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성막에 대하여

제13강, 성막 지붕

윤주만목사 2017. 2. 1. 21:09

출애굽기26:1절을 보겠습니다. (구 121쪽)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

 

성막은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본 식양대로 성막을 지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 지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신 그대로 지었습니다. 이제까지 성막에 대해서 그 식양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성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경륜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성막을 보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을 보고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모형과 그림자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있는 그 모형과 그림자를 보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짓고 또 솔로몬으로부터 해서 3번의 성전을 지었지만 이제 그것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없애셨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그 모형과 그림자를 보고 거기서 더 진보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를 보았으면 거기서 하늘의 일에 대해서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저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있는 성막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면서 그런 행위들로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백성은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이루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는 그들이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구원을 해 주시고 있는 가를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생명을 얻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얻으면 뭐합니까?

그 생명이 다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담대함으로 이제 휘장을 지나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보호해 주시고 있는가를 성막의 지붕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가 있습니다. 이 성소에는 성소와 지성소로 분리되어 있고 그 가운데 휘장이 쳐져 있습니다. 성막을 이제까지 배워서 우리가 알겠지만 성막 문으로 들어온 백성은 죄인입니다 그 죄인이 자기를 대속할 제물을 가지고와서 번제단에서 번제로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거기까지만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얼마만큼을 대속했는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 세상 죄는 아담이 범죄를 한 것으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물두멍에서 씻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반 백성이 씻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람들이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을 했다는 것은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물두멍에서 씻지를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서10:22절을 보겠습니다. (신 363쪽)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믿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내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아무리 안다 해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두멍에서 씻은 사람만이 성소로 들어갈 수 있고 성소에서 생명을 얻은 성도만이 담대함을 얻어 하나님이 계신 보좌 앞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알면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알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꼭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절에 있는 스님들도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을 많게는 수십 번을 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이 세상 종교의 학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마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설교들을 듣고 또 성경을 읽다 보니까 성경에 웬만한 말씀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목사인 저보다도 성경 구절을 척척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아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것은 문자적으로 아는 것이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진리를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다는 것을 알면 뭐합니까?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다면 그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아는데서 생깁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아는 것과 진리를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으로 마치 진리를 아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뭐합니까?

자기의 죄를 모르면 그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죄도 모르면서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믿을 수 없고 또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죄도 모르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르다 보니까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는데 하도 많이 배워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자기 죄를 모르다 보니까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지지가 않는 사람은 아직 물두멍에서 씻지를 못하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호해 주시겠습니까?

믿음이 있는 성도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을 보호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이 있는 성도들을 보호해 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보호를 받으려면 이제 성도는 담력을 얻어서 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성소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은 그저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육의 보호가 아니라 생명을 보호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들어가야 우리의 생명이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체를 성소라고 부르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는 성도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는 사람만이 성소에서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소를 덮고 있는 것이 바로 성막의 지붕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보호를 받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성소 안 입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이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지 성소 밖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막에서는 우리가 벌써 지성소에 들어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2:5-6절을 보겠습니다. (신 311쪽)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허물로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것으로 치는 것입니다 아니 육체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는 살아 있어서 이것이 실감이 나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누가 삽니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생명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생명이 있는 성도는 우리가 성막을 통해서 배웠듯이 이제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성도는 이미 지성소에 들어갔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함께 앉았습니다.

