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2:15절을 보겠습니다. (신 168쪽)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이미 그때에 창조가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들로서는 성경을 보고 있지만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그리고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렇게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실상은 이 세상에 다른 신을 믿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 근거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그리스도편지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대해서 율법으로 그리고 여러 선지자의 말씀으로 증거를 해 주고 있지만 인생들은 그저 자기들의 철학적 지식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왜 믿어야 하고 그분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는 그것조차 인생들의 철학적 지식으로 생각을 하면서 마음대로 상상을 하면서 성경을 보고 있고 그런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방인 역시 바알 사상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창조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인생들의 사상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고 있고 믿음에서 떠나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지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종교인들이지만 인생은 딱 거기까지가 한계라는 것을 늘 깨닫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에 대한 정성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래서 거의 모든 종교는 스스로를 의롭게 만들려고 하고 있고 그것은 또 이 세상의 철학적 사상과 같아 사람들은 그 종교를 보고 너무도 좋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역시 인생들의 철학적 지식의 사고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들의 언어로 기록은 되어 있지만 인생들의 철학적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들이 철학적 지식으로 보다가 거의 다 율법주의에 빠지고 있고 그것을 구약에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일로 말씀을 하고 있고 이방의 종교인들은 역시 그것을 실제로 생각을 하면서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철학입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답게 사는 일과 자기 종교의 교리가 합쳐져서 이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하나님의 지혜와는 전혀 다른 것임에도 인생들은 그 사상의 매너리즘에 빠져 스스로의 지식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령 그것이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그래서 잠언에서도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신약에 와서는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저 종교 안에서 성경을 인생의 언어로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입니다.
인생들의 지혜로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서도 그들은 그 말씀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서 자기들의 종교 안에서 감성적으로 부르면서 그 감정을 느끼면서 자기들이 마치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것이 종교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을 맞이하고 있는지를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고 있고 이방인들은 이 말씀을 보고 노래를 만들어서 종교 안에서 부르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라고 이 말씀을 사도 요한을 감동을 해서 기록하게 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이 주님을 맞이하는 모습이나 이방인들이 그 모습을 성경에서 보고 그것을 노래로 만들어서 부르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까?
종교가 그렇습니다.
그 안에만 들어가면 인생들은 한 없이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는 일이나 이방인들이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는 것이나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는 것으로 마치 더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했지만 사도 바울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영생을 얻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 종교 안에서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종교적인 행위를 하기 위해서 일만 만들어서 노래로 부르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우리 성도는 시간의 개념으로 성경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조를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셨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충분히 말씀을 했습니다.
모릅니다.
그들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보고 있는 이방인들 역시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 우리 성도는 종려나무가 의미를 하고 있는 뜻을 성경에서 증거를 받음으로 해서 주님께서 초막절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종려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나무라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역대하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것을 말씀을 하면서 그 대전 위에 종려나무를 새겨 놓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으로 성전을 보고 있는데 그 성전에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증거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에서 초막절에서도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증거를 받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주님께서 이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저 인생의 언어로 보면 절대로 성경이 해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기 위해서이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는가 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 우리로 앞서서 그 일을 이루셨고 그 일을 증거를 받고 믿음으로 역사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보면 잘 알고 있지만 12장 마지막 절에서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입니다.
물론 아직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고 영으로 부활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시간적 개념이고 성경은 창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으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보는 단 한 가지의 목적이 바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영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를 해 주고 있지만 인생들은 그저 자기들의 철학적 지식으로만 성경을 보다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헛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사라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참 생명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예수 안에 생명을 얻어야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영생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스가랴9:9절을 보겠습니다. (구 1320쪽)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인용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들이 안다고 인용이 되는 구절을 표기를 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아는 인용 구절만 성경에 표기를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표기를 해 놓은 인용만 성경에서 인용을 하는 것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초기 종교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보면서 이렇게 교부들이 인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자기들이 표기를 해 놓은 인용 외에는 더 이상 인용을 하는 것을 반대를 하고 있었고 그렇게 성경을 풀어서 진리로 인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를 하면서 알레고리하다는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종교가 그렇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만 인용이 된 것으로 인정을 하고 있고 자기들이 모르는 것은 인용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정죄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종교인들도 역시 이렇게 표기가 되어 있는 것만 인용이 된 것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을 바로 풀 수 있습니까?
