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47:4절을 보겠습니다. (구 909쪽)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없는 그에게 하늘의 뭇별들을 보여 주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손이 없습니다. 그런데 있는 것 같이 부르시고 있습니다. 실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기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이 되는 그리스도의 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 것과 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 아니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영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 믿음이 있는 성도는 알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이미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은 자입니다. 그런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리시는가 하면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셔서 살리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없는 하늘의 생명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것을 시편에서는 자기 별의 수효를 계수 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으니까 하늘의 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그 이름대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없는 것을 말씀으로 창조를 하신 분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그렇게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영의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죽은 것을 살리셨습니다.
우리 몸을 살리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죽었습니다. 신체는 죽었지만 그것을 영으로 살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 영으로 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알기만 하지 영의 일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그 말씀에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고 말씀을 하니까 진짜 신체의 아브라함과 나사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기독교 사를 보면 거의 그렇게 알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믿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초대 교회에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는지도 모르고 교회에만 나오면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바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에서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 인생을 그림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있습니까? 지금 아담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있습니까? 육체의 사람은 다 썩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잠을 잡니까?
아브라함이 믿을 때 없는 것을 있게 하신 그 안에 있는 하늘로부터 온 생명이 잠을 자고 있습니다. 실제 잠을 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영의 일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 잠자는 영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고 영접을 받는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없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있는 것 같이 부르시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의 생명은 우리가 느낄 수도 없고 인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없는 것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영의 비밀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사람의 이성입니다. 이것을 도무지 이해를 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제가 이제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이 영의 일을 한 번도 들어 보지를 않아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들에게 있어 들어보지도 않은 말씀이라는 것이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이 없이는 아무리 이 복음을 전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해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하는데 믿음이 없다 보니까 이 영의 일을 말씀을 드려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제가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있습니까? 아니 새로운 성경을 쓰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제 개인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2000년이 지났는데 이 영의 일을 모르고 있습니까? 한국에는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라고 하는데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비극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은 문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자기의 신체인지 아니면 성령으로 난 영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만약에 죽은 자가 사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 썩을 것을 다시 살린다면 믿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이 썩을 것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곳은 세상이 되는 것이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 것으로 부르셨습니다.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생명으로 있는 것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있지만 이 시대는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이 영의 일을 모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것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그것은 썩어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이 영의 비밀을 모르면 그는 버림을 받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4: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44쪽)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나이가 75세입니다 아브라함이 물론 그 후에도 10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는 75세가 되어서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가 사라와 혼인을 하고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라면 아마도 검사를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 아들을 낳고 싶어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육의 일이 아닙니다. 영의 일을 우리에게 예표와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보면서 육의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씀들을 보고 기도를 받고 기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조금 냉정하게 생각이 되더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으로는 분명히 아들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낳은 그 아들이 종교에 빠져 구원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모든 섭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육의 일로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들이 없는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었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의 일로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새번역에서는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절망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었다고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절망과 같은 상황에서 믿어야 합니다. 우리 육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에 비추어서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고 율법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는 일입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살 수 있습니다. 누가 자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니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율법만 놓고 보았을 때는 우리는 절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15:5절을 보겠습니다. (구18쪽)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을 보여 주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자손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제까지 로마서에서 이 자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될 수 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어 천국의 유업을 얻는 성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뭇별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구원을 받을 성도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이 있다는 것을 이제 과학이 발달을 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까지 지구에 있었던 사람의 숫자보다 하늘의 별들이 더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 당시 하늘에 뭇별들하고 지금 이 시대 알고 있는 하늘에 있는 별들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하늘의 별은 그저 많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시대는 이제까지 과학으로 밝혀진 별들의 숫자를 다 세고 있습니다.
네 자손이 그와 같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종교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실제 이제까지의 기독교인의 숫자를 보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이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앞 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했습니다. 죽는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일입니다.
죽습니다.
아니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사형 제도가 거의 폐지가 되어 있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면 다시 산다는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떠한 믿음을 가졌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육체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아서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랄 수 없는 중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법이 얼마나 정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법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법은 더 이상 법이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역시도 법으로 하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랄 수 없는 중에 그는 믿었습니다.
무엇을 믿었습니까?
