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연보

2, 연보란

윤주만목사 2022. 3. 9. 07:33

2. 연보에 대하여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린도전서16:1-9절을 보면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연보.

헬라어입니다. 돈의 징수, 수금, 세금, 특별세, 기부금, 모금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헬라어의 뜻을 아는 것으로 성경을 보고 있고 그렇게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종교에서 헌금이라는 미명 아래 거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헌금입니다 .

교회에서 하는 헌금입니다. 그 헌금이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연보와 같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종교는 거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난 후에 교인들이 헌금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교회 안에는 온갖 헌금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정말 셀 수 없는 헌금의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 헌금을 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헌금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다 종교에서 나온 것임에도 거의 2000년 가까이 종교 안에서 행해지다 보니까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헌금을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교인들이 더 난리가 나고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종교 안에서 하고 있는 헌금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돈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연보입니다.

고린도후서9장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서 한번 설교를 올려 드린 적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연보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연보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에게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초기 교회 안에서 연보를 하게 한 것과 이방의 종교 안에서 예배 때마다 하고 있는 헌금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삼가 지키는 모든 행위는 다 율법의 행위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방의 종교 안에서는 헌금을 삼가 지키는 행위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종교는 자기들이 세상에서 존재를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당연하게 이 헌금을 하고 있고 교인들 역시 이 헌금을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 세뇌가 되어서 좋은 것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것을 운영을 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그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도가 보이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지금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헌금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런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고 헌금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헌금을 하라고 말씀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을 가지고 이방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헌금을 하라는 뜻으로 고린도지방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했다면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헌금은 율법입니다.

그러면 연보는 율법이 아닙니까?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연보는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율법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연보라는 단어를 보고 아니 그 단어의 뜻을 아는 것으로 마치 그것이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을 유지를 해야 합니까?

그리고 목사들이나 그 교회 안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의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를 말씀을 했습니다. 이 땅에서 보이는 교회는 다 하갈과 같이 종의 교회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종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헌금을 한다는 그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산다는 것을 사도 바울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왜 헌금으로 하고 있습니까? 바보입니까? 자기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세상일을 하지 않으면 그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모르겠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는데 있어서 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들이 있는 돈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드렸고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돈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연보궤라고 말씀을 하지 않고 돈궤라고 했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돈궤입니다.

같은 의미로는 역대하에서 한번 말씀을 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는 단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대하에서는 이미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요아스 왕이 성전을 보수하기 위해서 돈궤를 성전 앞에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바로 그 단어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1절,“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연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연보를 왜 하라고 말씀을 합니까?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연보를 하라고 하는가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는 연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왜 그들을 위해서 연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대적 상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기근까지 겹쳐서 쉽게 말을 해서 그들은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았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자 삼천 명이 회개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죽임을 당한 후에 교회는 유대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각지로 흩어졌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역대하입니다.

이 연보에 대해서 우리 성도님들은 이미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설교말씀을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성전을 보수하기 위해서 연보궤를 성전에 놓았고 이스라엘이 거기에 돈을 넣었고 그 돈으로 성전을 보수하는 일을 위해서 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먼저 복음이 전파가 되었고 이제 사도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세우심으로 그가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너무도 힘든 상황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이방의 성도들에게 연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가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2:21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구약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보수하기 위해서 요아스 왕이 연보궤를 성전 앞에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보궤에서 나오는 돈은 성전을 보수하는 일에만 사용을 하게 했습니다. 그 성전이 이제 어디로 갔는가 하면 우리 이방인들의 안에 지어져 가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육체가 성전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심으로서 더 이상 보이는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고 그럼으로 이스라엘의 보이는 성전도 주님의 말씀과 같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연보를 합니까?

성도를 위해서 연보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지배와 극심한 가뭄으로 그들의 육체가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 끼 식사라도 하게 하고 그들이 복음을 들음으로서 그 안에 예수 안에서 성전을 짓게 하기 위해서 연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교헌금입니까?