초기 종교입니다.
로마에 의해서 종교가 공인이 되고 프랑크 왕국이 지배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종교인 외에는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그것이 1000년 가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편집이 되어 있는 성경을 지금 이 시대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1000년입니다.
그 기간이 짧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어느 누구도 성경을 볼 수 없는 시대였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때의 모든 인생들의 철학적 지식으로 본 성경을 교리로 만들어 놓은 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종교사를 모르고 인생들은 자기들의 철학적 지식으로 종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입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종교개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종교가 너무도 타락을 했고 그 타락한 모습 중에서 아주 지극히 일부의 것만을 개혁한 것이 지금 이 시대 우리가 보고 있는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들은 처음부터 진리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의 일을 우리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서기100년이 지날 때쯤부터 종교가 되기 시작을 했고 그들은 성경을 자기들의 철학적 지식의 사고 안에서 보는 것만을 용납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국 문을 막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는 이렇게 짐승이 되어서 더 이상 성경을 상고하지 못하게 하고 있고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성경을 보고 교리를 만들어 놓고 그 교리에 따라 성경을 보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정도 인용입니까?
초등학생도 성경을 보면 이 말씀이 스가랴 말씀을 인용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 것을 자기들이 마음대로 성경에 표기를 해 놓고 인용을 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성경을 기록할 때 이것을 표기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가능한 텍스트만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텍스트 안에서 지혜를 구하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표기를 해 놓은 것들은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 말씀이 스가랴 9장9절의 말씀을 인용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인용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앞 절에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고 있습니다.
종교가 만들어 놓은 산물이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는 성경을 상고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다수가 모여 정통이라고 하니까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를 소자들은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정말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12장 말씀이 스가랴, 이사야, 시편, 에스겔37장의 말씀의 인용이라는 것만 알아도 우리는 성경을 쉽게 풀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누구시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오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말씀합니다.
무덤에서 나오게 하고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합니다.
이 일을 보면 너희는 나를 여호와인줄 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일을 나사로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누구십니까?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인용을 하지 못하니까 주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생명에 대해서도 모르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입니까?
성경 어디에서 삼위일체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계속말씀을 하지만 비유라도 있다면 제가 믿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사로의 사건의 인용이 되어 있는 말씀만 바로 알아도 주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믿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용을 합니다.
그런 성도가 삼위일체를 믿을 수 있습니까?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바다 모래 같은 자들이 우리를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우리에게 어떤 위해를 가한다 해도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길을 그 모형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장사 지낸 뒤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하시고 휘장 사이로 난 길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역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모형이고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성경에서 증거를 받고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악한 일을 많이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만이라도 그냥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성경까지 자기들 마음대로 제목도 정하고 각주도 달아 놓고 그것을 표기를 하고 또 장절을 만들어서 우리가 진리를 알아 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악한 일입니다.
삼위일체를 만든 일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십계명에 제 일 계명부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형상이라든지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라는 다른 신을 만들어 놓고 형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형상을 만들면 안 됩니다.
그것이 꼭 무슨 형상이 아니더라도 지식으로라도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자기들의 지식으로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체가 형상이라는 것을 왜 모릅니까?
삼각형을 그려 놓습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을 점에 찍어 놓고서 서로 교차를 하게하고 있고 그것을 이 세상의 이성에 따라 물과 수증기와 얼음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형상을 만든 것이 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형상을 만들어서 믿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도 형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그들은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 자체가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자기들이 만든 신을 믿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일을 다 이루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스가랴 선지자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들아 크게 기뻐하라.