이것은 영의 일입니다 우리가 아직 영의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믿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있는 성도가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있는 성도를 주님께서 끝까지 보호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성도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진설병 상과 등대와 분향단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십자가를 보고 있다 해도 생명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보고 있습니다. 물로 씻고 성소에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믿음 자체가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성막에 들어와서 십자가를 보았으면 뭐합니까? 아직 믿음이 없어서 성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다면 그는 생명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아직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것은 아직 성막에 있는 것입니다 성막에서 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성도라면 그런 담력을 얻어서 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담력을 얻지 못해서 성소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어서 자기가 들어간 것 같아도 실제로는 담력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면서도 담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성막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담력을 얻어 성소로 들어가서 휘장 사이로 난 새롭고 산 길을 따라서 들어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고 확신을 하는 성도는 담력을 얻어 이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을 보호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보고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오묘하고 깊은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제가 깎아 내리고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야 하지만 믿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 성소에 들어가지를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소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성소와 지성소를 덮고 있는 것이 성막의 지붕입니다. 이 지붕 안으로 들어온 성도는 생명이 있는 성도고 하늘에 함께 앉아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32:7절을 보겠습니다. (구 824쪽)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셀라)”

 

주는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피난처가 어딘가 하면 바로 성소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가 피난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소입니다.

이 성막 전체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성소가 우리의 은신처가 되고 있고 그 성소 안에 있는 성도들을 보호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막은 없어졌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에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막이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도 이 성막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일을 우리가 믿음으로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보고 있는 성도들은 믿음으로 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 있고 담력을 얻어 휘장 사이로 난 새롭고 산 길로 들어갔습니다.

 

내 육체가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모형을 보고 우리의 영혼이 새롭고 산 길로 들어갔다는 말씀입니다 그 장막 안을 덮고 있는 것이 지붕입니다. 이 지붕은 우리를 지켜 주고 또 우리를 은밀한 곳에 숨겨 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은밀한 곳에 숨겨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장막 안에는 사단이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사단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영의 일을 믿음으로 그 하늘에 다시 들어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은밀한 곳에 우리를 숨겨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지붕으로 숨겨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장막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숨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를 재난에서 지켜 주실 분!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니, 나는 소리 높여 주님의 구원을 노래하렵니다.(셀라)“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도 보호를 받지 않으면 역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영의 일에 대해서 우리는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영의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로서 난 영을 주님께서 이렇게 보호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영의 말씀입니다

실제 다윗은 육을 보호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는 자기 영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가 되고 나를 지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윗도 나이가 들어서 그 육체는 결국에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보고 육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영을 생각하는 성도가 지혜롭습니다.

 

요한일서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주시므로, 악마가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사단이 그를 해치지 못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로서 났다고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악마가 해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의 비밀입니다 어떻게 지켜주시고 있는가 하면 장막 은밀한 곳에 숨겨 주시기 때문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체는 마음대로 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사단이 만지지도 못하게 은밀한 곳에 주님께서 숨겨 주시고 있습니다. 이 영의 신비한 일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계신 보좌 앞에 있기 때문에 사단이 거기까지는 들어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일을 제가 설명을 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성막 지붕을 통해서 우리는 이 영의 일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는 마음대로 만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성도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 죽을 때까지 죄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로서 난 영은 주님께서 은밀한 곳에 숨겨 주시고 있고 초막의 비밀한 곳에서 지켜 주시고 있기 때문에 사단이 그 영을 만지지도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 있는 성도는 주님께서 지붕으로 은밀히 감추시고 있기 때문에 사단이 그 안에는 들어오지를 못해서 만지지도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영의 일은 저도 말씀을 드리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말씀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로서 난 우리가 또 다시 이 세상에 노출이 된다면 사단은 그 영도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은 영의 일입니다.

이 성막 자체가 얼마나 신비하고 오묘한가를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막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보여 주시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그것을 자기들의 손으로 짓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사람들은 이 성막에 대한 말씀을 보고 있지만 그것을 육의 눈으로 보다보니까 전혀 이해가 안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들어갔습니다.

성소에서 휘장 사이로 난 새롭고 산 길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우리 육체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로서 난 새 생명이 믿음으로 들어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들어가 있는 성도를 주님께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지켜 주시고 있습니다. 초막의 비밀한 곳에 지켜 주시고 있고 장막의 은밀한 곳에 숨겨 주시고 있습니다.

 

안 믿습니다.

