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레위기10:1-7절을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모세가 아론의 아자비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 밖으로 메어 가라 하매 그들이 나아와 모세의 명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 밖으로 메어 내니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찌니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하니라”
때로는 무섭습니다.
정말 성경을 보면 어떤 때는 굳이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정도로 사람들을 죽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을 보면 조금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는데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이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예표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저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것을 보여주셨습니까?
그것은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이런 예표들을 보여 주신 것이지 하나님이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마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의미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저 문자적으로 보고 있자면 그는 이스라엘과 같이 망하는 길로 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보는 하나님은 정말 때로는 너무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고 나면 절대로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예표들은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기록이 된 사건이지 무서움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육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영의 일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서 육을 그대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육을 통해서 우리의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림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알고 있는 성경이 문자는 쉽게 말씀을 드려서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림자는 말 그래도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그림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체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들은 다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보아야 하는데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아니 그림자로 보이지가 안 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경을 어려서부터 보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뜻을 알려고 했지만 그들은 소경이 되어서 성경을 바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눈이 소경이 아니라 지혜에 있어서 소경이 되어서 그들의 이성적인 지식으로는 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늘 그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악을 행하는지도 모르고 악을 행했지만 그 악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지금도 자기가 악을 행하는지를 모르고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이 악인가를 모릅니다.
지금 아론의 아들들이 다른 불을 드린 것이 악입니다. 아론의 아들들이 다른 불을 드리면서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정말 정성을 다 해서 하나님께 분향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악한 일이 되었고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진노를 하셔서 그들을 불살라 죽이셨습니다.
예표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 역시 악을 행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그것을 의롭다 하고 있고 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악을 행하면서도 의로운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역시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에 더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는 그 악을 하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행하고 있는 것이 악이라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우리가 왜 보아야 하는 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은 어린 아이도 압니다. 그러나 의인이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무엇인가 자꾸 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율법을 보면 율법을 지켜야 할 것 같고 은사를 보면 나도 무엇인가 은사를 나타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에 빠집니까?
그것을 하면 마치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 같이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분별을 못하고 있는데 있어서 자기 영혼이 사망에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29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 시대는 하나님의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이라는 기본조차도 모르다 보니까 행위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명확하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아니면 은사를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 성화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전도를 합니다.
선교를 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를 합니다. 찬양을 드립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이 모든 것은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일이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일 없습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지극히 적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어느 목사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목사 중에 믿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아직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넘쳐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유대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한 것 같이 그렇게 믿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런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 한 가지만 보아도 그들은 유대교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아직까지도 자기들이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무지하게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은 자기들의 육체로 이기려고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지키느라 모든 힘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십자가에서 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율법을 안 지키고 있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이제까지 봐 왔던 모든 교회는 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천주교가 그랬고 또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이 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일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초대 교회 빼고는 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누군가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교회사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없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내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못 믿습니까?
그것이 율법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인정을 받으면서 교회법을 수도 없이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다 종교적인 행위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하지 못 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교회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주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있습니다. 그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형식의 차이지 사실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이성적 지식의 약간의 차이와 그리고 형식의 차이입니다. 그들은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미사라고 합니다.
예배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언어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같습니다. 저는 천주교 미사를 한 번도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미사를 드리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미사라고 하는 것과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의 차이는 그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형식을 가지고 서로 이단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가지고 서로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형식의 문제를 가지고 이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단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이 두 교회가 형식의 차이는 있어도 예수를 안 믿는 것에 있어서는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일입니다.
그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신 일들을 어떻게 믿느냐의 차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믿는다면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일입니다.
성경을 보고 주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면 그 일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성도는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 율법을 내가 지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알면 뭐합니까?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았으면 이제 그것을 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것을 거꾸로 하다 보니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구속의 일에 반하는 일에 열심을 내면서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저마다 들고 있는 향로에 불을 담고 그 불에 향을 피우며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나 그 불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과는 다른 불이었다.”
하나님께서 왜 나답과 아비후를 죽이셨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될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에 살라 죽이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육의 죽음은 우리의 영의 죽음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다면 나답과 아비후는 죽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이런 예표들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달을 수 있게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지 마시고 왜 나답과 아비후가 죽어야 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향로입니다.
성막을 강의할 때 분향단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성막의 모든 기구 하나하나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는 그것입니다. 성막에 대해서 모른다면 그는 아무리 교회 안에서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겼다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향로는 무엇입니까?
제가 주님의 기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을 이 분향단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분향단에서 기도를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해 주신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정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의 진심도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는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길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진심과 정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6:46절을 보면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이스라엘의 첫 제사입니다.
그 제사를 드리는 중에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 죽임을 당했는가 하면 향로에 불을 담아 향을 피워야 하는데 다른 불을 담아서 향로에 불을 피우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저도 이 불을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다른 불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다른 불로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 가져와야 합니까?
번제단에서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아야 합니다. 아무 곳에 있는 불을 향로에 담는 것이 아니라 민수기의 말씀을 보면 반드시 번제단에 있는 불을 향로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번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하지만 성경에서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바로 해석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는가를 늘 바로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알아야 나 역시도 나답과 아비후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노를 받은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경계로 보여주고 있는 진노입니다, 그들의 육적인 죽음은 우리의 영적인 죽음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바로 알아서 나답과 아비후와 같이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드리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막의 향로도 모르고 다른 불의 의미도 모르고 있습니다.
