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교회(7)
잠언 7:24-27절을 보겠습니다. (구 918쪽)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찌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교회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교회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에 이런 교회가 얼마가 되는가를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타락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음녀라고 하시면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 음녀에게서 벗어나라고 말씀을 했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음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더 이상 교회로서 그 기능을 상실을 했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 또 다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을 하신 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입니다.
이 초대교회는 약 300년 동안 유대교인들과 로마에 의해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로마가 화재로 인하여 불타버린 것을 기독교인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핍박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교회는 점점 성장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전혀 안 보이는 교회였던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까?
지금과 같은 건물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는 아주 은밀하게 교제를 했고 그 안에서 예배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은밀했는가를 교회사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조차 숨기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지로 갔습니다.
지금도 터키로 가서 보면 카타콤이라는 것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 석회석 산에 동굴을 뚫어 놓고 그 안에서 성도들이 비밀스럽게 예배를 했습니다. 혹시라도 로마의 군대가 올까봐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해서 고발이 될까봐 철저하게 신원을 확인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0년 동안에 엄청난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복음을 전파했어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또 로마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물론 그 시대적 배경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어찌되었든 이 세상에 처음 교회라는 이름으로 탄생이 된 교회는 그렇게 이 세상에 보였던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의 의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것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기독교를 공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이 세상에 교회가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황제의 보호를 받으면서 교회는 아주 빨리 법을 만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그리고 속사도들에 의해서 교부들에 의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교회를 국교로 인정을 하고 난 바로 뒤에 교회는 교리와 법을 만들기 시작을 하면서 급속하게 진리에서 타락을 했습니다. 지난 300년 동안 지켜왔던 믿음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이단자들이 나오기 시작을 해서 공회를 통해서 교리와 법을 세웠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니케아 공회 자체가 이단으로 변질이 되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법과 교리가 없어도 300년 동안 수많은 순교자들을 내면서도 교회는 진리에서 벗어나지를 않았습니다.
누가 이단자들입니까?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미 니케아 공회를 했을 때 그때의 교회는 종교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종교를 운영을 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것이 정치와 맞물리면서 법과 규례들을 만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법과 규례들이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때 만들어진 법과 규례들로 인하여 중세 시대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사람을 죽입니까?
저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면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생각하는 믿음과 다른 주장을 한다 할지라도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교회는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종교재판으로 죽였다는 것은 스스로가 종교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니케아 공회가 325년에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공회는 열렸지만 그때 만들어진 교리들로 인하여 중세 시대에 심지어는 교인들 하나하나를 심문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 저항을 하는 모든 사람을 종교 재판으로 죽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교회라고 생각을 합니까?
그리고 개혁주의 교회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불씨가 지펴지고 난 후에 칼뱅에 의해서 개혁주의 교회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교회는 서로 자기들의 교리가 맞는다고 하면서 전쟁까지 했습니다. 이들이 전쟁을 한 이유는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주님의 교회라면 저는 이 두 교회는 전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칼뱅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저 역시 그를 통해서 나온 오대 강령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교회 안에 수많은 법과 규례들을 세워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보면서 교회라고 하고 있고 교회사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이 세상에 드러나지를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눈에 잘 안 보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교회라는 것은 사실은 교회가 아니라 음녀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늘 음녀가 되어 있었던 것과 같이 교회사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교회들은 다 음녀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들을 보고 교회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를 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잠언 7:1-5절을 보겠습니다. (구 917쪽)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잠언 7장은 음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음녀는 바로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솔로몬이 쓴 잠언에서도 음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음녀가 된다는 것을 율법에서부터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이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이 음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음녀
그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도 음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하는 그들이 음녀에게 들어가 꼼짝을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음녀에게서 나를 지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정말 그물과 같다고 보면 맞습니다. 음녀에게 걸리지 않으면 이방 계집에게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음녀는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고 이방 계집은 이 세상의 종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이 둘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적은 소수의 사람만이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그리고 수많은 이단의 종교들과 심지어는 무당집까지 마치 그물을 쳐 놓은 것 같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음녀고 다른 모든 것은 다 이방 계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이 없는 교회를 음녀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다른 신이나 다른 사상을 믿고 있는 것을 이방 계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걸려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음녀라고 하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제가 음녀라고 하면 오히려 저를 보고 이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지금 이 시대 교회라고 간판을 내 걸고 어느 교단에 속해 있는 모든 교회는 다 음녀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 이유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 내 말을 들으며 내 명령을 지키고 내 법을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고 하면서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지혜를 내 누이와 같이 늘 곁에 있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있고 명철을 내 친족이라 할 만큼 늘 가까이 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지혜와 명철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사입니까?
지금 신학에서 배우고 있는 것이 교회사입니까? 그것은 교회사가 아니라 음녀의 역사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사라고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 무슨 지혜가 있고 명철이 있겠습니까? 교회도 아닌 것을 교회사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아닌 것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차라리 배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 몰라도 됩니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그 음녀가 행했던 것을 아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그것은 교회사가 아닙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을 합니까?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음녀가 교회로 보이는 것입니다 음녀가 교회로 보이는 그들에게 과연 구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잠언 9:10절을 보겠습니다. (구 920쪽)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지혜와 명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지혜와 명철이 없어서 음녀를 보고 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지난 2000년 동안 음녀를 보고 교회라고 하면서 그들이 해온 역사를 교회사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라졌습니다.
