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8:23절을 보겠습니다. (신 250쪽)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피조물입니다
물론 온 우주의 모든 것 역시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담을 흙으로 지으신 것을 피조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이 있고 영이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인 우리 사람은 모두가 육이고 그것을 피조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피조물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바라야 할 것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 아무 것이나 다 바랄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사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다가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양자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지금 우리 피조물에게는 영으로 있어서 그것을 느끼거나 그것이 자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오직 이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육적인 이스라엘과 같이 육체의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 하면 우리는 종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종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에게 고난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복음을 보고 그것을 전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말을 들을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사도들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병자도 고치고 여러 가지 이적도 행하면서 모든 사람이 복종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방에 복음을 막 전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 역시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대적을 하고 고난을 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바다 모래 같이 많은 사람들은 다 율법의 종이 되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 성도는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사람들의 심리는 다수를 정통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다수를 따라 가는 것이 안심이 되기 때문에 다수 안에 속해 있으려고 합니다.
내 가족이 듣습니까?
내 이웃이 듣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리어 자기 가족이 그리고 자기 이웃이 더 듣지를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정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자기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그들이 듣지를 않고 도리어 대적을 하게 됨으로 해서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습니다.
그리고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령의 감동을 받고 진리를 전한다 해도 남의 말은 그렇게도 잘 듣는 그들이 도리어 우리말은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우리가 누군가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사렛에 가셨을 때도 그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탄식을 합니다.
정말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단에 빠져 있는 것으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특별한 형벌을 생각하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반드시 전하고 싶은데 듣지를 않으니까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남길 정도로 출세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직 영혼의 구원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비밀이라서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습니다.
더구나 누구에게 주십니까?
학벌이 좋은 사람입니까? 문벌이 좋은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교회 안에 있는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오실 때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내 가족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친족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듣지를 않으니까 피조물이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듣지를 않으니까 피조물이 탄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을 어느 누구도 듣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리어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에 들어가면 반드시 음행을 하게 되어 있고 사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는데도 우리에게 그 교회에 들어오라고 도리어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고통입니다
우리의 탄식을 듣기는커녕 도리어 우리에게 와서 같이 음행을 하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알고 있는 피조물들에게는 그것이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렇게 탄식을 하고 고통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 하는 것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도무지 깨달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피조물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편지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이 복음을 바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이 피조물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육신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을 전하고 있지만 마치 다른 성경을 보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복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탄식하고 고통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피조물만 탄식합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보면 탄식이 나오고 있고 그들이 또 우리에게 음행을 하자고 하면 고통 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 피조물 뿐 아닙니다.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열매가 되어 있는 양자의 영도 탄식하면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28:26절을 보겠습니다. (구 245쪽)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칠칠절입니다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세 가지 절기가 있습니다. 먼저 유월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칠칠절이 있고 수장절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절기는 주님이 오셔서 이루시는 사역을 순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십일 동안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십일이 되는 오순절에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칠칠절에는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드려지실 것을 예표와 그림자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절기의 의미를 모르고 그저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는 유월절은 지키지 않으면서 맥추절과 수장절을 대신하는 추수감사절을 자기들이 만들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폐하여 졌습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폐하여 졌습니다. 그것을 자기 육체로 지키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악한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자기들 마음대로 절기를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이미 구약의 여로보암 왕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어떠한 일을 했는가를 알면서도 이 시대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언을 하신 그대로 열 지파는 북 이스라엘이 되어서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고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 유다의 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들이 포로가 되어서 갈 때까지 두 나라가 되어서 살아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입니다.
그가 절기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절기를 비슷하게 만들었는가 하면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어서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에 가서 절기를 지키다 보면 유대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자기 땅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 단을 만들어 놓고서 절기도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입니다
그것이 악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폐하여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절기를 지키고 있고 더구나 수장절과 비슷한 절기인 추수감사절을 만들어서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맥추절입니다
첫 열매를 드려지는 절기입니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니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시고 우리를 위해서 첫 열매로 드려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은 육체가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으로 부활하셨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구속을 이루시고 첫 열매로 드려진 것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입고 있었던 우리 육체와 같은 육신이 아닙니다. 그 육체는 죽었고 주님께서는 영으로 부활을 하셨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입니다. 이 시대는 무엇이 부활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종교가 만들어 놓은 교리를 따라 배우고 있습니다. 그 교리가 성경보다도 더 권위가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첫 열매로 드려지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 하시고 난 후에 이제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구원을 해 주셨다면 이제는 오순절이 임함으로 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처음 익은 열매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처음 익은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영의 생명에 관한 일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입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셔야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시대는 성령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성령이 오셔서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하고, 양자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이 영이 생명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의 일을 알지도 못하는 그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안다는 것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받았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 처음 익은 열매를 절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열매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열매가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로마서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막연하게 나도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고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하니까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모두가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열매가 무엇입니까?
양자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두 가지의 영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의 영이고 하나는 양자의 영입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그가 종의 영을 받은 사람과 같이 행동을 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종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그리고 종교가 되어서 삼가 지키고 있는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은 우리라고 말씀을 하니까 교회에만 들어오면 양자의 영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양자의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성령을 보내 주셔야 성령으로 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전혀 모르면서도 좋은 의미의 단어는 막연하게 자기들이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의 단어만을 보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목사가 말 하니까 자기들이 양자의 영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이 피조물은 반드시 썩어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천국에서 같이 살기를 원하셔서 이 피조물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입을 수 있는 양자의 영을 주셨습니다.
