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교회(3)
(Church, 敎會)
열왕기상 1:1-4절을 보겠습니다. (구 508쪽)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성경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어느 말씀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성경에 기록을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록을 했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도덕책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 책이 아닙니다. 물론 율법이 있고 또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기록이 되어 있다 보니까 사람들은 도덕을 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도덕적인 수준에서 성경을 보려 하고 있고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이고 또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이 성경을 도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도덕책으로 보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 말이 그 말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목사들이 도덕책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깨끗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게 하시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방해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냥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일을 잘 못해서 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열심을 내다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생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면 참 좋은데 그런 일들은 다 비유로 기록이 되다 보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도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 있는 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바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참으로 오묘해서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좋게 보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보기에 좋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나쁘다면 누구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 일들이 아니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일들이 사실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히려 그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이단이라고 까지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발송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에게 아주 심한 메일의 답장이 왔습니다. 교회를 비판을 했다고 저 보고 이단이라고 하고 있고 심지어는 사단이라고 까지 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메일을 보내 것을 보았습니다. 벌써 그 글에게 얼마나 분이 나 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이성으로는 그것이 너무도 정당한 일이고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라도 해야지 믿음이 있는 것 같아서 그리스도편지로 메일을 보낸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성의 생각에 바르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언 12:16절을 보겠습니다. (구 923쪽)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분을 내어야 할 상황인가 아닌가를 모르면 자기도 모르게 분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는 너무 종교에 빠져 있다 보니까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될 일에 아주 열심을 내고 있고 심지어는 분을 참지 못하고 표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분을 참지 못 했습니까? 율법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예수님께서 깨 버리시니까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분을 내고 있었습니다. 왜 자기들이 율법 때문에 분을 내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그저 율법에 미혹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분을 냈습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율법에 빠져 있는 사람은 율법에 대해서 반대 되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분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분을 내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을 한 일입니다.
총회가 있어서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제가 있는 노회와 다른 노회가 합쳐서 총회를 만들자고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어서 저도 임원으로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헌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노회비가 헌금이나 마찬가지니까 그것을 대체하자고 했지만 예배를 드리고 어떻게 헌금을 안 드릴 수 있느냐면서 분을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예수님에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고 하면서 분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역시 깨닫지 못합니다. 목사면 뭐 합니까? 자기가 나서야 할 자리인가 아닌가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사람을 죽이는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왜 율법을 대변을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과연 그렇게 분을 냈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에 대해서 분을 내고 못 참는 것이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분을 내지 않습니다. 자기가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모르니까 아무 것에나 자기가 나서서 분을 내고 있고 율법을 보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다 율법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배를 드리고 나서 헌금을 안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바리새인과 같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목사고 교인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미련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자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정말 신중하게 생각을 하고 내가 나서야 하는 때인가 아닌 가를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나를 수욕하는 일이라 해도 지혜로운 성도는 그것을 참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자기 미련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이 성경에는 너무도 많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아니라 영적인 일입니다 그런 것을 바로 해석을 하지 못하면 그 생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에 나와서 왜 천국에 못 들어갑니까?
그들이 육적으로 잘못해서 못 들어갑니까?
오히려 육적으로 너무 넘쳐서 그것이 문제가 돼서 못 들어가는 불행한 일이 발생이 되고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옳다고 하는 그 일이 올무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으며 스스로 진노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잘못해서 못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성도라면 그가 아무리 잘못을 한다 해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한편 강도를 구원을 해 주신 것입니다
오죽 하면 사형을 당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강도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로 잘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제사장은 버림을 받았는데 오히려 한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너무 잘 하려고 하다가 그것이 걸림이 되어서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해서 구원을 못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이성적 생각을 가지고 잘 하려고 하다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가 되어서 구원을 못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그저 교회에서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분을 왜 냅니까?
내가 하는 일이 바르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니까 분이 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너무도 잘하는 일인데 주님께서 그 안식일에 꼭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참지를 못하고 분을 냈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깨닫고 교회 안에서 그런 우를 범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상 1:1절을 보겠습니다. (구 508쪽)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다윗 왕이 나이가 들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모두가 죽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나이가 들면 몸이 차가워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몸이 차가워 질 정도로 나이가 안 들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실제 다윗 왕이 나이가 들다 보니까 이불을 덮어도 몸이 따뜻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성경에 왜 이런 말씀을 기록을 했습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누구나 가는 길을 가고 있는데 다윗이 무엇이 그리 특별해서 이런 사소한 일을 성경에 기록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일을 성경에 기록을 했습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달을 해서 얼마든지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몰랐겠습니까?
과학이 이렇게 까지 발달을 할 줄 하나님이 모르시고 지금 이 시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런 말씀을 성경에 기록을 하셨습니까? 그리고 도덕적으로 볼 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성경에 기록을 왜 하셨는가를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은 모두가 죽습니다.