니케아 공회가 있을 때부터 교회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음녀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나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진짜 교회는 이름도 없이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이 음녀에 의해서 수많은 핍박을 받고 사라졌다가 또 세워지기를 반복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배우고 있는 교회사에는 진짜 교회가 거의 보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죽는 자가 허다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허다하다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다른 성경에는 그에게 죽는 자가 셀 수도 없다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음녀에게 걸려서 죽은 자를 여러분이 셀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우리가 배우고 있는 교회사를 통해서 그 교회에 다녔던 모든 사람들과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누가 셀 수 있겠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지혜와 명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지혜와 명철을 얻어야 하는데 음녀에게 다 걸려 있기 때문에 지혜와 명철을 구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셀 수 없는 자들이 다 이 음녀에게 걸려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그래도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렇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난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너무도 잘 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음녀입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환상으로 보고 짐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혜와 명철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교회를 교회로 보고 있다는 자체가 지혜와 명철이 없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가 음녀였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교회에 대해서 판단을 합니까?
그것은 이 교회로 인하여 셀 수 없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판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 음녀로 인하여 셀 수 없는 사람이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음녀를 똑바로 보고 있는데 그 음녀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아내입니다
저는 한 번도 이것에 대해서 부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아내는 계속해서 음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있었던 그 시대도 교회가 음녀로 변했었는데 지금 이 시대는 말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를 그저 주님의 아내로만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아내도 음행을 하면 음녀가 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혜와 명철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음녀에게서 이방 계집에게서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잊고 하나님의 법을 모르면 교회에 나와 있어도 다 이 음녀에게 빠져 죽는다는 것을 잠언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계속해서 교회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서 이 음녀를 마치 세상의 음녀로 보고 있습니다.
잠언 7:6-7절을 보겠습니다. (구 917쪽)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어다 보다가 어리석은 자 중에,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어리석은 자입니다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말씀으로 인하여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 중에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까 지혜롭다고 생각을 하고 이 어리석은 자는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누가 어리석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믿지를 않고 행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경을 누가 보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 하면 마치 이 세상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 어리석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있다는 것은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어리석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회에 나오면 지혜로운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년을 보았습니다.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모래 같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한 소년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한 소년이라는 말씀을 바로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한 소년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한 소년입니다.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모래 같은데 그 중에서 어리석은 한 소년이 아닙니다.
한 지혜 없는 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까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전체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셀 수 없는 사람이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셀 수 없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지혜 없는 한 소년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소년이 다 지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대표입니다
성경에서 한 사람을 말씀을 하면 그것은 정말 한 사람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 없이 죽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똑같은 말씀을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역시 한 사람이 아니라 예복을 입지 않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혜가 있다면 지금 음녀에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미혹이 되지 않는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음녀에게 미혹이 되어서 다 죽고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가 지금 아카데미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설교를 그리스도편지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지만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음녀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녀에게 있으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소년 보다 더 어리석습니다. 음녀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 그 음녀와 함께 있으면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음녀 안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진실 되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 해도 음녀에게 있으면 절대로 구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거짓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해도 음녀에게 잡혀 있는 사람은 아니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른 진리가 서 있는 교회에서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은데 어떻게 음녀에게 있으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진리를 바로 전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모두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에 이미 음행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그 교회도 그런데 어떻게 음녀에게서 구원이 있겠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음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음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음녀가 아니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사도요한을 통해서 환상으로 보여 주시면서 교회가 짐승이 된다고 하셨으면 무조건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거의 모든 교회는 다 짐승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내가 음녀 안에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잠언 7:8-9절을 보겠습니다. (구 917쪽)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음녀의 집입니다
한 소년이 음녀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단지 한 소년이 아니라 이 한 소년은 이스라엘 전체를 말씀을 하고 있고 이 시대는 이방의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렇게 음녀로 변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음녀의 집으로 들어가면서도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 줄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음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 주셔서 이스라엘이 음녀가 되어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성경을 보고는 있지만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문제로 취급을 하다 보니까 자기들이 어떻게 음행을 하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소년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소년은 지혜에 없어서 이런 상태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이 비추고 있다면 절대로 음녀의 집으로 들어가지를 않을 텐데 이 소년은 지혜가 없어서 음녀를 보고 교회로 생각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85쪽)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샛별이 우리 마음이 떠오르는 것과 같이 늘 깨어 있어야 하는데 이 소년의 영적인 상태를 보면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입니다. 누가 음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가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샛별이 우리 마음에 떠올라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에 일단 들어오면 마치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샛별이 떠오르기 까지는 성경을 보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소년이다 보니까 음녀가 이야기를 하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직 샛별이 떠오르지 않은 이 소년은 음녀가 말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음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 음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사람에게 있다면 절대로 이 소년은 음녀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년의 이성적 지식으로 보면 이 음녀는 분명히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로 보이기 때문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음녀라는 것을 알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기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음녀를 알고 있다면 들어가겠습니까? 아직 그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지 않아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이기 때문에 이 음녀를 보고 교회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아무 의심이 없이 들어갑니다. 아니 이 소년의 눈에는 분명히 주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이 세상의 교회는 음녀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어느 것이 주님이 세우신 교회로 보이냐면 음녀가 주님이 세우신 교회로 보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교회로 보이지 않고 음녀의 집이 교회로 보이기 때문에 소년들이 다 그리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명철을 주셔 야지만 우리가 이 음녀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가 있다는 사람도 영의 일에 있어서는 소년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소년들이 자기의 이성적 지식을 가지고 이 음녀에게로 들어가면서 구원을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잠언 7:10절을 보겠습니다. (구 918쪽)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고 있습니다.
