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83-1,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윤주만목사 2024. 12. 29. 08:02

로마서9:3절을 보겠습니다. (251)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큰 근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으며 복음이 없었을 때는 이런 근심도 하지 않았고 또 마음에 고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이제 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라면 사도 바울에게 이러한 근심과 고통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을 받아 나름대로는 모두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복음을 깨닫고 보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정작 내 동족에게는 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을 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몰랐을 때는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고 또 나 역시도 그런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는 저주를 받을 다섯 처녀가 있고 축복을 받을 다섯 처녀가 있습니다. 이 다섯이라는 숫자도 비유지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숫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모르고 자기가 그래도 다섯 안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몰랐을 때입니다

다섯 처녀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염소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이를 갈며 울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모두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니까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아서 잘 알겠지만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큰 근심이 있고 마음에 그치지 않은 고통이 있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기독교라는 종교인으로 하여금 우리가 똑같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이방에 기독교인입니다. 이 둘이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유대인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이 시대는 성전이 없어서 제사를 안 드리고 있습니까? 사실 이 두 가지 말고는 거의 같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역시 복음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고 율법을 지킨 것과 이 시대 복음에 복종치 않은 것이 같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초대교회는 낫습니다.

그때는 주님의 제자들이 있었고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 사도행전에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난 후에 성령이 오실 때 120여명이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 120여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삼천 명이 회개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복음이 전파가 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교제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는 역사보다 더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다른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할 수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꿈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큰 은혜이고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빤히 압니다.

복음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될지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소가 푸주로 가는 것과 같이 소년이 끌려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가 푸주로 가면서도 모르는 것과 같이 음녀가 되어 있는 교회 안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 잘 압니다.

그들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모른다면 이런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마음입니다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다고 하면 낫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특별한 형벌을 받지 않으니까 그나마 마음이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야 하는 그들이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끌고 들어가려고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기어이 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들을 구원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심정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자기 혼자나 지옥으로 들어가지 왜 다른 사람까지 그렇게 열심을 내서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안타깝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마치 큰일을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의 형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늘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이 아니라 자기 형제를 위해서 그렇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전하고 있는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단호합니까?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는 성경에서 이 복음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천국을 사모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자기 골육과 친척을 생각하면 큰 근심이 되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솔직히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은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과 같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간절한 마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원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음은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고통이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기독교를 보면 화가 치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마음까지는 들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제 한계를 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입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골육과 친척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이 복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그치지 않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을 지라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저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자기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 해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저주를 받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입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는 것도 저주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저주는 그런 저주가 아닙니다. 단어를 같이 쓴다고 해서 마치 그 저주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갔다 왔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사도 바울도 말씀을 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천국을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 상상이 안 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어느 정도로 희미하게는 알겠지만 사실 상상이 안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천국입니다

그곳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곳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에 참예를 하는 자가 되면 하늘에 있는 천사도 우리의 판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가지 못한다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이 받는 저주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로 표현이 안 되는 상상할 수 없는 그 천국을 가지 못하는 것을 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복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동족이 그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내가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시대는 천국과 지옥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천국에 못 간다고 해서 그가 지옥에 갑니까? 그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소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못 가는 것은 저주입니다

