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35절을 보겠습니다. (신 166쪽)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보더라도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노아의 홍수를 일으키셔서 호흡이 있는 생명을 다 멸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노아 때에 사람들이 많아짐으로 해서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일을 생각을 하지 않고 육체의 일만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들에게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육체인 우리 인생이 육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믿기 보다는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본성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생각합니다.
영의 일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생명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이성적 알량한 지식으로 헬라어를 안다고 하면서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고 사도 바울의 말씀을 태초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입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생명에 대해서도 모르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영생을 얻었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천국에 가서 영생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은 주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입니다
주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주님께 와서 울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앞에서 자기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것을 생각을 하면서 울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생명을 얻은 자만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은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영으로 부활하심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영이 거하신다는 것을 믿게 역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생명입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반드시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어야 마지막 날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의 생명으로 다시 사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 생명으로 다시 산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에게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둘째 사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들은 완전히 소멸이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믿어야 하고 그런 성도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자기 오라비 나사로의 육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육체는 아무 것도 아닌데도 그 육체의 죽음에 울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 형적은 지나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쉽게 말을 해서 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마리아가 울고 유대인들도 울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울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생각하면서 울어야 하는데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있음으로 이 한 번 죽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들입니다
그런데 그 양들이 생명에 대해서는 울지 않고 있고 육체가 죽은 것을 보면서 우는 것을 보시고 사도 요한이 성령을 받은 후에 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나중에 생각이 나서 이 성경을 기록을 했다는 것을 알고 보아야 합니다.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분노를 하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이틀을 더 유하시고 유대로 오셔서 이제 자기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자기 양들이 전혀 주님이 오신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주님께 구하지 않고 있고 육체의 일로 구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분노를 하시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종교인들의 생각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종교인들 역시 아직 생명을 얻지도 못한 그들이 자기 삶에서 어려운 일이나 슬픈 일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통분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민망히 여기십니다. 우리말과 같이 얼마나 겸연쩍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주님은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양들은 자기 오라비의 육체의 죽음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을 보시고 사도 요한이 성령을 받은 후에 이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생명입니다
제가 지나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를 알고 있다면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깨닫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습니까?
그 안에서 성도라는 말을 들으면 뭐 합니까? 자기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고 자기가 다 안다고 하면 뭐합니까? 그가 태초에 있는 생명을 모르고 있고 그 생명을 얻지 못했다면 주님의 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내 양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 시대 종교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자기들이 주님의 양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주님을 통분히 여기시게 하고 있고 민망히 여기시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 종교인들로 인하여 그렇다는 것을 요한복음11장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생명을 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입니다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병든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바로 뒤에서 다시 살리시는 것을 아시는 분이 왜 그것으로 눈물을 흘리시겠습니까?
시편42:3을 보겠습니다. (구 832쪽)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모든 일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 양들이 생명을 얻는 일이고 그 일을 알고 믿음으로 해서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이제까지 계속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시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이 들었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그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또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정말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우리 성도는 이 생명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은 생명을 얻고 그 생명으로 부활을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생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나사로를 통해서 주님의 양들이 믿음으로 태초에 있는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못하실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병든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실 분이라면 죽은 나사로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표적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고 나사로가 죽고 난 후에 주님이 오시자 주께서 여기 계셨으면 내 오리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생각도 그렇고 이방인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고 자기들의 지식으로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생각은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은 다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들의 철학적 지식이고 시대에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신에 대해서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욥기에서도 말씀합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그 친구가 와서 욥에게 네가 무슨 잘못이 있으니까 고난을 당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자기 순전함을 이야기를 하자 그 친구 엘리후가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 그럴듯합니다.
아니 이 시대 종교인들의 생각이 다 그렇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자기들의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다 감찰하시는 분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하면 축복을 하고 잘못하면 징계를 하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면 사람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으면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이 사상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철학적으로 높은 지식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성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니까 더욱 더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니체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을 하고 난 후에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위버멘쉬가 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초인이 되라는 것이고 그것은 도덕적으로 그러니까 율법으로 뛰어난 자가 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을 합니까?
신이 죽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신이 욥의 친구 엘리후가 말을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고 계시다가 욥과 같이 잘못을 하면 징계를 바로 내리시는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신은 죽었다고 하고 있고 이제 그 대안으로 스스로 위버멘쉬가 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같은 말입니다
종교인들이 율법을 잘 지켜 신의 축복을 받는 것과 같이 이제는 신이 죽었으니까 스스로가 위버멘쉬가 되어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라는 말은 결국에는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거의 모든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한 무리는 종교에 빠져 있고 한 무리는 철학적으로 높은 지식의 배움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스스로가 위버멘쉬는 될 수 없습니다. 이미 그녀들은 종교인들로부터 죄인으로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의지를 하고 있고 그래서 나사로가 죽고 나서 주님이 오시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지금 이 시대 종교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는 진짜 도와주시는 것과 같이 보이고 있고 어느 누구는 전혀 도와주시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니체라는 철학자는 신은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고 이 시대 철학의 뿌리가 되고 있고 니체의 사상을 배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각에는 이미 신은 죽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니체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가 성경을 많이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하신 목적도 모르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모르기 때문에 당시 종교인들이 하는 행위는 그의 지식으로는 그저 샤머니즘으로 밖에 안 보였고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그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욥과 그 세 친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 하나님은 이럴 것이라고 상상을 하면서 믿는다고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지식으로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을 인생들은 믿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에 지금도 주님께서 오시자 주께서 여기 계셨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마르다가 주님께 말을 하는 것도 마지막 날 부활에는 내 오라비가 다시 산다는 것을 아는 것도 역시 그들의 종교적 사상에서 배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고 그래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그녀들에게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주님께서 여기 계시지 않아서 자기 오라비가 죽었다고 말을 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니까 인생의 감성을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이제까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자기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인생사의 슬픔을 보고 우십니까? 우리는 정말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아니 창조된 세상을 티끌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고 말씀을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시편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실 때를 예언으로 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우리 성도는 아들로 오신 주님께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는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자기들의 육체의 일을 생각을 하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주님의 양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바리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주님께서는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을 했습니다.
