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36절을 보겠습니다. (신 166쪽)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하고 말하였다.”
유대인들입니다
아니 우리 인생들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와 시대적으로 2000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비약적으로 발전을 해서 그 당시 사고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같습니다.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한계라는 것은 딱 거기까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종교인들은 인생들이 참 대단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자기들이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를 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고 실제 그런 것으로 교인들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들입니다
어느 누구하나 성경을 바로 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이 시대 종교인들이 성경을 보는 것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영의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거의 비슷하게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시대 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다르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아예 안 믿습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하나님의 아들은 이사야 9장6절을 근거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이 시대 종교인들 중에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으로 믿고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렇게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삼위일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하는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유대인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역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증거를 하고 있지만 성경을 바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종교가 만든 교리를 따라 하나님을 자기들의 이성으로 정의를 해서 만들어서 믿고 있고 그들은 그 교리를 절대 변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 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활도 모르고 있고 생명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종교인들이 다 그렇게 마르다와 같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부활에 대해서 누가 성경대로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누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생명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그것이 다 인생들의 알량한 지식으로 인하여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서 발생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는가를 알고 그대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성령을 받은 자가 얼마나 적은 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얻는 자가 적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유대인들과 같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고 있고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압니까?
이제까지의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이 성경을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종교를 교리적으로 정립을 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친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그들의 사상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고 심지어는 어느 것은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칼뱅의 오대강령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교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오대강령은 영의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신체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고 정한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교리에 모두가 빠져 있어서 지금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는 생명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깨달을 수 없게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지성입니다
자기가 조금 지성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내면 그것이 얼마나 큰 불행한 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인생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은데 세상 적으로 자기 지식이 있어서 많이 아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심각한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인생의 한계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생으로는 아무리 그가 지식이 있고 뛰어난 지적인 능력이 있다고 해서 성경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지식이 도리어 사람들을 망하는 길로 가게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죽었고 이제 교리로 든든히 서서 어느 누구도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유대 사람들은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하고 말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왜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을 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유대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금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어떻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했는가를 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인간적으로 너무 사랑하셔서 그가 죽은 것을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도 같은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시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1:34절을 보겠습니다. (신 256쪽)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인생도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들이 마치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런 생각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것을 유대인들이 보고 보라 그가 나사로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인생 나사로를 사랑하셔서 그가 죽음으로 인하여 슬퍼서 눈물을 흘리시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이제 성경이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주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보고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요한복음을 보면서 지금 유대인들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설교입니다
거의 모든 설교가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주님이 말씀을 하셨고 그리고 이제 뒤에서 주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다 보고 알고 있는 그들이 유대인들과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아직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사로는 이제 죽은 것으로 자기들의 이성으로 결론을 내리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미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기 때문에 그들은 죽은 나사로를 주님께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했는가를 보라고 하면서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순전히 인생의 생각으로 주님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이 다 기록이 되었고 그 시작과 결말까지도 알고 있는 이방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주님의 양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죽은 것을 보고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너무 모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주님이 인생의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미 앞에서 나사로가 잠잔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로 오셔서 실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고 있습니다.
모른다면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지를 모른다면 혹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고 있고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단순하게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다면 앞에서 말씀을 하신 것과 이제 뒤에서 하신 일을 생각을 하면 이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는데 유대인들이 말을 하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종교인들이 주님이 나사로를 인간적으로 사랑하셔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의 육체를 사랑하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 되어서 그 양이 생명을 얻은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죽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애정을 보이셨다는 것은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도 역시 우리가 알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역시 제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정도로 밖에는 말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의 마음을 압니까?
주님이 왜 눈물을 흘리셨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말씀을 한 것은 제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정도를 말씀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저 인간적인 감성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만 그렇습니까?
이 시대 종교인들은 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죽은 나사로가 육체로 다시 살줄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이제 성경이 다 기록이 되고 결말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전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서도 자가들의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조심스럽습니다.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자기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고 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리고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는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심으로 눈물을 흘리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감성이 아닙니다.
인생의 감성을 가지고 주님을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과 창조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피조물들이 마치 창조주의 마음을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도 전혀 모르고 있고 그들은 인간 예수만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을 요한복음에서 이미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주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상식입니다
시작과 끝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곧 치료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말을 다 알고 눈물을 흘린다면 그는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면 그때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인생입니다. 그 경점에 순간에서 내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른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을 하시는가를 알아야 하고 그 사랑을 내가 받아야 예수의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저 지금 유대인들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랑을 교회 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생들이 당하는 그 고통을 모두 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왜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 신약성경을 보고 있는 이방인들 역시 모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결말까지 성경에서 보고 있는 그들이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하면 바로 이렇게 그에게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11:37절을 보겠습니다. (신 166쪽)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하실 수 없었단 말이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11장에서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유대인들을 보면 다 육체의 일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안에 생명에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빛으로 오셨습니다.