죽은 자를 살려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사형 선고를 받는 아브라함을 살려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비유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영의 일은 사형 선고를 받는 그 육체는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려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민족이 누구입니까? 그들 역시 죽은 자를 살려 주시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차별을 두지 않고 믿는 모든 사람을 그렇게 살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이방에 전파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민족들에게 이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브라함과 같이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은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믿지를 않고 율법의 행위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암담하게도 이 시대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종교의 행위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그가 어떻게 믿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것을 모르고 교회에 나와서 믿는다고 하면 믿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이 시대는 죽은 자를 어떻게 살리시는 것을 모르고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자기 신체가 산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성경 밑에 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육체의 후손이 아니라 하늘의 씨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씨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성경을 모르고 문자를 보면서 자기들이 하늘의 씨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4: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44쪽)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의 나이가 백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입니다
이 세상 책을 보듯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성경을 이 세상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미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보아도 그들의 변증서를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빨리 세상이 되어 버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가 어떠한 믿음을 가져서 우리의 조상이 되었는가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했습니다. 이제 실제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로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표와 비유로 알고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사라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삭이라는 아들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영의 생명을 탄생할 수 있는가를 사도 바울이 구체적으로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사라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부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비유로는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삭이 탄생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그러니까 희망이 사라진 가운데서 어떻게 믿고 그의 씨가 탄생이 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씨는 하늘의 생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같이 알고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분명히 부부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사라는 교회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에 생명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를 보면 정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라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지만 교회는 태가 죽어 있습니다. 사라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라는 분명히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보면 태가 죽은 것 같이 보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았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은 자기 육체가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으로 보면 죽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죽고 사라의 태도 죽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사라는 분명히 그 교회를 통해서 생명을 탄생시켜야 하는데 이제까지 죽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죽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율법만 보았을 때는 우리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은 저주를 받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 절에서 희망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희망이 없습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몸이 죽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이삭을 낳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삭을 낳고 안 낳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었다면 이삭을 낳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영생입니다
아브라함 개인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가 이삭을 낳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자식을 낳는 것은 비유입니다. 물론 실제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영의 일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식입니다
또 다른 내가 탄생이 되는 것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탄생이 되는 것은 구원을 받은 것을 그러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보면 성경이 도무지 풀리지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라의 태도 죽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내가 율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왔습니다. 아니 모든 생명은 교회를 통해서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도 태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이삭을 낳는 믿음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기로 하고 백세가 되어서도 안 주는 것을 보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씨가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하여지지를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어떻게 믿었는가 하면 희망이 사라진 것과 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17:17절을 보겠습니다. (구 20쪽)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씨를 주신다고 하셨는데도 아직까지 이삭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시니까 그가 엎드리어 웃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하여졌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웃었다는 이 말씀을 보고 믿음이 약하여 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만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하여진 것과 같이 보입니다.
믿음입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시는 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생각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경륜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있는 이 말씀을 보고 혹시라도 아브라함이 믿음이 연약하여 졌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경륜을 믿는 믿음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경륜을 이루시고 있고 그것을 예표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웃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경륜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보아야지 마치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웃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입니다
창세기에서 이삭을 낳는 것을 가지고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었다고 그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으로 믿었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참 어렵습니다.
예표와 비유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무엇에 대한 비유이고 이 말씀이 무엇에 대한 말씀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것을 살리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4: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44쪽)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생명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라의 태가 죽었다는 말씀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삭을 낳는 일을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사라는 교회입니다. 갈라디아에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명에 대해서 믿었습니다.
여러분도 반드시 이 생명에 대해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하여 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 성도는 절대로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 대해서 말씀하는 가를 알아야 하는데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이 나오면 당연히 이삭을 낳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서 생명이 탄생합니까?
성경은 교회를 통해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나중에 주님을 만나고 나서 아라비아로 가서 성경을 보고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사도 바울은 이미 주님과의 관계에서 교회가 형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럴 수는 있습니다.
어느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를 통해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져서 그 안에서 생명이 탄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는 사실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의 교회가 얼마나 쉽게 타락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 믿음이 어느 믿음인가 하면 우리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을 하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요한일서2:25절을 보겠습니다. (신 390쪽)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이 어떠한 믿음을 가졌는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로마서를 보고 이삭을 낳는 그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에 대한 약속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아브라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의심하는 자는 믿음에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생명인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체의 생명이 아닙니다.
영입니다
죽는 자를 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살리셨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어느 한 말씀만 가지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체는 썩을 것입니다. 그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지 못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줄을 믿었는데 어느 것을 살리시는가 하면 아브라함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이 영의 일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이야기입니까? 그런데도 이 시대는 자기들의 신체의 구원을 바라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의심치 않았습니다. 자기가 다시 살아날 때 영원한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약속도 모르고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약속도 모르고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영원히 산다고는 하고 있지만 무엇이 영원히 사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에 대한 약속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모르고 있습니다. 참 그럴듯하게 말을 하고 있고 거기에 모든 사람이 미혹을 당해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다시 살리신다고 하니까 자기 신체가 죽은 후에 자기 신체와 결합이 되는 영이 다시 사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사망입니다. 사망이 문제가 아니라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 시대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나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영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인들은 그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율법을 지키면서 행위에 속한 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의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과 전혀 다른 영의 일을 자기들이 이성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63쪽)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믿음이 견고해 졌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생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삭을 낳는 믿음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아무리 이삭을 낳았다 해도 자기 생명이 없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그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생명이 영의 생명입니다. 내 신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그 생명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믿음이 견고해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견고케 하십니까?
아브라함 스스로가 믿어서 견고케 됩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아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할 수 있게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끝까지 견고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십니다.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 질 수 있게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은혜에 속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또 그 믿음을 끝까지 견고케 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에 대해서 하늘의 생명에 대해서는 내가 한 일이 하나도 없어서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경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시는데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탄생이 되는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next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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