그것은 다윗이라고 해도 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윗이 나이이가 들어 죽을 때가 가까이 오니까 별 이상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의 시를 보면 정말 다윗은 영성이 뛰어난 사람인데 왜 이런 일을 성경에 기록을 했고 또 이런 일을 하게 했는가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한 번 죽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그것을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죽을 때가 되면 자기의 모든 것을 정리를 하고 오직 하늘에 마음이 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의 시를 보면 성경의 저자들 중에서도 가장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을 보면 사람의 가장 천한 것과 그리고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 다윗이 나이가 들어서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2절을 보겠습니다. (구 508쪽)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이제 다윗이 정말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젊은 부인도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정략결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아들도 70명이나 낳았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윗이 얼마든지 젊은 부인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부인이라면 다윗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젊은 처녀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처녀가 왕의 품에 누워서 왕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왕은 절대적인 권력이고 나라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한다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풍습이었을 것입니다
왕이 나이가 들면 젊은 처녀를 구해서 왕과 함께 자게 함으로 해서 왕의 몸을 따뜻하게 했을 것입니다 실제 이 시대 과학에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손이라도 잡고 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많다고 합니다.
온열 치료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시대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치료 방법입니다. 열을 통해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 몸은 열에 의해서 아주 민감한 반응을 하는 것으로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몸의 온도를 1도씨 높이는 것으로 해서 암도 치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외부에서 어떤 작용을 해서 실제 치료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부부가 한 이불에서 살을 맞대고 자면 0.5도씨 이상의 체온이 올라가는데 그것이 실제 우리 몸의 면역력을 상당히 높여 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혼자 자는 사람과 함께 자는 사람의 차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가 온열 작용을 함으로 해서 부부가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천 년 전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벌써 그런 작용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다윗 왕이 나이가 들어 몸이 차가워지니까 밤에 젊은 처녀를 같이 자게 해서 다윗 왕의 체온을 높임으로 해서 치료 효과를 기대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어찌 되었던 성경에 굳이 이런 말씀까지 기록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 왕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서 몸이 차가워 졌다 해도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을 빤히 알고 있는 이스라엘이 굳이 이렇게 까지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더구나 믿음을 가지고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선진들이라면 이 세상에 굳이 이렇게 까지 애착을 가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굳이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아비삭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건들이 있다고 하지만 이 여자에 대해서 기록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필요 없는 말씀을 절대로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너무도 중요한 뜻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런 말씀들을 모르면 자기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게 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사망이 온다는 것을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왜 알아야 합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지만 우리는 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왜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아비삭으로 인하여 죽는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도 모르고 있고 아비삭으로 인하여 자기 생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비삭으로 죽고 있습니다.
성경이 아비삭으로 인하여 죽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다 보니까 자기가 왜 아비삭으로 죽게 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죄를 져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너무 열심을 내다가 그것으로 영적인 죄를 범하고 그것이 악이 되어서 그 영혼이 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열왕기상 1:3-4절을 보겠습니다. (구 508쪽)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비삭
그 이름의 정학한 뜻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 아버지는 방랑자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정말로 깊은 뜻이 있고 그것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면 영적인 죄를 져서 결국에는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아비삭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를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고 그것을 모르게 되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아도니아와 같은 자가 되어서 결국에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도니아의 육적인 죽음은 우리의 영적인 죽음을 예표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아가 어떤 죄를 지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아도니아가 스스로 왕이 되어서 선포를 하는 것이 열왕기상 1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삭과 아도니와의 관계를 우리가 정말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가 왜 아비삭을 달라고 해서 죽음을 당했는가를 바로 알지 못하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아도니와와 같은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비삭은 그런 여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동침을 하지 않았다고 4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동녀를 구해서 주었지만 다윗이 이 처녀와 동침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다윗 왕의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이 동녀를 구해서 다윗 왕과 함께 잠을 자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다윗의 아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그저 다윗 왕의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신하들이 아비삭이라는 동녀를 구해서 다윗과 잠시 잠을 자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비삭을 달라고 했다가 아도니아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처녀입니다
다윗과 혼인을 한 것도 아니고 잠시 다윗 왕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역할을 했을 뿐인데 이 처녀를 죽을 때 까지 혼자 살라고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아리따운 처녀라서 모두가 연모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도니아가 솔로몬 왕의 어머니인 밧세바에게 청을 했다가 그 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심히 아리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동녀를 구했는데 그녀가 심히 아리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아비삭이 누구를 상징하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참으로 오묘해서 정말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으면 그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늘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대할 때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늘 지혜를 구하야 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비삭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다윗이 동침도 하지 않은 여자인데 이 여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성경에 기록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장에서 잠깐 그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2장에서 또 잠깐 그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비삭으로 인하여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죽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3-16절을 보겠습니다. (구 512쪽)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뇨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또 가로되 내가 말씀할 일이 있나이다 밧세바가 가로되 말하라 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 바여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이제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가로되 말하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아도니아가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선포를 했다가 나단 선지자가 밧세바와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기름 부으라고 해서 아도니아에게 가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아도니아는 솔로몬에게 그 생명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아도니아에게 자중하고 있으라고 하고 그 생명을 살려 주었습니다.
