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십일조에 대하여

십일조-7 아브라함의 십일조

윤주만목사 2018. 9. 16. 08:13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14:17-20절을 보면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버리지를 못 합니다

한번 정해져 내려오는 관습은 그것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가 않고 그것이 또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면 도저히 바꾸지를 못 합니다 한번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 율법의 굴레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의 이성과 지식을 가지고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지 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도 그렇게 정의를 하고 있고 한번 그릇된 길로 접어들은 사람이 스스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성경은 절대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른들 앞에서 술은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을 금하다 시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것은 아주 관대한데 술을 함께 마시는 것을 절대 용납을 하지 않는 나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린 사람들이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쌍놈이라고 욕을 하기도 합니다.

 

담배면 어떻고 술이면 어떻겠습니까?

사실 따지는 보면 담배냐 술이냐 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도저히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고 또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그렇게 고정관념처럼 정해져 있으면 담배를 피우는 것을 용납을 못하고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을 폭행했다가 도리어 화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 제사 문제도 그렇습니다.

저는 제 집안이 어려서부터 신앙의 길을 가고 있어서 한 번도 제사를 드려 본 적이 없지만 실제 제 주변에서 이 제사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또 심지어는 형제간에 원수가 지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죽은 사람이 먼저 입니까? 산 사람이 먼저 입니까? 제사가 옳다 그르다는 논하기 이전에 누가 먼저 인가를 생각해 보면 싸울 일이 아니라 화목해야 하는 일임에도 서로 한 치도 몰러서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인들도 지혜로워야 합니다.

자기 형제와 원수를 지면서 까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절대 원하는 일이 아니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제사를 드리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얼마든지 지혜롭게 할 수 있는데도 조금은 무식하게 형제와 다툼을 벌이다가 형제로 하여금 영원히 복음을 거부하게 만든다면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 형제의 마음까지도 변화 시키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슬기로우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앙인들도 너무 꽉 막혀 있는 사람들이 많고 너무 무대포로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자신들을 보면서 믿음이라고 말할 때 참으로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한 마디로 무식한 행동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관습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 할아버지가 해왔고 그리고 내 아버지가 해왔고 또 지금 내가 그것을 하고 있다면 아마 그것에 대해서 버린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교회 안에도 사실 이런 일들이 너무도 많이 있는데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그것이 믿음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관습을 따르면 안 됩니다.

성도는 아무리 그것이 내가 어려서부터 아니 내 부모님 대서부터 해 왔던 일이라 해도 성경이 그것에 대해서 반대를 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에 대해서 버려야 하는 용기가 필요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습처럼 행해오던 일이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깨닫고 또 누구를 통해 깨닫게 되었을 때 그것을 버리는 일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17절을 보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말씀에 대해서 너무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은 그런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누군가 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어떤 일을 행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믿음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못된 부분이 있을 때 그것을 고치라고 믿음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 영혼의 문제와 직결이 되는 것인데 나는 이제 까지 관습에 따라 행해왔는데 어느 날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면 그것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행하고 있다면 자기 혼자서 이것을 거부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아마 이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니 이 시대는 목사들이 아주 잘 이용하고 있는 신천지에 미혹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를 공격하게 됩니다. 아마 이런 공격을 받고 또 자기가 수십 년간 다니던 교회에 척을 지게 된다면 이런 결정을 한다는 것은 거의 사망 선고나 다름이 없습니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은 정말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만큼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기 힘들고 사실 사람의 능력으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인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이 말씀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되면 알게 됩니다. 기복주의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발람이 삯을 위해 기도를 한 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성도가 그런 기도를 안 하고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과 교제를 하지 않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다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귀신도 믿음이 있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관습처럼 행해오던 종교적인 행위가 구원에 걸림이 될 때 과연 그것을 안 할 수 있겠느냐는 쉽지가 않습니다. 아마 그 교회를 스스로 나와서 홀로 광야에서 예배를 드리는 고통이 따라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4:10-11절을 보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송구영신 예배가 성경적입니까?

