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연보

1, 연보란

윤주만목사 2022. 3. 9. 07:10

1. 연보에 대하여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고린도후서9:1-5절을 보면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연보입니다.

자기의 재물을 내어서 남을 도와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나 축일을 맞이해 교회에다 바치는 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사전적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상식으로 알고 있는 연보는 자기의 재물을 내서 교회에서 남을 도와주거나 교회에다가 바치는 돈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헌금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경은 연보라는 단어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보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이것을 헌금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헌금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저 역시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집에서 성경을 보고 말씀을 푸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제 수입이 없다 보니까 우리 그리스도편지 안에서는 조금씩 저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헌금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연보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 성도님들은 알고 그렇게 저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헌금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헌금의 종류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정말 때로는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도 하지만 기복을 바라면서 헌금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헌금을 해야 합니까?

저는 반대를 합니다. 물론 누가복음 21장에서 과부가 구차한 가운데서 헌금을 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도 제가 설교로 말씀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그때 쓴 설교를 찾아보지를 않고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교회는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헌금을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면 문자적으로는 우리 성도가 헌금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저는 헌금에 대해서 반대를 합니다. 물론 고린도후서의 말씀에 나오고 있는 연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기까지 곁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먹을 것이 없어서 당장 굶어야 한다면 저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생이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우선은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의 것으로 주었으면 육의 것이 있으면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풍족하게 세상에서 사는 것은 좋은 모양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연보라는 명목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저는 늘 마음에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 저에게서 모두 떠난다 해도 제가 할 수 있는 형편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구차함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헌금입니까?

그것을 신명기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헌금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으로 교회에다 바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헌금은 신명기의 말씀과 같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헌금을 하고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는 이미 아세라가 되어 있고 그 안에서 하고 있는 헌금은 바알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의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9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연보가 과연 이 시대 돈으로 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성경을 바로 풀지 못하면 그는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성경을 바로 풀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저를 위해서나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유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역대하34:9절을 보면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저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

 

연보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말씀을 하고 있는 연보입니다. 우리는 이 연보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연보를 했는가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야 신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연보에 대해서 우리가 바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딱 한번 나오는 연보에 대한 말씀입니다.

역대하34장에서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하34장의 말씀을 바로 알면 당시 이스라엘이 왜 연보를 했는가를 알 수 있고 연보가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수리합니다.

요시야 왕 때에 연보를 했습니다. 누가 했는가 하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에게서 연보를 걷었는가 하면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기 위해서 걷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입니다.

왕의 궁전을 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서 거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서 거두었다고 하니까 이 시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연보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건물이지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육체입니다.

보이는 건물은 주님의 육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아내도 아니고 그냥 보이는 건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시야 왕 때에 그 전 왕들로 인하여 성전이 많이 훼손이 되었는데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서 연보를 걷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저의 육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입니다. 우리는 실제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음으로 더 이상 성전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지은 성전을 보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이 필요했고 그 성전을 수리하는데 처음으로 요시야 왕 때에 연보를 거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2:19-20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시야 왕 때입니다.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서 연보를 거두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된 연보를 그때 처음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헤롯 성전이 있었는데 그때 성전에 연보궤가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연보를 했습니까?

헤롯이 이스라엘의 인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주님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 지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 지은 것이 아니라 성전은 계속해서 확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 오는 사람들이 연보궤에 연보를 했습니다.

 

연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이성적인 연보입니다. 그러니까 사전적인 연보는 자기의 재물을 내어서 남을 도와주거나 주일이나 축일에 교회에 바치는 돈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연보라는 문자를 보고 연보가 이것이라고 사람의 이성을 따라 그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사전에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연보를 했습니까? 그리고 연보를 왜 거두었습니까?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성전을 짓기 위해서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전은 저의 육체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짓고 그것을 수리하면서도 그것이 저의 육체라는 것을 몰랐지만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성전이 저의 육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건물로 지어 놓은 건물을 가지고 성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성경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2:21-22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스라엘에 있던 성전입니다.

