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8:12절을 보겠습니다. (신 179쪽)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로마 군대 병정들과 그 부대장과 유대 사람들의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를 잡아 묶어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피조물의 육체는 버리시고 우리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보고 아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언어로도 설명이 안 되는 곳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에서 환상을 보았지만 같더라. 라고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버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뒤 성경대로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을 하심으로 해서 우리도 주님과 같은 생명을 얻는 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그에게 붙은 자라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가 그 일을 막으려고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는 것을 보시고 검을 꽂으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경대로 이 잔을 내가 마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종교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반드시 성경을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증거를 받음으로 해서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교리에 따라 성경을 무시를 하면서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군대가 와서 주님을 잡으려고 할 때 사도 베드로가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검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우리 인생이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가 아무리 주님의 제자라 해도 그리고 종교인들이 보낸 군대를 막을 힘이 있다고 해도 주님께서 마시겠다고 하는 잔을 우리 인생들이 막을 수도 없고 절대로 막아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창조하신 일의 영광이고 영생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 주셔야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거하신다는 말씀을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이 실상이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에게 이 세상은 그저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만이 실상이기 때문에 그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오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아시지만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기 때문에 마시겠다고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하시는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은 헛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받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 영의 일을 모르고 그저 종교에서 이야기를 하는 대로 표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모릅니다.
영의 생명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 세상의 철학적 지식에 따라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이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세뇌를 시키고 있고 마치 마약을 하는 것과 같이 그 중독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잔을 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군대는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을 하고 주님 홀로 잡히셔서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일의 영광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시편27:3절을 보겠습니다. (구 820쪽)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성경대로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그냥 오셨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다 성경에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말씀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심으로 해서 우리 피조물들이 믿음으로 역사를 하게하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태초에 있는 생명으로 하나가 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 문자를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저 이 세상의 책을 보고 아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성경을 인용을 한다고는 하지만 저 역시 정말 부족하기만 합니다. 이제까지 종교는 거의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성경에서 인용하는 말씀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말씀입니다
성경이 성경을 인용을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교는 자기들이 성경에 각주를 달아 놓은 것 외에는 성경을 인용을 하지 못하게 했고 그것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인용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인용이 되는 말씀을 찾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게 그들의 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서로 인용을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기 위해서 실제 쉽게 인용이 되는 말씀들을 이사야 말씀이라든지 시편의 말씀이라든지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말씀만 인용이 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입니다
다윗이 기록을 했을지라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실제 이루시는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시편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생을 얻으려면 반드시 증거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종교는 그것을 스스로가 막고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그들은 천국 문을 막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까지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용을 해서 먼저는 주님께서는 창조주시이심을 믿어야 하고 창조를 이루시는 일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어야 영의 일을 믿을 수 있는데 종교는 원천적으로 차단을 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하고 합니다.
그리고 알레고리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들이 말을 하는 영지주의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자기들의 교리를 세우기 위해서 성경에도 없는 말을 만들어서 사용을 하고 있고 그런 언어적 표현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는 것을 차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대입니다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지금 요한복음을 보면 시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편의 말씀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들이 세상을 살면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다윗과 같은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자기들의 일과 결부를 시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안연하다. 라는 히브리어의 뜻을 보더라도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안심하다, 안전하다. 등으로 사용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 아버지의 잔을 마시면서 군대가 이렇게 주님을 결박을 하더라고 주님은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아시기 때문에 아버지를 신뢰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습니다.
믿는다는 표현은 이상할지라도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셨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시는 말씀으로 충분히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인 표현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 요한복음에서 이 시편의 말씀 그대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신 잔을 마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연합니다.
주님께서는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더라도 우리의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잔을 마시기로 받아들이시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주님을 결박을 하고 이제 십자가에서 죽이려 한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시지만 주님께서는 창조주시기 때문에 안연하다는 것을 시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입니다
이렇게 모든 성경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모세의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으면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이고 그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태초에 있는 생명을 얻음으로 해서 영생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시편의 말씀과 요한복음의 말씀을 전혀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시편에서 다윗이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기록을 했고 주님께서는 기록된 그대로 요한복음에서 군대에게 결박을 당하시면서도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안연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성경을 보고 푸는 것을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이지를 못 합니다.
저는 그들이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시편의 말씀과 요한복음의 말씀은 너무도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종교에서 신학을 배운 사람들은 그 종교가 이렇게 성경을 푸는 것을 반대를 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성경을 인용을 하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고 그래서 인용을 하는 각주를 달아 놓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입니다
그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군대에게 홀로 잡히시면서 제자들을 다 보내라고 용납을 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홀로 잡히셨지만 주님께서는 안연하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고통은 있지만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니 그분이 이루셨기 때문에 시편에서 다윗이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요한복음5장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말씀대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이고 성경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을 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이 누군가 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대로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영생이라는 인생의 단어를 보고 아는 것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인들과 이방에서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안연합니다.
이미 17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전입니다.