사도바울은 해를 삼가 지킴으로 해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헛될까 하노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해를 삼가 지키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해를 삼가 지키라고 어디에도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매년 연말이 되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 성경적입니다

아니 드려서는 안 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 말씀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면 과연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교회에 장로고 권사인 사람이 이 말씀을 누군가로부터 듣고 드려서는 안 된다고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할 때 과연 그들이 교회에서 관습처럼 드리는 그 예배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거의 불가능 합니다

바로 이럴 때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라고 야고보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 교회가 커서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송구영신예배를 거절하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일 수 있겠지만 아마 그 교회에서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관습처럼 행해오던 그것이 비 성경적이고 또 복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것은 안 할 수 있는 행위를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를 나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진리적인 문제에 막 부닥쳤을 때 과연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은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누구도 건들이지를 못하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교회가 아주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단들도 한 결 같이 이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는 동조를 하고 있고 이 문제를 건들이면 아마 이단들도 역시 이단이라고 공격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십일조 문제를 건들이면 마치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먼저 입니까? 아니면 구원이 먼저 입니까? 교회가 수만 개 세워져 있다고 해도 그 안에서 구원을 받는 성도가 없다면 그것은 이 세상 건물에 불과 합니다. 그 건물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와 대적을 한다면 반드시 주님의 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그런 건물이라면 반드시 무너져야 교회가 선다고 믿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이 시대 한국 교회에 교인들에게 마치 믿음의 증표나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 십일조가 마치 구원 받은 성도의 표징이나 되는 것처럼 너무도 대견해 하고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할례를 통해 자기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구원의 표징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 편지에는 처음으로 십일조 문제를 설교로 올립니다.

그러나 천양이 있는 풍경 카페에는 이미 십일조에 대해서 몇 편의 설교를 올렸고 그것을 본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들을 보고도 이제까지의 관습에 의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는 성도는 지극히 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십일조를 안 하고는 교회를 다니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까 감동을 받고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다섯 왕이 쳐들어 와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아 갔고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가 기르던 사병들을 데리고 가서 그 왕들을 쳐부수고 조카 롯을 구해오는 길입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가 누구인가는 히브리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을 구해 가지고 오는 길에 마중 나와서 떡과 포도주를 준비 해 왔습니다. 이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이제 십일조가 나옵니다.

멜기세덱이 다섯 왕을 쳐부수고 오는 아브라함을 마중 나와 그를 축복해 주고 있습니다. 너에게 대적을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싸움을 아브라함이 했지만 그 대적을 붙이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렸으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당연히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참으로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민수기 18:24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레위인은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열한 지파에서 십일조를 드려서 레위인으로 기업을 삼게 하셨습니다. 이 십일조를 통해 레위인들은 제사장 직분을 행할 수 있었고 또 신명기에서는 이 십일조를 통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돕게 하셨습니다.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먼저 드렸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자기가 십일조를 하겠다고 했지만 성경은 그가 십일조를 했는지 안 했는지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중요한 십일조라면 그것이 믿음의 증표와 같은 것이라면 이삭도 했어야 하고 또 야곱이 약속을 한 것을 이행했는가를 성경을 자세히 기록을 했어야 하지만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십일조는 율법이 되었습니다.

아니 율법에 분명히 명시를 했고 십일조를 왜 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분명히 명시를 했습니다. 만약 십일조가 율법이 아니라면 아브라함과 야곱이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했다면 율법 책에는 기록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가 율법이 아니라는 주장은 너무 터무니가 없고 또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율법 613가지에 십일조와 그 규례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제사 제도를 위해 정해진 율법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레위 인들이 기업이 없으므로 그들이 제사를 드리고 또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기업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 기업을 열한 지파에서 자기들이 수확을 한 십일조를 통해 레위 인들의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 만약 제사 제도가 없었다면 레위인도 필요 없을 것이고 또한 레위 인이 없다면 굳이 십일조를 나머지 지파가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레위 인이 아니더라도 자기들이 감동을 받아 섬기면 되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7:12절을 보면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 졌습니다.