아니 성막을 보고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기구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직까지 성막의 뜰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을 하시고 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어떻게 지켜 주시고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숨겨 주시고 있는 가를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육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성도는 이제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면서도 육에 머물러 있습니다. 영의 비밀한 일을 알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 교인들은 그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교회 안에는 들어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들어가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성막 지붕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의미하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를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26:14절을 보겠습니다. (구 122쪽)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

 

성막의 지붕은 내 겹으로 쌓여 있습니다.

우리가 겉에서 보았을 때 보이는 것은 해달의 가죽입니다.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 덮게를 만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해달의 가죽으로 성경에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16장10절에서는 똑같은 단어로 물돼지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돼지가 맞는 가 해달이 맞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쓸모없는 것을 가지고 논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이 시대에 정확하게 규정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해달이라고 한다 해도 그렇고 물돼지라고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물돼지는 돌고래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해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가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기 때문에 저도 딱히 어느 것이 맞는다고 말씀을 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있습니다.

이것으로 신을 만들어서 신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분명히 이 가죽으로 여인들의 신을 만들어서 신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광야로 나왔을 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좋은 것을 다 가지고 나왔습니다. 애굽의 집에서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다 가지고 왔습니다. 아마도 이 해달의 가죽은 그들이 광야로 나가면서 가죽신을 신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누구나 돈이 있으면 신을 사 신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도 자기가 좋다고 해서 아무나 신을 신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분명히 계급의 상징과도 같았고 가죽신은 일반 평민이 신을 수 없는 신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는 지붕입니다.

육적으로 볼 때는 해달의 가죽은 검습니다. 그리고 이 가죽으로 덮은 것은 성소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막의 기후에서 성소 안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가죽으로 알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추위와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그 털은 까만색입니다

해달의 가죽은 모든 것을 차단해 줌으로서 성막 안에 있는 사람에게 추위 더위 비바람이 오지 않음으로 아무런 해가 오지를 않습니다. 성막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막아 줌으로 아무런 해가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해를 막아 줍니다. 죽음과 고통과 질병과 모든 해를 막아 줍니다. 그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네 겹의 덮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밖에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해달의 가죽입니다. 다른 덮개들은 그 안에 덮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소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어진 덮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이 해달의 가죽만 보이고 있습니다.

 

그 안을 볼 수 없습니다.

육적으로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있지만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 있어서 성막 안을 사람들이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해달의 가죽이라는 것은 검은 색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보아도 별로 눈길이 가지를 않습니다. 그 당시 중동 지방에서는 신으로 만들어 신을 정도로 가죽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11:9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해달의 가죽은 성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온다 해도 이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 있어서 상함이나 해함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우리를 덮어 줌으로 해서 성소 안에서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단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죽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를 하고 있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면서도 아직까지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단에게 붙들려서 자기들이 얼마나 상하고 있고 해를 입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식이 있으면 자기들이 사단의 미혹으로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데 지식이 없어서 상함을 입고 해를 입고 있습니다. 해달의 가죽은 육적으로는 이 세상의 비바람과 태양과 추위를 막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적으로 상함을 입고 해함을 입는 것에서 막아주는 것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면 결국 사단에게 붙잡혀서 상함을 입고 해를 당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렇게 마귀의 자식들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덮어 주시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우리를 상함과 해됨에서 보호를 해 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막을 보고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면 뭐합니까? 솔직히 이 시대 사람들을 보면 지적으로는 뛰어날지 몰라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해달의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 져서 상함도 없고 해됨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밖에서 아무리 성막을 바라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덮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가는 것을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그렇게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 져서 상함도 없고 해됨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 안에 있는 성도만이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막 전체의 모든 기구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막을 보고 성소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성도만이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생명을 주님께서 보호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사야53:5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3쪽)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왜 우리가 상함을 없고 해됨이 없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찔림을 받았고 그가 우리를 위해 상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해달의 가죽은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덮어 주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해달의 가죽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상함과 해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가 찔림을 당하셨고 그가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막아 주시고 있습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을 막아 주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상함도 없고 해됨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다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해달의 가죽과 같이 상함을 입고 채찍으로 맞으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야 그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이스라엘과 같이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단이 얼마나 강한 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사단에게서 보호할 수 있는 분이 없다는 것을 해달의 가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은혜를 모르고 은혜 안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말로는 예수 안이라고 하지만 실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고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는 방주가 아니라 광야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 성막을 자기들의 손으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영의 일을 육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의 일을 믿어야 하는데 믿지를 않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사망이 이르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성막을 보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도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시대도 믿음이 없어 교회 안에서 이스라엘과 같이 행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입니다