주님께서 그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진다고 말씀을 하고 나서 로마에 의해서 실제 성전은 그렇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성전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실제 성전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성전입니다.

그것은 이제 보이지 않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하늘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성전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성전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보이지 않는 성전이 이 시대도 주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함께 성전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연보를 왜 하는 가를 이제까지 말씀을 했습니다. 보이는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짓기 위해서 연보를 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수리하고 실제 짓기 위해서 연보를 했습니다. 그 연보는 실제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돈으로 했습니다. 이제 그 성전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고린도후서에서 참 연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위해서는 실제 돈을 내서 연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사용하는 돈으로 할 수 있습니까? 그 성전을 수리하고 짓는데 돈이 필요합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돈으로 이 성전을 질 수 있다는 것은 돈으로 우리의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돈으로 어떻게 이 성전을 지울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더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사망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그 헌금들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작용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으로 해서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모르고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합니까?

그런 핑계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곧 저주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아무 생각이 없이 교회 안에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입니까?

아무리 그것이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가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이미 종교가 되어서 거대한 포승에 묶여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다수가 하니까 그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면서 교회 안에 들어오는 소자들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알입니다.

교회 안에서 돈이 오간다는 것은 다 바알에게서 온 사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돈들은 바알에게 드리는 것이지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인생들의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아래서 헌금을 강요를 하고 있고 사람의 이성을 따라 생각을 하면서 정성을 다 해서 하고 있습니다.

 

헌금이 필요합니까?

다 자기들을 위해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교회라는 건물을 근사하게 지어 놓고 그것을 유지하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를 하고 있고 사람들은 바알 사상에 빠져 헌금을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그것을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연보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연보가 과연 우리가 지금 돈으로 하는 행위를 말씀하고 있는가를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은 즐겨 내시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그 말씀을 문자로 보고 헌금을 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헌금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연보라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돈으로 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어떻게 섬깁니까?

돈으로 성도를 섬기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성전이 지어져 가게 하기 위해서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성전이 성도들 안에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을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일에 대해서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쓸 필요가 없습니까?

이미 다 알고 있고 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굳이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돈이 많아서 돈을 많이 내서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성전을 짓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을 봅니까?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그 헌금을 이야기를 하면서 초대 교회에 성도들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서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6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그들이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어서 돈을 내서 그들에게 밥을 주는 것이 성도들의 섬기는 일입니까?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우리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설령 내가 모든 것을 내서 그들을 도와준다고 했는데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입니다.

내가 섬기고 있는 성도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섬기는 일을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욥과 같이 고아의 아비가 되고 과부의 눈을 실망케 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아니 그 안에 성전이 지어지지 않는다면 섬겼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실제 우리가 돈으로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누군가 돈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는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성도를 섬기는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사도 바울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에게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말씀의 의미도 전혀 모르면서 자기들이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실제 이렇게 함으로 해서 성도들을 섬겼고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기 때문에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는 다 돈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용하면서 돈을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십일조를 해야 하고 선교헌금을 해야 하고 감사 헌금을 해야 하고 각종 헌금을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섬기는 일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내가 섬기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안에서 성전이 지어져 가지 않고 있다면 그는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돈으로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전함으로서 할 수 있습니까? 연보는 돈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 그러니까 성도들 안에서 예수 안에서 성전을 짓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질 수 있습니까?

이 지구에 있는 모든 돈을 주고도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한다고 그것을 진짜 사용하는 돈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연보는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성도를 섬김으로 성도들에게 성전이 지어져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 중에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서 누가 알고 있습니까? 다 바알에게 미혹을 당해서 돈만 밝히고 있지 성도를 섬기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돈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성도들을 섬기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과응보 사상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업보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한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그런 사상이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모든 것을 행위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돈으로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의가 쌓이게 되고 그 의로 부자가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행위로 부자가 되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섬김으로 그 성도가 영생을 얻는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성도들이 어떻게 교회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합니까?