기생의 옷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율법의 의로 옷을 입은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음녀는 이렇게 율법의 의로 옷을 입고 이 소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율법의 옷을 잘 차려 입은 모습이 당연히 좋게 보이기 때문에 이 기생을 보고 모두가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1절을 보겠습니다. (구 3쪽)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간교한 계집입니다.
이 계집이 누구입니까? 거짓을 말하고 있는 사단이 만들어 놓은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에덴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하와를 미혹을 했습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어본 하와가 뱀의 간교한 혀에 미혹이 돼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 세상의 교회가 어떻게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넘어가는 가를 이미 에덴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간교합니다.
사단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기생의 옷을 입혀서 음녀를 만들어 놓으면 거기에 모든 사람이 다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기생의 옷은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좋습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율법의 의는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와도 사단에게 넘어 갔습니다.
하물며 죄악 중에 탄생을 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과연 사단을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 음녀의 집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누가 사단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단이 얼마나 간교하게 미혹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교회를 보고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멍청합니까?
사람들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의 눈에 이성에는 분명히 주님이 세우신 교회같이 만들어 놓아야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 사망을 당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하면 무조건 주님이 세웠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 교회가 음녀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잠언 7:11-12절을 보겠습니다. (구 918쪽)
“이 계집은 떠들며 완패하며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모퉁이,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이 계집은 떠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보면 얼마나 떠들고 있습니까? 자기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그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서 얼마나 떠들고 있습니까? 영혼을 구한다고 전도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소년들을 죽이기 위해서 지금 이 시대도 온 거리를 다니면서 떠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발이 집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거리에서, 어떤 때에는 광장 모퉁이에서,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음녀가 한 사람이라도 자기 집으로 끌어 들이려 하는 것과 분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음녀와 같이 거리로 나가서 떠들면서 사람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음녀가 전도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라고 지어 놓고 그 집으로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들이기 위해서 거리로 나가서 떠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심지어는 신문에 전면 광고를 하면서 떠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말로는 오직 예수를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다 음녀라는 것을 분별을 해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음녀에 대해서 말씀을 하니까 성도들이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누가 열심을 내야 합니까? 율법주의자보다 우리 성도들이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생명도 없는 그들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성도들이 나만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만족을 하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양날의 검입니다
성경은 늘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거의 모든 교회를 음녀라고 정의를 하고 교회와 사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리니까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타락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개혁자들이 종교 개혁을 했습니다.
그들이 개혁을 하고 난 후에 항상 걸림이 되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칼뱅이 오대교리를 공포하고 난 후에 보니까 이제 성도로서의 삶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방종을 할 것을 우려해서 교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이런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고 하는 교리를 정해 놓았습니다.
저도 역시 이 부분이 고민입니다
아마도 모든 믿음의 선지자들이 이 고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퇴보를 한다면 제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설령 이 복음을 듣고 아무 일을 안 하는 성도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저에게 진리를 전하게 하실 줄을 믿고 있습니다. 설령 이 복음을 듣고서 영지주의자가 나온다 해도 그 가운데서 한명이라도 구원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를 전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잠언 7:13-14절을 보겠습니다. (구 918쪽)
“그 계집이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소년을 만납니다.
아직 복음의 깊은 비밀을 모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이 소년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종교에 의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죽는 가를 잠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교회고 모든 사람은 그 교회를 주님이 세웠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음녀가 되어서 이렇게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 계집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진실 되게 일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음녀들이 부끄러움을 스스로가 알고 있다면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로마서 9:33절을 보겠습니다. (신 252쪽)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음녀는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기생의 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기생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기생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자기들의 흠 없는 율법의 의를 옷 입고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행위의 의에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행위의 의에 옷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생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율법의 의에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기생의 옷을 입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소년들을 미혹을 하고 있고 그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기생의 옷을 입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분명히 음녀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그리고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행위들이 기생의 옷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옷을 입게 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음녀는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기생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기생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다 음녀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화목제를 드렸다고 말 합니다.
자기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갚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난번 서원을 강의 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음녀는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니까 소년이 미혹이 되어서 이 음녀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8)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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