사실 서열로 따지면 아도니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낳았을 때 그를 내 다음에 왕이 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솔로몬을 사랑했다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으로 보았을 때는 당연히 아도니아가 왕이 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다윗의 위를 이은 다음 왕은 솔로몬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도니아에게 있던 모든 사람은 뿔뿔이 흩어지고 아도니아는 도피성으로 가서 제단 뿔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들입니다. 비록 그가 잠시 왕을 선포했을지라도 그의 형이다 보니까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아도니아 입장에서는 자기가 왕이 충분히 될 수 있는 일이지만 솔로몬에 의해서 어쩌면 왕을 빼앗긴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도니아가 밧세바를 찾아 갑니다.
이제 다윗 왕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몸을 따뜻하게 했던 그 동녀 아비삭이 심히 아리따워서 아도니아가 그에게 연정을 품었습니다. 아마도 누구라도 이 아비삭을 보았다면 그를 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심히 아리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히 아리땁기 때문에 아비삭을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 다윗과 혼인을 한 상태도 아닌 아비삭을 좀 달라고 한다 해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아비삭도 처녀이기 때문에 누군가와는 혼인을 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일입니다 이 아비삭이 다윗 왕과 정식으로 혼인을 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단지 죽을 때가 되어서 다윗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을 뿐입니다.
밧세가가 묻습니다.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도니야도 화평한 목적으로 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밧세바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다고 하니까 아도니야의 말을 듣고 그의 청을 들어 주어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부인입니다
그런데 아비삭은 부인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밧세바가 생각할 때는 자기가 부인이기 때문에 아비삭이 다윗의 부인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 했고 그 정도쯤은 들어 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더구나 아도니야의 말과 같이 자기가 먼저 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다윗 왕으로 인하여 솔로몬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들어주어도 충분히 될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화평한 목적입니다
그러나 밧세바도 그렇고 아도니아도 화평이 무엇인가를 몰랐습니다. 지금 밧세바나 아도니아는 화평을 모르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순전히 인간적인 이성으로 생각을 할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밧세바 입장에서는 자기가 다윗에 부인이고 자기 아들이 다윗의 위를 이어 왕에 올랐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골로새서 1: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25쪽)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화평한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화평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화평을 이루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한 목적이라면 아도니야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심히 아리따운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달라고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지금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분명히 화평한 목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밧세바도 그렇고 아도니아도 화평한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고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아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화평한 목적을 가지고 밧세바에게 찾아왔다고는 하지는 정욕을 위해서 심히 아리따운 동녀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삼고자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화평한 목적을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악을 행하고 있는 줄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결국에는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왜 아도니아가 화평한 목적으로 와서 밧세바에게 청한 그 일이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를 이제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예표입니다 우리가 그 예표를 못 보면 성경에서 그저 문자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아도니아가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한 것이 큰 문제입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찌 되었든 다윗 왕을 모신 여자인데 아비의 여자를 달라고 해서 그 일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정식으로 혼인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다윗의 품에서 같이 잠을 잤다면 다윗의 부인과 마찬가지인데 아비삭을 달라고 한 것은 솔로몬의 말과 같이 다윗의 부인을 달라고 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그를 죽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도덕책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할 일이 없으신 분입니다. 아비의 여자를 취해 아내로 삼고자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사건을 기록을 했다면 이 세상의 초등학문도 그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물론 로마 시대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도덕적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자가 죽고 나서 그 아들이 다시 권력을 가지게 되면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문제는 또 다릅니다.
다윗이 취하지를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처녀입니다. 다윗이 나이가 거의 팔십에 가까이 되었을 때 이 여자는 이제 겨우 이십 세도 안 된 여자입니다. 사실 도덕적으로도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일로 아도니아가 죽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죽어야 합니다.
아도니야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기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을 이 시대 교인들이 똑같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이 아도니야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가 이 일로 인하여 죽임을 당했다면 그것은 이 시대 영혼이 죽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육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영입니다. 아도니아의 육체가 죽었다면 우리가 아도니아와 같은 일을 했을 때는 영혼이 죽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마도 여기에 있는 성도님들도 지금 아도니아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잘 이해를 못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메타포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볼 때 정말로 그 안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자기도 똑같이 아도니야와 같이 그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아도니야는 다윗왕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아도니야는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예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이 아도니야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도니야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언제 아비의 부인을 취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는 아도니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표입니다 너무도 중요한 예표이고 이 시대 아도니야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도 많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거의 모든 교인들이 다 아도니야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몸을 따뜻하게 했던 동녀를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동녀가 심히 아리따워서 그것을 보면서 모두가 연정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누구를 예표 합니까?
이 말씀은 예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야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과 잠을 잤는가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되고 오직 예표로만 이 말씀을 보면 이 시대 아도니야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결혼은 안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아비삭은 다윗 왕의 품에서 자던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가 심히 아리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여자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알면 아도니야와 같은 죄를 짓지 않고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르면 죽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그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모르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성경을 다 해석을 할 수 없을지라도 그래도 내 영혼이 죽고 사는 것은 반드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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