그리고 전도헌금입니까? 그것을 마치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연보와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고 성령 안에서 예수의 생명을 얻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성전이 지어져 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식량을 위해서 연보를 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도를 위하여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뭄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전승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고 성경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이 먹어야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게 하기 위해서 연보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육적인 도움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안에는 성전이 지어져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성전이 지어져 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영생을 얻는 그러니까 예수의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방의 성도들에게 연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연보가 헌금입니까?

지금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헌금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전도 헌금이라든지 선교헌금을 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려면 예수의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이방의 종교인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하는 헌금이 연보가 될 수 있습니까?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의식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 삼가 지키고 있는 행위는 다 종교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는 연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에 이방의 성도들에게 연보를 해서 그들 안에 보이지 않는 성전 예수의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의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절,“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연보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보는 당시 상황에 맞추어서 하고 있는 것이지 계속해서 이 연보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연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사용을 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도를 위하여 하는 연보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미리 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기 전에 미리 하라고 하는가 하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연보가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미리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연보의 의미를 알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헌금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 헌금으로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도 역시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그 육체가 불편하지 않게 섬겼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종교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고 또 교회 건물을 짓는 데도 사용을 하고 있고 목사들이나 교회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월급을 지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연보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미 한 번 설교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교에 너무 깊이 세뇌가 되어서 제가 아무리 말씀을 해도 깨닫지를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제가 헌금을 하는 것을 반대를 하면 오히려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육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이방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연보를 한 것 역시 육체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일을 통해서 그들 안에 예수의 생명을 얻은 자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일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절,“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연보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방의 성도들에게 연보를 하게 했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정말 한 끼 식사를 하는 것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전승으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라 해도 사람의 육체가 죽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입니다.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가신지가 얼마 되지 않은 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고 그들이 배가 고파 복음을 듣는 일을 할 수 없게 되니까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이방에 성도들에게 연보를 하게 했습니다.

 

육체적인 도움이 아닙니다.

연보는 다 성전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성전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 안에 주 안에서 성전이 지어져 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방의 성도들에게 연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연보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연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전혀 관계를 하지 않고 있고 자기가 쓰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연보를 사용합니까?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연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방의 성도들이 연보를 한 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배가 고파서 사용을 했다면 그것은 연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종교인들이 마음대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특별한 헌금은 그 사용처대로 사용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이미 그 용도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 성전을 짓는 것에 사용을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연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더구나 종교 안에서 하는 헌금과 연보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4절,“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연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연보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연보 특히 주님께서 헌금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성경에서 그 단어를 보고 그 뜻을 헬라어로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는 헌금과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헌금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헌금을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헌금을 말씀을 하지 않았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섬김을 받으시면서 도 그것을 헌금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순전히 이방의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복음에 함께 동참을 하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너희 중에서 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러나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연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사용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 있고 그러니 이방의 성도들에게 연보를 하게 했으니까 그 책임을 지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 율법의 행위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율법의 행위이고 어느 헌금이라고 하면 그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고 그 율법의 행위를 하게 되면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저 역시 복음을 전하는 자이지만 만약에 어느 누구라도 이 헌금을 한다면 저는 절대로 반대를 합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합니까?

누가 하나님께 헌금을 하라고 성경에서 말씀을 합니까? 그리고 우리 인생들이 하는 헌금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으십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런 감성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냉정할 정도로 이성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하고 그래서 성경에서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하는 헌금입니다.

그것은 종교에게 하는 헌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어느 것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창조에 속하지 않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된 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단번에 드리셨는데 또 무엇을 받으신다고 피조물인 인생들이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까?

 

5절,“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지만 그들에게만 연보를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연보를 하라고 했고 이 연보에 대해서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지금 이방의 종교에서 하는 헌금과 같이 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돈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고린도전서16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이런 말씀을 이용을 해서 교회 안에 있는 소자들에게 당연히 헌금을 하게 하고 있고 그것을 율법으로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초기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이 연보를 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는 당시 노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연보를 하는 것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연보라고 하기 보다는 섬기는 일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일시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마치 이방의 성도들이 계속해서 이 연보를 한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입니다.