번제단의 불입니다.
이 번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럼 이 불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냥 일반 불이 아니라 향로에 담아야 하는 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온 불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번제단입니다.
갈라디아서 1:8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왜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습니까?
그들은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향로에 담아 있는 불은 번제단에서 나온 불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서 분향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면 그 분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는 향인데 그 불이 다르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번제단에서 어린 양을 태워서 번제로 드리는 일입니다. 그 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의미하는 불입니다, 향로에는 그 불을 담아서 향을 태워야 하는데 십자가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분향단은 아무리 주님께서 기도를 하셨다 해도 우리 죄를 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성막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하는가 하면 바로 이런 문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막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모형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지금 나답과 아비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예표를 통해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저주를 받지 말라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분향단에서 향을 태우는 일은 주님께서 우리 생명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기초가 무엇입니까?
바로 번제단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분향단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분향단에서의 그 기도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바로 알고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분향단에 향을 피우는데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믿지 않고 다른 불을 드린 나답과 아비후는 반드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 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초가 되지 않고 그것을 모른다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이 시대도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저주를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이 아니라 다른 불을 담아서 드리고 있는 이 시대 모든 사람 역시 나답과 아비후와 같이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그들을 반드시 죽이실 것입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요한계시록20:9절을 보면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마지막 때의 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저희를 소멸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나답과 아비후에게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셔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것이 진노입니다.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은 우리에게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예표로 보여 주신 사건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이 시대 교회 안에 얼마나 다른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소멸을 당하게 됩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첫 제사를 드리면서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섬겼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어서 제사를 드리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그저 형식에 맞추어서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죽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이 시대 예배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막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에 두지 않고 하는 모든 제사 예배를 결국 자기들을 진노에 빠뜨리고 있는데도 이 시대는 나답과 아비후가 되어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하나님입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거룩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를 않았습니다.
제사는 잘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와서 성막을 짓고 처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거룩하게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육적으로는 누가 보아도 정말 거룩한 모습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거룩함을 나타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거룩함을 보여 주시고 있는 가를 몰랐습니다.
안 믿었습니다.
성막을 보고도 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 하나하나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거룩하게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거룩함을 보이시는 가를 몰랐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가운을 입고 찬양을 보이고 거룩하게 말을 하면서 자기들이 거룩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다른 불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온 백성 앞에서 영광을 얻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 모든 백성이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반드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성막에서 첫 제사를 드리면서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가를 몰랐습니다. 그저 형식에 맞추어서 제사를 드리는 일에만 마음이 있었지 그 성막에서의 모든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아론의 아자비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 밖으로 메어 가라 하매 그들이 나아와 모세의 명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 밖으로 메어 내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렀다. 그들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들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카들의 시체를 성소에서 진 바깥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들은 모세가 시킨 대로 가까이 가서, 조카들의 옷을 잡아 끌어 진 바깥으로 옮겼다.”
저주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은 지금 이 시대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가 이들과 같이 저주를 자청하지 말라고 경계로 보여주신 예표입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이 어떻게 되는 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장사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진 밖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메고 간 것이 아니라 속옷을 잡아서 끌고 나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바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시고 죽은 후에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그 속옷을 잡아 진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성소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늘의 참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과연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람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셨습니다. 아무리 제사장이라 해도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성막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고 있고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저 자기들의 진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제사장입니다.
아론에게는 아들이고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는 형제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께 첫 제사를 드리는 중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첫 제사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합니다.
너희는 머리는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죽임을 면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풍습은 형제나 그 자식이 부지중에 죽으면 옷을 찢는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론과 그의 형제들에게 절대로 옷을 찢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지만 이것은 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죽음을 면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직 너희 형제 온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슬퍼합니까? 나답과 아비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몰라서 죽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슬퍼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영의 일입니다.
육적인 죽음 물론 우리가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슬퍼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육적인 죽음에는 너무도 슬퍼하면서도 영이 죽는 그것에 있어서는 절대로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영혼이 죽는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영혼 구원을 받지 못하는 그것으로 슬퍼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영혼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 정성으로 드리는 그것을 보면서 자기 육적인 생명이 당장 죽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나답과 아비후와 같이 다른 불로 분향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찌니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하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당신들은 회막 어귀 바깥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어기면, 당신들도 죽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주님께서 기름부어 거룩하게 구별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시킨 대로 하였다.”
회막에서 나가면 안 됩니다.
그 회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안입니다. 만약에 아들이나 형제가 죽은 것으로 인하여 두려워해서 회막 문 밖으로 나가면 그들도 역시 죽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죽는가 하면 아론과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신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회막에서 나가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제사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죽었습니다. 그것의 근본적인 문제는 형식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왜 번제단에 있는 불을 향로에 담아야 하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것만 모른 것이 아닙니다.
이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성막이 무엇인가를 몰랐습니다. 지금 이 시대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때에 분명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진멸할 것입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보아야 하고 또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그저 문자적으로 육적으로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이 나답과 아비후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이 아니고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성도가 되어서 주님께서 오실 때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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