우리 인생의 언어로 이미 예정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과거형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주로서 다 아시는 일이지만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잔입니다
주님께서 창조를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신 성도는 영생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을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9:28절을 보겠습니다. (신 362쪽)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우리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내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피조물들은 다 사망으로 가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시고 그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얼마나 가슴 벅차는 말씀입니까? 우리 언어로 표현조차 되지 않는 그리고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그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역사를 하게 하시고 그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자들이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종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이 말을 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불교에서 말을 하는 극락이나 그리고 무당들이 이야기를 하는 내세나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지혜가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세를 이야기를 하고 있고 다만 종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만 다를 뿐인데도 그것이 다르다는 것으로 자기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이방의 종교는 사도들이 죽고 난 후부터 싹트기 시작을 했고 그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그들이 거짓말에 속아 막연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창조하신 일의 영광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굳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되고 아무리 강한 군대가 온다고 해도 주님의 말씀 한 마디면 그들은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서 언약의 피를 흘려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히브리서에서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조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번역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창조하실 때부터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이 에덴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우리 인류를 죄악의 종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인생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셔야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잔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 없습니다. 죄의 값을 다 갚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 기초적인 일도 모르는 인생들이 그저 감성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 외치고 있고 노래까지 집단적으로 부르면서 마약에 취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히브리서에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입니다
그는 죄를 지었고 그래서 우리 인생은 죄악의 종자입니다 실상은 우리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인생들이 생각을 하는 지옥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신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가 죽을 수 있게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서 우리 피조물들이 죽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이 십자가의 의미도 모르면서 그저 자기들의 감성으로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일의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정말 부탁드립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면서 육체대로 알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을 제가 부정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제를 하는 목적은 바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창조하신 일에서 보면 이 일이 가장 먼저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도 죽었고 아브라함도 죽었습니다. 만약에 이 일이 2000년 전에 일이라면 그 이전에 있던 사람들은 그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하고 그래서 우리 성도는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믿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8:13절을 보겠습니다. (신 179쪽)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데,”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누구를 예표를 하는 인물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아도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를 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종교가 되었고 당시는 더욱이 로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시대다보니까 대제사장의 임명도 로마의 영향력에 있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반포를 하시고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의 가장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론을 세워 대제사장을 삼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생직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이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예표를 하는 사람은 다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나 아론 등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을 부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율법을 예표를 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론입니다
그가 모세가 죽기 전에 먼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에 올라가게 하시고 거기서 아론의 옷을 벗겨 엘르아살에게 입히게 하시고 아론이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대제사장 직을 맡게 하시고 광야라는 교회에서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아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를 못하게 하셨습니다.
구원입니다
광야는 교회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단 두 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두 명만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분명히 모세와 아론도 구원을 받았고 또 여러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의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모세나 아론 그리고 성막을 지었던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았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표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습니다.
이 대제사장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3가지의 비유의 직책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왕으로, 선지자로,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굳이 복음을 듣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성경을 보면 그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행위는 다 율법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그냥 기록이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삶입니다
그들은 종교인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율법대로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저 자기들의 철학에 따라 성경을 보고 있고 제 각각의 생각에 따라 성경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율법에 따라 이야기를 하고 있고 행동도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21:4절을 보겠습니다. (구 178쪽)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율법주의로 살았는가를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거대한 종교적 사회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방의 교회는 물론 그들과 같이 집단화된 교회도 있지만 이 시대 교회를 보면 거의 개 교회 중심으로 가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속해 있습니다. 종교 단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개 교회에 직접 어떤 법으로 통제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법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교회가 대형화가 되다보니까 그렇게 하면 그 교회가 교단에서 탈퇴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교단도 어떻게 보면 대형 교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입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 같은 곳입니다. 그런 종파들은 중앙에서 모든 인사권에 있다 보니까 또 종교인들이 인사이동을 하다보니까 중앙의 통제를 받고 있고 또 거대한 종파에서 그들은 벗어나지도 못하게 법적으로도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국가 자체가 교회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한 명이 있고 그가 일 년 일 차례 온 백성을 위해서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가장 큰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 구심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된 것은 성경에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율법이 반포가 되고 난 후로는 그들은 제사장을 중심으로 모든 결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대제사장은 율법을 보더라도 그가 해야 하는 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권세는 왕과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입니다
더구나 대제사장입니다. 율법에 그들을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백성의 어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른인즉 스스로를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정말 거룩하게 보이고 있고 율법의 의로도 흠이 없이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른입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도시 사회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종교인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그의 말이 곧 법인 것과 같이 하고 있는 것보다 더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군대입니다
물론 그들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주님을 잡아서 대제사장에게 데려오는 것은 레위기의 율법대로 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말에 따라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대제사장에게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조금 특별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다음 아들이 대제사장을 하거나 아니면 왕이 임명을 해서 대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로마 시대고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역사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는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말씀할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거의 일 년에 한 번씩 로마에 의해서 대제사장이 바뀌게 되었고 그래서 대제사장을 했다가 물러나기도 했고 또 다시 대제사장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때입니다.
가야바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로마와 결탁을 해서 그들에게 대제사장의 직무를 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고 그렇게 행위를 했기 때문에 주님을 잡아서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고 성경에서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 종교 안에서 서로를 인정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율법주의를 따라 모든 것을 행했기 때문에 당연히 주님을 잡아 결박을 해서 안나스에게로 끌고 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보고 율법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고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행위를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을 잡아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주신 잔을 누가 먹을 수 있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라고 다르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그들에게 경계로 하는 말씀이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next 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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