분노를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자기 양들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으로 주님께서 분노를 하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역시 같은 말씀입니다 시편의 말씀이 물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비유와 예표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역시 주님께서 계시는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르다 입니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안다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주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시 말씀을 하지만 생명 외에는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십니다.
지금 주님께서 인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 오라비가 죽은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셔서 눈물을 흘리시고 계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독생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기 양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기 양들이 하나님이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고 그리고 생명에 대해서도 부활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감성적인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감성을 불쌍히 여기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자기 양들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눈물을 흘리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11장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자기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줄을 안다고 말을 하니까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믿느냐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십니다.
주님께서는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셔야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인생들은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자기 양들이 생명에 대해서 깨달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지 죽은 나사로로 인하여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9:35-36절을 보겠습니다. (신 14쪽)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주님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종교가 되어서 다 율법을 지키고 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눈물입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적인 감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하지만 주님은 우리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인생의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느끼는 것을 다 감정적으로 느끼시는 분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애정입니까?
그리고 앞에서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시는 자라서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을 하셔서 그들이 우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인생의 감정을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차별을 가지고 대하십니까? 누구는 더 사랑을 하시고 누구에게는 더 애정을 가지시고 대하시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고 성경을 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말씀을 가지고 감정적으로 밖에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다 같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라서 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종교가 되어 있는 유대인들 중에서 죄인을 대하는 것은 다 같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성경의 문자를 보고 마치 주님이 인간적인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사도 마태는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민망히 여기시니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헬라어의 원어는 다릅니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는 말씀은 거의 비슷하게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슷합니다.
마리아의 우는 것과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영적으로 고생하며 유리하는 것을 보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는 생명을 전하러 오셨는데 생명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이 오셔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그것을 사도들이 성경에 기록을 하고 이제 우리가 그 신약 성경을 보고 있지만 이 생명에 대해서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들이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지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겼습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 어떤가를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입니다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종교에 의해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주님이 그렇다고 말씀을 하시면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있는 그들이 이상하게도 또 그런 문자는 아예 무시를 하고 보고 있습니다. 문자를 보려고 하면 모든 말씀을 다 문자 그대로 보아야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누구에게 오셨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기준이 있습니까? 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상대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재용 회장도 빌게이츠에 비하면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통의 시민입니다
아니 겨우 집 한 채를 가지고 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지에 비하면 이 시대 노숙자에 비하면 또 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적으로 성경을 보면 이렇게 성경이 도무지 풀리지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누구를 위해 오셨습니까?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난한 자는 누군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가난하다고 심지어는 거지 나사로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입니다
요한복음11장은 죄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마리아를 죄인으로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누구하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자가 없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고 죽은 나사로를 내가 다시 깨우러 간다고 이미 앞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육체적으로 산다는 것을 이미 아시는 분께서 눈물을 흘리신다면 그것은 정말 가식적인 행위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입니까?
외식하지 말라고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가식적인 행위를 보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겠습니까? 성경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자기 양들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을 모르고 이 세상의 것을 말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런데 자기 양들이라고 하는 그들이 생명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고 육체가 죽은 것을 보고 자기 오라비가 죽은 것을 보고 우는 것을 보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생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 양들을 보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를 하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감성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한 번 죽은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보고 그 누이가 우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냉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를 통해서 호흡이 있는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멸망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인하여 포로가 됨으로 해서 수만 명이, 아니 수십만 명이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귀중히 여기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이제까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육체가 죽는 것을 그냥 두셨습니다. 육의 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지만 영의 생명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종교는 보이는 것을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다 감성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보면 거의 다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로 뒤에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입니다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유대인들 전체를 보시면서 우리 인생 전체를 보시면서 분노를 하고 계십니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노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에게 비유와 예표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방인들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성경을 보면서 그 문장의 단어만 보고 주님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면서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얼마나 참담하시겠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경을 안다고 해 보았자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를 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말씀을 성경에서 다 말씀을 할 수 없다는 것에 있어서는 저 역시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왜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제가 말씀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더 받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도 우리에게 더 큰 은혜가 되게 전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next 159-2
'요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0-1,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0) | 2022.12.04 |
---|---|
159-2,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0) | 2022.11.27 |
158-2,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0) | 2022.11.20 |
158-1,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0) | 2022.11.20 |
157-2,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0) | 2022.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