사람이 볼 수 있는 지붕의 겉은 해달의 가죽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해에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해를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해를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편85:2절을 보겠습니다. (신 865쪽)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그의 피로 성소를 덮어 버렸습니다.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붉게 물들이 숫양의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덮으신 것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의 피로 덮으셔서 그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서는 죄가 나타나지가 않습니다.

 

죄가 안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성소 안을 모두 덮어버림으로 해서 그 안에는 죄가 안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성소를 덮고 있는 모든 덮개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이렇게 성막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죄가 보이면 그 성소 안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 죄인은 성소 안에 들어갔다가는 그냥 죽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참 장막에는 점도 없고 흠도 없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도들의 죄를 다 덮어 버리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죄의 문제가 참으로 문제가 많이 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모습니다

 

죄를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자기가 고백을 해서 용서를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이 세상의 샤머니즘 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의 방법으로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믿지를 않고 있고 그 죄를 안 지려고 율법을 더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안 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죽을 때 까지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성소 안에 있는 생명은 죄가 안 보입니다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덮어 버리시니까 죄를 찾으려고 해도 없습니다.

 

죄를 우리가 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세상의 종교는 자기 죄를 씻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위들을 하고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모르기 때문에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의 피가 덮어 졌다고 해도 그것이 실감이 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는 그 피로 덮어 버리셨습니다.

 

죄 안 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죄를 마음 놓고 지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려고 해도 사단보다 약하기 때문에 알면서도 죄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덮어 버렸기 때문에 죄가 안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해결 방법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완전히 덮어 버려야지 죄가 안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5:8절을 보겠습니다. (신 245쪽)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 숫양의 가죽은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소 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소에 들어오기 까지는 믿음이 필요하고 또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소에 들어와서 하나님보좌에 나아가 있는 성도들은 영원히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완전하게 덮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만이 주님께서 사랑으로 덮어 주시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이 말이 얼마나 맞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으로 덮어 주시기 위해서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지붕을 덮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영원히 있습니다.

