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48쪽)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 피조물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를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이 구원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모든 성경이 우리 피조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망입니다
간곡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담입니다
꿩 잡는개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이 마음에 와 닫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면 뭐 합니까? 아니 모든 사람이 나를 성도라고 하면 뭐 합니까?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던 바리새인들은 마귀의 자식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강도짓을 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흠이 잡히지 않게 가능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고 있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그렇게 되는가 하면 여러분의 눈으로 이성으로 정말 성도와 같이 산 그 사람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피조물의 소망입니다
왜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육신은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생이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소망이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그들을 보면 간곡하지가 않고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입니다
다른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바로 이 영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영생은 자기들이 당연히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이제는 이 세상에 것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면서 간곡히 바라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그것이 발람의 기도와 같은 불의의 삯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교회 안에 있다고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의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지키고 있는 그것도 율법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면 그는 종으로 살다가 반드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피조물들이 이 소망을 가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조물들이 자기와 함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질의 부자 뿐 아니라 율법의 의로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되기를 바라고 있는가 하면 너무 간곡해서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영생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그들이 이 세상의 것을 위해서 간곡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다른 소망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우리 피조물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고서도 다른 것을 가지려고 하고 있다면 그는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영생이라는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을 가졌는데도 그 가치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미련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주를 보아도 그 가치를 모르면 길가에 있는 돌멩이와 같이 취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그것은 받은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그 가치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아는 성도는 그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가 안 보이면 그 가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영생입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만약에 이 영생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세상에서 불쌍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친히 우리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고 있습니다.
처음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 피조물들에게 이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그가 자기 육체의 것을 하나님께 바라다가 사망의 길고 가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 기독교는 율법주의와 기복주의에 너무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을 짓기 전부터 우리 피조물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피조물을 지어서 허무한데 굴복케 하셨는가 하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생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보이는 것이었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참 잘 믿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구원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영의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생에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피조물은 썩어 없어진 후에 주님이 오셔서 잠자는 자들을 깨워 부활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 후에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세의 일입니다. 이것이 보이는 것이라면 그리고 사람의 이성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참 좋겠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말씀그대로 영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영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 이 영의 생명에 있는데 이것이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도무지 믿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모든 교회가 보이는 것을 쫓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가 않기 때문에 피조물들은 보이는 당장의 것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부 거짓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천국은 우리 인생이 볼 수도 없고 갔다 올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갔다 왔다고 하니까 자기도 갔다 올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는 미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갔다 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것을 육적으로 환상이나 꿈으로 본 것에 불과합니다.
천국입니다
내세는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보았다 해도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천국에 대해서 다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알아들 수 있는 언어, 아니 사람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주님은 천국에 대해서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느낄 수도 없고 체험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체험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하고 있는데 성경에 누가 체험을 했다고 말씀을 하는가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종교의 집단 최면에 걸려 그 말이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것을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 눈으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보이는 소망을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응답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외에 것을 가지고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다 마귀에게 속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는 집단으로 최면이 걸려서 보이는 소망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에서 보이지 않는 영의 일을 깨닫지를 못하면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에 두어야 하는데 보이는 것을 소망에 두면 그것으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겉 사람이 아니라 속에 태어난 생명을 보고 있습니다.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내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보려 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이미 진리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두 짐승에게 경배를 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정말 이 보이는 것에서 정과 혈을 떼어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눈으로 보는 그것으로 다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아주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인데 육신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것을 끊어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안개입니다
얼마나 잠깐 동안 보이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의 생명은 영원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인생무상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1: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24쪽)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모든 구속의 일을 마치시고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왕으로 계속 있을 것을 바라면서 근심을 했습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그 형상을 제자들은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그들은 주님에게 자기들의 왕으로 계실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아무리 제자들이라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왕으로 계십니다.
물론 주님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 이방인들은 소망이 없어졌습니다. 아니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소망인가 하면 보이지 않는 소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영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 그리고 썩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소망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천국입니다. 우리가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어떻게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하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를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보이지 않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양자의 영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은 이미 다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는 그런 행위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이단들은 어떤 보이는 장소를 마치 성지와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곳에서 자기들이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하면서 종교에 빠져 그 땅을 사고 있습니다. 정통이라는 교회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보이는 아세라를 크게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타락을 했으면 자기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특별 새벽 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간곡하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것을 바리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어서 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보는 것을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서 탐욕을 부리면서 그것에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보는 것을 바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그 사람은 반드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보는 것을 누가 바라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초대교회에 성도들은 보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눈으로 보는 것을 너무 많이 바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 청년들은 찬송가에 미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르면서 자기 마음에 도취가 되어서 마치 은혜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찬양대에 서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배 보는 것입니다.
찬송가 보는 것입니다. 기도 보는 것입니다. 헌금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더 잘 보이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그런 것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찬양대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예배를 하게 되면 그는 견디지를 못하고 나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보는 것이 소망이 아닌데 이 시대는 너무 보이려고 하고 있고 그것이 자기 영혼을 죽이는 일인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보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설령 그 보이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과 같다 해도 그것을 보지 않고 있습니다.