이 피조물이 고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령이 오심으로 복음을 깨닫고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피조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부활하신 그 영을 우리가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양자의 영을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탄식을 합니까?
이제 그것을 26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습니다. 그 열매가 있는 우리가 속으로 탄식하면서 양자 될 것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탄식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성령입니다
우리 안에 처음 익은 열매를 성령으로 받았습니다. 이 성령이 탄식을 하면서 양자 될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것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20:6절을 보겠습니다. (신 420쪽)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다.
몸이라고 하니까 육체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육의 몸을 말씀하고 있고 또 신령한 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 몸이 부활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토인 우리의 몸은 반드시 썩어 없어집니다.
그 몸이 아닙니다.
지금은 양자의 영이 있습니다. 그 영은 느끼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내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니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어렵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깨달아서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쉬운 육의 것을 찾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성령을 모릅니까? 말씀 그대로 성령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영의 일은 너무 어려우니까 쉽게 자기들이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또 헌금을 하는 그런 행위들을 하는 것으로 마치 영의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속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입고 부활을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양자의 영만 있습니다. 이 양자의 영을 받은 피조물은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식을 하면서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참여를 해야 합니다.
누가 복 있는 자입니까? 이 세상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복이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양자가 되어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지 못한다면 그는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 부활을 생각하면서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탄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양자의 영을 받지도 않은 그들이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어서 자기 벌거벗은 수치를 못 보고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자기 육체의 모습을 보고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그 모습에 모두가 취해 있습니다.
성도는 다릅니다.
우리는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지금 이 시대는 고난이 별로 없다 보니까 이 말씀이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씀은 고난을 받고 있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육체의 고난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그것을 고난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고난은 우리 성도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도 다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육체의 고난을 가지고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입니다
그래도 얼마나 살기가 좋습니까? 제가 육체가 평안해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 역시 세상 사람들이 받는 그런 고난은 누구보다 더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고난이 아니라 초대교회에 성도들이 받았던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고난은 없습니다.
아마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다 보니까 그런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상황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초대교회에 성도들과 같이 그런 고난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난을 받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 고난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밥 세끼를 먹을 수 있고 또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으면 족합니다. 저는 정말 제가 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불편하지만 않으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고난입니다.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자기들의 정치를 이용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처지와 형편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니까 그 복을 너무 가볍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내 주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보니까 실감이 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 가운데 십만 명 중에 나 혼자 복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 시대 기독교인 중에서 백만 명 중에 나 혼자 복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받은 복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백만 명 중에 나 하나를 택하셔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양자의 영을 받게 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의 숫자입니까?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한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표현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성도라면 이 세상에서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을 지라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설령 고난이 오더라도 우리는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입니다
거기에 참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복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감히 표현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복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그때는 너무 고난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 그들을 위로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지금 로마서8장도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곧 종말이 올 것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종말 아직 멀었습니다.
왜 멀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성도가 있는 이상은 종말은 오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 역시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성도가 있는 이상은 종말은 오지 않습니다.
종말론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없어지면 그때 종말이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현상이 이 시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 그리고 큰 사건은 이 시대 말고도 늘 있었습니다. 유럽에 페스트가 한번 발생을 하면 한 국가가 거의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종말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큰 전쟁이나 지진과 같이 자연 재해가 있으면 종말이 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종말의 징조가 아닙니다. 종말은 교회 안에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와 같이 교회는 점점 율법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때가 종말입니다
성도는 없고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는 그때가 종말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런 징조를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양자의 영이 있는가를 늘 생각하면서 영생을 사모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몸이 구속이 됩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보고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명한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부활에 참예를 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복을 받는 것이고 이 시대 우리가 그것을 사모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마서8:24절을 보겠습니다. (신 250쪽)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시대는 구원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합니다. 아니 구원을 너무 가볍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만 나오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체가 어리석습니다. 성경의 비유는 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왜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지만 그런 비유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만약에 이 구원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 구원에 대해서 이 시대 교회는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지식으로 성경을 보다가 모두가 웅덩이에 빠지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많이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구원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알아야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면 구원파입니까?
정말 답답하기만 합니다. 왜 구원을 말씀하는데 구원파가 됩니까? 제가 구원파에 구원이 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종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구원파 만의 문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가장 율법을 적게 지키는 곳에 어디입니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은 구원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파도 적게 지키는 곳에 속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단 한 가지를 지키면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는 율법의 종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가 있고 영을 좇는 자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비교를 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성경을 그렇게 보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우리 육신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피조물은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기독교는 계속해서 이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제는 어느 누구도 자기들이 배운 신학을 반박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무엇이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양자의 영이 구원을 얻어서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 양자의 영이 부활을 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소망입니다
우리 성도의 소망은 구원입니다. 소망이 무엇입니까? 어떤 일을 간곡하게 바라는 것이 소망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 소망을 바라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국을 간다고 하지만 실제 그들은 간곡하지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간곡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구원에 대해서 간곡하지가 않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간곡합니까? 자기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 간곡합니다. 구원을 얻는 그 일에 대해서 간곡해야 하는데 교회에만 들어오면 다 구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고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 구원파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구원파입니까?
저는 구원파 근처도 안 가본 사람입니다. 그들이 하는 설교도 들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글로서는 약간 보았습니다. 그러나 별로 가치가 없는 글이라서 더 이상 볼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구원파라고 합니다. 그 말은 자기는 구원에 대해서 간곡하지가 않다는 말이 됩니다.
간곡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구원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면 이 설교에 깊이 빠져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글을 보더라도 그들에게는 간곡한 것이 되지 않아서 그냥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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