성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원히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들어가는 천국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랑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함께 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살고 싶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이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육적인 사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육체의 생명이 탄생을 하는 것도 사랑에 의해서 탄생이 됩니다. 그리고 탄생이 된 생명을 그 부모들이 얼마나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사랑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야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밖에는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성소를 보고도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왜 못 들어갔는가 하면 율법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율법에 이 성소에 들어가는 자는 죽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감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혜를 구해서 이 성소를 알았다면 당연히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제사장들이 이 성소를 섬기는 일을 했지 그 안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지를 못 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에서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리로 들어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가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들어가셨는데도 이 시대는 그리로 들어갈 담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담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아직도 율법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법아래 있는 사람은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담력을 얻어 성소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를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막에서 제사는 너무도 잘 드렸지만 그들은 그것이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도 실체를 알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그런 것을 보고도 이 시대 역시도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실제 하나님께서 이 성소를 섬기는 법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성소에는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율법대로 하면 우리는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율법을 따른 이스라엘은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법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법을 따라서 행하는 자는 절대로 이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우리에게 담력을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법으로는 못 들어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힘입는 성도는 담력을 얻어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들어가신 것 같이 우리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이미 성소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믿음으로 들어가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를 덮어 주시고 있습니다. 해를 받지 않게 덮어 주시고 있고 또 사랑으로 우리를 덮어 주시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이 시대는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영의 일을 믿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점점 더 행위로 빠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의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출애굽기26:7절을 보겠습니다. (구 122쪽)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밖에서부터 세 번째 덮개입니다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막 지붕에서 가장 어려운 말씀이 아닌가를 생각해 봅니다. 염소털이라는 말씀이 있지만 이 염소털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성막론을 보면 이 염소털을 흰 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림으로 나와 있는 성막의 덮개를 보면 다 흰색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는 염소털은 검은 색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어느 색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가서에서나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할 때 검은색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고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염소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염소를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하는 곳은 없습니다. 물론 제사에서 염소를 제물로 드린 것을 제가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성막의 앙장을 양털로 짜라고 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흰색입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라면 이미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이 있습니다. 죄를 덮어 버렸다면 당연히 그 안에 있는 성도는 깨끗합니다. 저도 이 염소털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면 이미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스가랴9:9절을 보겠습니다. (구 1320쪽)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스가랴 선지자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이 세상은 공의를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공의롭지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이 성소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공의의 의로 우리를 판단해 주시고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공의의 의로 우리를 판단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고 과부의 제판장이시고 또 나그네에게 양식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아, 과부, 그리고 나그네는 이 세상의 의로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공의로 판단을 해 주셔서 그들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구원을 받은 성도가 공의로 판단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가 있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공의로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의를 모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 공의를 모르다 보니까 점점 더 율법주의에 빠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예수님께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의로 판단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 외모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공의로우십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공의로우시지 않았다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은 그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먼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죄가 크고 작다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그렇고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척도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십일조를 내기 않은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모르다 보니까 그런 말을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생명을 얻는 것을 율법의 잣대로 보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고 지금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십자가에 달려 같이 죽어가는 한편 강도도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이 공의로 판단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공의로 덮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34쪽)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환난을 받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환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환난을 받은 우리에게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환난을 받고 있습니까? 물론 복음을 전하면서 환난을 받는 것도 있지만 우리는 사단보다 약해서 늘 죄를 짓고 있고 그 죄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이 율법으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람의 눈에는 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고 또 못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이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법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고아나 과부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도 역시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공의로 판단을 해 주시니까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이 공의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공의의 의로 판단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를 보면서 그것을 잣대로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으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고 있습니다.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보는 한 장의 사진에 불과합니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든지 공의의 판단으로 우리를 성소에서 보호를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그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넘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공의로우시지 않다면 우리는 그 성소 안에서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공의의 의가 아니고는 우리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같이 악해져서 공의의 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를 보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알고 있습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있습니다. 양은 축복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염소는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양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염소보다 더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닙니다. 또한 더 의로워서도 아니고 선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공의로 판단을 해 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공의롭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공의가 무엇인가도 모르고 그저 율법의 행위를 보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버림을 당했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주님께서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믿지를 못하고 있고 그 공의로 판단을 받으려 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로 판단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담력을 얻어서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가 없다면 성소에 들어가지를 못 합니다. 성소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을 공의로 판단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편37:28절을 보겠습니다. (구 829쪽)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그 성도를 버리지 않습니다.

왜 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하면 공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의로 판단을 하면 당연히 버림을 받지만 공의의 의로 판단을 받기 때문에 성도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온 성도들을 영영히 보호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덮개는 그 안에 있는 성도를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덮개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넘칩니까? 주님은 공의로우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성소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을 영영히 보호를 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있습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공의로 판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가 양이고 오른편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믿음을 모르고 그저 종교에 빠져 행위에 열심을 내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 성도는 공의의 의로 판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지를 못하니까 오직 예수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였지만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공의의 의로 판단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누가 영영히 보호를 받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한 모양이라고 지키고 있다면 그는 공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에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이 공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율법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또 주 예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그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공의를 버렸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아무리 공의를 이야기 한다 해도 그는 공의를 버린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우리를 공의로 판단을 해 주시고 성소에 들어온 성도들을 영영히 보호를 해 주시고 있는데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소경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믿음을 폄하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그것이 얼마나 든든한 가를 알고 있지만 믿음이 없는 자들은 도무지 깨닫지를 못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의지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주님께서 영영히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26:1절을 보겠습니다. (구 121쪽)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

 

성소의 맨 안쪽에 쳐 있는 앙장입니다.