그래서 돈이 필요합니까? 그런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굳이 연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탐욕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풀고 있고 그것을 따르는 무지한 소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사망의 길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입니다.

선교를 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 교회는 선교사를 수백 명 파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들을 섬기는 일입니까? 돈으로 영혼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벌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안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2절,“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고린도 교회에 성도들이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그것은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이 성도를 섬기는 일을 원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이제 막 복음이 전파가 되기 시작한 때입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열심을 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 복음을 듣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그들도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누구라도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직 자기 자신도 복음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도 않았으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더 열심을 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가야입니다.

고린도 지방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게도냐인들에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은 성도를 섬기는 일을 일 년 전부터 예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일 년 전부터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예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너무도 감동을 했습니다. 그런 그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일 년 전부터 예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마게도냐인들에게 전했는데 그 말을 듣고 퍽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절,“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누구를 보냈습니까?

그것을 고린도후서 8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도와 형제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보냈습니까?

그러니까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성도를 섬기는 일을 예비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동역자들을 보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내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게 했고 복음을 들음으로서 그들이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예비할 수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진노를 받을 일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평생을 교회 안에서 악한 일만 하다가 주님께서 오실 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게 됩니다. 특히 목사 한 사람이 성경을 잘못 해석을 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디도와 형제들을 보냈습니다. 마게도냐인들에게 자랑을 한 것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디도와 여러 교회의 사자들인 형제들을 보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서 사도 바울이 자랑한 것과 같이 헛되지 않게 준비를 하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사도 바울은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디도와 여러 교회의 사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고 이 시대 목사들은 돈을 요구를 하고 있고 사도 바울이 돈을 준비하게 하기 위해서 디도를 보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고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입니다.

이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는 바알이 가득 차 있어서 모든 성경말씀을 돈으로 보고 있습니다. 진짜 성도를 섬기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돈만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절,“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준비를 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을 자랑을 했습니다. 누구에게 했는가 하면 마게도냐인들에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인들이 사도 바울과 함께 고린도 교회에 가서 너희가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까? 그리고 그들을 가르쳐서 그들이 또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아니 새롭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만이 아는 심정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사도 바울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복음을 전해서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성도를 섬기는 일을 그러니까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너무도 기쁘고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자랑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정말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 복음을 조금 듣다가 보면 사람들이 교만에 빠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있지만 그 역시도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초대교회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그래도 초대교회는 이제 막 복음이 전파가 되었기 때문에 복음만 전해지면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수많은 그들이 넘쳐나고 있어서 복음을 듣다가도 또 다른 것에 미혹을 받는 것을 볼 때 마다 안타깝기만 합니다.

 

5절,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연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를 섬기는 일을 연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이 사도 바울이 보낸 디도나 여러 교회의 사자들인 형제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를 하는 것을 연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연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디도와 여러 교회의 사자가 되는 형제들로부터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하겠다고 미리 약속을 하고 준비를 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미리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돈을 미리 준비를 하게 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디도와 여러 교회의 사자들인 형제들을 보내서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할 수 있게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미리 준비를 함으로서 그것이 참 연보고 억지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했습니다.

연보가 무엇입니까? 성전을 짓는 일에 쓰는 돈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보이는 성전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돈으로 하는 연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제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바뀌었고 그 성전을 세우는 일을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그것이 연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 년 전부터 미리 준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듣고 믿은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일 년 전부터 디도와 형제들을 보내서 준비를 했고 그런 그들이 성도를 섬기는 일을 성도 안에 성전이 지어가면 그것이 참 연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연보입니다.

이 시대는 참 연보를 하는 사람이 지극히 적습니다. 이런 말씀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초대교회보다 더 어려운 현실이 참담하기만 합니다. 그럴지라도 이 시대 복음을 듣고 있는 성도들 중에서도 고린도교회에 성도들과 같이 참 연보를 하는 성도들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 그의 안에 예수 안에서 성전이 지어져 가게 함으로서 구원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보고 배움으로 예수 안에서 성전을 지어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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