보는 것 바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을 바라다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성도는 그런 보는 것을 따라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이 시대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미혹하려면 어떻게 하든지 잘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할 수 있다면 더 크게 그리고 화려하게 꾸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을 너무 쉽게 믿어버리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전혀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더구나 거짓 천사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 하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자기들의 눈으로 보면서 그것을 참이라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교회도 시장의 논리에 있습니다.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어야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나라 국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영어 예배를 한다고 하고 있고 그 안에서 자기들의 지식을 자랑하느라 되지도 않는 히브리어를 배운다고 헬라어를 배운다고 하고 있습니다. 다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보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참이다 거짓이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누가 보는 것을 바랍니까?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가 양의 옷을 입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기 위해서 양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양의 옷을 보고 다 미혹을 당해서 사망의 길로 끌려가면서도 자기들이 천국에 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5:7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 시대 기독교는 보는 것만 바라고 있습니다. 믿음의 비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행위를 보고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보는 것에 모두가 취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입니까?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보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보는 것임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우리가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교회는 서로 더 잘 보이려고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은사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은사라고 하면서 그것을 보기 위해서 모두가 마법에 걸린 사람들과 같이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기독교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은사라고 하는 행위는 실상은 은사가 아니라 종교에서 나온 샤머니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다 보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한다고 하면서 이상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또 성령을 체험한다고 하면서 세상 종교에서도 하지 않는 이상한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보이지 않은 것의 실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보는 것으로 하면서 그것을 다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가지고, 보는 것으로 믿음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모두가 종교의 집단 최면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을 안 봅니까?
성경을 보는데도 그런 행위들을 하고 있다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보이는 것은 다 우리 육신이 하는 것이고 사도 바울은 그런 것으로 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내 마음으로 믿는 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내 마음으로 믿는가 하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을 일을 알고 내 마음에서 믿는 그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에 없어서 문자로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같이 소경이 되어 있습니다.
보는 것을 누가 바랍니까?
이스라엘이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을 예수님께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보는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믿지 않고 있는가 하면 보는 것으로 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눈으로 보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 보는 것을 바라다보니까 이 시대 은사주의가 성행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제까지 종교가 해온 그런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은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은사가 아닙니다.
이 은사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성경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믿음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니까 교회 안에서 보는 것으로 하는 그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으로 행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행합니까?
마음으로 믿을 때 믿음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내가 눈으로 보지 않을지라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그 문자는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들이 기초적인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비밀입니다
믿음은 비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음의 비밀을 알게 하신 성도는 마음으로 믿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입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까? 다 보는 것으로 하고 있고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과는 완전히 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소망이 천국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 믿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천국은 따 놓았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초보가 되는 이런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영생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에 빠지면 모두가 생각이 포승에 묶여서 그대로 끌려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교회 안에서 보는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좋게 보이려고 건물도 크게 짓고 있고 그 안에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찬양대를 세워 놓고 있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들이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렇게 다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우선 국어사전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국어사전만 보아도 자기들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보는 것으로 하는 그 행위를 믿음으로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합니까?
그러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종교의 의식에 맞추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사실 국어 적으로 볼 때 그것을 믿음으로 행한다는 그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종교의 모습입니다.
로마서8:25절을 보겠습니다. (신 250쪽)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것은 영생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른 것이 소망이 아니라 우리 안에 양자의 영을 받았는데 그 영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일입니다.
만일,
아주 적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적으면 사도 바울이 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보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구원은 받지 못하더라도 자기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적은가를 알아야 합니다.
거의 없다는 의미로 만일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구원은 마음으로 믿으면 받을 수 있습니다.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면 구원은 누구라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다보니까 마음으로 어떻게 행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를 믿음으로 행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 아무에게나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을 이해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신 성도만이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성도가 너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까?
그들이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까? 교회에 나와서 그저 입으로 주라고 시인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까? 그들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하는 모든 사람은 성령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스스로의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습니다.
아주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구원을 받는 자가 아주 적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때는 이스라엘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령 선지자가 왔어도 당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까?
이 시대 누가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종교에 빠져서 보는 것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 믿음이 있는 성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를 이단이라고 해도 좋고 저를 욕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을 비추어서 볼 때 이 시대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시기 바랍니다.
보는 것으로 하고 있는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해 주시고 있습니다. 비록 보이지 않은 것으로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5:8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영의 일이 보이는 것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이 소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보인다면 그래도 조금은 더 쉽게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
사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함으로서 우리가 참을 수 있습니다. 사실 보이는 것을 바라고 참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군대를 다 갔다 와서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개월 수가 짧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거의 3년을 군대에서 보냈습니다. 군대를 가면 3년이 지나면 제대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은 지나고 나니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에는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고 군대 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도 사실 참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참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서는 현재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이 시대 보이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우리 성도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믿음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믿음의 비밀이 얼마나 든든하고 우리를 굳게 세우고 있는가를 그들은 죽을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비밀입니다
길이 참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믿음이 있는 성도는 비록 보이지 않는 그것을 소망으로 가지고 있다 해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를 해 주시기 때문에 길이 참을 수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아무리 보는 것으로 자기들이 믿음이 있다 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로마서8장은 위로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고난을 당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고난을 받고 있는 그들에게 영의 일을 말씀하면서 길이 참고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줄을 믿는 성도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성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영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게 역사를 해 주심으로 우리가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next 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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