해달의 가죽과 붉게 불들인 숫양의 가죽과 그리고 염소털로 짠 앙장과 성소 안에서 볼 수 있는 그룹들을 공교히 짠 앙장이 있습니다. 그것들의 치수를 제가 일일이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드릴 수 있지만 그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굳이 말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은 성막 문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룹들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룹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소 안쪽에서 보이는 앙장은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시편8:1절을 보겠습니다. (구 808쪽)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성소 안쪽에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룹들을 공교히 짠 앙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소의 덮개 하나하나는 이렇게 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맨 안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다윗의 시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사람의 눈에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들의 풀과 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 율법의 의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생명을 얻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썩은 냄새만 진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래서 영광이 나타날지라도 그것은 결국에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믿어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이아몬드가 아름답다 해도 이제 갓 태어난 아이에게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아는 성도만이 이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이 왜 아름답습니까?

그것은 그 이름을 부른 자에게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썩는 생명도 아름다운데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우리가 그 신령한 몸을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생명이 썩지 않는다는 것이 상상이나 됩니까? 그 생명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영광이 하늘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소의 앙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 있는 성도만이 이 영광을 볼 수 있고 영광에 참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영광으로 덮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그것을 알아가는 순간마다 은혜가 넘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은 너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위에 있습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만이 그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광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영광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도 영광을 얻습니다. 어떻게 성도들이 영광을 얻는가 하면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복음으로 영광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영광이 있기에 우리 성도들 역시 복음으로 영광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2:16절을 보겠습니다. (신 168쪽)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무슨 영광입니까?

부활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부활을 하시지 않았다면 영광을 얻으실 수 없습니다. 이 부활이라는 것을 우리가 지금은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영광이 얼마나 큰가를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썩지 않는 신령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상으로는 썩지 않는 신령한 몸이라는 것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가 그 형상을 보게 되면 그 영광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이 든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또 우리가 부활을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광을 우리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대통령이 취임을 해도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잠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도 그렇게 영광이 넘치는데 영원히 왕 노릇 하는 그 영광은 상상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광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영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하늘 위에 있어서 우리 역시 부활을 하고 난 후에 그런 영광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은 내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광이 덮고 있습니다.

성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덮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영광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그에게 붙어 영광에 참여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영광으로 우리를 덮어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절대로 부활을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절기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세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어느 사람도 부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을 한시적으로 살다 죽고 그것으로 끝이 난다면 우리는 이성이 없는 짐승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복음은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복된 소식입니다. 짐승 같이 죽어서 사라져야 하는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육체가 아닙니다.

만약에 지금의 육체로 다시 산다고 하면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저 같아도 굳이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 영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부활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성소에 들어가서 그룹들이 공교히 수놓은 앙장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 영광에 참여를 하는 성도가 되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61:4절을 보겠습니다. (구 845쪽)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셀라)”

 

주위 장막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오직 믿음이 아니고는 이 영의 비밀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늘 깨어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성소에 들어가지를 못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으니까 이제는 들어가야 합니다.

 

영원히 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영원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로서 썩지 않는 형상으로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성도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 아직까지도 성소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해를 막아주고 있습니다.

모든 죄를 덮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공의로 판단을 해 주셔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 영광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지식이 없어 이스라엘이 망 했습니다.

역시 이 시대도 지식이 없어 망하는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으로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행위를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들을 이루셔서 우리가 지금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는 성도가 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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