지옥에 가서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자기가 자기 골육과 친척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멸이 된다 해도 원하는 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있는 성도만이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옥에 가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주를 말씀을 하니까 지옥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너무도 좋은 곳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그곳을 갔다 왔습니다. 그곳에 가지 못하는 그 자체가 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주를 받을지라도 내 골육과 친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 세상은 누구나 돈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누가 돈을 싫어하겠습니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10억을 약속을 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에게 오면 10억을 주겠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잘 몰라서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가 무서운 사람으로 잘못 알려져서 못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실감은 나지 않지만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설령 그 돈을 받지 못할 찌라도 내 아들이 그 돈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양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자기 아들에게도 양보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저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저주를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저주와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저주는 다릅니다. 내가 설령 천국에 가지 못할지라도 내 골육과 친척들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이 얼마나 영광이 넘치는 곳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천국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영의 일을 모르고 내세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이 말씀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저주를 말씀하면 지옥으로 생각하는 그들은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이 말씀은 내가 설령 천국에 가지 못할지라도 내 골육과 친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받은 모든 것을 다 포기를 하더라도 내 골육과 천척들이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인 표현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가지고도 못사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이 지구를 다 내 것으로 만들었다 해도 천국은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이 지구가 아무리 좋다 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천국을 갔다 왔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모든 것을 걸고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희미하게라도 알고 있어야 사도 바울이 어떤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도 모르고 이 시대 교인들이 이 말씀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일만 달란트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포기를 한다 해도 내 혈육과 친척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과 같이 특별한 마음을 주시지 않은 사람은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방의 사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골육과 친척을 얼마나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설령 천국에 가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32:32-33절을 보겠습니다. (133)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모세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인도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인도자였다면 사도 바울은 이방의 인도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세와 같은 인도자를 얼마나 바랐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가 바라는 모세가 고소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모세가 고소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반포한 율법이 너희를 고소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방에 증인이 되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내려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내려오지를 않으니까 백성들이 아론에게 모세가 내려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모세가 죽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론이 신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를 각을 떠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진노를 하셨습니다. 모세가 내려와서 하나님의 편에 설 사람을 부르고 나서 그들로 이스라엘을 도륙하라고 해서 레위 자손들이 그 형제를 친척을 삼천 명을 죽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백성은 목이 곧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이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시자 모세가 하나님께 구하여 이 백성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돌리지 말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합의를 하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와 하나님이 합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원하는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가 얼마나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보아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하나님께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간청을 하지만 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라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봅니다.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 까지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천국을 사모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를 가나안에 들여보내시지 않고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 모세입니다

그가 얼마나 천국을 사모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범죄를 해서 금송아지를 각을 떠서 만들어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려고 할 때 모세가 내 이름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지우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몰랐습니다.

아니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의 장년이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사모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는가를 신명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모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하면서 우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진멸을 당해야 하는 백성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십계명의 처음 계명을 어긴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간구합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주의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모세입니다. 그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형대로 성막을 만들게 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방의 사도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이 똑같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의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천국에 못 가더라도 이 백성만큼은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곳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지옥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지옥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곳을 누가 가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거짓 선지자가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요한계시록21장에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은 모두가 다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과 거짓 선지자가 들어가는 불과 유황 못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구더기도 죽지 않은 곳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음부의 고통 중에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누가 들어가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저주를 받는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불쌍합니까?

세상 사람이 불쌍합니까? 그들도 물론 정말 좋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불쌍합니다. 그러나 진짜 불쌍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말 합니다

차라리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거짓 선지자들이 들어가는 곳에는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달라고 했고 사도 바울 역시도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진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이 지금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저주를 받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일이라면 모세나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객기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옥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들이 지옥에 가는 것이지 우리는 이미 성경에서 악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이 취소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설령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세상에서 무신론자로 산다 해도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곳을 가지 못하는 그 자체가 저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같은데 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을 저주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 역시 저주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방에 사도로 세움을 입고 이방에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만은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절대로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내 골육과 친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 골육과 친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그냥 하는 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정말 진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천국도 알고 있고 지옥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면서 객기를 부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9:4절을 보겠습니다. (251)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데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삭은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시고 가나안 일경으로 흉년이 들게 하시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모두 애굽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400년을 살게 하시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모르는 왕이 나오면서 이스라엘이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4:22절을 보겠습니다. (87)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400년 후에 가나안 일경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그 조상들로부터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무슨 뜻입니까?

승리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이겼다고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 이긴 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어떻게 장자가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장자가 될 수 없었지만 야곱이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은 저희는 하나님의장자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실제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이방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43:1절을 보겠습니다. (1019)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이 있습니다.

8장에서 말씀하는 양자가 아닙니다. 지금 육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육적으로 그들의 신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영적으로 우리 성도들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육적으로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장자로서 이 세상을 살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양자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육의 이스라엘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살았을지라도 분명히 육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는 복음이 계시가 되지 않았지만 육적으로는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10:12절을 보겠습니다. (278)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영광이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섬기고 싶어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해 주심으로 해서 그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사람들이 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노아 때에 홍수를 통해서 사람들을 진멸을 했습니다. 그리고 노아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노아 홍수 후입니다.

그들은 홍수를 경험하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언어가 같아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달리 하시고 그들을 지면에서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스스로 더듬어서 하나님을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더듬어서 찾기를 원하셨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악만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를 왜 부르셨습니까?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육적으로는 지금 있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들을 부르시고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짓게 하시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분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분이 계시가 되어서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인생들에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러나 그 영광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백성 전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잘 몰랐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영광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을 통해서 언약을 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next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