더 이상 제사를 드리는 레위 인이 필요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속죄로 모든 제사를 다 드렸습니다. 제사 직분이 변했으니까 이제 제사 제도에 필요한 율법도 반드시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 제도에 필요한 율법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제사 제도가 사라지면 레위인도 사라지고 그러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십일조도 사려져야 합니다. 이 문제는 그냥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받아 들이냐 아니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십일조를 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단순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냐 안 하냐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제사 제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임을 히브리서 7장에서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직도 옛 계명에 따른 십일조를 하게 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제사 제도를 따르는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문제입니다

단순히 감성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고 있는 십일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다면 이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결국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헛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드렸으니까 믿음의 자손인 나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과연 그 말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 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모두가 십일조를 했느냐 하는 문제를 살펴보면 됩니다. 만약 아브라함의 자손 모두가 십일조를 했다면 십일조에 대한 분명한 당위성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7:8-9절을 보면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레위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런데 레위는 어떻게 십일조를 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레위는 십일조를 안 했는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다고 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레위는 안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로 말미암아 레위도 십일조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레위는 분명히 안 했지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그 허리에 있었음으로 레위도 십일조를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레위만 해당 됩니까?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 다른 지파들은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릴 때 그 허리에 있지 않았습니까?

 

모든 자파가 다 그 허리에 있었습니다.

나머지 열한 지파도 모두가 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다 그 허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육적으로 십일조를 드리기 이전에 이미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대표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것이 또한 내가 범죄 한 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의가 또한 내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절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대표성을 받아들여야지만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 대표성을 말씀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레위도 그 허리에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십일조를 다 드렸다면 더 이상 십일조를 해서는 안 되고 더구나 제사 제도가 번역이 되었는데 아직도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 제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7절을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누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까?

아직도 율법의 행위를 따라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레위도 허리에 있어 같이 드렸다고 믿는 그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십일조를 행위로 드리면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27절을 보면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까?

성경은 분명히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레위가 그 허리에 있어 같이 드렸다고 말씀을 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십일조 문제로 다투지 말고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제사 제도에 있는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선교를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십일조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이 좋을지라도 방법이 나쁜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제사를 거절하는 십일조를 드려서 선한 일을 하겠다고 하는 자체가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며 드리고 있는 십일조로 인하여 진노가 임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제사를 거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행위를 하고서도 자기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행위를 따라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따라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했으면 내가 한 것과 동일합니다. 내 믿음의 조상이 했으면 이제 나는 안 해도 되는 것이 성경의 대표성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이 얼마든지 비판을 해도 저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분명히 여러분의 심령을 감동하고 있고 이제 여러분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야고보서의 말씀 그대로 죽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 아무리 강변을 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헌금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는 교회가 어떻다는 것을 다 알고 있고 그런 성도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오히려 십일조보다 더 감동을 받아서 행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33-34절을 보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있는 성도들은 교회의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십일조 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정해서 십일조를 한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자기 밭과 집을 팔아서 교회가 설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탐욕에 물들었습니다.

십일조를 통해 부를 축척하고 있고 이 시대 100만의 버는 과부의 가산을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해서 삼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요구하는 자도 진노를 받을 것이고 또 이것에 속아서 하는 자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제사를 부정했기 때문에 반드시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연보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일하는데 있어 즐겨 내는 자를 기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제사를 거절하는 방법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좋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니 그것을 하는 순간 반드시 진노를 받게 될 것이고 교회에 나와서 지옥에 가는 가장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제가 전해 드린 말씀이 틀리다고 생각을 하시면 굳이 안 하셔도 되지만 이것이 맞다고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면 반드시 여러분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만약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지 않으면 여러분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그런 죽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십일조 악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믿는 성도라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면 십일조를 하지 않을 것이고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복음의 일에 연보를 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그런 성도만이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그런 성도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단번에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고 믿는 성도는 십일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보를 통해 얼마든지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성도만이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더욱 더 은혜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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