자는 하나님을 아는 일을 했습니다. 먼저 온 자는 자기 행위로 교회 안에서 일을 했고 나중 온 자는 하나님을 아는 일을 했습니다. 같은 약속을 받았지만 어떻게 일을 하는가에 따라 그가 먼저 온 자가 되어서 버림을 받을 수 있고 나중 온 자가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있어서 그들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저주를 받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먼저 온 자가 되어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이 세상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상입니다
이 세상 교회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 가서 상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천국에 가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큰 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그 상을 이미 교회 안에서 다 받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받고 있는 그 상으로 천국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74쪽)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저희는 이스라엘입니다
고린도전서10장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왜 저주를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지를 못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하고 나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까?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그렇게 했어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저희가 간음을 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저희가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경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기독교인들에게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가 언제 우상숭배를 했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를 모욕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저를 공격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당한 일을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전혀 경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고 자기들이 간음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고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이스라엘과 같이 먼저 온 자가 되어서 원망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입니까?
아니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한 일이 우리가 문자적으로 보고 있는 나쁜 일입니까? 그것을 이 시대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렇게 하다가 모두가 죽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라는 교회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뿐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어떻습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 바알과 아세라를 이스라엘만 섬기고 있습니까? 그들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고 이 시대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지 않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잘못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알을 섬겼다면 이 시대 역시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다만 지혜가 없어서 자기들이 어떻게 바알을 섬기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세라를 섬겼다면 이 시대 역시 아세라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성경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왜 봅니까?
물론 그 안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경계를 무시하고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만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래서 그들만 마귀의 자식들이 되었습니까? 주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마귀의 자식들이 되었다면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마귀의 자식들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그 결과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인들은 십일조를 내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있고 주일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믿음이라는 말만 하면 믿음이 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3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찐저 바리새인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7번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주님께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그 말씀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식하지 않고 있습니까?
외식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나타나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외식하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경계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나쁜 의미로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말씀들을 이 시대 기독교 안에서 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아무리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어도 그것이 풀어지지가 않아서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외식합니다.
어느 정도 외식을 했는가 하면 식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을 손을 씻지 않으니까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율법을 어겼다고 합니다. 아마도 제가 목사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기도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하면 그들은 저에게 목사가 맞느냐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스라엘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까?
제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면 무슨 봉창 두드리는 말을 하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분명히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 않고 있는데 우리에게 왜 이상한 말을 하느냐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우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평생을 우상숭배하면서 살아가다가 사망에 이르는데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경계입니다
그러나 경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방의 교회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어리석어서 그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성령을 받아서 지혜가 있어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두 짐승입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짐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가 역시 짐승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환상을 통해서 보여 주셔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두 짐승이 누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들이 짐승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한 일을 지금 이 시대 교회가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그런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고 그저 문자적으로 보면서 자기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5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조상들도 저희의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아들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누군가 하면 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큰 자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갈데아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 조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늘의 뭇별들을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조상을 둔 이스라엘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히브리서11장을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도 족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중이 있습니다. 자기 조상 중에 왕이 있었거나 또는 영의정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조상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얼마나 자랑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조상 중에서 누가 있었고 우리 조상 중에서 어떠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자랑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모든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아주 적은 숫자를 빼고는 모두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그런 조상을 두었다는 것은 조상을 따라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조상이 뛰어나면 그 후손도 조상을 따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런 조상을 두고도 이스라엘은 조상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후에 디모데나 디도 같은 사람들이 복음의 일군으로 직분을 맡은 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사도들만 해도 모두가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율법의 행위를 하다가 저주를 받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있어서 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그 동안에 이방인들에는 거의 복음이 전해지지가 않았습니다.
로마서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39쪽)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조상들도 저희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도 저희에게 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족보를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와 누가복음에서 족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족보를 따라 나셨습니다.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아직 정혼을 하지 않은 마리아에게서 주님이 성령으로 잉태가 되어서 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족보를 따라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에 선지자들로 미리 약속하신대로 그래도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이스라엘의 족보를 따라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실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수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 족보를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 조상들의 족보를 따라 오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당연히 성경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을 하셨으니까 믿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영접하지를 않았습니다. 왜 영접을 하지 않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이루시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모든 성경을 다 육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역시 영의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육적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족보를 따라 오셨어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지금은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율법을 지키는 일을 버리는 것이 선행이 되어야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5: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94쩍)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지만 또 이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교리에 모두가 묶여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만들고 놓았습니다. 아니 감히 그런 생각조차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 말씀이 기초가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이 한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전에 아타나시우스라는 사람이 만든 교리를 가지고 삼위일체라는 이상한 신을 만들어 놓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느 누가 삼위일체라 해도 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삼위일체를 믿는다 해도 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없고 유일하신 하나님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다른 위의 아들입니까? 성경 어디에서 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은 다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입니다. 성자로서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여자의 몸을 빌어서 나셔서 아들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종교는 참 하나님이신 분을 성자라고 하면서 다른 위를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른 위 자체가 이미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이 이사야9장6절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들로 인정이 되셨다고 하면서 확실하게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입니다
왜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라고 합니까? 아들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기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다보니까 가장 기초가 되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신을 섬기면서 영생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삼위일체라는 교리에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입니다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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