우리 인생들이 가장 기뻐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육체가 예루살렘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들어오심으로 해서 십자가에서 구속의 일을 다 이루시고 장사 지낸 뒤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인 하나님이 되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 기쁘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 인생의 사건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도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 증거를 받지 못하니까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을 보면서도 그저 그때 그 사건으로만 보는 것이 종교인들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실제 있었던 일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증거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해서 증거를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방인 역시 모세의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의 말씀에서 전혀 증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바냐3:14-15절을 보겠습니다. (구 1309쪽)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시온입니다.
인생들이 성경을 보면서 그 문자의 단어의 뜻을 알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온이라는 단어도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보고 시온이즘이라는 말까지 나왔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은 비유와 예표라는 것을 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는 것을 인생들은 그 기초조차도 깨닫지를 못하고 성경을 그저 인생의 언어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이방의 종교는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에 종교 안에서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했지만 종교가 태동을 하면서부터 진리는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성경을 그렇게 보다가 주님께서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없었고 이방의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온입니다.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로 의견을 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를 다 이루시고 이스라엘을 예표와 비유로 해서 그 구속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런 지명에 대한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명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찾아야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는 깨닫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로 말씀을 하는 것이고 우리 구원을 받는 성도들이 있는 곳을 의미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스바냐 선지자입니다.
역시 영적인 일을 이스라엘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생명을 얻지 못한 자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해서 율법의 사로잡힘에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의 이스라엘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구속의 일을 이루심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면서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뻐합니다.
그리고 노래하고 즐거워합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오는 육적인 일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인생들은 다 율법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그 포로에서 돌이키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면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지금 요한복음 12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전혀 증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봅니까?
그리고 그저 인생의 언어를 압니까? 그리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막연하게 무엇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 지금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합니까?
스바냐 선지자는 분명히 여호와께서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지금 요한복음 12장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구속의 일을 다 이루심으로 해서 우리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자기들의 원수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원수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입니다.
늘 말씀을 하지만 모세의 율법이 있으면 그 율법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증거를 받아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에 대해서 증거를 받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자기들의 철학적 지식으로 성자라고 말을 하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성경이 해석이 되지 않고 또 성경말씀이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증거도 받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누가 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시는 영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아니 요한복음 12장13절부터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의 종교인들은 그 말씀을 인용을 할 수 없고 그것은 그들이 만든 삼위일체라는 교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누가 봐도 지금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즐거워하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입니다.
인용을 하지 못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를 인용을 하는 것 자체를 원천적으로 그들은 교리로 반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앞에서 말씀을 한 것과 같이 서기 100년쯤 종교가 태동이 될 때 이미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억지입니까?
성경을 제가 억지로 짜 맞추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직접적으로는 스가랴9장의 말씀의 인용도 맞습니다. 그러나 13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이 지금 응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성령이 오시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종교는 한번 그들의 교리로 자기들이 정한 것 외에 인용을 하지 못하게 하니까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은 응하지도 않고 성경을 끝낸 이상한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화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 있을찐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분명히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우리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생명을 얻는 자 되어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우리는 다 화를 당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 해서 그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일로 지금 성경에 기록이 된 것과 같이 시온의 딸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입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영으로 부활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심으로 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그 일이 임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입니다.
그 일을 이제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증거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증거를 받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그리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또 만왕의 왕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입니다.
그 시작부터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성경은 우리에게 종교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짐승이라고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는 일에 있어서 악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지금 이루시고 있다는 것을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 오셔서 이루시는 일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믿음으로 역사를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늘 말씀을 하지만 믿음이라는 단어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단어의 뜻만 알아도 성경을 상고하면서 지혜를 구하고 성령을 구할 수 있는데 인생들은 그저 자기들이 종교 안에 있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방의 종교는 율법도 자기들의 철학적 지식에 따라 어느 것은 폐하고 어느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을 전혀 증거를 받지 못하면서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초막절입니다.
지난 시간에 그 절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 역시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8절에서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절기로 근심합니다.
왜 근심하는가 하면 초막절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절기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모르니까 근심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창조하신 일에 대해서 비유와 예표와 그리고 여러 가지 표적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일 역시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초막절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보여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물론 그것이 인생들의 한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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