이방의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서 연보를 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된 후에는 이방의 성도들이 더욱 고난을 당하고 있었고 로마에 의해서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한시적인 일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마치 이 연보가 지금의 헌금과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종교는 이제 의식화를 해서 의무적으로 하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위해서만 거의 일을 했습니다. 그것을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8:3절을 보면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고린도전서9:14절을 보면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까?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헌금을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 목적이 인간적으로 타당하다고 해도 우리는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답은 성경입니다.

왜 성경을 안 보고 인간적인 생각에서 그것으로 옳고 그름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2000년 동안 종교에서 의해서 전해지다 보니까 사람들은 이제 아예 감각이 없고 성경을 보면서도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는 그 일이 성경적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고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지 종교에서 행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은 종교에 들어가는 순간 다 소자가 되어서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성도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아니 모든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에서 그렇게 증거를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종교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성경에서 증거를 하고 있는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에 대해서 믿어야 이 연보에 대한 말씀도 깨달을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동등됨을 취하시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우리 피조물의 형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그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했습니까?

아니 연보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데 그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신데 사람들이 돈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주님께 직접 드린 것이 아니라 갸룟 유다가 그 돈궤를 맡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돈을 드려서 가룟 유다가 그 돈궤를 맡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헌금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연보라고 말씀을 할 수도 있는데도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섬겼습니다.

물론 돈을 내서 섬기는 사람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주변에서 섬기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헌금을 했다거나 연보를 냈다거나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금합니까?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복음을 전하시는데 그들이 돈을 낸 것도 헌금이라고 연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방의 종교는 돈만 밝히는 자들이 종교 안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소자들에게 강도짓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헌금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운영이 되고 그 종교 안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섬겼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연보를 해서 섬겼다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 연보에 대해서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합니다.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에 있을 때는 그들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섬겼고 이제 고린도지방으로 오면 그들이 섬긴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갈 곳입니다.

너희가 보내어 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 것도 없이 갈 수 있습니까? 물론 사도 바울이 이 시대 선교사들과 같이 풍족하게 갔다는 것을 아닙니다. 정말 최소한의 물질을 가지고 다른 지방으로 가는 것을 가지고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정말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섬김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 성도님들이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어려우면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준다고 말씀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늘 이것이 마음의 짐이 되고 있고 정말 때로는 해서는 안 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힘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다는 말씀을 해서 저에게 그래도 위로의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간에 포기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듣는 성도들에게 조금이라도 육체적으로도 폐를 끼치는 것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풍족합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절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성도님들이 더 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마음이 생기고 있고 때로는 정말 너무도 큰 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누구의 섬김도 받지 않고 제 마음껏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헌금은 안 됩니다.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이제는 우리 성도들은 이것이 율법의 행위라는 것을 다 알고 있고 그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연보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연보도 모르고 하는 그런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7절,“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우리 성도님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가 아니더라도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보고 있지만 말씀을 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그저 종교 안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는 있지만 그가 가면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당시 이방의 성도들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영접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것을 너무도 기뻐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그래도 섬김을 받는 입장에서 미안한 마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의 종교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문자를 보고 헬라어의 뜻을 아는 것으로 이 연보의 의미도 전혀 모르면서도 그저 소자들에게 헌금을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한 영혼이라도 구원을 하기 위해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지만 그 말씀을 보고 있는 이방인들은 사도 바울과는 전혀 다르게 종교 안에서 하는 행위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8절,“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정말 이방에 복음을 전한 사도입니다.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는가를 이 말씀을 보더라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세운 터 위에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행선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서 복음을 전하고는 있지만 섬김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도들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나에게 큰 문이 활짝 열려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해입니다.

늘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방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도 말씀을 하지만 그대로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연보를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연보가 예수 안에서 성전을 지어져 가는 일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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