실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모든 일은 구약에 예언에 되어 있는 말씀들을 그대로 하고 있고 또 주님이 오셔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다 이루심으로 해서 우리 양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입니다
생명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 생명이라는 단어가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거의 다 육체의 생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의 생명을 우리에게 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생명을 얻어 영생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이성으로는 이 생명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정의를 해서 설명을 할 수도 없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것을 주시고 우리에게 이 생명에 대해서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가 됨으로 그 믿음으로 역사를 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믿고 있습니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이 생명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인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이 생명 자체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고 우리는 이 생명에 대해서 성경에서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양들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모르고 있지만 우리 양들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해서 증거를 받음으로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이 역사를 함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이 생명으로 부활을 한다고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유리하고 있는 양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그저 육체의 일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방인들이라고 다르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생명을 알고 있습니까?
그들이 부활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주님의 양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다도 그렇고 마리아도 그렇고 또 유대인들 역시 다 육적인 일에 대해서만 주님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눈물입니다
자기 양들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있고 눈물까지 흘리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고 또 이 생명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은 도리어 우리를 이단으로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릅니다. 모르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더 많이 아는 것과 같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해도 때로는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습니다. 그들과 싸울 수도 없고 싸우자니 이제 우리말을 아예 듣지를 않고 원수가 될 것 같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못할 때의 그 마음은 정말 비통하기까지 합니다.
진리를 전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거의 다 비 진리에 속해 있습니다. 아니 진리는 사람들의 이성에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스스로가 내가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을 충분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표적들을 나타내시면서 구약의 예언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적으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은 다 육체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 때에 당시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일을 믿지를 않고 아니 전혀 모르고 그저 육체의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를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하시는 것을 예표로 보여주셨습니다. 육체가 되어 있는 인생들에게 어떻게 하시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직접 오셨는데 유대인들이 하는 말마다 다 육체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양입니다
그들까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을 하시면 너무도 불쌍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분이 나기도 하시면서 다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주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영의 생명을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35:5절을 보겠습니다. (구 1008쪽)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고 삶에 어려움이 있었던 사람들은 보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이스라엘이 모였을 때 성경을 읽어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다니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적으로는 영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성경에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인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무슨 일을 하신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 이방인들보다 그들은 성경의 문자를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10장에서도 말씀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양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니까 유대인들 중에 한 무리는 귀신들려 미쳤다고 하면서 우리가 그 말을 들을 가치도 없다고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무리는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을 합니까?
그들이 구약 성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말씀이나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보아도 주님이 오실 때 소경이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보았습니다. 그 말씀을 본 사람들은 그 문자 그대로 생각을 하면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고 그것이 실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중입니다
문자대로 보면서 자기들의 이성에 따라 판단을 하면서 이때는 이렇게 말을 하고 때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를 하시고 있고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먹이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약간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상식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병이 들어 있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더 쉽겠습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약간은 주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병든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지 못했느냐고 감정 섞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더 쉽습니다.
병을 고쳐주는 것이 누가 생각을 해도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것과 병이 든 사람의 병을 고쳐 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습니까?
부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그렇게 사랑했다고 하면서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어떻게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지 못해서 죽게 했느냐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이성입니다
다 육체적으로만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을 보아도 지극히 육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성경을 보고 그 문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문자는 알고 있지만 그 말씀이 의미를 하고 있는 뜻은 전혀 모르고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창조하신 목적도 모르고 있습니다.
소경입니다
성경에서 소경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실제 소경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소경이라는 단어를 보고 다 실제 소경으로 생각을 하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이방인들 역시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제 소경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율법입니다.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율법에 있습니다. 그 율법을 보고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더구나 욥이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소경의 눈이 되고 절음발이의 발이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입니다
거의 다 문자적으로 보고 있고 실제 소경으로 보고 있어서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까지 생명에 대해서 전했는데 부정적으로 말을 하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 표적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고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병이 든 나사로의 병을 고쳐서 죽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이 오셔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어도 그 생명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주님이 오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인생들의 이성적 감성에 젖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입니다. 유대인들의 말과 같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는 유월절을 먹이시고 있고 또 생명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이성입니다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이성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에게 성령의 임하심으로 잉태가 되었다는 일은 사실 저 역시 인생의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물론 그렇게도 믿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맹목적인 것보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그 의미를 다 깨닫고 있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이 영의 일이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실상이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살아계실 때 자기들에게 유월절을 먹이신 것을 다 기억하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그는 주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는 생명에 대해서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생명을 전혀 모르고 육체의 일을 생각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성도는 생명을 얻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의 양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할지라고 주님께서는 병든 나사로가 죽은 후에 다시 살리시는 표적을 나타내심으로 그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next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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